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바라기

성서적 관점에서 본 ‘폭력의 길’과 ‘생명의 길’

깜장보석 2012. 9. 21. 13:33

 

 

김영남 신부

(서울가톨릭대 교수, 신약성서)

 

 

2. 성서를 통해서 본 생명의 길

 

앞의 제1부에서 우리는성서적 생명이해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여기 제2부에서는성서를 통해서 본 생명의 길에 관하여 살펴보겠다. 1부가 생명이라는 주제를 주로 개념적 측면에서 접근했다면, 여기 제2부에서는 행위적 측면에서 접근한다. 성서에 기록된 몇 가지 대표적 사례들을 살펴봄으로써, 성서에서는 사람이 생명의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보고 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런데 생명의 길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려다 보면 성서에 기록된 몇 가지 대표적 사례들을 살펴봄으로써, 성서에서는 사람이 생명의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보고 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그런데 생명의 길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려다 보면 성서에 그토록 많이 나오는 폭력의 문제를 못 본체하며 그냥 지나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여기 제2부에서는 특히 구약성서를 다룰 때에, ‘생명의 길이라는 주제를 단독으로 다루지 않고 폭력의 길을 배경으로 삼아 함께 다루고자 한다. ‘폭력의 세계생명’, ‘구원’, ‘평화등의 성서의 근본 메시지를 또렷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검은 배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구약성서를 통해서 본 폭력의 길생명의 길

 

성서의 역사는 크게 보아 폭력의 길생명의 길의 갈림길에서 폭력의 길의 유혹을 뿌리치며(또는 폭력의 길의 유혹에 빠져 많은 고통을 겪고 난 후) 어렵게 생명의 길을 찾아 간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구약성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빼놓지 않고 전체적으로 통독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약성서 안에 잔혹한 폭력을 묘사하는 대목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사실에 크게 당혹하게 된다. ‘폭력의 길을 치닫는 인간 군상들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이 대목들은, 사실 폭력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며 고통 속에 있는 인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구약성서의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폭력의 아우성 속에서도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생명의 길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용기있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언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폭력의 길생명의 길을 보여주는 구약성서의 대표적인 대목 몇 가지만을 선택하여 살펴보겠다.

 

 

1.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창조질서 안에서의 인간생명의 위치와 생명의 길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세상과 인간의 창조이야기는 창세기 1-11장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창세 1,26-27) 하느님께서 직접 주신 생명의 숨결[창세 2,7]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하느님께서 말씀을 직접 건네시는 대화의 상대가 되는 존재(창세 1,28-29; 참조: 3,9-13; 4,9-10이하)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함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런 존귀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간도 피조물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다른 조물들과 다름이 없다. 그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 갈존재이다(창세 2,7; 3,19 참조). 인간이 제 아무리 존귀하다 하더라도, 그 존귀함이란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하심과 꾸며주심으로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은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이 그의 숨결을 거두시면 사라질 존재요 입김에 불과하다(참조: 시편 39,6.12; 49,13.21; 82,7; 89,48; 90,5; 이사 40,6-7).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이 한계성을 망각하는 데에, 인간의 불행의 뿌리가 있다. 바로 이 점을 창세 3장부터 11장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말해주려 한다. 창세 1-2장에 묘사된 조화와 질서를 갖춘 원래의 아름다운 세상과 인간의 모습은 인간이 하느님의 돌보심을 저버리고 순종하지 않음으로써, 즉 죄를 지음으로써 깨어지기 시작한다(창세 3). 땅까지도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창세 3,17). 죄를 지은 후, 즉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자, 인간 서로 서로의 관계도 깨어져 나간다. 하와를 보고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요하며 환호하던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는 하와에게 탓을 전가한다(창세 2,233,12를 비교).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죄에 이어서, 형이 무죄한 아우 아벨을 죽이는 끔찍한 죄가 발생한다. 그리고 죄는 점점 증가하여 세상에 만연하게 된다(창세 6,5-6.11-12). 이 이야기에는 인간자신의 존귀함과 조화된 인간 상호의 삶은 처음부터 창조주와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하고 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사제계 전승에 의하면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마저도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가 어긋나면서 악화된다. 죄를 짓기 전의 동물(타생명체)와 인간 사이뿐 아니라 동물과 동물사이에도 조화와 평화가 지배하였는데 죄가 세상에 만연한 후에는 인간이 모든 동물의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하고(창세 9,2), 죄를 짓기 전에는 푸성귀와 씨가 있는 열매(창세 1,29 이하)가 인간의 양식이었는데 죄가 세상에 만연한 후에는 고기가 양식이 된다(창세 9,3-4). 야훼계 전승도 비슷한 면을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도우시려고 짐승을 만들어 데려다주시자, 아담이 그 짐승마다 이름을 붙여주는 것을 보면, 비록 그가 그들 중에서 자기의 협력자를 찾지는 못하지만 그들을 평화롭게 다스렸음을 암시해준다. 코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절히 표현한다: “인간이 누리는 깊은 하느님의 평화는 아담이 사귄 동물세계 전체에 두루 미쳤다(창세 2,19-20).

 

창세 1,28에 나오는 다스림지배의 의미:

유일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말씀으로 태초의 혼돈의 상태에서 차근차근히 질서와 조화를 이루시고, 그 창조과정의 절정의 단계에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창세 1,1-2,4a의 맥락을 고려할 때, 1,28에 나오는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온갖 생물을 다스려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하느님께서 그토록 좋다고 보신 세상에서 타 피조물들이 조화와 질서를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돌볼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다.

땅을 지배하여라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는 말씀에 관하여 C. 베스터만은 다음과 같이 흥미있는 말을 한다: 땅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고대에 형성되어 있던 왕권 개념에 의하여 분명하게 밝혀져야 할 왕과 관련된 함축적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다. 자기 영토의 주군으로서 왕은 단지 그 영역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영역을 위해 복을 가져다 주는 자, 또한 복을 중재하는 자이기도 한 것이다. 만일 인간이 의 자원들을 착취하여 대지와 초목, 동물들, 강과 바다들을 손상시킬 경우, 그는 땅에 대한 지배라고 하는 자신의 왕다운 직무에서 실패하고 말 것이다. 대지의 풍요한 산출력과 맑은 공기, 그리고 수질 상태에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지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야 비로소 과학기술의 맹렬한 진보로 야기된 치명적인 결과에 대한 공포가 뒤늦게 자각되고 있는 중이다.

한 가지 더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성서적 신앙이해에 있어서,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겸허한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뜻이 있어 창조하신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 즉 다른 생명체와 자연 전반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거기에 있는 창조질서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의 창조주시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면 인간은 자연을 하느님의 선물로서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연을 경시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보면 창조주를 경시하는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결국 인간생명에 대한 경시의 태도를 낳게 될 것이다. 창세 3,17에 의하면 땅은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호세 4,2-3의 말씀도 자연계가 인간의 죄 때문에 신음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데 놀라울 정도로 그 메시지가 현대적으로 느껴진다: “이 땅에는 사랑하는 자도, 신실한 자도 없고 이 하느님을 알아주는 자 또한 없어 맹세하고도 지키지 않고 살인과 강도질은 꼬리를 물고 가는 데마다 간음과 강간이요, 유혈참극이 그치지 않는다. 때문에 땅은 메마르고 주민은 모두 찌들어간다. 들짐승과 공중의 새도 함께 야위고 바다의 고기는 씨가 말라간다.” (참조: 예레 12,4; 신약성서에서는 로마 8,19.22)

 

 

2. ‘카인과 아벨 이야기(창세 4,1-16)

 

2.1. 카인의 이야기가 창세기 1-11장의 맥락에서 갖는 의미

창세기 4장의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창세기 1-3장을 전제로 하고 있고, 창세기 1-11장의 원역사(原歷史)라는 맥락 속에 있다. 인간이 생명을 얻기 위해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창세기 1-3장이 이미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다. 창세기 1-2장의 이 선포는 신구약성서의 세계 전체에 잔잔히 울리고 있는 배경음악에 비유할 수도 있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창세기 3-11장의 이야기들은 인간의 존귀함과 인간들 사이의 (조화와 질서를 갖춘) 평화로운 삶은 근본적으로 창조주와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인간이 죄를 지은 후, 즉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자, 인간 서로 서로의 관계도 깨어져 나간다. 그리고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죄의 영향은 폭력에서 드러난다. 아담과 하와의 죄에 이어서, 형이 무죄한 아우 아벨을 죽이는 끔찍한 죄가 발생한다. 그리고 죄는 점점 증가하여 세상에 만연하게 된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가서는 이런 말까지 나온다: “세상은 하느님 앞에 타락해 있었다. 세상은 폭력[히브리어로 하마스סמח]으로 가득 차 있었다.”(창세 6,11; 창세 6,5-6 참조)

 

2.2. ‘피의 울부짖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 ‘카인과 아벨’, ‘다윗과 우리야’, ‘아합과 나봇

생명을 해치는 폭력행위 가운데 가장 나쁜 형태는 피흘림’(살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 사례를 구약성서에서 세 가지만 든다면 다음과 같은 대목들을 열거할 수 있겠다. 1) 카인이 무죄한 자기 동생 아벨을 쳐죽인 일(창세 4,1-16); 2) 다윗 임금이 그의 충직한 장군 우리야를 의도적으로 위험한 전선에 보내어 죽도록 내버려두고 그의 아내까지 빼앗은 일(2사무 11-12) 3) 아합임금과 이세벨 왕후가 농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차지한 일(1열왕 21).

