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읽는 하갈 이야기
하성애 (한국 여성신학자 협의회 회원)
목차
1. 여는 이야기
2. 이야기할 본문에 대한 사역(창세기 16,1-13)
3. 본문 이야기 속으로의 여행
4. 닫는 이야기
1. 여는 이야기
그동안 하갈 이야기를 담고 있는 본문에 많은 연구와 해석들이 있어 왔지만 하갈의 입장에서 보다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입장에서 본문을 해석해 온 것이 전통적인 입장이었다. 그것은 하갈에 관한 본문 이야기를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을 중심으로 약속과 성취하는 틀을 가진 구속사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해석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서 본문들을 하나의 중심 주제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은 어떤 일관성을 견지할 수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성서 본문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보일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과 관점들을 놓치게 할 위험을 안고 있다. 그것은 또한 해석자가 끼고 있는 중심주제라는 안경을 통하여 본문을 보게 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어느 한 쪽에 치우치게 해석할 위험을 안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하나의 중심 주제를 통해서 본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본문 그 자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본문을 통해 들려오는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 의미들을 읽어내는 데 중점을 두려고 한다.
이러한 읽기를 위한 중요한 전제는 바로 이 글을 통해 읽어나갈 본문을 하나의 이야기로 상정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름대로 역사적 단서들을 갖고 있지만 오랜 세월을 통해 전해져 오는 동안 그 역사적 단서라는 골격을 기초로 하여 여러 신앙 공동체의 신앙 경험이 씨실과 날실처럼 함께 짜여져 갖가지 무늬를 띠게 된 옷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문을 구성하는 이야기가 변화를 겪으면서 짜여져 오는 동안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텍스트는 ‘텍스쳐’(texture)이고, 주석은 최종 형태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작업이다.
사실 구약성서의 대부분은 이야기이다. 하느님과 그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이다. 하느님이 그들을 어떻게 부르셨고, 그들은 그 하느님의 부름에 어떻게 응답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느님이 어떻게 그들을 구원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들이 하느님의 구원을 어떻게 체험하고 고백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구체적인 시대와 장소와 인물들과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생생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본성은 언제나 과거에 이미 체험된 것이고 현재와 미래에 의미를 부여하며 재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해석의 새 패러다임에서는 해석을 ‘텍스트를 재현하는 행위’로 규정한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저마다 체험한 고유한 이야기들이 있고, 우리 안에 스며든 타인의 이야기들이 있으며, 이러한 과거의 이야기들을 우리 안에 다시 재현하는 해석학적 작업을 통해 현재 엮어지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래서 과거의 이야기들은 늘 현재의 이야기 속에서 새롭게 부활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성서 이야기를 탐험하는 의미를 부여해주는 지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성서의 이야기를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되어 그것을 재현하는 의미에서 본문 이야기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우리가 본문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함께 그 이야기 속을 여행할 때, 우리는 그들 중 어느 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 할 수도 있고, 감정을 이입할 수도 있고, 또 전혀 다른 인물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차례차례 그들 모두가 되어 볼 수도 있겠다. 이렇게 본문의 이야기를 탐험해 나갈 때 그 이야기는 어느새 먼 옛날에 있었던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살아나게 될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하갈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본문은 창세기 16장 1절에서 16절과 21장 1절에서 21절이다. 이 두 본문이 서로 비슷한 구도로 되어 있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적 거리를 둔 배경 속에서 기술되고 있다. 하갈에 관한 성서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두 부분을 다 다루어야겠지만, 이 글의 성격상 전체 이야기를 상세히 다룰 수 없기에 첫 번째 이야기(창세 16,1-16)를 우선 다루되 본문은 창세기 16장 1절에서 13절로 한정하여 살펴볼 것이다. 본문은 히브리어 본문에서 사역하였으나, 지면상의 한계로 사역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였다. 앞서 밝혔듯이, 이 글을 풀어가는 전제는 하갈과 관련된 성서 본문을 어떤 문학적 짜임새를 갖춘 하나의 ‘이야기’로 상정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 속을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아마도 하갈이라는 한 여성이 그의 고된 삶의 여정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경험 가운데 새롭게 눈뜨게 되는 여정에 동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새롭게 눈뜨게 되는 동행이 될 것이다.
2. 이야기할 본문에 대한 사역(창세기 16,1-13)
1절: 그런데 사래, 아브람의 아내, 그(여)가 아이를 낳아 주지 못했다, 그(남)에게. 그리고 그(여)에게 몸종이 있었는데 이집트 사람이었고 그(여)의 이름은 하갈이었다.
