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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시가 선정한 좋은 시

깜장보석 2013. 6. 18. 18:24

 

우리시가 선정한 좋은 시(1)
- 고성만



<


                                                                                                                       








개명(改名) -김경주



  오래전 문득

  개명을 하고 작명집을 나오는 사람의 표정이

  궁금한 오후가 있었다


  그때 저녁은

  분필을 눕혀 어두운 칠판에 북북

  흩어 놓던 새 떼 같은 거

  그때 기별은

  점집 무녀가 사람들이 버리고 간

  이름들을 하나 하나 불러 보는 거


  오래전 문득

  가계(家系)에 없는 언어로 개명을 한 후

  묵은 이름을 잊기 위해

  그 이름을 옮기고 있을 때


  어느 문장 속에 떠오르던 내 무덤도 있다

  그러나 그 무덤의 이름은 끝내 생각나지 않는다

  그 곡해를

  내 피로 흩어진 한 짐승의 동요(童謠)라고 불렀을 때

  그 문장은

  자신의 이름을 떠난 한 짐승의 숲이 되었다


  저녁에 흰 뼈가 드러나는 바람과 함께

  나는 묻힐 것이다 수십 개의 이름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해 본 저녁의 개명은

  분필로 칠판에 북북 흩어 놓던

  그 새 떼의 분진(粉塵)이 궁금해지는 거


  아무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바닥에 가루로 흘러내린

  그 시차의 이름을

  이제 나는 쓸 것이다


  나의 가계(家系)엔 내 피가 안 통하는 구름이 있다

 

    - 김경주 시집, 『시차의 눈을 달랜다』(민음사)에서


[시 읽기]

  김경주 만큼 좋음과 나쁨이 확연히 구별되는 시인도 별로 없다. 그 밑바탕에는 ‘가벼움과 진지함’이 깔려 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운 사유를 들고,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장난치는 것과 같은 태도를 든다. 그의 시 또한 그런 것 같다. 어떤 시는 뛰어나게 산뜻하다가도 어떤 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로 난삽하다.

  예를 들어,


  천 년 전으로 바람이 눈을 감을 때 배반은 인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서사이고 샘은 벌레에게 가장 어울리는 무덤이다  - 「정교한 횡설수설」에서


  ‘배반은’으로 이끌리는 문장과 ‘샘은’으로 이끌리는 두 문장이 이어져 있는데, 이 둘 다 주어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들에서 모호함이 출발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영어의 번역문장이라고도 하는데 내 생각에 김경주 자신의 의도적 비문非文이다. ‘천 년 전으로 바람이 눈을 감’다니, 시제가 맞지 않고 ‘샘은 벌레에게 가장 어울리는 무덤’이라는 비유도 어설프다. 이쯤에서 그의 시집을 덮는다.

  한참 있다가 다시 펴니 그의 시 중 드물게 가지런한 시가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개명改名을 꿈꾼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확실히 각인되도록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내가 본 사람 중, 예쁜 어감으로 바꾼 사람은 실패할 확률이 높았고, 독특한 어감으로 바꾼 사람은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그 자신이 본래의 이름 대신 김경주라 개명했을, 어느 저녁의 경험을 이렇게 피력한다.


  저녁에 흰 뼈가 드러나는 바람과 함께

  나는 묻힐 것이다 수십 개의 이름으로


  ‘흰 뼈’는 ‘나의 가계(家系)엔 내 피가 안 통하는 구름이 있다’와 같은 구절에서의 ‘가계’를 비유한 말이다. 그것은 각각 ‘바람’과 ‘구름’이라는 형체가 없는 것으로 분해되어 ‘이름’으로 만난다. 무정형의 연체동물과 같은 비유이다. 역시 김경주답다. 그래서 문제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의 시에는 이와 비슷비슷한 이미지가 너무 많다.

  김경주 만큼 논란의 중심에 선 시인이 별로 없다. 그는 프로야구 선수나 연예인처럼 스타 기질이 있다. 우리에게 그런 시인 한 명쯤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젖이라는 이름의 좆 - 김민정



네게 좆이 있다면

내겐 젖이 있다

그러니 과시하지 마라

유치하다면

시작은 다 너로부터 비롯함일지니


어쨌거나 우리 쥐면 한 손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빨면 한 입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썰면 한 접시라는 공통점


(아, 난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이 지극한 공평, 이 아찔한 안도)


섹스를 나눈 뒤

등을 맞대고 잠든 우리

저마다의 심장을 향해 도넛처럼,

완전 도-우-넛처럼 잔뜩 오그라들 때

거기 침대 위에 큼지막하게 던져진


두 짝의 가슴이,

두 쪽의 불알이,


어머 착해

    - 김민정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문학과지성사)에서


[시 읽기]

  초록색 표지의 시집이 눈에 확 띤다. 제목이 자극적이다. 이제하 시인이 그린 초상화가 귀엽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나를 빤히 바라본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모든 시인은 ‘신기 내린 무당’이라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시집의 차례를 보니 동음이의어 또는 유사한 음이 나열된 시들이 수십 개 들어있다. 「미혼과 마흔」, 「화두냐 화투냐」, 「페니스라는 이름의 페이스」 등등 도발적이고 유쾌한 제목으로 가득하다. 김민정은 사춘기 여자아이처럼 당돌하게 중얼거린다. 반항적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시는 ‘페미니즘적’이다. 억압의 상태에서 벗어나 해방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양성 평등을 요구한다. 이 정도의 요구라면 기존에도 있었고, 더 강한 주장도 많았다. 하지만 김민정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러한 시를 앞에 놓고 어색한 표정을 짓는 어른들을 대놓고 비웃는다. 잘 보라며 옷을 벗는다. 천천히, 한 꺼풀 한 꺼풀 던져버린 후 침대로 올라간다.