이상 열거한 세 경우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무죄한 이의 피흘림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무죄한 이의 보호자로서 강력히 개입하신다는 점이다. 이 점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나오는 다음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들어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직역하면 네 아우의 피의 소리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그런데 피(피의 소리)가 울부짖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피의 소리를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나 하느님은 들으신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2사무 11-12장의 우리야 사건1열왕 21장의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주어진다.

우리야 사건의 경우, 다윗 임금이 자신의 왕권을 이용해 자신에게 그토록 충직하였던 우리야의 목숨을 빼앗고 그의 아내까지 빼앗는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을 때, 피의 소리를 누가 들었던가? 다윗이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을지 모르나, 하느님은 속일 수 없었다. ‘하느님께서 그 피의 소리를 들으셨던 것이다. 이를 성서는 예언자의 갑작스런 방문을 통해 표현한다. 예언자 나단이 갑자기 다윗을 방문하여 준엄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분이 보시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죽이고 그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다.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가시지 않을 것이다.”(2사무 12,10). 다윗은 우리야의 일로 인해 바쎄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잃을 뿐만 아니라,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포함하여 많은 고통을 겪게 된다. 이른바 다윗 왕위 계승사(2사무 9장부터 1열왕 2장까지)에 나오는 피비린내 나는 그 많은 일들을 이해하는 열쇠는 위의 예언에서 볼 수 있다.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에도 무죄한 나봇의 피흘림이 있은 바로 다음에 하느님의 응답이 예언자의 갑작스런 방문을 통해 주어진다: “이 때 야훼의 말씀이 디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내렸다. ...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으리라.’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1열왕 21,17-20). 아합 임금은 나봇의 일로 인하여 라못 길르앗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시신에 묻은 피는 예언자의 예언대로 나봇이 죽은 그곳에서 개가 핥게 된다(1열왕 21,19; 22,38). 나봇의 무죄한 피가 부르짖음에 야훼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참조: “이렇게 하여 죄 없는 자가 피흘리는 일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송두리째 뿌리뽑아야 하기[때문이었다]”(신명 19,13). “뇌물을 받고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에게는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신명 27,25).

 

2.3. 죄인 카인이 체험한 하느님의 자비: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창세 4,9)는 하느님의 질문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은 죄를 벌하시려고 찾으시는 무서운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죄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시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양쪽이 다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되는데, 특히 후자의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죄를 모른 체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죄는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3,9-10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분명히 하느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기 위해서는 곁에 있는 형제와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성서 전반에 흐르고 있는 이 대원칙이 이렇게 성서 첫머리에 벌써 나오는 것이다. 과연 죄의 결과가 하느님의 벌로 나타난다. 카인에게 주어진 죄의 결과를 창세 4,11-12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낸 그 땅에서 쫓겨나리라. 네가 땅을 부치어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으리라.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리라.” 땅의 소출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것과 떠도는 신세가 되는 것(12)이 벌이다. 사실, 예바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절한 설명을 달고 있다: “자기 동생을 죽인 자는 동생 없이 살아가야 한다.” 카인의 정처없는 삶동생(이웃)을 죽인 행위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성서 전체는 하느님은 인간의 죄악 때문에 심판을 내리시지만, 그분의 은총(자비)은 인간의 죄악보다도 더욱 위대하시다는 것을 증거한다(참조: 로마 5,20: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위에 언급된 3,9의 질문에서 우리는 죄를 짓고 생명의 원천인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인간을 안타까워 하시며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보아야 할 것이다(참조: 루가 15장의 돌아온 탕자를 얼싸안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 이러한 모습은 사실 창세기 1-11장의 원역사(原歷史)에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측면이다. 카인의 경우, 죄를 지은 후에도 계속되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모습은 그에게 보호의 징표를 주는데(창세 4,15)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의 질문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말하며 하느님 앞에서도 자기의 죄를 감출 수 있듯이 뻔뻔스럽게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데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그리고 창세 4,17-21에 의하면 카인은 단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였을 뿐 아니라, 성읍의 창시자가 되고 인간의 문화와 문명의 조상까지 되었다.

 

2.4. 카인이 걸어 간 폭력의 길시기(猜忌)

카인의 동생 살해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폭력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가 이 이야기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카인이 화가 난 이유는 하느님께서 아벨이 바친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자신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4-5). 그런데 유의할 점은 창세기의 4장이 성서 본문 하느님께서 카인과 아벨에게 다르게대해 주신 이유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하려고 한다. 예컨대, 흔히 나오는 설명 중의 하나는 카인이 제물을 경건한 마음으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4장의 본문 자체에는 그런 말이 일체 없다. 카인이 화를 낸 이유는 굳이 찾자면, 그것은 우리 인간의 심리 깊숙이 잠재해 있는 다른 이의 다름’, 특히 자기 보다 좋은 면에서의 다름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경향(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카인은 아벨이 자기보다 좋은 면에서 다름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카인은 하느님께서 죄악이 문 앞에 (성난 야수처럼)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텐데, 너는 그것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세 4,7)며 주의까지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악을 저지른다.

그런데 이런 시기(또는 비교’, ‘경쟁’)폭력의 관계는 야곱에사오의 형제 관계(창세 25-27. 32-33)에서도 나타나고, 요셉그의 형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창세 37-50). 야곱의 이야기와 요셉의 이야기는, 형제들이 그들 사이에 있던, ‘죽음을 불러 올 수도 있었던 증오심을 극복하고 화해에 도달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갈등은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거짓폭력으로 상대를 제거하려는 데서 촉발된 것이었다.

 

3. 아브라함의 이야기(창세 12-25)에 나오는 폭력의 길생명의 길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갈등관계를 극복하고 서로 함께 사는 생명의 길에 도달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창세 12,1-3의 중요성을 보아야겠다. 창세기 12,1-3은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되는 성조사(聖祖史), 더 나아가 그와 함께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창세기 1-11장의 태고사를 연결해 주는 부분이다. 특히 3절의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리라. 너는 복이 되리라.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가 인류 구원이라는 목표 속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제시해 주는 구절이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이스라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민족이 하느님이 내리시는 복에 참여하도록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런 일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너를 통하여”)가 되도록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민족 이야기의 서두가 이렇게 만민족을 평화롭게 끌어안는 보편적 전망속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은 구약성서 전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구약성서의 다른 곳에 많이 나오는 타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이며 호전적인 문헌들을 대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갈등관계를 극복하고 생명의 길을 찾아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단 두 가지만 살펴보자. 매우 짤막한 이야기이지만, 창세기 13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갈등관계를 피하기 위해, 조카 롯에게 더 좋은 땅을 선택하도록 양보한다. 그런데 이렇게 양보한 아브람에게 하느님은 다른 방법으로 더 갚아 주신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설화군(說話群)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창세기 221-19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제사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폭력의 길생명의 길에 관한 우리의 주제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이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믿음의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그는 마치, 칠흑같은 밤에 뒤에서는 원수들이 죽이려고 쫓아오는 데, 바닥이 보이지도 않는 높은 낭떠러지 앞에 놓여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에 있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믿고낭떠러지에 뛰어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의 이 행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깊은 믿음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존재하지 않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존재로 불러내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로마 4,17-18).

그러나 위와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칭송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제사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곤혹케 하는 신학적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그 문제란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정말 사랑하는 외아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는 하느님이신가? 그렇다면 그런 하느님은 정말 잔혹한 하느님이시지 않고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심각한 질문이다. 대답을 시도해보면 다음과 같다:

인신번제(人身燔祭)는 원수사랑까지도 가르치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구약성서 자체 안에서도 사형의 죄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행위였다(레위 20,2-6; 신명 18,10). 그런데 인신제사의 관행은 이방인들의 영향을 받아 왕정시대까지만 해도 가끔 행해지던 것 같다. (2열왕 16,3)에 의하면 성서 역사가는 아하즈 임금의 행적에 관해 말하면서 그는 이민족들의 고약한 풍속을 본받아 자기의 아들을 불에 살라 바쳤다고 비난하고 있다. 사실, 2열왕 3,27에 의하면 모암 임금이 세자인 자기의 맏아들을 성 위에서 번제를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열왕 21,6에 의하면 므나쎄 임금도 왕자들을 불에 살라 바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런 인신(특히 귀중한 아들)제사의 동기에는 풍전등화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도들이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일부 학자들은 창세 22,1-19아브라함의 제사이야기를 하나의 원인설화(原因說話 Ätiologie, Aetiology)로 보고 설명하려고 한다. 즉 아브라함의 제사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인신번제(人身燔祭)가 왜 금지되었으며 그 대신 동물을 제물로 바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또는 유래를’) 밝혀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런 원인설화적 해설을 수용할 수 있다면, 아브라함의 제사 이야기 뒤에는 아득한 옛날부터 인간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끔찍한 폭력의 길[방법]’을 쓰고자 하는 경향(이는 인신번제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을 극복하고 평화적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던 결과의 한 부분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신번제(人身燔祭)라는 주제는 성서독자들에게 즉시 곤혹스러운 다른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그 대목이란 바로 판관기에 나오는 판관 입다가 자신의 딸을 번제로 바친 이야기이다(판관 12,29-40). 이에 관해서는 거두절미하고 이홍기 신부의 간결한 다음 설명을 인용하는 것으로 필자의 설명을 대신하겠다: “(판관) 입다가 딸을 바친 이야기는 원래 이스라엘이 매년 시집가기 직전의 처녀들을 위해 지내던 처녀 축제와 연관된 독립 설화였다가 후에 영웅 설화에 삽입된 것 같다. 율법규정상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 제사를 못 바치게 되어 있지만(레위 18,21; 20,2-5; 신명 12,31; 18,10) 여기서는 인간 제사에 대한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고 단순하게 보도할 뿐이다. 이야기 자체에는 인간제사의 윤리성을 논하지 않는다. 단지 이 에피소드는 이스라엘이 처해 있던 어려운 처지와 하느님께 약속한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지도자의 곧고 정직한 태도를 드러낸다.