2절: 그러자 그(여)가 말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자 보시오, 그-분이-막으셨소-나를, 야훼께서 아이 낳는 것을. 제발 들어가시오, 내 몸종에게 아마도 내가-아이를-얻게-될-것이오/내가-세워지게-될-것이오, 그 여자를 통해서.” 그러자 그(남)가 들었다, 아브람이 사래의 목소리를.
3절: 그러자 그(여)가 데려왔다, 사래, 아브람의 아내가 하갈, 그 이집트사람, 그(여)의 몸종을,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뒤에 그리고 그(여)가 주었다, 그(여)를 아브람에게, 그(여)의 남편, 그(남)에게 여자로/부인으로.
4절: 그러자 그(남)가 들어갔다, 하갈에게로. 그러자 그(여)가 임신했다. 그리고 그(여)가-보았다. 그(여)가 임신한 것을, 그러자 그(여)가 가벼워졌다, 그(여)의 여주인이 그(여)의 눈에.
5절: 그러자 그(여)가 말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나의 (받는) 폭력이 당신 위에 있어야 (마땅하오). 나, 바로 내가 주었소, 나의 몸종을 당신의 품에. 그러나 그(여)가-보았소, 그(여)가 임신한 것을. 그러자 내가 가벼워졌소, 그(여)의 눈에. 그분이 판단하시기를! 야훼께서 나와 당신 사이에서.”
6절: 그러자 그(남)가 말했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보시오, 당신의 몸 종은 당신의 손 안에 있소. 그(여)에게 행하시오, 좋은 것을, 당신의 눈에.” 그러자-그(여)가-억압했다-그(여)를, 사래가. 그러자 그(여)가 도망쳤다, 그(여)의 얼굴로부터.
7절: 그러자-그(남)가-찾았다-그(여)를, 야훼의 사자가, 광야에 있는 물 샘 곁에서,〈슈르〉길에 있는 그 샘 곁에서.
8절: 그리고 그(남)가 말했다, “하갈, 사래의 몸종아, 어디로부터 네가 왔느냐? 또 어디로 네가 가려느냐?” 그러자 그(여)가 말했다.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로부터, 내가 도망치고 있습니다.”
9절: 그러자 그(남)가 말했다. 그(여)에게 야훼의 사자가, “돌아가라, 네 여주인에게로, 그리고 복종하라, 그(여)의 손 아래.”
10절: 또 그(남)가 말했다. 그(여)에게 야훼의 사자가, “내가 많아지고 많아지게 하리라, 네-씨를/네-후손을. 그래서 그것이 세어질 수 없으리라, 많아서.”
11절: 또 그(남)가 말했다, 그(여)에게 야훼의 사자가,
“보라, 네가 임신했다. 그러니 네가 낳으리라, 아들을. 그러면 네가 지어야 하리라. 그(남)의 이름을〈이쉬마엘〉이라고. 그 분이 들으셨기 때문이다. 야훼께서 너의 억압을.
12절: 그런데 그(남), 그(남)는 되리라, 인간 들나귀가. 그(남)의 손이 모두를 거스르고, 모두의 손이 그(남)를 거스르리라. 그리고 그(남)의 모든 형제들의 얼굴에 맞서 그가 살아가리라.”
13절: 그래서 그(여)는 지었다, 그(여)에게 말씀하시는 야훼의 이름을, “당신은〈엘 로이〉(‘나를 보시는 하느님’)입니다”라고. 그(여)가 (이렇게)말했기 때문에, “참말로 어떻게, 여기서 내가 보게 되었을까? 나를 보시는 분과 함께.”
3. 본문 이야기 속으로의 여행
본문 이야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사래’인데, 그는 ‘아브람의 아내’이고 ‘그(여)가 아이를 낳아 주지 못했다 그(남)에게’라고 소개되고 있다.(1절) 족장시대에 결혼한 여성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은 막대한 유산의 손실을 의미했기 때문에, 사래가 아이를 낳아주지 못했다는 것은 앞으로 발생할 문제를 예고해 준다. 그런데 ‘그(여)에게’ 아이는 없었지만,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몸종이었다. 이리하여 또 다른 등장인물이 소개되는데, 그는 ‘몸종’이며 ‘이집트사람’으로 소개된다(1절). 사라의 지위와 비교해 볼 때, 하갈의 지위는 몸종과 외국인으로서 불안정하고 종속적인 위치이다.
