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휴머니즘
성서의 휴머니즘
이영헌 신부
(광주가톨릭대학교 신약성서신학 교수)
1.머리말
휴머니즘은 프랑스 혁명 이후 특히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문학가들의 주요한 관심사였고, 시대와 상황에 적응하려는 신학과 철학에서도 많은 연구와 발전을 거듭해 온 주제들 가운데 하나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의 중세기가 비인간적이고 다만 신 중심이었다고 전제하고서 그리스도교의 휴머니즘을 오해하거나 인간과 하느님을 대립관계로 보고자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그리스도교에 의해 근본적으로 수호 및 앙양되어 온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인간을 존중하는 그리스도교의 휴머니즘에 대한 지나친 편견이나 오해는 대부분 교회제도에 대한 반발이나 일부 교직자들에 대한 불만에서 연유되었으리라 여겨진다. 기나긴 역사과정에서 일부 교직자들이나 교회제도의 영향으로 인해서 약한 사람들의 인간성이 무시당하는 불행한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휴머니즘을 올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근본바탕을 이루는 성서의 휴머니즘을 살펴봐야만 한다. 달리 말하자면, 성서의 휴머니즘을 분명히 파악하는 일은 그리스도교의 휴머니즘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길잡이가 된다. 또한 인간의 한계상황에 부딪친 부조리와 인간성 파괴의 위협 앞에서 신음하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그 소명도 일깨워 주고, 실추된 인간성 회복 및 구원된 인간의 전망도 아울러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성서의 휴머니즘에 관한 연구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더욱 절실하게 요청된다고 하겠다.
성서는 인간 구원의 역사 곧 구세사를 근본적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역사 가운데 하느님과 인간의 긴밀한 관계가 이야기된다. 또한 하느님이 누구신지 계시되고, 인간이 무엇인지도 시사된다. 따라서 성서의 휴머니즘은 당연히 구세사적인 맥락 안에서 살펴진다. 성서의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을 돌보고 동반하시며, 특히 방황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시고 당신 곁으로 부르신다(참조: 시편 8,5-7; 요한 3,16).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한(창세 1,26-27) 인간의 불충실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당신의 뜻을 유지하시는 데에 터를 두고서 신학적으로 언급된다(참조:「사목헌장」12-22항)
2.하느님의 창조행위에서 본 인간
창세기에 보도된 사제계 전승 창조설화(창세 1,1-2,4a)와 야훼계 전승 창조설화(창세 2,4b-25)는 서술묘사나 보도내용에 있어서 서로들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 보인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는 서로 일치를 이룬다. 하느님의 인간창조가 사제계 전승에서는 맨 나중에, 야훼계 전승에서는 맨 먼저 이루어진다. 이런 상반된 차이는 전승자들이 강조하려는 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게다. 즉 사제계 전승자는 우주 만물의 창조가 인간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데 반해서, 야훼계 전승자는 창조의 중심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전자의 경우 인간은 피라미드식으로 이루어진 창조행위의 정상을 장식하는 피조물이요, 후자의 경우 인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창조의 정상이 인간에게 이르러 완성된다거나 창조의 중심이 인간에 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을 중심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즉 우주만물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바로 그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선물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지상세계를 관리 보호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소명도 받은 셈이다(참조: 창세 2,15).
사실상 성서는 첫 장에서부터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피조물이라고 말함으로써(창세 1,26-27)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또한 그 품위를 높게 평가한다. 이 모습은 모든 인간에게 전달 될 수 있고(창세 5,1-3), 죄인 안에서까지도 남아 있을 수 있는 인간의 항구적인 선이요, 영원한 보배다. 또한 인간 역사의 온갖 재난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우선이어야 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결코 침해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창세 9,6). 따라서 하느님의 모습이 된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있어서 천부적인 유산이요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인식은 시편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인간이 무엇이옵니까? 당신께서 이토록 기억해 주시다니! 사람이 무엇이옵니까? 당신께서 이토록 돌보아 주시다니!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셨나이다”(시편 8,5-7). 또한 「사목헌장」에서도 이 사실을 재확인시켜 준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창조주를 알아 사랑할 수 있으며, 창조주로부터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만물을 다스리고 이용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사목헌장」12항).