인신(人身)제사와 관련된 본문들을 다루면서 우리는 계시의 발전과정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하여, 그들의 고난에 찬 역사의 과정을 통해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것을 계속 깨달아가야 했다. 예컨대 유일신 신앙도 이스라엘에서 확고한 신앙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을 거쳐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신앙을 전하려고 노력해야 했던 것이었다. 이는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 우상숭배의 풍조 속에서 야훼 유일신 신앙을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야 했는지 그 역사적 사실만 보아도 분명하다(참조: 1열왕 17-19). 인신제사와 관련된 문제도 이런 계시의 발전과정의 한 면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교회가 늘 강조하여 가르쳐왔듯이 계시의 완성이자 중심은 그리스도이다(참조: 계시헌장 2, 3, 4, 15, 16).

그리고 인신제사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점은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각 문헌이 가지고 있는 문학양식(문학유형)에 유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는 시()로써 해석해야지, 시를 마치 신문기자의 사건보도처럼 해석하면 다 되는 것처럼, 입다라는 판관(영웅)에 관한 여러 가지 옛 이야기들을 편집해 놓은 이야기 하나를 해석하면서,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무조건 후대의 신앙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을 주는 이야기로 해석할 이유는 없다. ‘역사기록역사기록으로 담담하게 볼 필요가 있다. 윤리적 판단을 배제한 채, 악한 현실까지도 포함하여 역사 현실의 한 면을 성서저자가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석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성서저자의 기록(저술)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4. 출애굽기 1-14장에 나타난 폭력의 길생명의 길

 

우리는 출애굽기 서두(1-2)에서 벌써 폭력의 길생명의 길에 관한 말씀을 찾아 볼 수 있다. 1장에서는 두 명의 히브리 산파가 보여주는 생명의 길과 파라오가 보여주는 폭력의 길이 나오고, 2장에서는 모세의 어머니, 누이, 공주의 태도에서 생명을 선택하고 보호하는 태도, 장성한 모세가 살인을 하여 결국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마는 체험, 곧 모세가 겪는 폭력의 길의 실패 체험을 본다.

 

4.1. 출애굽기 1: 1장 후렴처럼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급속한 번성(7, 9, 12, 20), 창세기에 나오는 자식을 낳고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강복의 말씀과 성조들에게 주어진 후손에 대한 약속의 말씀들을 보면, 결국 하느님의 강복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출애굽기 1장에는 이렇게 힘차지만 보이지 않는 힘의 원천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태도와 이를 모르는 파라오의 태도가 매우 대조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점은 특히 1,15-22의 단락에서 살인의 명령을 내리는 파라오의 태도와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그 명령을 거부하는 두 산파의 태도에서 풍자적이며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급속한 번성의 이면에는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파라오의 태도는 두려움이었다(참조: 9절의 보아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듯 무섭게 불어나니 큰 일이다”; 13: “에집트인들은 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스라엘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에서 나오는 결과는 잔인한 억압이요, 강제노동이요 급기야는 학살이었다. 반면에 보잘 것 없는 산파에 불과하였던 두 여인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에집트 왕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사내아이들을 살려 두었다(17; 참조 21). 산파들은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산파들은 이 갈림길에서 생명으로 통하는 길을 선택했다. 파라오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목숨을 건 모험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던 두 산파가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17절의 말씀대로 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행동을 한 후에는 책임을 추궁하는 파라오에게 당당히 그리고 지혜롭게 대답할 수도 있었다(18).

출애굽기 1장은 스스로를 하느님으로 자처하는 절대군주 파라오와의 결속은 폭력에 이르는 길이요 죽음에 이르는 길이지만, 하느님과의 결속(계약)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우리는 여기 출애급기 1장에서도 보게 된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결단을 내려 행한 행동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도 생명으로 이끌어 준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던 요셉도 자신의 생명은 물론 자신을 죽이려했던 형들의 생명까지도 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 출애굽기 1장에서 파라오의 그 잔인함과 포악함의 근원이 그의 하느님에 대한 무지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도록도와주는 성서사도직은 하느님께 대한 무지를 없애줌으로써, 세상의 평화에 근본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귀담아 들어야 하겠다.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 경외심이 없다면 우리도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 대해 새로운 또 하나의 포악한 파라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출애굽기 1장을 보면서 명심해야 할 것이다.

 

4.2. 출애 2,1-10: 모세의 출생에 관하여 말하는 이 대목에서도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린 생명을 보호하려는 여인들의 태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모세의 어머니와 모세의 누이 그리고 파라오의 딸 이 세 사람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위인들의 이야기에서 아가의 이름은 탄생 직후에 주어지는데, 모세의 경우에는 탄생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아기의 이름이 언급된다는 점이다. 모세라는 이름을 이렇게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밝힌 데에는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설화자에게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 설화자는 모세의 탄생과 결부된 이야기들은 단지 역사적으로 출애굽의 영웅이었던 인물인 모세에게만 해당된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들의 주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암시해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는 출애 2,1-10의 이야기를 모세라는 위대한 인물의 탄생 이야기로 먼저 읽을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어린 생명의 생사에 관련된 이야기로 먼저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 이야기에 담겨진 고유한 뜻이 긴장감을 갖고 다가올 것이다. 어린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노력한 여인들은, 그 아기가 장차 위대한 사람이었다. 오직 생명을 지켜야한다는 양심의 소리에 순응하여 그렇게 투신하였던 것이다. 성서저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도 각자의 고유한 상황 속에서 이 여인들의 태도를 본 받도록 초대하고 있다.

 

4.3. 출애 2,11-15: 모세가 겪은 폭력의 길에 대한 실패 체험

여기에는 모세가 다 장성한 후에 있었던 일화(11-15)가 소개되고 있다. 이 대목은 모세가 자기 동족을 찾아 나서고 그들의 고생에 연대의식을 갖게 됨을 묘사한다. 가만히 있으면 파라오의 왕족으로서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영화를 누리면서 살아 갈 수 있었던 모세였지만, 그는 자신의 안전지대를 떠나 자신의 동족들이 살고있는’ ‘고생의 땅으로’ ‘나간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도 일종의 엑소도스(그리스어로 exodos떠나감을 뜻함)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던 어느 날 모세는 어느 에집트인이 모세의 동족인 어느 히브리인을 심하게 때리는 것을 보고 동족에 대한 연대의식에서 그 에집트인을 죽이고 만다. 그리고 모세는 자신의 이런 살인 행위를 은폐하려고 애를 쓴다.

다음 장면에서는 모세가 서로 맞붙어 싸우고 있는 히브리인 둘을 만난다. 여기서 성서저자는 모세가 싸우는 사람 중에서도 잘못한 사람을 나무랐다고 강조함으로써 모세의 관심사가 정의에 있음을 보여준다. 아마 처음에 모세는 싸우는 두 사람을 중재해 보려고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누가 당신을 우리의 우두머리로 삼고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라는 비난에 찬 어투의 질문은 이야기 전체의 의도를 알아보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말이다. 모세는 동족에 대한 강한 연대의식에서 나름대로 그들을 구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아직 권위가 없었다.

 

4.4. 출애 2,16-22: 미디안 땅에서. 이 단락에서 무대의 장면은 미디안 땅으로바뀐다. 폭력은 문명의 세계인 에집트에만(1,1-2,14)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적대 민족사이에(2,11-12)만 있던 것도 아니었다. 이미 위에서 보았듯이 같은 동족 사이에서도 있었다(2,13-14). 그리고 이제 여기 미디안의 유목민들의 세계에서도 억압과 폭력이 있다는 것을 모세는 체험하게 된다(2,16-17).

모세는 도망자로서 낯선 땅에 와서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는데, 그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사람은 마음만 옳게 먹으면 남에게 도움이 될 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세의 이 짧은 일화(episode)에서도 볼 수가 있다.