  섹스를 나눈 뒤

  등을 맞대고 잠든 우리

  완전 도-우-넛처럼 잔뜩 오그라들 때

  거기 침대 위에 큼지막하게 던져진


  두 짝의 가슴이,

  두 쪽의 불알이,


  어머 착해


  너희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안다는 듯, 초월했다는 듯, ‘어머 착해’라고 중얼거린다. 이것은 ‘비시적’인 것에 ‘시적’인 성격을 불어넣는 행위이다. ‘시’라고 정해진 것은 없으며 즐거움을 만끽하는 언어야말로 진짜 시라고 일갈한다. 젊은 시인들은 다 그러나?하고 생각하니 일군의 시인들이 떠오른다. 자폐적 경험에서 비롯된 잠꼬대 같은 이야기를 개성이라 칭하던 여러 시인들도 이젠 젊다는 것의 지위를 물려주고, 또 다른 낡음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유치함에 지나지 않는 요설체의 문장이나, 미성숙의 권력으로 진정성을 왜곡하는 시는 정말 보고 싶지 않다.












                                                                                                                          












강물에 뜬 페트병은 어디로 갔을까 - 염창권



비어 있는 것들

빡빡하게 밀집되지 못한 것들

힘을 잃고 갑자기 주글주글해지면서 작아지는 것들

깔깔거리는 소녀들의 치기어린 배웅으로 얼굴이 얻어터지면서

발기불능의 침을 뱉듯 강물에 던져진다

겉껍질뿐인 저 페트병은 어디로 흘러서 가는 것일까

내부엔 공허를 가득 채웠으니

출렁이며 이동하는 외부의 밀집성과의 가혹한 단절!

표류하면서도 제 무게에 의해 가라앉지 못할

결코 풀어버릴 수 없는

치밀한 속박.

    - 『우리시』 2010년 2월호 <신작특집>에서


[시 읽기]

  좋은 시란 어떤 시인가? 남들이 표현하기 힘든 내면의식을 적절한 비유와 상징을 섞어서 가슴에 와 닿게 표현한 시이다. 읽고 난 후 겨울나무 숲속처럼 ‘싸~’하게 훑고 지나가는 것이 좋은 시이며, 가볍게 한숨이 나오는 것이 좋은 시이다. 좋은 시는 대개 제목이 좋다. 미인은 대개 인상이 좋은 것처럼.

  제목에는 화자의 정서가 들어있다. 그 예로 기형도의 「엄마 걱정」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대개 시의 주제와 연결되어있어 시를 읽어 시의 의미를 아는 데 암시를 준다. 또 제목에는 화자의 태도가 들어있다. 그러한 시로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들 수 있는데, 화자의 격정적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제목에는 시적 상황이 들어있다. 그러한 예로 김용택의 「섬진강」을 들 수 있는데, 주제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어 내용 파악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시의 제목은 어떨까? 「강물에 뜬 페트병은 어디로 갔을까」에는 화자의 태도가 들어있다. 설의적 의문형 문장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교훈적이라 짐작할 수 있다. 페트병은 ‘힘을 잃고 갑자기 주글주글해지면서 작아지는 것들’이고 ‘발기불능의 침을 뱉듯’ 던져진다는 표현으로 보아 환경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존재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내부엔 공허를 가득 채웠으니

  출렁이며 이동하는 외부의 밀집성과의 가혹한 단절!


  페트병은 현대문명을 상징한다. 이미 그것은 통제 불능의 괴물처럼 커져서 인간들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보복을 가해온다. 지진, 해일, 태풍, 폭우, 폭설, 가뭄, 혹한, 혹서 등 미래는 불확실하며, 불모성 속에 존재하리라는 것을 알려준다. 인간들이 궁극적으로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영화 <아바타> 속의 행성처럼, 외계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나날이 올 것이라고 경고한다. 속 빈 채 떠다니는 것이 어디 페트병뿐이랴 우리 자신들 역시 부유하는 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좋은 시인가? 이 시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기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간섭하지 않으므로 좋은 시이다. 뭔가를 전하면서도 그 자체를 응시하게 만드는 본질적인 힘, ‘표류하면서도 제 무게에 의해 가라앉지 못할/ 결코 풀어버릴 수 없는/ 치밀한 속박’처럼 운명론적인 형태까지 고찰하는 깊이가 시의 위상을 스스로 높이고 있는 것이다. 허전한 가슴을 채워줄 그 무엇, 그것이 무엇인지 더욱 궁금하게 만드는 시이다.


