이와 같이 성서는 인간이 하느님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하느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그 모습은 인간이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지향하고 하느님 대신에 세상만물을 다스리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림으로써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동시에 이런 인간 모습은 창조의 하느님을 세상만물과 인간을 돌보시는 구원의 하느님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근원적인 존엄성과 가치가 있고, 또한 창조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분리되지 않는 신학적인 근거도 있다. 특히 제2 이사야는 창조주 하느님과 구세주 하느님이 동일한 하느님이시라고 기리면서 노래한다(이사 40,12 이하; 44,3 이하).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또한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거리감도 깨달아야 한다. 모습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유사한 모상이지 그 모습의 원천과 동일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습이 원천과 동일하다고 할 때, 즉 인간이 피조물로서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하느님과 동일하다고 스스로 여길 때 타락하고야 만다. 첫 인류의 타락 역시 “너희도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라는 악마의 충동으로 인해 이루어졌던 것이다(창세 3,4-5.22-23). 이러한 무분별은 크나큰 죄악을 낳기 마련이다. 하느님께서 당신과 맞서려는 바빌론의 왕(이사 14,13-14)이나 신으로 자처한 띠로의 왕을 질책하신 말씀(에제 28,1-19)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주제는 인간이 세상만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위임받았다는 것을 뜻하고, 동시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잃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도 의미한다. 또한 하느님의 역사하심 안에서 하느님을 모방하고 하느님의 활동에 겸허한 응답을 해야 하는 윤리적인 동기나 의미도 배제되지 않는다(참조: 출애 20,10-11; 요한 5,17). 인간이 하느님을 지향하고 하느님께 대한 자신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곳에서 하느님의 모습이 명확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주제는 성서 안에서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하느님의 불멸성에 참여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다. 특히 영혼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지혜서는 인간이 영혼에 있어서 하느님의 모습이 된다는 것이다. 즉 영혼은 영적이요 불사불멸하기 때문에 영혼을 지닌 인간은 하느님의 불사불멸성에 참여하는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본성을 본 따서 인간을 만드셨다.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니 악마에게 편드는 자들이 죽음을 맛볼 것이다”(지혜 2,23-24).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적 표현과 표상을 빌려 그리스도를 우주 창조와 구원의 중보자로 찬양하는 찬가(골로 1,15-20)에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요 “모든 피조물의 맏이”라고 고백된다(골로 1,15; 참조: 2고린 4,4). 바울로는 모든 사람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아담의 범죄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대조시키면서(로마 5,12-21) 아담이 그리스도의 “원형”(로마 5,14; 참조: 1고린 15,45)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아담의 범죄가 초래한 죄와 죽음을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킨 메시아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이며 구원받는 새로운 인류의 머리다(참조: 1고린 15,45-48).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는 그리스도의 존재양식을 연관시켜 노래한 찬미가(필립 2,6-11)에서도 시사되어 있다. 아담은 자신을 들어 높이고자 자기가 지닌 하느님의 모습을 깨뜨려 버림으로써 낙원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으나(참조: 창세 1,26-3,24). 그리스도는 그와 반대로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양식(참조: 요한 1,1-2; 17,5), 곧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했기 때문에 높이 들어올림을 받고 인간의 구원을 이루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동등한 모습, 곧 하느님의 완전한 모습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주님이다(참조: 골로 3,10; 로마 8,29; 2고린 3,17-18). 따라서 인간은 그리스도와 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에 의해 “새로운 창조물”로서 하느님의 모습이 된다(2고린 5,17; 갈라 6,15; 참조: 1고린 15,49). 이 모습은 인간의 종말론적인 본질로서 하느님과의 근원적인 결속관계로 인해 이루어지는 존재론적인 변형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대화적인 존재”(Dialogwesen)가 되게 하고 하느님과의 대화적인 관계를 지속적으로 갖도록 하는 데 그 목적과 의의가 있다. 그러기에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엄성과 그 가치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성서는 이와 같이 하느님과의 근원적인 불가분의 결속 관계를 전제로 하는 휴머니즘을 내세운다(참조: 신명 14,1: 마르 10,8).
3.인간의 본질과 특성
히브리 성서는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인간의 본질과 특성을 지칭하기 위하여 nēfeš(갈망하는 인간), bāšār(몰락할 인간), rūaḥ(전권을 부여받은 인간), lēb 또는 lēbāb(이성적인 인간)등의 낱말을 문맥에 따라 특징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전통교리에서 말하는 영혼과 육신의 개념은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사실상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구분하여 영혼만을 귀중하게 여겨왔던 시간은 고대 희랍의 이원론 사상으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이었다(참조: 지혜 8,19-20; 9,15; 2고린 5,6; 필립 1,23). 특히 오르페우스와 플라톤 학파는 인간을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으로 보았던 것이다.