 

4.5. 출애 3-14; 여기에 나오는 출애굽 해방의 역사는 파라오의 억압(출애 2,11)을 견디지 못하여 신음하며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출애 2,23-25; 3,7-10)의 역사이다. 앞에서 보았던, ‘아벨의 피, ‘나봇의 피, ‘우리야의 피의 울부짖음이 개인의 울부짖음이라고 볼 수 있다면, 여기 출애굽의 역사에서는 한 백성의 울부짖음이다. 출애굽의 사건은 이 백성들의 부르짖음이 기폭점(출발점)이 되어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백성들의 신음과 울부짖음에 대하여 하느님은 의로운 재판관처럼 구원의 응답을 하신다. ‘하느님을 향한 백성의 부르짖음(탄원)’은 결코 공허하게 사라지지 않으며 반드시 하느님께 전달된다는 것,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 탄원을 들으시고 반드시 구원의 응답을 베푸신다는 것을 우리는 출애굽의 역사에서 분명히 본다.

 

 

5. ‘토라(가르침)과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나타난 생명의 길

 

1) 구약성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생명의 길은 한마디로, ‘토라(ה?וֹתּ)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구약성서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려주신 토라(가르침, 율법)을 따르는 길이 곧 생명이 길이라고 증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시편집 전체를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시편 1두 가지 길’, , 멸망에 이르는 악인의 길과 행복에 이르는 의인의 길을 비교하면서, 행복하려면 토라의 길을 따르라고 호소한다.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좀 있을 수는 있지만, 원래의 신명기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 30,15-20에 나오는 결단요청도 이 토라의 길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라는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려주신 은혜로운 것이었다. 이 세상의 수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그리고 그들 중에는 이스라엘보다 더 강대한 민족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 약하고 보잘 것 없던 자신들을 선택하시어 계약을 맺으시면서 주신 은혜로운 것이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토라는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길이었다(참조 시편 19[18],8-11).

2) 그런데 토라(הרות)의 근본정신은 1차적으로 셔마(ע??)기도’(신명 6,4-5)에 나오고, ‘십계명(출애 20,1-17; 신명 5,1-21)에 좀 더 확대되어 표현되어 있다. 이런 계명이 국가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표현된 것이 바로 계약의 책[출애 20,22-23,33]이요, ‘신명기 법전[신명기 12-26]이다.

3) 예언자들은 주님 토라의 근본 정신을 자애(‘사랑’, 히브리어로 헤세드דסח), 공정(‘’, 히브리어로 미쉬파트טפשׁמ), ‘정의’(‘의로움’, 히브리어로 처다카הקדצ)에 있다고 보았다. 달리 말하자면,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생명의 길로 나아가려면 자애정의’, ‘공정’, 진실[진리]에 바탕을 둔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예컨대, 호세 6,6; 이사 5,7; 미가 6,8; 예레 9,22-23; 참조 시편 72[71],2-4).

이런 예언자들의 근본정신은 율법서(모세오경)의 근본정신을 잇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신명기에 잘 드러나 있듯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는 근본계명(셔마기도, 신명 6,4-5) 자체가 이미 이웃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온 마음, 온 목숨, 온 힘으로 사랑한다는 것이웃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일상생활에서도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웃중에서도 사회적 경제적으로 약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애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점은 이미 계약의 책신명기 법전에 나오는 이른바 각종 약자 보호법에도 잘 나타나 있다. 모세오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한 자애롭고’, ‘정의로운삶을 살아야 할 근본적인 동기로서 줄기차게 출애굽의 체험을 상기시킨다: ‘너희가 에집트 종살이하던 일을 생각하여라.’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으로 거저 베풀어주신 은혜가 기본 동기가 되어 있다.

 

6. 왕들의 역사에 나타난 폭력의 길생명의 길

 

이미 왕정제도 도입단계에서 왕정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왕정적 기사(예컨대 1사무 8장 특히 10-18)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스라엘은 그들의 왕들에 대하여 대단히 뼈아픈 체험을 가지고 있다. 좋은 이야기들도 있지만(예컨대, 다윗의 원수사랑의 예’; 다윗과 요나탄의 우정...), 전체적으로 왕들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에는 신격화된(우상화된) 파라오 밑에서 노예살이한 체험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자기들의 왕들 중의 일부를 폭군으로 체험하게 된다. ...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왕들과 부유층)이 오히려 폭력의 길을 걷는다. 예컨대, 다윗 임금과 아합 임금이 걸은 폭력의 길에 관하여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 1열왕 1-2장에 의하면 솔로몬은 말년의 쇠약한 다윗을 이용하여 잔인한 방법으로 왕권을 잡는다. 솔로몬은 그의 처세에 관한 역사기록의 첫 머리(열왕기 상권 3)에 배치되어 있는 기브온의 꿈대목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솔로몬이 장수나 부귀영화가 아니라 명석한 머리([새번역]에 의하면, ‘듣는 마음’)를 청한 것(1열왕 3,9)을 기특하게 여기시어 덤으로 부귀영화를 오히려 탐하고, 그리하여 (특히 북부지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주변의 다른 왕들과 다름없이 백성들을 억압하는 정치를 하였다(예컨대, 1열왕 11,11: “부왕[솔로몬]께서는 너희를 가죽채찍으로 치셨으나 나는 쇠채찍으로 다스리리라.”)

왕정시대에 이스라엘의 지도층이 얼마나 폭력의 길을 걸었는지는 예언자들의 신랄한 사회불의의 고발이 잘 반영해 준다(참조: 호세 4,1-3; 5,1-7; 아모 2,6-8; 8,4-8; 이사 1,11-17; 예레 7). 예언자들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형식적 경신례 비판의 말씀들을 간과할 수 없다. 예언자들에 의하면 형식적 경신례는 사회불의와 무관하지가 않다(이사 1,11-18; 호세 6,1-6; 아모 5,21-24).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국가형성에 기초가 되어 있던 이스라엘이라는 사회에서 야훼 신앙이 형식적일 뿐이고, 백성들이 갖가지 죄악을 일삼으면서도 양심의 가책마저 받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환경에서는 속죄제사를 비롯한 많은 제사들은 사람들의 양심만 무디게 하는나쁜 결과를 더 가져오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7. ‘가나안 땅 정복 이야기와 관련된 잔인함의 문제

 

성서를 통독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적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는 잔인함이다. 이스라엘 백성(인간)잔인함도 문제가 되지만, 적어도 쓰여져 있는 대로만 보면, 때때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잔인한행동을 지시하는 것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이런 문헌들은 구약성서에서 주로, 이른바 신명기계 역사서(신명기의 정신 속에서 편집된 역사서: 여호수아서, 판관기, 사무엘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라고 불리는 문헌들에 집중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가나안 땅 점유 과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여호수아서 1-12장에 집중되어 있다.

 

잔인한 하느님이라는 인상을 주는 문헌들의 예:

여기서는 이른바 절멸(絶滅)(히브리어로 헤렘םרח)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기본 문헌은 신명 7,1-6; 20,10-18이다. 이 본문들 안에는 전멸시켜야 한다.불쌍히 여기지도 말라(신명 7,2)는 말이 명시적으로 나온다. 가나안의 성읍들의 경우에는 남녀노소 숨쉬는 것 모두를 전멸시켜야 한다(특히 16-17)고 되어 있다. 신명기계 역사서에서 절멸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다음 본문(문헌)들은, 위에 언급한 신명기의 전멸(םרח)법을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호 6; 7-8; 1028-43; 11; 민수 21,35; 1사무 15(사울이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아말렉 왕을 살려주고 전리품을 취했다는 것 때문에 사무엘 예언자로부터 배척을 받는다는 이야기).

 

위의 본문들에 관하여 좀 더 언급하겠다. 예리고 성을 점령한 후 이스라엘은 예리고 성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소건 양이건 나귀건 모조리 칼로 쳐 없애버렸다.”(여호 6,21). 여호수아서 7장과 8장은 아이성 공략 때, ‘아간이 전리품 중에서 일부[좋은 옷 한 벌과 은과 금덩어리 하나]를 보고 욕심이 나 가진 일 때문에 공격에 실패했다고 판단... 그를 색출해 그와 그의 일족을 불사르기도 하고 돌로 쳐죽이기도 하였다(여호 7,25) 그리고 8장에서는 다시 아이 성을 공략해 아이 주님을 몰살시켰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더욱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야기의 어투가 그렇게 잔인하게 한 행동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어투라는 점이다(특히 20-26절 참조).

1028-43(남부 가나안 성읍들의 점령 이야기)11(가나안 북방 성읍들의 점령이야기)에는 짤막짤막한 보고의 끝에는 “(숨쉬는 것이면) 하나도 살려두지 않고 해치웠다[죽였다]”라는 말 또는 이렇게 야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쓸어버렸다라는 말이 후렴처럼 나온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였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음을 드러내 준다. 민수 21장에 나오는 동부 요르단 지역 점령 이야기도 다음과 같이 전멸(절멸,‘헤렘’)법에 관한 언급으로 마친다: “그들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고 쳐죽였다. 그리고 그의 땅을 차지하였다.”(민수 21,35).