                                                                                                                      










배꼽- 김충규



가끔 배꼽을 내려다본다

특히 샤워하고 나올 때 약간 물기가 묻은 배꼽을


내 몸이 가진 아주 작은 우물,

샤워할 때 고이는 물, 혹은

몸이 땀을 낼 때 그 땀으로 연명하는,


태어나자마자 얻은 흉터,

이 흉터는 평생 가져가야 한다

살아가면서 갖가지 흉터가 몸에 기록되지만

배꼽은 그 모든 흉터의 원형인 것,

허리를 체조선수같이 구부릴 수 있다면

혀로 살짝 핥아보고 싶은 배꼽,

사랑하는 여자의 배꼽을 애무할 때면

그 몸의 전체가 서서히 비틀리며 전율하는 것같이

결국 흠씬 땀을 흘리는 것같이

내 혀가 내 배꼽에 닿을 때의 느낌도 그러할까


배꼽에 귀를 대어볼 수 있다면

끊기기 전 모친의 자궁과 연결되었던 탯줄의

가느다란 떨림이 전해질지도 모를 일,


거울을 통해서도 볼 수 있으나

배꼽은 고개를 밑으로 젖히고 보는 게 제격,

평생 메우면서 살아가는 삽질의 달인도

제 작은 배꼽은 메우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한다


배꼽을 가끔 들여다보면서 때를 벗겨준다

태어나자마자 얻은 최초의 고통,

그 신성한 흉터의 제단을 말끔하게 청소하는 것이다

그 아주 작은 우물 안에 내 첫 울음이 매장돼 있으므로

    - 김충규 시집, 『아무 망설임 없이』(문학의 전당)에서


[시 읽기]

  인간에게 기억이 있다면 몇 살까지 가능할까 나는 내 기억의 시원을 찾아 올라간 적이 있다. 예닐곱 살 때 어머니 손잡고 전주의 예식장에 가던 기억(예식장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너 살 때 군산비행장을 이착륙하는 비행기의 소음에 놀라 이불 속으로 숨던 기억,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젖 빨던 기억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분명 무의식이지만 어떨 때는 정말 생생하게 떠오른다. 심지어 양수에 싸여 어머니의 뱃속을 유영하던 기억조차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품을 때가 있었다. 그것은 나처럼 마음이 유약한 사람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하고 세계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원초적 보살핌 속으로 도피하고 싶은 심정이기도 하다.

  고고呱呱라는 말이 있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서 처음 우는 울음소리’라는 뜻인데, 이 시는 그 때 느꼈던 세계에 대한 공포를 확장하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얻은 최초의 고통,

  그 신성한 흉터의 제단을 말끔하게 청소하는 것이다

  그 아주 작은 우물 안에 내 첫 울음이 매장돼 있으므로


  태어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첫 울음’은 ‘매장되’어 있으므로 태어나 살도록 만든 모든 고통의 원인은 배꼽에 있다. 배꼽은 그래서 우물과 통한다. 우물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다. 우물엔 물이 고여 있다. 배꼽은 몸의 중간이며 중심이다. 기와 혈이 드나드는 통로이기 때문에 그곳을 단전이라 부른다. 화자는 배꼽을 우물로 인식하므로 그 ‘신성한 흉터’를 핥아보고 싶다. ‘제단을 말끔하게 청소’하기 위해서 늘 깨끗이 닦고 보살피려고 노력한다. 조상들은 다 벗어도 배꼽만큼은 가리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한여름에도 배 위에 수건 한 장만 걸치고 자는 것이다. 배꼽은 곧 태(胎)이다. ‘태’는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조직’으로 신성시되어 옛날 왕궁에서는 항아리에 넣어 보관했다.

  김충규는 배꼽을 ‘탯줄이 연결된 자리’를 넘어 보편적 의미로 확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다다르고자 하는 이상, 삶의 높이나 두께, 추구하는 목표 등을 상징하는 것이다. 배꼽은 배가 고플 때는 쑥 들어가지만, 배가 부를 때는 툭 튀어나온다. 그래서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런 자기를 자주 돌아보아야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다. 배꼽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아직 비어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 혼자로서 완성되지 않는 그 무엇, ‘평생 메우면서 살아가는 삽질의 달인도/ 제 작은 배꼽은 메우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하’는 인생의 허기. 배꼽이야말로 배고픔의 다른 말이다.

  이번 시집엔 이렇게 원초적 의식을 형상화한 것이 여러 편 눈에 띤다. 모두 섬뜩한 예지를 담고 있다. 이런 시들에서는 짭짤한 ‘피 냄새’가 난다. 그는 근원을 채굴하여 우리 앞에 펼쳐놓는 도굴꾼이다. 어떨 때는 나의 둔함으로 인하여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수많은 감각을 통한 의미의 확장에 박수를 보낸다.




                                                                                                                        








홍시 감나무- 나병춘



천둥번갯불에

번쩍, 드러난

나의 부끄런 알몸처럼


무서리 광풍에 다 털려버린

감나무

홍시詩 하나 달고

오소소


따스하다

저 환한

블.알.