이 이야기에서 처음으로 입을 여는 사람은 사래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임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대한 사래의 입장을 들을 수 있다. “자, 보시오, 그 분이 막으셨소 나를, 야훼께서, 아이 낳는 것을.”(2절) 여기서 사래는 야훼께서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결백을 강조하는 사래의 이러한 강경한 어조는 역설적으로 그가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 몰려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이를 낳지 못하도록 막은 분이 다름 아닌 야훼 자신임이 분명해졌을 때, 사래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야훼께서 막지 않으셔서 출산능력이 왕성한 다른 여성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완벽한 해결방안이었다. 왜냐하면,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에게 아들을 약속하신 야훼께서는 창세기 17장까지도 그 아들이 사래를 통해서 출생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한 적이 없다. 만일 야훼께서 분명히 사래가 아닌 아브람에게 아들을 약속하셨고, 사래의 출산을 막으셨다면, 붙임여성 대신 몸종을 통해 아이를 얻을 수 있는 관습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사회에서 야훼의 뜻은 어디에 있겠는가? 아마 또 다른 여성을 통해서일 것이다. 따라서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는 사래의 반응은, 비록 야훼께서 사래의 출산을 막으셨을지라도, 그가 야훼께 충실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아브람은 물론 사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아이를-얻게-될-것이오/내가-세워지게-될-것이오, 그를 통해서”(2절)라는 사래의 다음 말로부터 우리가 눈치챌 수 있는 것은 사래의 목적이 아브람의 목적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사래의 진짜 목적은 아브람을 위한 상속자를 제공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갈을 통해 자신이 그 집안에서 ‘세워지는’ 것이다. 사래의 이 말은 그 집에서 사래의 진짜 지위를 드러내 준다. 즉 여인이 아이를 얻는 것과 집안에서 세워지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사래는 아직 그 집에서 세워지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갈을 통해 아이를 얻는 방법이 사래를 그 집안에서 세워주고 아브람에게는 상속자를 제공하는 최상의 해결방안이었다면 하갈에게는 어떠한 것인가? 사래가 하갈을 데려다가 아브람에게 줄 때, 그래서 아브람이 하갈에게 들어갈 때, 하갈로부터 우리는 어떤 목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브람이 하갈에게 들어가자 곧 하갈이 임신했다고 진술한다(4절). 이것은 십 년 동안이나 사래의 자궁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이야기의 속도가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는 것과 맞물려, 독자들은 하갈의 임신과 함께 상황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가 임신했다’라고 서술하면서 이야기 전달자는 처음으로 하갈을 행위의 주체로 삼는데, 이는 이야기가 풀리면서 예상되는 변화를 알려주는 표지이다. 지금까지 하갈은 다른 사람들의 행위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임신은 그의 눈을 열었고, 그를 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여)가-보았다, 그(여)가 임신한 것을. 그러자 그(여)가 가벼워졌다, 그(여)의 여주인이 그(여)의 눈에.”(4절 후반절) 우리는 이제야 처음으로 하갈의 눈을 통해 상황을 볼 수 있게 된다. 하갈이 자신의 자궁에 새로운 생명이 있음을 보았을 때, 그의 눈이 열렸고, 그는 자신이 사래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제 하갈은 힘의 비밀을 알게 된다. 즉 자신의 여주인과 같은 도구를 가지고 자신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구조도, 자신처럼 출산능력이 있는 여성이 상속자를 생산해 주지 않는 이상, 그 체제를 재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학관계의 변화에 직면한 사래의 반응은 무엇인가? 그는 하갈 대신에 아브람에게 간다. 사래의 이러한 반응을 통해 우리는 사래가 하갈을 아브람에게 줌으로써, 이전에 하갈에 대해 자신이 행사할 수 있었던 배타적 권위를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어쨌든, “나의 (받는) 폭력이 당신 위에 있어야 (마땅하오)”(5절 전반절)라고 말함으로써 사래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이 아브람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앞서 우리가 하갈의 눈을 통해 가부장적 사회의 역학관계를 읽었듯이, 이번엔 사래의 눈을 통해 이 문제를 읽을 수 있다. 