 

이런 문헌들을 아무런 여과 작업 없이 (무비판적으로)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이는 해석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우선, 근본적인 하느님 (神觀)이 문제가 된다. 이런 본문들을 구약성서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보지 않고 단편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이 갖게 되는 하느님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무서운 하느님이 될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은 윤리적 계명뿐 아니라 종교의식적인 규정까지 포함하여 계명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어김없이 무서운 벌을 내리시는 하느님(‘보복하시려는 하느님’)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하느님 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개인, 사회, 단체)에 대하여도 신앙의 이름으로 잔인함을 요구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는 데에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벌어진 종교전쟁들의 잔혹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때로는 집단적 탐욕이 종교적 가면 또는 의로운 전쟁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구약성서의 절멸법 이해의 시도

1) ‘절멸법의 원래 의도는 전리품에 대한 탐욕(전쟁에서 어떤 이들을 취하려는 욕심)을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예컨대 여호수아서 7장과 8장은 아이성 공략 때, ‘아간이 전리품 중에서 좋은 옷 한 벌과 은과 금덩어리 하나를 보고 욕심이 나 가진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이 화근이 된다.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으로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 절멸 이야기들의 기본 의도이다.

2) 실제 역사는 달랐다. 절멸법 시행에 관한 위의 문헌들이 있지만, ‘가나안 점유때의 실제 역사는 특히 여호 1-11장이 주는 일사불란하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점령해 간 것 같은인상과는 무척 다른 것이었다. 이 점은 판관기 1(특히 17-35)을 면밀하게 읽어보면 차이가 난다. 판관기 1장의 기록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차지하지 못한 땅이 무척 많이 있었다. 판관기는 물론, 여호수아서 자체도 전체적으로 종합 분석해 보면, 가나안의 모든 땅이 점령된 것도 아니었고, 또 그렇게 절멸하는전쟁의 수단으로만 점령했던 것도 아니었다. 초기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지 않던 산악지방과 광야 변두리 지방에 평화롭게 들어가 살기도 하고, 여호수아서 9장이 보여주듯이 평화 조약을 통하여 땅을 차지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물론 생존장소의 확보를 위한 치열한 전투가 없었을 리 만무하다.

3) 신명기계 역사서는 실제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것(보도)이 아니라, 고대의 전승자료들을 신명기적 신학을 기준으로 삼아 편찬한 결과물이다. 역사평가 기준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신명기계 역사서의 역사평가 기준은 하느님 말씀에의 순종여부이다. 신명기계 역사서 편집자들의 기본 판단에 의하면, 이스라엘(유다)의 패망 원인은 주님의 토라에 대한 계속되는 불충실에 있었다.

4) ‘잔인한 하느님의 인상을 주는 자료들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되는 것은,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각 문헌이 가지고 있는 문학양식(문학유형)에 유의해야 한다는 성서해석 원칙이다. 이 원칙은 계시헌장에서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참조: 계시헌장 12). ()는 시로써 해석해야지, 시를 마치 신문기자의 사건보도처럼 해석하면 안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유에 관한 고대의 전승들을 편집해 놓은 역사서술을 다루면서, 더구나 적대자들을 몰살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까지,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거기에서 후대의 신앙인들을 위한 어떤 모범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 방법이다. ‘역사기록역사기록으로 담담하게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역사 기록은 그 기록에 담긴 내용을 살았던 한 시대의 사회상, 인간상을 담아내고 있다. ‘절멸의 이야기는 그런 잔인했던 인간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성서의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5) ‘잔인한 하느님의 인상을 주는 자료들을 보면서, 우리는 계시의 발전과정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하여, 그들의 고난에 찬 역사의 과정을 통해 하느님께서 계시하시는 것을 계속 깨달아가야 했다. 예컨대 유일신 신앙도 이스라엘에서 확고한 신앙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을 거쳐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 신앙을 전하려고 노력해야 했던 것이었다. 이는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 우상숭배의 풍조 속에서 야훼 유일신 신앙을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확고하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야 했는지 그 역사적 사실만 보아도 분명하다(참조: 1열왕 17-19).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당연한 신앙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후의 생명에 대한 믿음,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도 구약성서 후기에 가서야 비로소 드러난 것이다. 교회가 늘 강조하여 가르쳐 왔듯이 계시의 완성이자 중심은 그리스도이다(참조: 계시헌장 2, 3, 4, 15, 16).

그리고 잔인한 하느님이라는 인상을 주는 문헌들은 구약성서의 큰 흐름에서 볼 때, 역사의 한 과정에 있었던 일이다. ‘가나안 땅 점유라는 역사의 한 단계에서 있었던 역사적 자료 가운데 일부분이다. 역사의 과정 중에 있었던 일시적인 판단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6) 이 논문의 앞에서 길게 논술하였듯이, 구약성서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면면히 흐르면서 계시된 내용, 즉 구약성서의 중심흐름에 의하면,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신 분이시다(출애 34,6; 시편 86,15; 103,8; 145,8).

이스라엘이 그들이 고난에 찬 역사에서 계시로 깨달은 하느님은 그들만을 위한 하느님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만 자비로우시고’, 이스라엘의 편만 드시고, 다른 민족들을 적대하시는 하느님이 아니었다. 이런 점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준엄한 심판의 신탁들이 잘 보여준다. 이 논문에서도 창세기를 다루면서 분명히 밝혔듯이, 그들의 하느님은 천지와 만민족의 창조주 하느님으로서 만민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참조: 창세 12,3). 이스라엘은 바로 이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도구가 될 사명을 띠고 있었다.

 

8. 복수 및 저주 시편에 나타난 증오와 잔인함의 문제

 

바로 앞에서 다룬가나안 땅 정복 이야기와 관련된 잔인함의 문제를 다루다 보면 자연스럽게 복수와 저주시편의 문제가 나오게 된다.

해당되는 문헌들: 시편 69[68], 23-29; 109[108]; 137[136],7-9; 139[138],19-22. 예레미야의 고백록중에서 예레 12,3-4; 15,15; 20,12; 18,21이하.

 

이해의 시도

1) 복수와 저주시편(또는 원수에 대한 처벌을 기원하는 시편)에서 간청하는 사람은 많은 경우, (억울하게) 박해받고, 굴욕당한 사람()을 대변한다.

예례미야 예언자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 고난을 많이 받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있던 상황에서 백성들과 고난과 갈등을 함께 겪었던 사람이었다.

2) 이런 시편의 작가가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은 공정한 징벌이다. 그것을 솔직히 바라고 그 원의를 솔직히 피력하는 것이다. 공의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세워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그 증오심, 분함, 원통함에 함몰하지 않고 끝까지 하느님 앞에 버티며 그분을 향해 (비록 격렬한 표현이지만) 말씀을 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절규 자체가 진실한 기도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한 일종의 신음소리라고 볼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절규가 그들(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기도일 때가 있다. 이 점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경우에 잘 해당된다.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던 그의 역사를 독자들이 비교적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2)와 긴밀히 연결된 것이지만, 자기 자신이 직접 복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느님께 징벌해 주실 것을 청하는 것이다(참조: 신명 32,25; 로마 12,19). 원수들이 정의의 하느님께 승복하고 그분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다.

4) 중요한 점 한가지는 사후의 생명에 대한 믿음은 구약시대 후기에 가서야(마카베오 후서; 지혜서) 뚜렷해졌다는 점이다. 사후의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정의가 이루어지려면, 자신들이 죽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절박감이 컸었다.

5) 복수와 저주 시편은 후대 신앙인 독자들에게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의 고통[고뇌]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 준다. 그들의 절망적인 외침들, 어떻게도 해볼 도리가 없는 무력한 자들의 처지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준다. 이것은 동시에 이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악한 상황, 불의한 구조를 직시하도록 요청하며, 그런 잘못된 상황을 하느님께 대한 근본적인 믿음 속에서 극복해 갈 사명[책임감]을 갖도록 일깨워준다.

6)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구체적 인물(단체)를 두고 저주와 복수를 하느님께 빌어서는 안된다(예수의 가르침: ‘원수 사랑’, ‘용서’). 그러나 정의가 실현되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또 실생활에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9. ‘폭력의 길또는 전쟁에 대하여 비판적인 구약성서의 문헌들

 

1) 경전형성사적 측면에서 본 고찰 한 가지: 사실, 구약의 경전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모세오경이라는 틀에서 잔인한 정복 이야기가 나오는 여호수아서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눈여겨볼 만한 현상이다. 이스라엘의 신앙이해에서 모세오경이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해 보면 이 현상은 매우 고무적이다.