    - 격월간 『정신과표현』1,2월호에서


[시 읽기]

  시에서 시적화자를 추리하는 일은 중요하다. 첫째, 자신의 정서를 드러내는 시적화자가 있다. 김소월의 「초혼」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虛空)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主人)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는 구절에서 화자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이다. 둘째, 시 속에 숨어 있는 화자가 있다. 박목월의 「청노루」를 예로 들 수 있는데, ‘느릅나무/ 속잎 피어 나는 열두 굽이’를 바라보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나병춘은 ‘부끄런’, ‘따스하다’, ‘환한’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자기를 드러내는 화자이다. 어느 날 시인은 초겨울 잎 떨어진 감나무 아래 서있다. ‘홍시’의 ‘시’자와 시詩의 ‘시’자가 같은 것에 착안하여 홍시가 익는 과정을 시가 완성되는 과정에 빗댄다. 홍시와 시는 정성스레 가꾸어야 탐스러운 열매가 열리고, 무서리 광풍에 털려야 제대로 익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시의 진면목은 3연에 있다. 백 마디의 말이 필요 없는 함축! ‘저 환한/ 불.알.’이야말로 홍시와 시의 접점이 아닐까 ‘불.알’.이란 말은 ‘고환’을 날것 그대로 부르는 이름일 뿐만 아니라 동음이의어를 통한 언어유희이기도 하다. ‘불알’은 불의 알, 곧 반짝반짝 빛나는 전구이다. 이 시의 화자는 숨어있되, 자연을 적극적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것이 나병춘 시의 특징이다.

  일찍이 교과서에 실린 적 있는, 「호박」이라는 시에서도 이런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동자승 하나

  배꼽 환히 드러내 놓고

  알몸으로 와선중이다


  따가운 햇볕도 배고픔도

  다 눌러 베고서


  이 시 역시 호박과 동자승을 절묘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이것은 비유의 힘이다. 비유 중에서도 은유에 해당한다. 원관념은 드러내지 않고 그것을 상징하는 보조관념으로만 표현한, 원관념이 생략된 비유는 대개의 경우 한 두 구절에 한정되어있지만, 이 시는 시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 호박은 소신공양하여 모두에게 자기를 바치는 존재이므로 와선하는 중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적절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절구이다. 이 시를 읽는 이의 가슴은 시원스레 열리고 저절로 따뜻해진다.

  이런 성향은 시인 자신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나병춘은 선이 굵은 시인이다. 이런 저런 말로 에두르지 않고, 포장하지 않으며, 망설이지 않는다.

  그래서 동치미 맛처럼 싱거운 때가 있었다는 고백을 첨언해야겠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스물여덟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찾아 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처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와 함께 하지 않았다


십수 년이 지나 요 근래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내게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 있고

걷어 채인 좌판,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 『현대시』, 2008년 3월호에서


[시 읽기]

  나에게는 『노동해방문학』의 기억이 선명히 남아있다.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 즉 ‘사노맹’의 기관지로 발행되다가 주동자들의 검거와 함께 좌초된 본격적인 노동자 문학잡지. 창간호를 보았을 때의 두근거림을 지금도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거기엔 박노해와 386이 있었다. 그로부터 25년이 흘러 이 책이 과거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곳이 보이지 않는데, 가 있는 곳 또한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모순은 해결되었을까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노동현장이다. 70년대 무작정 상경으로부터 비롯된, 맨주먹의 도전은 예나 지금이나 피눈물 나는 고통을 수반한다. 그 자리를 송경동이 지키고 있다. ‘용산참사’ 장례식 노제에서 가수 최도은씨와 함께 송경동 시인의 조가·조시가 울려 퍼졌다. 그는 여전히 민중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현미경 보다는 망원경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출신과 조직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다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까운 곳의 사물을 자세히 보기보다 멀리 있는 자연에 눈을 두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시는 농경사회를 살아온 사람의 사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무리 도시에서 오래 살아도 길들여 지지 않는 순박한 성격, 소처럼 우직하고 땅처럼 묵묵하며 바다처럼 애잔한 아픔이 이 시에 스며있다.

  어떤 시보다 쉽고 단순하지만 근본에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으므로 마음이 놓인다. 앞으론 보다 가벼운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시가 선정한 좋은 시(2)

- 고성만









기침 - 이동훈


기침이 잦아지면서
성가시던 가려움증이 사라졌다.
독한 놈을 더 독한 놈이 몰아낸 꼴이다.
쿨룩, 쿨룩
혹여 비뚜로 나간 말이나 행동이
이부자리까지 들썩하게 하는 게 아닐까.
짐짓 일상을 반성하는 시늉까지 하는데
아내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야단이다.
기운을 다 소모하면 편안해질 것을
처방 받고 기운을 차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그래도 아내 말에 토를 달지는 않는다.
아예 밥까지 먹지 말라고 하면 곤란하니까.
굶을 수만 있다면 그리해도 좋겠지만
가려움증이나 기침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게
한 끼를 굶는 일이다.
구걸도 마다않는 가난 앞에는
너무 부끄러운 고백이다.
배고픈 이웃은 가까이 있는데 무수한 말들만
분파를 나누어 배부르게 경계를 쌓고 있지 않은가.
기침은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아
저 홀로 밤새 터져 나오니
아내 입장에서는 께름한 것이 당연하다.
다 낫기 전에 병원에 가야겠다는 우스갯말을
느지막이 고민해 보는데
그래, 안 그래, 그래, 안 그래
연하여 묻듯이
쿨룩, 쿨룩대는 것이다.
    - ‘2009 우리시 문학상 신인상’ 당선 시