위 용어들 가운데 우선 nēfeš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대목(창세 2,7)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데, 개별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참조: 창세 12,5). Nēfeš는 본래 목구멍, 목을 뜻하는 말로서 욕구나 갈망, 영혼이나 생명 그리고 개별 인간을 가리키는 복잡한 의미로 히브리 성서에서는 사용된다. 즉 잔잔해질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을 나타내며(이사 5,14; 전도 6,7.9), 인간이 자기자신의 힘만으로는 살수가 없고(잠언 10,3),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것을 말해준다(시편 42,2-3). 달리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자기자신에게서 획득하거나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욕구를 통해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을 갈망하는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진정한 자아를 의식하고(시편 35,9-10; 103,1)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과정에 놓여져 살아 있는 구체적인 존재라고(시편 42,6.12; 43,5) 말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bāšār는 살아 있는 인간을 구성하는 외적인 질료 곧 살〔肉〕이나 신체를 주로 가리킨다. 그래서 인간의 몸 전체도 표현한다. bāšār도 nēfeš처럼 인간 그 자체를 지칭하지만 육체의 면을 중심으로 인간을 표현한 것이 특징적이다(참조: 창세 2,24). 그리하여 인간을 서로 연결시키는 일가 친척(창세 37,27; 느헤 5,5; 레위 18,6)이나 동료 인간 내지는 인류 전체(이사 40,5-6; 49,26; 시편 145,21)를 의미한다. 또한 인간의 생이 그 자체로서는 허약하고 몰락할 것이라는 특성도 부각시킨다(시편 56,5.12; 욥기 10,4). 특히 하느님의 능력과 대조시켜 인간능력의 한계를 묘사한다(예레 17,5.7; 2역대 32,8). 따라서 bāšār는 하느님의 생명력에만 의존해야 하는 인간(욥기 34,14-15.20), 자기 자체 안에서는 몰락하거나(창세 6,3; 시편 78,38-39) 죄악에도 빠지기 쉬운 허약한 인간 그 자체를 가리킨다(창세 6,12; 시편 65,3-4; 참조: 로마 7,5-18)
그런데 lēb 또는 lēbāb는 원래 마음이나 심장을 뜻하는 말로 bāšār와는 달리 살아 있는 인간의 내적인 면에 역점이 있다. 즉 인간의 감정과 욕망의 심리적인 면뿐만 아니라 지성과 사고의 이성적인 면 그리고 도덕과 양심의 윤리적인 면까지도 지칭한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가리키며,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도록 부름을 받은 실존자라는 사실도 강조한다(참조: 잠언 16,9; 시편 20,5; 22,7; 2역대 34,27). 인간이 하느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종속관계로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규정하는 가장 본질적인 개념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rūaḥ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의 손안에 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말해주기 때문이다.
Rūaḥ는 원래 바람, 입김, 숨 등을 뜻하는 말로서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를 지칭한다. 그런데 rūaḥ는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나와 인간에게 침투되어 들어가는 것으로서(창세 2,7; 에제 36,27; 37,6-10; 욥기 34,14-15) 신적인 힘이나 영, 생명력 그리고 통찰력이나 의지력 등을 가리킨다. 따라서 rūaḥ는 인간의 본질과 특성을 말하는 히브리 성서의 용어들 가운데 가장 신적이요, 가장 영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rūaḥ라는 성서적인 표현(창세 41,38; 민수 24,2; 호세 9,7; 이사 42,1)도 바로 이 점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이와 같이 히브리 성서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배제한 인간의 자립이다. 자존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 획득한 능력이나 전권도 부인한다(참조: 창세 1,26-27).
바울로도 인간이 하느님과 맺는 다양한 관계들을 서술하면서 sōma(몸), sarx(육), psychē(혼), pneuma(몸), kardia(마음), nous(정신)이라는 용어들을 복잡하게 사용한다. 물론 이 용어들은 인간의 여러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기보다는 인간 전체를 다만 여러 각도에서 관찰하고 묘사한다. Sōma는 여러 지체들로 구성된 인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을 지칭한다(1고린 12,12-26; 로마 12,4-5). 하지만 인간의 살과 피와 뼈만을 뜻하지는 않고, 전체적이고 통일된 복합체, 곧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인간을 구체적으로 가리킨다(필립 1,20; 로마 6,12-13). 이런 의미는 인간이 특히 어떤 행동의 주체나 대상일 경우 더욱 부각된다(1고린 9,27; 로마 8,13; 12,1) 바울로는 sōma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참조: 로마 6,6.12; 8,3.13; 필립 3,21). 이것은 인간이 죄나 육(sarx)와 같은 세력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로마 7,14.18.23; 8,3.13). 또한 바울로는 히브리 성서의 bāšār 용법을 반영하여 sōma를 sarx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1고린 6,16; 2고린 4,10; 참조: 갈라 4,13; 6,17). 이 경우 sarx는 물리적인 몸을 뜻한다. 하지만 sarx는 대부분 본성적으로 나약한 인간상을 가리킨다(로마 3,5; 6,19; 1고린 9,8). 즉 자연적이고 물리적이며 지상적인 인간의 나약성을 뜻한다(골로 3,5; 1고린 1,29; 로마 8,5.8). Sarx의 행실들은 온갖 악행들로서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게 한다고 바울로는 강조한다(갈라 5,19-21; 참조: 로마 7,18). 따라서 sarx는 한마디로 지상에 얽매인 세속적인 인간, 곧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있는 인간을 가리킨다. 이 개념은 pneuma의 영향을 받고 사는 영적인 인간과 커다란 대조를 이룬다(갈라 5,22-26; 1고린 2,10-16). 하느님의 pneuma 없이 사는 인간은 자기 이성에만 의존하여 세속적인 생각을 품고 사는 자라는 것이다(1고린 2,14).