2) 요나서의 예: 구약성서 안에서 폭력과 보복의 태도를 극복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헌은 아마 요나서일 것이다. ‘요나에언자에게는 자기가 고집하던 폭력/ 보복의 길을 버리고, 하느님이 지시하시는 생명의 길’, 자비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 학살을 자행하고 갖은 몹쓸 짓을 행한 니느웨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것을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그는 그 하느님의 뜻을 피해 멀리 멀리 도망까지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오리까.”라는 시편 139[138],7의 말씀처럼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도망갈 수가 없었다. 결국 하느님께 붙잡혀 돌아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증오가 얼마나 맹목적이 되고, 폭력적이 될 수 있는지 요나서는 잘 보여준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컸던지, 그는 무죄한 어린이들이 죽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니느웨 모두가 하느님의 벌을 받아 망하기를 바란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예언자가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요나서는 에즈라-느헤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는 배타적 민족주의, 국수주의 특히 외국인에 대한 맹목적 증오에 대한 반발의 표현이다. 맹목적이며 폭력적인 증오와 보복의 경향을 경고하는 뜻은,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하시는 다음 말씀에 잘 드러나 있다: “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데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가 밤 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와 하느냐? 이 니느웨에는 앞 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 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요나 4,10-11) (타민족들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종용하는 룻기도 참조).

3) () 왕정적 기사: 왕정 도입과정(1사무 8-12)안에서 보이는 반왕정적 이야기들(예컨대 1사무 8,10-18의 사무엘의 연설) 자체를 전쟁에 대한 비판적 문헌으로 볼 수 있는지 아닌지는 자체가 의문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반왕정적 기사가 국가에 의해 행해지는 구조적 폭력을 경계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언자적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

4) 예언자들의 폭력에 대한 고발. 예언자들의 경고 신탁(信託)들 중에는 상당 분량의 이방인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곧 이어서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가 길게 이어진다. 1열왕 19,1-18에 나오는 엘리야 예언자의 소명위기와 호렙산 순례이야기도 넓게 보면 폭력적 방법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담고 있다.

5) 그러나 전사이신 하느님 상은 바빌론 군대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587의 사건 이후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6) 의 절규는 사실, 무죄한 의인에게 이유 없는 고통을 허용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절규이며, 이는 바로 잔인한 것 같은하느님에 대한 절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7) 역대기의 예: ‘폭력의 길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역대기에서도 볼 수 있다. 역대기 안에는 가나안 땅의 군사적 정복 이야기 전체가 생략되어 있다! 그리고 열왕기에서와는 달리 다윗에 관한 기록 중에서 다윗의 잔인한 행동에 관한 모습은 다 자취를 감춘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없다! 히브리 성서(마지막 권은 역대기)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 믿는 하느님이며 동시에 유다 백성의 하느님이신 보편적 하느님을 부르는 것으로 끝난다. 이 보편적 하느님은 재건된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평화의 사건을 약속한다(2역대 36,21).

 

10. 폭력이 필요 없는 이상사회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왕국이 완전히 망한 후 바빌론 유배를 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주권이 없는 백성으로 계속 이민족들의 지배를 받으며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오랜 세월의 고통을 겪으면서 그들은 인간의 폭력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하느님께서 세워주시기를 고대했다. 이 사회에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 민족들도 참여한다. 이런 희망을 보여주는 문헌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사 2,1-5; 미가 4,1-4; 이사 11,6-9; 65,21-22; 65,29; 즈가 8,4-8. 이 문헌들은 다가올 메시아 시대의 평화를 묘사하는데, 창세기 1-2장에 묘사된 창조 때의 평화와 조화를 연상시킨다: “늑대가 새끼양과 어울리고, 표범이 수염소와 함께 뒹굴고, 새끼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으리니,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젖먹이가 살모사의 굴에서 장난하고, 나의 거룩한 산 어디를 가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 바다에 물이 넘실거리듯 땅에는 야훼를 아는 지식이 넘치리라.”(이사 11,6-9).

이런 배경 속에서 예레미야는 새로운 계약의 약속을 말한다. 예레 31,33이하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그런데 이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삶은 하느님이 기적적으로 새로운 마음을 만드신 때에만 가능하다.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에제 36,26. 시편 51(50),12 참조: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롭게 하소서.”)

 

비폭력적인 메시아에 대한 희망: 고통스러운 세월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다윗 왕과 같은 왕을 고대하는 전통적 군왕적 메시아가 아닌, 비폭력적 메시아에 대한 희망도 갖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즈가 9,9-10에 나온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울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 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 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화를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메시아가 백성에게 전하는 것은 평화이다.

 

고통받는 야훼님의 종’:

폭력의 길생명의 길에 관한 주제를 다루면서 마지막으로 꼭 다루어야 할 것은 제2이사야서에 나오는 고통받는 야훼님의 종의 모습이다. 이 종은 폭력을 행사하기는커녕, 백성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고통을 받으며 자기 몸을 내어 줌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백성을 구속한다(참조: 특히 넷째 노래 이사 52,13-53,12). 야훼님의 종의 임무는 뭇 민족에게 공정(히브리어 미쉬파트’; 공동번역에는 인생길’)을 펴나가는 것인데, 그가 공정을 펴나가는 방법도 폭력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 대표적 예로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갈대가 부러졌다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한다.”(이사 42,2-3).

앞에서 필자는 구약성서의 역사는 폭력의 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생명의 길을 찾아 나서려고 부단히 애를 쓴 역사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야훼님의 종 모습이 성서신학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심용섭 신부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에집트에서 탈출하여 귀중한 자유 곧 생명을 획득한 후 이집트에서 경험했던 파라오 중심의 국가체제와는 달리, 전체를 통괄하는 지도자가 없는 농업 부족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웃 민족을 모방하여 곧 국가체제를 확립하였고 각종 조직을 통해 자유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다른 체험 없이, 출애굽의 체험을 통한 야훼의 유일성의 이념과 이웃과의 폭력전쟁 갈등을 통한 체험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이런 통념들을 수용하는 전사[戰士]로서의 야훼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이 원하던 바는 아니었다. 결국 실패하였고 귀양후 전과는 달리 예루살렘 중심의 신정소왕국(神政小王國) 형태로 다른 사회를 건설하려했지만 역시 좌절되었다. 그러나 고통과 억압을 체험하였던 귀양 후부터 미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그 대표적인 예가 2이사야서에 나오는 야훼의 종의 모습이다.”

 

구약성서에 자취를 남긴 구약성서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긴 고난의 역사를 통하여 도달한 하느님의 뜻(계시),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만백성을 제압시키는 메시아 모습이 아니라, 주인 뜻에 죽을 때까지 순종하는 어린양처럼, 많은 사람들을 속량’(贖良)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며 갖은 모욕과 고통을 받는 야훼님의 종의 약한 모습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의 모습이 아니라, 남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마저 내어놓은 약한 모습을 통해서 주어진 것이다! ‘예수의 모습은 이런 배경에서 보면 구약의 완성이다! 여기에 대하여는 . 신약성서를 통해서 본 생명의 길을 다루면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 신약성서를 통해서 본 생명의 길

 

1.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생명의 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예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 , 생명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이르는 생명의 길이다. 그리고 이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은 바로 사랑과 섬김의 길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 여러분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내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4; 참조: 15,12). 이 구절에서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이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사랑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 주시는 태도에서 잘 드러나며(요한 13,1-17), 이런 사랑으로 섬기는 태도의 절정은 당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시는 데에 나타난다(요한 15,13 참조).

 

2. 공관 복음서들에 나타난 생명의 길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섬기는 사랑의 가르침은 공관복음서들에서도 매우 강조되는 것이다.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최고계명으로 표현되어 있고 서로 섬기라는 가르침은 마르 10,42-45와 그 병행구절(마태 20,24-28; 루가 22,24-27)에 표현되어 있다. 최고계명에 관한 대담은 공관복음서의 세 복음서에 다 나오는데(마르 12,28-34; 마태 22,34-40; 루가 10,25-28), 루가복음서에서는 첫째 계명’, ‘둘째 계명의 구분이 없다. 그러니 사랑의 이중계명이라는 표현은 루가복음서의 경우에 직접 해당된다. 루가복음서에서는 바로 이어서 루가 10,29-37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가 나오는데, 이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설명하는 예화이다. 그런데 루가복음서에서는 최고계명에 대한 질문이 다음과 같이 영생(永生) 얻기 위한 질문으로 표현되어 있다.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루가 10,25). 이렇게 볼 때 최고계명’, 또는 사랑의 이중계명은 이번성서사도직 협의회 11차 총회/세미나의 주제인 생명의 길이라는 주제와 잘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루가복음서의 표현을 따른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바로 사랑의 이중계명을 지키는 길이다.

서로 섬기라는 가르침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음 말씀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백성들을 다스린다는 사람들은 엄하게 지배하고 그 높은 사람들은 백성들을 억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 가운데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습니다.”(마르 10,42-45)

 

위의 가르침(‘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라’)이 어떤 이유에서 예수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인지에 대하여 간략히 설명하겠다. 우선 위의 말씀은 공관 세 복음서에 다 나온다(병행 대목들: 마태 20,24-28; 루가 22,24-27). 그리고 같은 정신이 위에서 본 요한복음서 13장의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예수의 모습과 그 다음에 오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섬김의 정신은 필립 2,6-11의 그리스도 찬가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자기비허와 그런 겸허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 존중하며 살라는(필립 2,1-5)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도 중심 계명으로 나온다.