[시 읽기]
  어느 때나 신인에게 거는 기대는 각별하다. 기성세대의 식상함을 벗어나 새로운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은 바람 때문인 듯하다. 사물을 바라보는 눈도 새롭고, 발상도 새롭고, 어법도 새롭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우리시』2009년 12월호에는 그런 기대를 반영한 결과처럼 신인이 등장하였다. 그것도 한꺼번에 두 명씩이나. 이미 박승류, 이은환, 황연진, 조삼현, 방인자와 같은 훌륭한 시인들을 발굴하여 우리 문단의 미래를 밝히는 데 일조한 바 있는 ‘우리시회’로서는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이동훈은 「인사동 가는 길」외 4편의 시로 당선의 영예를 안았는데, 심사위원인 임보, 홍해리, 황정산 시인으로부터 ‘아이러니적인 표현 방식으로 현실의 모순과 허무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차가운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들었다.
  이동훈은 정공법을 택하고 있다. 삶의 본질을 향해 날선 비수를 들이대어, 굵은 가지를 뚝 잘라놓고 그 해법을 독해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것은 일찍이 이육사 시인이 「교목」에서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라고 노래하던 목소리의 울림과 비슷한 면이 있다. 기침 감기에 걸려 며칠 고생하다가, 밥을 굶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 이르러 ‘가려움증이나 기침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게/ 한 끼를 굶는 일’이라면서, ‘배고픈 이웃은 가까이 있는데 무수한 말들만/ 분파를 나누어 배부르게 경계를 쌓고 있지 않은가’하고 자기를 반성한다. 이웃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나아가서 시대의 아픔을 담아내며, 모순을 극복하고자하는 자세이며, 지식인이 이 시대에 해야 할 일을 기침으로 형상화(‘그래, 안 그래/ 연하여 묻듯이/ 쿨룩, 쿨룩대는 것’)한다.
  이제 출발선상에 선 이 시인께 외연을 확장하고 내포를 함축하여 자신만의 영역 개척하시라는 부탁 드려본다.






엘리제를 위하여 - 장수철


엘리제는 어디 있는가.
트럭이 후진하며 들려주는 엘리제를 위하여.

능수버들 낭창낭창 흩날리듯
못갖춘마디의 도입부가 길바닥에 뿌려지고
트럭이 신중하게 후진할 때에 맞춰 속 깊은 엘리제가
후사경으로도 보이지 않는 비탈의 이면을 분산화음으로 쓸어내리면,
골목길 바닥에 앉아 있다가
주섬주섬 공깃돌을 들고 일어서는 아이들.

비탈을 오르다 힘을 잃거나
잘못 들어선 막다른 길에서 돌아 나올 때
홀린 듯 사는 내가 갑자기 낯설어 다시 나에게로 들어설 때
걸어 온 길 위 올망졸망 피어난 이끼꽃 식구들까지 처연히
짓밟으며 나는 언제나 못갖춘마디로 되돌아와야만 했구나.

트럭이 후진하며 들려주는 엘리제를 위하여.
나의 엘리제는 어디 있는가.
    - ‘2009 우리시 문학상 신인상’ 당선 시

[시 읽기]
  이동훈과 함께 ‘2009년 우리시 문학상 신인상’에 당선된 장수철은 오랫동안 시 쓰기 공부를 해온 ‘내공’이 엿보인다. 「엘리제를 위하여」와 함께 신인상에 선정된 「평일 늦잠자기에 대한 존재론적 소묘」,「파 한 단」, 「가을, 나무들의 사춘기」, 「신문지 한 장」등의 작품에서 삶의 비의를 포착하고자하는 노력과 그럴듯한 표현을 얻기 위해 은유하는 솜씨가 번뜩인다.
  시인은 거리에서 후진하는 트럭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트럭은 경보음으로 ‘엘리제를 위하여’라는 음악을 들려준다. 불후의 명작, 예술작품이 길바닥에 뿌려지는 순간이다. 이것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씁쓸한 이 장면이 따지고 보면 예술의 가치를 실현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비탈을 오르다 힘을 잃거나/ 잘못 들어선 막다른 길에서 돌아 나올 때’ 귀청이 따갑게 울리는 클랙슨 소리에 비해 음악 경보음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트럭을 소재로 한 시가 있었다. 박찬일의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라는 시에는 ‘싱싱한 야채 있습니다 싱싱한 과일 있습니다 싱싱한 계란 있습니다 싱싱한 생선 있습니다 녹음기에 녹음하느라/ 녹음기를 켜놓느라 싱싱한 야채 있습니다 싱싱한 과일 있습니다 싱싱한 계란 있습니다 싱싱한 생선 있습니다 정신이 없다.// 미안하다 사람들아 나는 정신이 없다’ 는 구절이 나온다. 이 시에서 트럭은 ‘푸른’이라는 관형어의 수식을 받음으로써 생명력을 획득한다. 힘들고 고된 행상이 갑자기 싱싱해지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미안하다 사람들아 나는 정신이 없다’고 말한다. 이 시는 사람들의 틈과 틈 사이에 일어나는 찰나의 슬픔과 기쁨을 잡아내고 있다.
  장수철에게서도 그런 독특한 어법에 느껴진다. ‘비밀서고의 금서처럼/ 나는 잠들어 있다’, ‘점심 빈 그릇을 담은 배달 오토바이를 따라/ 하루 반나절이 비탈을 내려가며/ 덜그럭덜그럭/ 나를 독해하고 있다’, ‘저무는 도시의 문법’, ‘초저녁부터 덜 마른 눈물자국처럼 희끗/ 마침표로 찍어놓은 낮달 하나’와 같은 표현들이 그것인데, 행간을 넓히면서 여백을 음미할 수 있는 여유를 준다. 더욱 정진해서 우리나라 시단과 ‘우리시회’를 빛내시기 바란다.  