Pneuma는 일반적으로 성삼위의 위격으로서 성령을 가리킨다. 하지만, 전체 인간의 한 단면을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1데살 5,23; 로마 8,16; 1고린 2,10-11). 이 경우 pneuma는 psychē와 거의 같은 뜻으로(필립 1,27; 2고린 12,18) 인식력과 의지력을 소유한 인간, 이런 능력으로 인해 하느님의 영을 받기에 특별히 적합한 구체적인 인간을 가리킨다. 이에 비해서 psychē는 다만 생동력과 의식이나 지식 및 의지력을 가진 살아있는 자연적이요 지상적인 인간을 지칭한다(1데살 2,8; 필립 2,30; 2고린 1,23; 12,15; 로마 11,3; 16,4). 바울로는 psychē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지만 sarx의 생명으로서 자기 이성에만 의존한 물질적인 인간을 가리킨다. 즉 하느님의 영에 따라 사는 영적인 인간과는 크게 구별된다. 그리고 nous는 인식하고 판단하는 주체로서 인간을 지칭한다. 이 용어는 인간이 지적으로 이해하고 계획하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1고린 1,10; 2,16; 로마 14,5). 또한 하느님께 관한 것을 알아낼 수 있는 인간의 능력도 가리킨다(로마 1,20; 7,23). Kadia도 nous와 거의 동일한 뜻으로 사용되는데, 살아 있는 인간의 자발적이고 정감적인 면에 역점이 있다(로마 1,24; 9,2; 1고린 4,5; 2고린 2,4; 7,3; 8,16). 그리하여 의심하기도 하고 믿기도 하는 인간의 마음(로마 10,6-10), 완고하고 뉘우칠 줄 모르는 인간의 마음(로마 2,5; 2고린 3,14), 또한 영적으로 굳건해질 수 있는 인간의 마음(1데살 3,13; 갈라 4,6; 2고린 1,22)도 특징적으로 지칭한다. 따라서 kardia는 인간이 하느님께로 전향할 수 있는 인간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바울로는 여러 가지 용어로써 인간의 본질적인 면들을 다양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구체적인 실존을 표현하는 생명 안에서 집합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인간의 생명은 비천한 육적인 인간 조건에 놓여진 비참한 상태요(로마 7,24; 8,12; 참조: 갈라 2,20), “하느님의 영광”을 상실한 상태다(로마 3,23; 8,18-23). 그러기에 모든 인간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2고린 5,17; 갈라 6,15)로 거듭 태어나는 존재론적인 변형이 이루어져야만 한다(참조: 로마 8,2; 갈라 4,4-5; 요한 3,3-14,6). 그러므로 인간의 비천한 존재가 그리스도로 인해 하느님 앞에 의롭게 되었다는 것(로마 3,24-25)은 창조설화의 근본 메시지(창세 1,26-27)와도 그 맥락이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땅의 흙덩이로 인간을 빚으시고 당신의 영을 그에게 부으시어 당신의 모습으로 그를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비천한 존재가 들여 높여져 하느님 앞에 의롭게 되고 과분한 영광과 존엄성도 함께 부여받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성서는 인간의 본질 그 자체 안에 이미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표명되어 있다는 그 특성을 말해준다. 특히 바울로는 죄의 세력으로 인해 상실된 인간성이 오로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해 회복된다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론의 차원에서 인간을 조명했었다(참조: 로마 3-8장). 그러므로 인간 중심적인 하느님의 창조행위는 인간 구원에서 완성되고,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개방을 제시하는 성서의 휴머니즘은 인간 구원에서 정점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친교를 필요로 하는 인간
성서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충만하게 채우기 위해서(구원된 실존자로서 살기 위해서) 하느님 그리고 동료 인간과의 친교(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친교)를 나누어야 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한마디로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목전에 둔 휴머니즘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앞서 언급했듯이 근원적으로 불가분의 결속 관계다. 이 관계는 또한 인격적이고 계약적인 친교의 관계다(참조: 출애 19,3-6; 24,3-8; 예레 31,31-33; 마르 14,24-25 병행구; 1고린 11,25-26).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으로 삼아 대화의 장으로 부르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느님 편에서 선택과 약속이 주어지고, 인간은 그에 대해 응답이나 거절, 순종이나 불순종을 시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물론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이 인간에게 배제된 것은 아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이런 관계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의 협력자”(1고린 3,9)로 살아감으로써 결국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맺어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지속적으로 하느님과 진솔하게 대화를 나눔으로써 계약에 충실하게 되고,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더욱더 성숙시켜 갈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내세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안에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며 살게 된다.