사래가 내뱉는 첫마디는 ‘나의 (받는) 폭력’(י???)이다. 사래는 자신이 갇혀 있는 그 상황을 폭력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사래와 하갈과 아브람 사이의 삼각관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래가 하갈의 눈에 가벼워졌다는 사실(5절 후반절)은 하갈의 임신 후 그 집안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자신의 몸종이었던 하갈의 눈에서조차 사래가 가벼워졌다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얼마나 더 그러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하갈을 아브람에게 넘겨 준 결과로 사래의 지위가 더 불안정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래가 당한 폭력에 아브람이 어떤 기여를 했는지, 하갈의 임신 후 사래에 대한 아브람의 태도 변화에 대해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 그럴지라고 우리는 사래의 다음 말, “그 분이 판단하기를! 야훼께서 나와 당신 사이에서”(5절 후반절)를 통해 아브람에게 책임이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사래의 항변에 직면한 아브람의 반응은 무엇인가? 이제 이 문제에 대한 아브람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보시오, 당신의 몸종은 당신의 손 안에 있소”(6절)라고 말하면서 아브람은 사래가 제기한 문제를 사래와 그의 몸종 하갈 사이로 국한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아브람은 “그에게 행하시오, 좋은 것을, 당신의 눈에”라고 말함으로써, 문제에 대한 책임을 하갈에게 돌리는 듯하다. 즉 하갈의 잘못된 행동이 사래에 의해 응분의 대가를 치러 마땅하다는 태도이다. 사래에게 그의 눈에 좋은 것을 행하라고 말함으로써 아브람은 잃어버린 사래의 눈을 되찾아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하갈의 학대로 이어지는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아브람에 의해 확신을 얻은 사래의 눈은 가부장적 위계 질서를 반영한다. 여기서 사래의 눈은 가부장적 위계 질서에 반(反)하는 다시 찾은 하갈의 눈과 첨예하게 대립한다.
어쨌거나 아브람이 법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그 문제에서 손을 씻음으로써 이제 공은 다시 사래와 하갈 편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아브람이 좀 더 책임있게 중재의 노력을 기울였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사래의 분노는 아브람에 의해 법적인 힘을 얻어 하갈에게 돌아가고, 다시 사래에게 몰린 하갈은 도망을 치게 된다(6절).
이제 가부장적 억압의 모든 짐이,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가장 낮은 계층에 있는 하갈에게 집중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실수의 결과로 고통 당한다. 하갈이 걸머져야 했던 고통이 단 두 낱말, ‘그(여)가-억압했다’(????)와 ‘그(여)가-도망쳤다’(ח???)로 묘사되는데, 이 낱말들은 우리에게 출애굽 이야기를 상기시켜 준다. 따라서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하느님, 억압당하는 자들의 해방의 하느님이라면, 여기서도 억압당하는 하갈을 위해 나서서 일하시는 하느님으로 나타날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기대한 바대로 도망치던 하갈은 광야에서 야훼의 사자에 의해 발견된다. 이제 하갈은 광야에서 혼자 있다(7절). 출애굽 이야기에서처럼, 광야는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다. 아무도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곳이다. 그 곳은 하느님을 만나기 좋은 장소이다. 그 누구에게도 제한 받지 않는 자유로우신 출애굽의 하느님, ה??? ר?? ה???(“나는 곧 나이다” 혹은 “나는 내가 되려고 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의 그 하느님을 만나기 좋은 장소이다. 이 광야라는 공간적 배경에 ‘샘 곁에서’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7절)은 생명을 주고 양육하는 그 곳의 분위기와 함께, 거기에서 일어나게 될 예상치 못한 만남, 즉 광야에서 샘을 발견하는 것에 비견할만한 뜻밖의 만남을 강조한다.
야훼의 사자가 입을 연 첫 마디는 지금까지 사래나 아브람, 그 누구에 의해서도 불려진 적 없는 그의 이름, ‘하갈’(8절)이었다. 그 다음 말, ‘사래의 몸종’이란 말에서 우리는, 트리블(Trible)이 지적했듯이, 야훼 하느님 역시 몸종에 대한 여주인의 지배권을 정당화하며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역설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야훼 하느님께서 이 절망적인 여인의 정체성을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하갈, 너는 사래의 몸종이지. 사래의 몸종으로서 네가 견뎌야 했던 그 고통과 억압을 내가 보았고 또 들었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지.”