환절기의 판화 - 이송희


고원을 꿈꾸던 밤들이 포개져

붉은 눈 깜빡이며 소리의 알을 낳고

마음 결 따라가지 못해 잔설로 남는다

그물처럼 달려드는 바람의 눈을 피해

급히 비닐 막을 치는 분주한 손길 뒤로

그림자 짙어진 하늘이 촉촉하게 몸을 푼다

오목하게 패인 상처는 별빛으로 다스리고

빈 가지에 눈꽃 하나 접붙이는 동안에

생살의 아픔을 뚫고 얼음꽃 피어난다
    ―  이송희 시집,『환절기의 판화』(고요아침)에서

[시 읽기]
  여기 새로운 목소리의 시인이 있다. 그녀는 새봄 수선화처럼 피어서 여기 좀 봐 달라고 외친다. 이젠 뭔가 달라져야한다고. 시를 읽는 사람도, 시를 쓰는 사람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야한다고. 이송희는 1976년 광주에서 태어나고,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봄의 계단」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미 「물병자리」로 ‘제3회 오늘의 시조시인상’을 받았고, 2009년에 시집, 『환절기의 판화』(고요아침)를 상재하였다.
  이송희는 엄밀히 말해 시조시인이다. 하지만 잘된 시조는 거의 시와 구별이 가지 않는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물처럼 달려드는 바람의 눈을 피해

  급히 비닐 막을 치는 분주한 손길 뒤로

  그림자 짙어진 하늘이 촉촉하게 몸을 푼다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흐르는 과정 즉, 환절기이다. 이 시에는 구체와 추상이 교묘히 섞여있다. ‘바람의 눈’은 겨울 추위를 말하기 위한 추상인데 ‘비닐 막 치는 분주한 손길’은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한 구체이다. 이러한 구절들은 환절기라는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수사들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한 기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림자 짙어진 하늘’이 생명력을 얻는다. 누군가(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간절한 심정이 살아난다. 황진이의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와 표현의 유사성은 지적될 만하다. ‘동짓달’이라는 시간을 ‘한 허리’라는 공간으로 치환하는 솜씨가 대략 엇비슷할 뿐만 아니라, 대상을 묘파하여 유려하게 휘감아 드러내는 솜씨가 구성지다.
  황진이는 ‘어론 님’으로 지칭되는 구체적 인물을 기다리는 데 반하여, 이송희는 계절의 변화에 따른 예감을 위주로 한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오목하게 패인 상처는 별빛으로 다스리고

  빈가지에 눈꽃 하나 접붙이는 동안에

  생살의 아픔을 뚫고 얼음꽃 피어난다

  가히 아름다운 풍경 하나를 얻는다. 지나간 시간은 분명 기쁨보다 슬픔으로 남았을 것이기 때문에 ‘오목하게 패인 상처’를 ‘눈꽃 하나’로 ‘접붙이는 동안’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접붙이’는 행위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식물을 인위적으로 만든 절단면을 따라 이어서 하나의 개체로 만드는 재배 기술’을 가리킨다. 곧 환절기는 계절에 계절을 접붙여 새로운 계절로 넘어가는 통과의례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한다.
  수험생은 대학입시에, 취업준비생은 입사시험에,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상인은 장사에, 정치가는 대결과 타협에, 종교인은 신념에, 서민의 가계는 생존에 각각 접붙여 바람을 불어넣는다. 염려와 기대가 반복되는 사이 고통조차도 꽃이 되어 ‘얼음꽃 피어나’는 것이다. 이송희는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게 생활을 아파한다.
  이송희의 첫 시집, 『환절기의 판화』 표제작이 된 이 시는 월간 『우리시』에 발표되었다. ‘우리시회’가 우리 문단에 신선한 활력소가 되었음을 발견한 듯하여 기쁜 마음이 든다.