그런데 성서는 인간이 하느님과의 친교(수직적인 관계)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동료 인간과의 친교(수평적인 관계)도 함께 나누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즉 하느님과의 친교 속에 동료 인간과 함께 하는 공동체 안에 살아야 하는 인간상을 내세운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주리라”(창세 2,18)는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창조되는 그 순간부터 수평적인 관계를 이루고 친교를 나누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창세 2,24)는 야훼계 전승자의 말도 부부가 하나의 단일체(최고의 친밀성과 완전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혈연관계보다 더 강한 수평적인 관계와 친교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상 예언자들은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 혼인계약의 관계로 표현했고, 바울로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이런 혼인계약의 관계로 설명했었다(에페 5,21-33). 따라서 혼인관계가 지닌 신적인 차원의 신비와 존엄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참조: 토비 8,7). 이런 신비와 존엄성은 인간의 공동체성이나 동료 인간성에도 자리한다. 부부관계가 곧 인간의 수평적인 관계(가족관계나 공동체의 유대관계)의 기초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계약을 맺으실 때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선택하여 맺으셨다(참조: 출애 24,1-11)는 의미도 이런 맥락 가운데 더욱 부각될 수 있다.
이와 반면에 성서는 인간 각 개인의 인격적인 존엄성을 존중하고 하느님께서 인간을 개별적으로 아신다고 말한다(참조: 출애 33,17; 예레 1,5).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시나이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시나이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저의 모든 길이 당신께는 익숙하나이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시나이다”(시편 139,1-4). 하느님께서는 인간 각 개인에 대해 이와 같이 긴밀한 친교를 나누시면서도 주도권을 가지신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먼저) 여러분을 알아 주셨습니다”(갈라 4,9). 그러기에 성서의 인간은 “인간이 무엇이옵니까? 당신께서 이토록 기억해주시다니! 사람이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이토록 돌보아 주시다니!”(시편 8,5)라고 읊는다. 바울로도 “내가 지금 육신 안에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께 대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말한다. 이렇게 인간 각 개인의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인간 각 개인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에 있어서 하나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너와 나”라는 상대적인 위격체로서 존엄성도 지닌다. 따라서 개인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하나의 공동체에 속하는 동료 인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참조: 에제 18,30). 즉 각 개인은 자신을 위해서, 또 자신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유대관계 속에서 규정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긴장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놓여진 셈이다.
이와 같이 성서의 휴머니즘은 인간차별을 허용하지 않고, 인간이 근원적으로 동등한 수평적인 유대관계 속에 창조되어 친교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참조: 로마 12,1-8; 1고린 12,1-30).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과 동료 인간들 앞에서 연대의식을 가질 뿐만 아니라 각자 자기의 삶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참조: 창세 3,8-9; 4,8-14). 동료 인간을 지배하려다가는 오히려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전도 8,9). 동료 인간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함께 살기 위해서는 모든 증오를 물리치고 자기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레위 19,17-18), 심지어 나그네도(레위 19,34; 참조: 루가 10,29-37),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출애 23,4-5; 잠언 25,21-22; 마태 5,44; 루가 6,27-28). 주인과 노예의 관계 속에도 사랑(출애 21,7-11) 내지는 완전한 유대감이 생길 수 있다(신명 15,12-18; 23,16-17). 예수도 제자들에게 사랑의 계명을 유언으로 주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34). 인간이 서로 함께 사는 삶의 방향과 목표는 결국 사랑으로 집결된다. 따라서 사랑이 배제된 인간의 삶은 비인간적이고 무신론적이며(참조: 1요한 4,7-12) 성서의 휴머니즘과도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동료 인간과 더불어 하느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도록 향방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5.구원받아야 할 인간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성서는 인간이 하느님과 불가분의 결속관계 속에 동료 인간과 더불어 구원에로 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인간의 본질과 특성 안에 이미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표명되어 있고, 하느님의 창조행위가 인간 구원에서 완성된다는 것도 부각시킨다.