이제 그 야훼의 사자는 하갈에게 피할 수 없는 본질적인 질문 둘을 던진다. 이는 그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들이다. 첫째 질문, “어디로부터 네가 왔느냐?”(8절)는 그의 과거를 회상시킨다. 그것은 그에게 학대와 불의와 폭력과 억압과 배반으로 얼룩진 고통스러운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로부터’(8절). 자신의 과거를 회상해 볼 때, 기억 속에서 가장 또렷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도 자신의 여주인, 사래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여주인의 얼굴로부터 하갈은 출산하지 못하는 여성의 비참함, 자신을 그토록 거칠게 다루도록 그를 몰아간 깊은 상처,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누르게 만든 가부장제의 찌꺼기 같은 것들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하갈은 그러한 끔직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자신도 살아남기 위해 싸우면서, 또 다른 여성의 고통과 상처는 보지 못하고 무관심했던 건 아닐까? 참으로 하갈은 지금 어디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연루될 수밖에 없었던 그 가부장적 관계에 대해 그는 어떤 책임이 있는가?
“어디로 네가 가려느냐?”(8절 전반절)라는 둘째 질문은 하갈의 미래를 탐색한다. 그는 아마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임신한 몸종으로 내가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 어딘가에 과연 있을까?’ 가부장적 억압과 위계적인 사회구조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그가 자신의 아이를 양육할 수 있는 곳이 어딘가에 과연 있을까? 이제 우리는 야훼의 사자가 하갈에게 한 질문 자체가 그에게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주기 위한 준비 과정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돌아가라, 네 여주인에게로”(9절 후반절)라는 명령이 단지 사래와 아브람처럼 억압하는 자를 이롭게 하는 절대적 명령이 아니라, 현재 하갈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서 그를 또한 이롭게 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임신한 여성으로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 억압자들의 자원이라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십분 양보를 하더라도 야훼의 사자의 다음명령, “복종하라, 그의 손 아래”(9절 후반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야훼는 출애굽의 하느님이 아닌가? 야훼는 압제자로부터 압제 당하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분이 아닌가? 그러나 이 순간이야말로 이러한 모습으로부터 야훼 하느님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단서는 곧 이어 하갈에게 주어지는 약속, “내가 많아지고 많아지게 하리라, 네-씨를/네-후손을. 그래서 그것이 세어질 수 없으리라. 많아서”(10절 후반절)에서 찾을 수 있다.
야훼의 사자의 약속은 하갈에게 미래의 변화에 대한 놀라운 시각(vision)을 제시한다. 이제 그는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가부장제는 확실히 견고하고, 그렇기에 그가 혼자 한꺼번에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변화는 항상 시간이 걸리고, 헌신된 많은 사람들의 막대한 노력을 요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혼자이고 지지자도 없지만, 미래에 그는 엄청나게 불어난 자신의 씨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세어질 수 없는 많음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압도한다. 희망이 절망을 압도한다. 생명의 씨앗들이 죽음을 압도한다. 이제 그의 과거의 고통스런 이야기는 그의 미래와 관련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위대한 미래는 현재라는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한다. 이제 하갈은 자신의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의 손아래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든 우리가 참으로 변화를 일구기 위해 싸우려고 한다면, 바로 그 사회구조 안에서 우선 살아남아야 한다. 그 안에서 살아남아 싸우기 위해서 때로는 억압을 견뎌내야 한다. 특별히 오랜 시간이 걸릴 때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복종하라, 그의 손아래”(9절 후반절)라는 명령은 위계 질서 안에 있는 여주인의 몸종으로서 그가 지켜야 할 이상적인 가치로 권장되는 사항이 아니다. 또한 이 명령은 주로 압제자들이 즐겨 말하듯이, 야훼 하느님이 현상(status quo)을 수호하는 분임을 드러내는 표시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이 때로 하느님의 궁극적인 의도와 상충될 수도 있다는 좋은 예를 발견한다. 변화는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렇듯 억압을 당한다는 것이 곧바로 그것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에 저항하여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하갈은 억압을 견딜만한 새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 하갈이 가지고 있는 힘은 무엇인가? 야훼의 사자는 말한다. “보라, 네가 임신했다.”(11절 전반절) 먼저 하갈은 자신을 보고 자신의 내부에 있는 힘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그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야훼의 사자는 말한다. “그러니 네가 낳으리라, 아들을”(11절 전반절). 이 아들은 하갈에게 하나의 상징, 곧 야훼 하느님께서 자신의 ‘억압을 들으셨다’(11절 후반절)는 상징이 될 것이다. 하갈이 그 아들과 함께 있는 한, 그는 과거에 자신의 ‘억압을 들으신’ 그 하느님을 기억할 것이고, 현재에 자신의 ‘억압을 듣고 계시는’ 그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며, 미래에도 자신의 ‘억압을 들으실’ 그 하느님을 믿게 될 것이다.