피로와 파도와 - 이제니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바다를 향해 열리는 창문이 있다 라고 쓴다
백지를 낭비하는 사람의 연약한 감정이 밀려온다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한적한 한담 없는 한담의 밀물 속에
오늘의 밀물과 밀물과 밀물이
어제의 밀물과 밀물과 밀물로 번져갈 때

물고기들은 목적 없이 잠들어 잇다
물결을 신은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스치듯 지나간 것들이 있다 라고 쓴다
눈물과 허기와 졸음과 거울과 종이와 경탄과
그리움과 정적과 울음과 운기와 그름과 침묵 가까이

소리내 말하지 못한 문장을 공책에 백 번 적는다
그 문장이 그 문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 『다시올문학』 2009년 겨울호에서

[시 읽기]
  거제 해안에 가본 적이 있다. 종려나무 사이 푸른색 붉은 색 모텔과 펜션 지붕들이 빛나고 해변에는 끊임없이 찰랑이는 물결, 우리나라의 바다 빛깔이 코발트블루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학동 여차리 홍포 공고지 바람의 언덕 구조라 지심도 외도…… 잔상으로 남은 지명을 따라 외딴 섬마을에 방 하나 얻고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싶다.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피도와

  이 시구는 필연적 연결 고리 없이 반복으로 씌어졌다. 물결과 파도는 ‘이음동의어’이다. 음만 다르고 뜻은 비슷한 말이다. 하지만 물결은 바람에 의해 형성되는 잔잔한 물이랑이고, 파도는 조수간만에 의해 드나드는 해류의 작용이라는 점이 다르다. 이 시에는 이와 같이 뜻이 비슷하거나 음이 비슷한 말들이 많다. 

  눈물과 허기와 졸음과 거울과 종이와 경탄과
  그리움과 정적과 울음과 온기와 구름과 침묵 가까이

  이제니는 왜 이렇게 비슷한 말을 반복하고 있는가? 말놀음 아닌가? 사람들은 누구나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표현된 것 사이에서 괴리를 경험한 일이 있을 것이다. 글은 글쓴이를 배반한다. 그러나 이 시의 경우 애초부터 의미를 강조하고 있지 않으므로 절망할 필요가 없다. 이 시는 말들의 자유로움을 추구한다. 대신 ‘소리내 말’한다. ‘소리내 말하지 못한 문장을 공책에 백 번 적는’다. 그리고 계속 중얼거린다. 풍선은 아름다운 꿈을 담지만 뻥 터지면 아무 것도 남지 않듯이,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분명하지 않다.
  다행히 우리말이 가진 느낌은 이 시인이 말하고 있지 않은 나머지를 보충해준다. ‘ㄴ,ㅁ,ㅇ,ㄹ’이 그것인데 유성자음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음운들은 소리 내어 읽어볼수록 운율미가 느껴진다. 이러한 노력이 처음은 아니지만(고려가요 「청산별곡」의 후렴구 ‘얄리얄리얄랑셩’은 이러한 시도의 원형이다.) 아무나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는데, 한글로 공부하고 한글로 사유하는 요즘 젊은 시인들은 과감히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시도는 시도로 끝나서는 안 된다. 독자와의 소통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차별화시키며, 개성적으로 승화되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이제니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물푸레나무  -박형권


저 나무, 물푸레나무
안에 들어가 살림 차리면
숟가락과 냄비를 들고 부름켜로 들어가
방 한 칸 내고
엽서만 한 창문을 내고
녹차 물을 끓이면
지나가던 달빛이 창문에 흰 이마를 대고
나물처럼 조물조물 버무린 살림을 엿보겠다
나는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고
겨울 들판에서 옮겨온 밤까치꽃 같은 여자가 뜨개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벽에 귀를 댄다
물푸레나무에는 물이 많아서
천장에서 똑똑 물이 떨어져
그릇이란 그릇 죄다 받쳐놓으면
실로폰 소리 나겠지
겨울 내내 물 푸다가 봄이 오겠다
여자하고 나하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서로 좋아하는 것
나의 하초와 여자의 클리토리스가 파랗게 물이 들도록
끙 끙 끙
어떻게 어떻게 힘주다 보면
나도 모르게 봄을 낳아서
갓 낳은 알처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세상이 찾아오겠다

그때 창문을 열면?
  - 박형권 시집, 『우두커니』(실천문학사)에서

[시 읽기]
  요즘엔 이런 시가 좋다. 봄을 기다리면서 봄을 노래하는 시. 온난화가 진행되는 이 때, 겨울도 예전 같지 않아서 그다지 춥다고 느끼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겨울은 겨울, 눈도 많이 오고 바람도 많이 분다. 올해 겨울이 유난히 더 춥게 느껴지는 ‘4대강, 사교육비, 무한경쟁, 저출산, 고령화’와 같은 걱정스러운 말들이 횡행하는, 심리적인 데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실눈을 뜨고 따뜻한 봄노래를 찾는 중이다.