구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원조들(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 노아)과 성조들(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이야기 및 이스라엘 민족사는 인간의 끝없는 죄악과 방황 속에 하느님의 구원적인 개입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인간구원의 역사다. 첫 인류 아담과 하와의 죄악으로 물든 방황은 하느님 없이 서 보려는 자존과 교만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접근하시어 대화를 나누시고, 당신의 연민과 자비를 드러내 보이시며 후속 조치까지 취하셨던 것이다(창세 3장).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인간이 동료 인간과의 동반자 관계(동료 인간성)을 거부함으로써 죄악의 무거운 압박 속에 몰입되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단절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도 하느님의 연민과 자비가 발동되어 악의 세력이 난무하는 인간사회 속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안전한 위치를 확보하고 관계가 단절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느님의 후속 조치가 마련되었던 것이다(창세 4장). 노아의 이야기 역시 하느님께서는 죄악의 세력에 빠져 멸망의 위기에 처한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는 것을 말해준다(창세 6-9장).
유목민 생활을 하던 아브람은 하란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소명과 약속을 받아(창세 12,1-9) 인생의 대 전환기를 맞게 되고, 하느님과 계약을 맺어(창세 15장과 17장) 이스라엘의 첫 성조로서 아브라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창세 17,5). 이로써 아브라함의 삶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라, 목적과 방향을 지닌 여정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로 이루어진 출애굽 사건으로 인해 하나의 민족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가운데 해방과 구원의 손길을 뻗치신 하느님의 자비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하느님은 바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이시다. 즉 인간과 맺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시는 하느님이시요, 방황하는 인간을 친히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이시다(참조: 출애 3,21; 6,5-6).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황량한 벌판에서 40년 동안 방랑의 생활을 하였을 적에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물과 음식을 마련하시어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셨다(출애 15,22-17,7). 또한 하느님께서는 “만남의 장막” 안에서 언제나 그들과 함께 기거하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뜨거운 태양볕을 막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어둠을 비추시었다(출애 40,34-38).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수직적이요 수평적인 관계를 잘 유지하여 참된 자유를 누리도록 십계명도 주셨다(출애 20,1-17; 참조: 신명 5,6-21).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원초적 구원 의지의 표명이며, 야훼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인간의 죄악과 방황이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의 숙명적인 본성으로 나타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된 땅 가나안에 정착함으로써 물리적인 방황을 끝내고(여호 6장) 야훼 하느님 한 분만을 섬기기로 장엄서약까지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여호 24,14-28), 또다시 하느님을 배신함으로써 윤리적인 방황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런 죄악과 방황은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주변 강대국에 멸망당하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계속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바로잡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제시하며 당신의 구원의지를 펼치기 위해서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회유와 질책, 호소와 징벌등의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악과 방황은 종식되질 않았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 구세주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시고, 마침내 당신의 외아들까지 친히 보내신 것이다(참조: 요한 3,16; 갈라 4,4-5). 바로 여기에 인간을 끝까지 돌보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 셈이다. 이처럼 성서의 휴머니즘은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 사랑에서 최고봉을 이룬다(참조: 1요한 4,7-21).
바울로도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고 말하면서(로마 1,18-3,20)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로마 1,16-17)을 명확히 밝힌 바 있다. 이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대속죄적 죽음으로 이룩된 하느님의 신의(로마 3,21-31)를 바울로가 천명하기 위해서 언급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대속죄적 죽음으로 이룩된 인간 구원을 밝히 드러내고자 그 이전(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묘사하여 인간의 구원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예수 역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인간의 믿음과 회개를 외쳤고(마르 1,15 병행구; 마태 11,20-24),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마르 2,10 병행구) 인간에게 해방(루가 4,18-19)과 구원을 주기 위해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마르 2,17 병행구). 바울로에 따르면 인간은 오로지 그리스도 사건(십자가 죽음과 부활)안에서 이해될 수 있고(로마 7,24-8,2; 참조: 1고린 1,18-31), 그리스도의 사명은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데 있으며(로마 5,5-8; 8,31),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의 의로움”을 얻어(필립 3,9)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물”이 될 수 있다(갈라 6,15; 2고린 5,17). 따라서 진정한 인간 회복은 인간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전적으로 순종한 그리스도로 인해 이루어질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그리스도 덕분으로 “묵은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모될 수 있다(골로 3,9-10; 참조 에페 4,22-24).