 

마르 10,42-45가 마르코 복음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더 나아가, ‘서로 섬기라는 가르침은 마르코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구조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마르코 복음서의 구조에 따르면, 마르코복음서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을 분기점으로 삼아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분된다. 그런데 후반부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 그 중의 첫 부분인 8,27-10,52는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및 부활에 대한 예고(8,31; 9,30-31; 10,32-34)가 그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매 번 예고 다음에는 그러한 (수난, 죽음, 부활)예고를 하는 스승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엉뚱한 태도가 언급된다(8,32-33; 9,32-34; 10,35-50; 10,38-45). 그러므로,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마르 10,38-45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의 예고와 관련되어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제일 마지막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 다음에는 예수께서 예리고를 거쳐 결정적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일만 남아 있다.) 그리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은 둘째 가르침(9,35-50)에도 있던 것인데 10,42-45에서 다시 반복된다. 그 만큼 섬기라는 내용이 강조된 것이다. 그리고 끝 구절인 10,45에는 예수님의 지상생활 전체의 사명이 제시되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을 총 종합하면서 바로 자신의 삶 전체를 섬김”, 그것도 당신의 목숨을 대신 내어 놓으실 정도의 섬김으로 정의하신다. 그리고 제자들도 이러한 스승의 삶을 뒤따라(추종하여) 살아야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3. ‘폭력의 길을 버리고 생명을 길을 선택하라는 요청의 예들

 

마르 3,1-6에는 안식일 논쟁의 하나로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치유한일화가 전해지는데, 반대자들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하시는 예수의 다음 말씀은 생명의 선택을 요청하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야 됩니까, 악한 일을 해야 됩니까? 목숨을 구해야 됩니까, 죽여야 됩니까?”(마르 3,4). 이 단락의 끝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의미심장한 다음의 말로 끝난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밖으로 나가서 즉시 헤로데의 도당들과 함께 예수에 대한 모의를 하여 그분을 없애버리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세상 조류에 거슬러 생명을 선택하는길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예수는 위의 생명 선택의 길을 끝까지 가셔서 당신 목숨을 내어 주시기까지 하셨다. 당신의 제자들도 그 길을 따라오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께서 사셨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생명의 길은 다음의 당신 말씀처럼 역설적이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그리고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마르 8,35)

폭력을 거부하는 다른 예들: 루가 9,54-55에 의하면 예수의 일행을 사마리아 사람들 일부가 맞아들이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말씀드린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리어 저들을 태워 버리도록 저희가 말해 볼까요그러나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를 예수께서는 나무라셨다; 마태 13,24-30. 가라지 비유에 나오는 종들이 주인에게 가서 가서 가라지들을 뽑아 버릴 까요?”하고 말하자 주인은 그 요청을 거절한다; 예수께서 붙잡히실 때, 베드로 사도가 칼을 뽑아 대제관의 종의 귀를 후려쳐서 베어버리자,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 칼을 칼집에 넣으시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요한 18,10-11); 폭력을 거부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마르 10,42-45와 산상설교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절정의 표현은 마태 5,38-42에 나오는 보복을 포기하라는 내용의 말과 바로 이어서 마태 5,43-48에 나오는 원수사랑의 가르침이다. 위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사는 것이 아마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길(마르 8,34; 마태 16,24; 루가 9,23)일 것이다. 루가복음서 15장의 잃어버린 아들을 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도 넓게 보면, ‘원수 사랑보복포기를 통하여 생명의 길에 이르라는 예수의 가르침의 한 표현이다.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은 정의의 보복을 요구하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품으라고 초대한다. ‘분노보복이 아니라 자비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루가 10,29-37)를 통하여,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네 이웃사람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미워하며 살던 당대의 유다인 청중들에게, 그 편협한 마음(증오의 마음)을 열고 미워하던 사람(‘원수’)이웃으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한다. ‘폭력의 씨앗인 미움을 버리고 사랑의 길을 가라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바로 그 길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비유는 쓰러져 죽어가는 이웃을 못본 체하며 거행하는 하느님 공경이 온전할 리 없다고 강조한다. 이런 가르침은 내가 바라는 것은 사랑(자애)이지 제물이 아니다(호세 6,6; 참조: 마태 9,13; 12,7; 마르 12,33)라는 예언서의 정신을 잇고 있는 것이다.

 

4. 사도 바오로의 생명이해와 생명의 길

 

사도 바오로의 생명이해는 바오로의 선포의 핵심내용인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1고린 15,45)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류를 위하여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었다(로마 5,17.18.21; 1고린 15,22.45). 그리고 부활하시어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 살아 계신다(로마 8,10-11 참조). 그래서 바오로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생명은 그들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그들 안에 그 생명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이고,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립 1,21); “나는 살아 있지만, 이미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지금 내가 육신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 2,20; 참조: 2고린 4,10.12).

이러한 생명이해에 비추어 볼 때, 바오로에게 있어서 생명에 이르는 길또는 생명에 머무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다. 그런데 바오로 서간에서 이 믿음은 사랑의 실천을 요구한다(참조: 1데살 1,3에 나오는 믿음의 일이라는 표현). 갈라 5,6에 의하면 믿음은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힘을 낸다(참조: ‘사랑으로 힘을 내는 믿음이라는 표현).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믿음의 일을 할 때, 순수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선사된(참조: 로마 5,5; 8,15; 갈라 3,2; 4,6) 성령을 통하여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는 성령에 따라사는 삶의 과정에서 이른바 []령의 열매(갈라 5,22-23: 사랑, 기쁨, 평화, 온유함 등)가 열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생명의 길이라는 주제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고린토 113장의 사랑의 찬가에서 묘사되는 사랑의 길일 것이다. 그런데 바오로가 말하는 신자들의 사랑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참조: 로마 8,35; 필립 2,7-8; 갈라 2,20),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로마 8,39)에 대한 응답의 차원을 갖고 있다. 필립비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를 통해 바오로는 예수께서 가셨던 사랑의 길은 또한 겸비의 길이었다고 말하며, 신자들도 바로 그분 그리스도께서 품고 사셨던 그 겸비의 마음을 지니고 살라고 권고한다.

 

5. ‘보복의 포기의 가르침 (마태 5,38-42)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하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마시오. 오히려 누가 당신의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편 뺨마저 돌려대시오.”(마태 5,38-39)

 

문맥: 마태오복음서 5-7장에 나오는 산상설교 가운데, 5,21-48에 나오는 이른바 반대명제(Antithese) 6개 가운데 다섯째가 나오는 대목이다. 마지막 여섯째가 원수들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마태 5,43-48)이다.

 

병행문 루가 6,29-39와의 비교: 마태오 복음서에서 다섯째와 여섯째 반대명제로 나오는 것이 루가복음서에서는 하나로 합쳐져 있고, 마태 5,41에 나오는 예(“누가 당신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시오.”)가 생략되어 있다. 루가복음서에서는 반대명제형식으로 되어 있지 않다. (, “(옛 사람들에게는) 라고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 마태 5,46-47의 예에 해당되는 부분이 루가복음서에서는 더 많은 예들이 들어 있다.

 

해설:

위의 다섯 번째의 반대명제가 나오는 대목은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관한 말씀이다. 예수가 주시는 답은 한 마디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내용의 말씀이고, 이런 가르침은 다음의 마지막 (여섯째) 반대명제인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에서 더욱 강조된다.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예수께서 반대명제들을 시작하기 전에 하셨던 말씀 곧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더 큰 의로움(마태 5,20)의 삶을 살게 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첫 구절에 나오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씀은 구약성서에도 몇 군데에 나오는 말씀(출애 21,24; 레위 24,20; 신명 19,21)인데, 이 말씀은 근동의 옛 법전(예컨대 함무라비[기원전 1792-1950] 법전)과 많은 민족들에게도 알려져 있던 법령을 라틴어로는 복수를 뜻하는 talio라는 단어를 써서 lex talionis 복수법이라고 불린다. 우리말로는 남에게 해를 입힌 똑 같은 형태의 벌을 내리는 법이라고 해서 동해형법(同害刑法)이라고 번역되거나, 또는 해를 끼친 동일한 방법으로 복수하는 법이라고 하여 同態復讐法이라고 번역된다. 그런데 이 법의 원래의 취지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복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복수를 억제하여, 남에게 끼친 해와 받는 벌이 균형을 잡도록 하는데 있다고 한다. 이 점은 사람들은 흔히 감정에 치우쳐 받은 해보다도 훨씬 더 많은 복수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해가 잘되는 조치이다.

그런데 예수는 받은 만큼만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복수할 생각을 말라고 가르치신다.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것을 강조하시기 위해 무려 네 가지 예를 드신다.