11절 후반절에서 하갈은 자신의 아이의 이름을 לא????(〈이스마엘〉, ‘하느님이 들으신다.’)이라 짓는데, 이는 그의 하느님 경험을 통해 ‘본바’(vision)가 자신의 씨들을 통해 계속되리라는 믿음을 보여준다. 그의 아들은 ‘인간 들나귀’(12절 전반절)가 될 것이다. 여기서 인간 들나귀는 그의 어머니와는 달리, 아무에게도 귀속되거나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의 씨들은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야훼께서 그의 억압을 들으셨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 말, “그의 손이 모두를 거스르고, 모두의 손이 그를 거스르리라”(12절 후반절)에서 더 분명하게 묘사되는데, 이스마엘은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뿐 아니라, 억압에 저항하여 싸울 것임을 보여준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 “그의 모든 형제들의 얼굴에 맞서 그가 살아가리라”(12절 후반절) 역시 하갈의 삶을 상기시켜 주는데, “내 여주인 사래의 얼굴로부터, 내가 도망치고 있습니다”(8절 후반절)과 형식상 평행을 이루면서 내용상으로는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은 자신이 이전에 그래야 했던 것처럼 다른 이들의 얼굴로부터 도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모든 형제들의 얼굴에 맞서 살아갈 것이다.
이제 하갈은 자신의 자궁에서 그 씨(????)가 자라서 낡은 질서의 억압을 거슬러(?) 점점 많아지는(ה??אַ ה???) 것을 본다. 야훼의 사자가 10절에서 ‘네 씨’라고 분명히 언급한대로, 그것은 더 이상 상속자를 얻기 위한 아브람의 씨도 아니며, 한 집안의 여인으로 세워지기 위한 사래의 씨도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그 집안에 매여 있는 가부장제의 씨가 아니라, 가부장제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운 들나귀 씨인 것이다.
이렇게 새로 본 후에, 하갈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하느님께 이름 붙이기를, “당신은 יאּ? ל?(〈엘 로이〉, ‘나를 보시는 하느님’)입니다.”(13절)라고 하였다. 이렇듯 하갈이 만난 하느님은 ‘보시는 하느님’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하느님 경험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이름을 짓는 특권을 갖는다. 사래의 눈에 그리고 아브람의 눈에는 그 분이 어떻게 보여질지 모르지만, 하갈의 눈에 그 분은 ‘엘 로이’이다. 이제 그는 사래나 아브람, 가부장제 안에 있는 그 누구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그 동안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던 여인이 야훼의 사자를 만난 후에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변화이다. 참으로 그에게 하느님은 ‘보시는 하느님’이다. 그는 광야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발견될 거라고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야훼의 사자의 눈에 발견되었다. 하느님은 다른 이들과는 다른 눈을 갖고 계신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실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해 주신다. 새로운 시각(vision)을 일깨워 주신다. 하느님은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해서 그의 억압과 싸움과 희망을 보시며, 또한 그것을 보게 하시는 하느님이다. 하갈 이야기 속을 여행하면서, 하갈과 동행하신 하느님, 그리고 하갈이 경험하고 고백했던 하느님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새롭게 만날 수 있을까?
4. 닫는 이야기
타메즈(Tzmez)는 이 하갈 이야기가 정경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억압받는 사람들 역시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역사를 함께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하느님은 그들이 광야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들은 역사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해 살아야 했고, 역사의 주체가 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씨받이 몸종에 불과했던 한 여인이 하느님으로부터 큰 민족의 시조가 되는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한 책임까지 맡게되는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러한 의미를 포착할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살펴본 본문에서는 아브라함보다 하갈이 하느님의 역사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함을 보면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처럼 역사의 주류에 속하는 사람 뿐 아니라 그 주변부에 속한 사람들도 당신의 역사에 초대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또한 하갈이 베두인의 조상이라는 점에서 야훼 하느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에게만 머무는 것이 아님을 엿볼 수 있다.
억압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하갈의 이야기를 볼 때, 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 전통과 신앙의 이름으로 가리워졌던 많은 부분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오늘날 억압당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또한 성경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하갈은 누구인가?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들, 외국인들, 성적으로 유린당한 여성들, 소년소녀 가장들, 과부들, 노동자들, 농민들, 도시빈민들과 억압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일 것이다. 특별히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린 자식들을 떠나온 외국인 여성노동자들 가운데 또한 하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억압당하는 자들의 조상으로서 하느님의 관심과 보호가 그들 편에 있음을 보여주는 산 증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