이와 같이 성서의 휴머니즘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구세사적인 맥락 안에 자리하고 있다. 즉 인간은 근원적으로 하느님께 향방된 존재요,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며,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6.하느님의 육화에서 본 인간
하느님의 육화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가리킨다(참조: 요한 1,1-
18). 즉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구세사의 정점이요, 성서 휴머니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시어 당신을 닮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악의 세력에 빠져 방황을 일삼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비와 사랑으로 계속 돌보시다가 마침내 몸소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와 인간까지 되셨기 때문이다. 특히 요한계 문헌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육화한 신적인 로고스(말씀)요(요한 1,14; 1요한 4,2; 2요한 7). 세상과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파견된(요한 3,16-18) “세상의 구원자”다(요한 4,42; 참조: 요한 12,47; 1요한 4,14). 바울로는 이런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말한다(2고린 4,4; 골로 1,15).
신약성서는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가 바로 나자렛 출신 예수라고 고백하며 예수의 출현과 활동이 이스라엘(인류)의 오랜 방황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인 순간이요 하느님의 인간 구원사에 있어서 정점이라고 증언한다. 또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결같이 증언한다. 즉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로마 1,3-4).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요한 1,1). “때가 찼을 때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하느님의 아들인 것이다(갈라 4,4-5; 참조: 요한 3,2; 13,3; 16,27-28). 따라서 예수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잇는 권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고, 하느님도 언제나 예수와 함께 하신다(요한 3,2; 5,17.19; 참조: 마태 1,23).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느님에 관해 신빙성 있는 말을 할 수 있다(요한 1,18; 마태 11,27). 뿐만 아니라,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느님은 서로 “하나”이기 때문에(요한 10,30; 14,10; 17,11.21), 아들을 보는 자는 곧 아버지도 보는 것이 된다(요한 12,45; 14,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느님의 유일한 참된 계시자라고 말한다(참조: 히브 1,3).
예수는 언행에 있어서도 하느님과 일치를 이룬다. 예수의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고(요한 14,10), 예수의 일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이다(요한 9,4). 따라서 예수의 말과 일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며(요한 17,4), 예수만이 인간을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는 “세상의 빛”이요(요한 8,12), “착한 목자”(요한 10,11)요, “길, 진리, 생명”이며(요한 14,6), 그리고 “생명의 빵”(요한 6,35)과 “생명의 물”이다(요한 4,10). 한마디로 인간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참조: 요한 14,6; 1요한 5,20). 사실상 예수의 복음선포 및 가르침과 기적은 인간구원을 위해 행해진 것들이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의 복음선포를 인간에게 하느님의 원의나 구원의지를 드러내 주는 말씀으로 증언한다. 즉 구약의 하느님 말씀과 동일하게 여겨지고, 인간에게 효력을 발휘하는 역동적인 힘이며 진리를 계시하는 빛이다. 특히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12,49; 17,14). 예수의 말 가운데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언급한다(14,10.24; 17,8).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며(3,34),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11,49-50; 14,10) 오로지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을 말한다(8,28; 12,50). 그렇기에 예수의 말은 “영”이요 생명이며(6,63), 예수의 말을 들고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 된다고 한다(5,24; 8,51; 12,48; 14,24; 15.3; 17,14.17). 따라서 예수의 말은 “진리의 말씀”(2고린 6,7; 에페 1,13; 골로 1,5). “구원의 말씀”(사도 13,26), “생명의 말씀”(1요한 1,1; 필립 2,16) 등으로도 표현된다. 이것은 예수의 말이 예수의 인격(신원과 정체)을 나타내고 동시에 하느님을 대신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울로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느님의 능력”(1고린 1,23-24)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요한 5,24; 8,51; 14,23), 믿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을 야기시킨다(요한 12,47-48; 마르 8,38; 루가 9,26).
예수의 말을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기계시로 언급한 것은 요한 복음서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14,6.14.7).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육화한 로고스 곧 하느님 말씀 그 자체로 칭한 것도 요한 복음서의 서언에서만 볼 수 있다(1,1-18). 육을 취한 로고스는 신적인 영광 가운데 역사적인 객관성과 육체적인 측면의 인간성, 곧 인간적인 무상함 내지는 죽음이라는 실재를 취한 하느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로고스의 육화는 곧 하느님의 육화요, 인간 가운데 임재한 하느님의 현존을 뜻한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의 인격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역동적인 현존을 가리킨다(참조: 요한 4,21-24).