  물푸레나무에는 물이 많아서
  천장에서 똑똑 물이 떨어져
  그릇이란 그릇 죄다 받쳐놓으면
  실로폰 소리 나겠지
  겨울 내내 물 푸다가 봄이 오겠다

  꼭 내가 쓴 시 같다. 아니 쓰고 싶은 시 같다. 물푸레나무는 짙은 초록색 잎을 매달뿐 아니라 가지를 물에 담그면 푸르게 물이 든다. 그래서 ‘천장에서 똑똑 물이 떨어’질 수 있다. 이런 상상력은 이미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일찍이 백석과 이용악이 있었고, 안도현과 김용택이 있었다. 자연과 농촌을 배경으로 해서 고통을 치유하는 시들.
  문학평론가 고봉준의 해설이 눈에 들어온다. “박형권의 시는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시대의 언어를 연상시킨다. 흔히 ‘민중 서정시’라는 강건하면서도 투박한 날카로운 언어들 말이다. 확실히, 그의 시는 비시대적이다. 그의 시가 의식적으로 시대를 비켜갔다고 말하는 것은 해석의 과잉이겠지만, 그가 시대적은 감성의 구조와 유행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를 써왔음은 분명해 보인다.”
  고봉준이 말하는 ‘비시대적’이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박형권은 왜 이런 시를 쓰는 것일까? 그 해답은 시집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망둥이들이 물빛 사랑을 해보고 싶은/ 일몰여관/ 지금 방 잡아두면 달이 옆방에 들고,/ 어떡하고 있나 밤새 엿들을 수 있지(일몰여관)’, ‘앞장 서 가거나 뒤따라 가거나 손만 놓지 않는다면/ 서로가 서로를 반드시 건질 것이다(예인선)’ 이런 시구에 이르면 삶의 진정성과 강렬성으로 인하여 마음이 놓인다.
  깊은 겨울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좋은 계절이다. 이런 시를 읽으며 겨울밤을 보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덧붙여 나는, 예전에는 한 달 두서너 권씩 신간시집을 샀으나, 올핸 다 합해서 대여섯 권정도 밖에 사지 않았음을 고백해야겠다. 이 부끄러운 고백 가운데 박형권의 시집이 선택된 것은 소장도서로서의 가치판단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책을 살 때는 내용 뿐 아니라 장정과 활자의 배열 등 외적인 면도 고려하는데, 내가 최근에 본 시집 중, 가장 편집이 뛰어났다고 한다면 지나친 추측일까.






거리가 생겨났다 - 이봉환


흐리고 우울한 날이어서 활짝,

달맞이꽃밭에 노랑나비

멈칫멈칫 금방 피어난 듯 꽃잎인 듯 달라붙는다 문득

노란 것들과 나 사이 꽃잎인지 나비인지

구분이 안 가는 거리가 생겨난다

떠나는 길과 머무는 집이 묶였다가 풀어지고

걱정과 환희가 함께 버무려지는 거리

한 걸음 집 쪽으로 물러서면 먼 남의 일이 되지만

한 발짝 길 쪽으로 다가가면 활활 애가 타는 거리

그 거리가 있어 나 견딜 수 있네

그리움이 꽃피는 거기 그 거리

그쯤에 놓여진 내 애달픈 사랑
    - 『우리시』 2009년 12월호에서

[시 읽기]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거리’를 두는 일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거리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독립된 인격체가 만나 손을 잡는 것이라고 나는 풀이한다. ‘거리’는 무엇일까? 두 가지 대상 사이의 간격일 것이다. 산의 나무가 그렇듯이 적당한 간격이야말로 상처를 입히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비결이다. 
  
  노란 것들과 나 사이 꽃잎인지 나비인지

  구분이 안 가는 거리가 생겨난다

  기화요초 만화방창 바야흐로 흐드러진 계절, 시인은 지금 산책 중이다. 세상 모든 것이 짝짓기 하느라 여념이 없다. 꽃은 나비에게 향기를 풍기고, 나비는 꽃에게서 꿀을 얻고, 인간은 인간에게 눈짓 몸짓을 보낸다. 그것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떠나는 길과 머무는 집이 묶였다가 풀어지고

  걱정과 환희가 함께 버무려지는 거리

  한 걸음 집 쪽으로 물러서면 먼 남의 일이 되지만

  한 발짝 길 쪽으로 다가가면 활활 애가 타는 거리

  한 때 둘은 불이 붙도록 사랑했다. 그리하여 한 집을 이루었다. 사소한 일로 다투기 시작했다. 화해했다가 다시 틀어졌다. 그러다 헤어졌다. 재결합했는데 결국 갈라서서 길을 떠난다.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어느 날 돌아보니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와서 차지한다. 또 한 번 집을 이룬다. ‘한 걸음 집 쪽으로 물러서면 남의 일이 되지만/ 한 발짝 길 쪽으로 다가가면 활활 애가 타는 거리’라는 절묘한 표현에서, ‘길’은 떠나는 것이고, ‘집’은 머무는 것이다. 물러서는 곳은 ‘집’이고, 다가가는 곳은 ‘길’이다. ‘길’은 움직이는 것이고, ‘집’은 멈춰서는 것이다. 즉, 사랑은 집에서 하고, 만남과 헤어짐은 길에서 한다.
  이 시는 남녀관계 혹은 부부관계를 말하는 것만 같지는 않다. 모든 집착과 해탈의 관계를 말하는 것 같다. 한 발 더 나가 ‘거리가 생겨났다’는 말로 개념을 창조한다. 너와 나 사이에 새로운 질서, 우주가 형성되었다. 너와 나는 ‘통’한다. 하도 많이 다녀서 반들반들한 거리에서 나는 너에게 ‘통째로’ 주겠다.
  시인은 ‘애달’프다. 끙끙 앓는다. 아프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나는 이봉환이 창조한 ‘거리’ 앞에서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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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나브로
글쓴이 : Simo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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