그 첫째 예는 오른편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다른 뺨마저 돌려 대라는 말씀인데, 심한 모욕을 당하는 경우를 예로 든 것이다. 더구나 오른편 뺨을 때린다는 것은 때리는 사람이 왼손잡이가 아니라면, 오른 손 등으로 뺨을 때린다는 것인데, 이는 더욱 더 모욕적인 행위라고 한다. 이런 문제 때문인지 루가 복음서의 경우에는 오른 편이라는 말이 없이 그냥 뺨을 때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마저 내주시오라는 두 번째 예의 말씀은 요즘과 같이 옷이 흔한 것이 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옷이 매우 귀했던 시절에는 비록 허름한 옷이라도 도대체 을 걸친다는 것 자체도 어려웠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예컨대 다음에 나오는 신명 24,13(참조 출애 22,25; 잠언 20,16)을 보면 을 담보물로 잡는 경우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 사람이 지극히 가난한 자일 경우 너희는 그가 잡힌 담보물을 덮고 잘 수 있는 담요의 역할도 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예 즉 누가 당신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시오라는 말은 로마의 점령지였던 당시의 상황에서 흔히 있던 로마의 군인들이나 관리들이 민간인들을 강제징발 하거나 또는 강제 잡역을 시키던 관행과 관련이 있는 말씀이다. 예컨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로마 군인들이 지나 가던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게 했던 일(마태 27,32)도 그 하나의 예이다. 여기에 나오는 예들이 단수 2인칭 형식 즉 당신에게 누가 무엇 무엇을 하면, 이렇게 이렇게 하시오.”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해서 이 말씀을 개인적 관계에만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이 말씀들은 적대적일 뿐 아니라, 폭력 예컨대 박해까지 감행하는 주변세계 속에 있는 예수의 제자 공동체를 염두에 둔 말씀이다. 로마 12,17에서 사도 바오로도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시오.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해 줄 생각을 품으시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예수의 산상설교에 대한 훌륭한 해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네 번째의 예는 앞의 예들과는 달리 남에게서 악행을 당하는 경우가 아니라, 도움의 요청을 받는 경우인데, 적극적으로 도우라고 강조하신다.

 

그러나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위의 모든 예들을 문자 그대로 이행해야 하는 법령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죄를 짓게 하는 눈과 손을 빼어 버리거나 잘라 버리라는 말씀(마태 5,29.30)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하는 법령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과 비슷하다. 예컨대 요한복음 18,22이하에 의하면 예수는 대제관의 집에서 심문을 받는 도중 어느 하인이 당신에게 손찌검을 했을 때, 맞고 가만히 계시지만 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항의를 하셨다: “만일 내가 잘못했다면 그 증거를 대시오. 그러나 내가 올바로 말했다면 왜 나를 때립니까?” 물론 이 요한 복음서에서도 예수는 폭력을 사용하며 저항을 하지는 않으셨다. 위에 열거된 예들을 통해 예수는 결코 소극적인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약자들의 윤리”, 또는 겁쟁이들의 윤리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적극적인 행동을 요청한다. 단지 뺨을 맞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뺨을 갖다 대며, 속옷 뿐 아니라 겉옷도 내주며, 강제로 요구된 것보다 더 걸어주며, 청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는 적극적인 행동을 요청한다. 이 적극적인 행동들은 이미 다음에 나오는 원수도 사랑하라는 정신을 품고 있으며 거기서 완성된다고도 볼 수 있다.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는 것,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6. ‘원수사랑의 가르침 (마태 5,43-48)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분은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마태 5,44-45).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위의 대목은 마태오복음서 5-7장에 나오는 산상설교에 있는 이른바 여섯 가지 반대명제들 중에서 제일 마지막 부분이다. 이 부분은 앞에 나온 반대명제들을 집약하여 거기에 배어 있는 정신을 최고조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시작 말씀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도 두 번째 최고계명으로 인용하시는 레위 19,18에 나오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계명은 구약성서에 어느 곳에도,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나오지 아니한다. 그러나 원수들을 미워하라는 계명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구약성서에는 원수들에 대한 미움이 여러 곳에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른 바 복수와 저주의 시편들이다. 그 대표적인 예는 시편 109편과 137,7-9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서 12,3-4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수들에 대한 증오가 표현된 말씀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들을 고려하며 신중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특히 그러한 말씀들이 터져 나오는 역사적 환경들을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고려에도 불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 당시 유다인들의 일반적 태도에 비하여 대단히 놀라운 말씀이었다. 당대의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서를 근거로 바로 죄인들과 악인들을 미워하시는 하느님 때문에라도 (앞에 언급된 복수와 저주 시편 외에도, 호세 9,15; 시편 5,5-6; 11,5; 참조 쿰란 1 QS 1,9-11) 악행을 저지르는 악인들을 미워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반대명제를 말씀하신다. 원수들의 멸망을 기원하는 대신에, 예수님은 원수들을 위하여 진정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아니, 그들을 사랑하라고까지 말씀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이 어떠한 동기에서 원수들을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동기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의 자비와 선하심을 체험하고 사는 사람들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의 끝없는 선하심과 자비를 드러내 주는 것이 그분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표지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되는 끝없는 자비를 보이시는 하느님의 뜻이 바로 예수님을 뒤따르려는 사람들의 행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뒤따르려는 사람들인 제자들을 행동할 때 자기 자신의 느낌과 원의에 따라 하거나, 또는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반응하는 식의 행위를 해서는 안되며,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뜻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이 원수사랑의 가르침은, 아무리 그것이 신앙적 우애라고 하더라도 끼리끼리의 사랑을 넘어서라고 요구한다는 것을 우리는 다음의 예수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무슨 보수를 받겠습니까?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여러분이 무엇을 더 낫게 한단 말입니까?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습니까?”(마태 5,46-47). 마태오 복음서의 이 부분에 해당되는 말씀 다음에 루가 복음사가는 여러 가지 예를 더 들고 있다(루가 6,34-35의 첨가 부분).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때로는 불쌍한 사람들을 진정한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미워하던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 것도 어려운데, 더구나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불가능하다고도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거의 초인간적인 사랑을 요청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요청하시는 것인가? 사실, 그리스도 신앙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사랑은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한 사랑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실행하지 못할 계명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할 힘도 성령을 통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원수들을 사랑해야 할 때, 또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려 할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시는 사랑의 힘으로 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그분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깊은 영적 기쁨이 아니라,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면, 그런 정의와 평화의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해 주는 가르침(안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인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성령을 받고 그 힘으로 변화된 사람들에 의해 실행될 수 있는 희망의 말씀이다.

우리는 인류의 역사 안에서, 때로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폭력의 악순환’(예컨대, 요즘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원수 갚음은 원수 갚음을 낳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폭력의 악순환에서 해방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분의 가르침에 의하면, 폭력의 악순환의 고리를 진정으로 끊는 길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을 선으로써 극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악을 선으로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라고까지 가르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원수사랑을 말씀으로 가르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삶 전체, 심지어 당신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보여 주셨다. 그분은 우리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선하심을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시며 보여주신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심으로써 인류를 노예처럼 얽어매고 있는 그 악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시고 구속(救贖)하셨다. 예수님을 뒤따라야 할 제자들도 그분으로부터 원수사랑까지 포함하는 사랑으로죄악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7. 결론: 신약성서를 통해서 본 생명의 길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길이다(참조 요한 14,6). 그런데 생명에 이르려면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가신 길을 뒤따라야(추종) 하는데, 예수께서 가신 길(따라서, 예수 추종의 길)폭력의 길과는 정 반대의 길이었다. 그 길은 한 마디로 사랑으로 섬기는 길이었다. 사실,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남기신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는 데에 있다(참조: 요한 13장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과 새 계명의 말씀, 마르 10,42-45와 그 병행대목에 나오는 가르침; 필립 2,5-11). 이런 예수의 가르침은 산상설교에 나오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과, ‘보복과 폭력적 대응의 포기(마태 5,39-42)의 관한 말씀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그런데 예수는 위와 같이 제자들에게 가르쳤을 뿐 아니라, 당신 목숨까지 내놓으시면서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가신 길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시며’,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삶이었다. 자기이익을 위하여, 많은 경우에, 폭력을 사용하면서까지 남을 희생제물로 만드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길이었다. 그분은 다른 동물을 사나운 힘으로 잡아먹는 사자처럼 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자들에게 잡아 먹히는 어린 양처럼사셨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린양처럼 자신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으셨다.(참조 이사 53,10; 요한 1,29.35 “하느님의 어린양”; 마르 10,45).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려는 제자들, 그리고 그를 믿는 신앙인들은 예수의 뜻에 따라, ‘폭력이 기초가 되어 있는 사회가 아니라, (믿음과) 사랑섬김이 기초가 되어 있는 사는 공동체를 이루어 세상의 빛소금의 역할을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참조: 마태 5,13-16). 죄에 뒤엉켜 폭력의 악순환의 어둠 속에 빠져 노예처럼살고 있고, 그 속에서 멸망의 길로 달리고 있는 세상(인류)에게 희망의 빛을 비출 사명을 띠고 있다. 참조: “오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자!”(이사 2,5);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이사 60,1)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세속의 사회라면 몰라도, 신앙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부터 먼저, ‘폭력이 아니라, ‘믿음’, ‘사랑’, ‘용서’, ‘화해의 삶이 살아 있어서 하느님의 영광이 빛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곳이 먼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핵심 가르침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하느님의 자애와 정의가 체험되고 실천되는 장’,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는 그렇게 할 사명만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몸소 우리와 함께 하시며, 당신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고, 힘을 주신다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