육화한 하느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물론 전적으로 하느님을 대신하지는 않는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시사하듯이 하느님과 유일무이한 결속의 관계에 있다(참조: 마태 11,27; 루가 10,22; 요한 17,21). 본질적으로 같다는 말은 무조건 존재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는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과 본질이 같았지만(참조: 요한 1,1-3),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필립 2,6).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했다(필립 2,8). 즉 예수는 인간 구원의 중재자(2고린 5,19; 골로 1,20; 히브 9,15)로서 세상의 죄를 몸소 짊어진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36),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요한 10,7-18)가 되었다. 예수의 이 대속죄적 죽음으로(참조: 1요한 1,7; 2,2; 3,5; 4,10) 인해 인간은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을 수 있게 된 것이다(루가 22,20; 1고린 11,25; 참조: 마르 14,24; 마태 26,28). 그리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좌정한 예수 그리스도(에페 1,20; 1베드 3,22)는 천상 주님으로 찬미되고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찬양받으시게 되었다(필립 2,9-11). 이렇게 볼 때, 육화한 하느님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앞에서 오히려 인간을 대신했다고 여겨진다(참조: 로마 8,34). 그러므로 하느님의 육화는 인간 영역으로 몸소 들어오신 하느님의 주도권을 강하게 시사하고, 바로 인간 구원에 그 목적과 의의가 있다. 또한 십자가 사건과 더불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주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한다(참조: 요한 3,14-18). 바로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높게 평가해야 할 이유와 근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과의 결속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악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 구원의 결실을 풍요롭게 맺을 뿐만 아니라(참조: 요한 15,1-17), “그리스도의 지체”(1고린 6,15; 12,12-27)요 “성령의 성전”으로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겠기 때문에(1고린 6,19-20) 더욱더 그러하다.
7.맺는 말
구약성서는 처음부터 인간을 하느님의 존귀한 피조물이라고 규정하고서 피조물 가운데 창조의 중심이요 절정으로 서술 묘사한다. 그리고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로써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가분의 결속관계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나 관리 및 보호의 관계를 시사한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은 관계(수직적인 관계)로 인해서 인간은 또한 동료 인간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해 간다. 성서에서는 이런 관계를 떠나 홀로 존재하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성서의 휴머니즘은 인간의 이런 특성에 터를 두고서 신학적으로 언급된다.
성서의 인간은 하느님께로 향방되고 동료 인간에게 개방된 존재요, 또한 친교나 교제를 필요로 하며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존재다.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수반된다. 특히 하느님 없이 홀로 서려는 인간은 불안한 상태에 놓여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이 피조물로서 한계를 벗어나 오만이나 독선으로만 가득 찰 때,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들을 단절시키고 타락하기 마련이다. 육적인 조건에 있는 인간 그 자신을 연약하기 때문이다(참조: 시편 103,13-16; 이사 40,6-8; 로마 7,14-24). 인간이 헛되이 하느님과 맞서 자기의 자율성만을 내세움으로써 죄악의 세력에 빠지게 된다고 성서는 설화를 통해서 가르친다(참조: 창세 3-11장).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본성적으로 종교적인 능력이나 자질을 자기고 있는 존재다(참조: 로마 1,19-20; 2,14-15). 인간의 지력은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뜻을 선택할 수 있게 하며, 인간의 자율은 하느님의 뜻을 행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때, 비로소 그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참 자유를 찾게 된다. 하느님을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하거나 인간의 의지를 강요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인간은 오만한 생각에서 하느님의 뜻을 저버림으로써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들을 단절시키고 죄악의 세력에 빠져 방황의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스스로 인간에게 찾아오시어 구원을 향한 삶의 여정으로 바꾸신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창조에서뿐 아니라 인간구원의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하느님은 인간과 맺은 계약과 약속에 충실하셨고, 또한 당신의 구원의지를 메시아라는 인물을 내세워 더욱 구체화 시키셨던 것이다.
신약성서는 나자렛 출신 예수의 인격과 삶 안에서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증언한다. 예수는 온 인류에게 생명과 해방 그리고 구원을 가져다주는 진정한 메시아(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죄악으로 물든 인간의 방황은 예수로 인해서 끝나게 되었고,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예수의 사건(강생, 죽음과 부활)안에서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제 예수의 인격 앞에 놓여져 있고, 인간 구원은 예수 사건의 의미를 받아들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인간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선포를 통해서 계속된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볼 때, 성서의 휴머니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오신 인간 구원의 역사 가운데 다양하게 언급되고,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육화와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을 이룬다. 인간은 창조의 순간부터 한 인격체로서 하느님 그리고 동료인간과 불가분의 결속관계를 맺었기에, 그 관계를 떠나서는 결코 구원될 수도 없고 자신의 존엄성과 가치도 상실해버린다. 인간은 오로지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참조: 1디모 2,5) 날로 새로워지면서 하느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유지할 수가 있다(참조: 골로 3,9-10; 필립 3,21; 1고린 15,45-49).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 창조와 구원의 주님이시고(참조: 1고린 15,28), 성서는 그런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성서의 휴머니즘은 인간의 자아의식에 출발점을 둔 철학이나 문학의 휴머니즘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성서에서 볼 때, 인간의 존엄한 권위나 권리는 사실상 하느님 자신의 중심적인 관심사였고, 하느님의 자기 계시의 근거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