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생활 맛들이기

[스크랩] 밀양박씨(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깜장보석 2014. 3. 4. 14:22

 

억산(億山)에서 뻗은 산봉들이 차츰 낮은 구릉으로 길게 내리 닿은 사이의 곡야(谷野)는 이 곳에 취락을 선사시대부터 이루게 되었다. 동창천을 따라 기암절벽이 즐비하여 좋은 경관을 이루고 있으며 유풍(儒風)이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여 본 면의 중심부를 점유하고 있다. 이 곳에는 지석묘가 흩어져 있었으나 경지 정리 등으로 많이 없어졌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된다. 또한 신지동(薪旨洞), 길부동(吉夫洞)을 합친 마을이다.

 

지석묘가 흩어져 있는 죽전(竹田) 마을 뒷편 구릉(土城)에서 발견되는 석도, 돌도끼, 토기 파편 등 선사시대와 삼한시대의 유물로 보아 주민이 정착한 것이 선사시대이나 구명이 되지 않음이 못내 아쉽다. 1리인 신지(薪旨)에는 1520년에 밀양인 박하담 공이 입주 정착하였다. 2리에는 1570년에 밀양인 박경윤 공이 1리에서 입주하여 동리 기초를 가다듬었다. 이전 내력의 단서로는 오직 유물뿐이다. 3리에도 1690년에 1리에서 밀양인 박의묘 공이 이거하여 한층 동리를 다듬어 손색없는 마을로  순화시키고 교화하였다.

 

4리는 1540년경에 성주 배씨가 입촌했다하나 소상하게는 알 수가 없다. 1리인 신지(薪旨)를 선호(仙湖), 섶마리, 섶말, 선마리 등으로 부른다. 처음에는 용두소(龍頭沼) 소요대(逍遙臺)와 같은 절승지에 선인(仙人)이 우유(優遊)할만한 곳이라 선호(仙湖)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섶마리에는 두 설이 있다. 하나는 선호(仙湖) 부근에 숲이 울창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과 밀양 박씨가 입촌하여 잡목 숲인 섶을 벌채하여 마을을 일구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두 설이 다섶(잡목)에서 기인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섶마을이 구개음화로 섶마리, 선마리로 충분히 발음될 수 있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박은 섶을 따라 올라가야만 많이 달린다는데서 박씨(朴氏)의 후손이 번창하라는 뜻에서 섶마을로 동명을 했다하나 과연 그런 뜻이 함유되었는지는 의문이 간다. 섶마을이 섶마리로 변하자 신지(薪旨)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진다.

 

입암(立岩)

선방우, 선바위로 박하담 공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마을인데, 마을옆 하천변에 용두 모양의 바위와 물결이 굽이치면서 이루어진 소(沼)가 있어 용두소(龍頭沼)라 이름 붙였는데 이 소(沼)의 맞은편에 우뚝 선 바위가 있어 박 공이 초당의 이름을 입암정사(立岩情舍)라 명명한데서 유래하여 마을 이름도 입암(立岩)이라 했다 한다.

 

죽전(竹田), 대밭

박공이 동생을 이곳에 이주하게 했는데 대밭을 일구어 마을을 열었기 때문에 붙여진 동명이다.

 

길부(吉夫), 자부골

동명에 두 설이 있다. 하나는 마을 뒷산의 모양이 옥녀가 머리를 빗는 형국이라 옥녀에게는 좋은 지아비(夫)가 있어야 한다는 속설에 따라 길부(吉夫)라고 붙였다는 설과 또 하나는 이 마을 남자들이 단명이라 지아비가 오래 살고 좋은 지아비가 되어 달라는 뜻에서 붙여졌다는 설인데 전자가 이치에 맞지 않나 믿어진다.

 

어성(御城), 어성(漁城)

임란 당시 의병들이 마을 뒷산에 축성하여 왜병과 싸웠다. 이 때 성 이름을 어성(御城)이라 하여 동명도 어성(御城)또는 어성(漁城)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설로는 냇가에 고기가 많이 잡혀서 어성(漁城)이라 했다하나 확실치는 않다.

 

금천(錦川)

원래 선천(線川)이라 했다. 일제에 합병되어 1914년 행정구역 조정시 박시묵 공이 금천(錦川)으로 개명했다.
이 마을에는 선암서원(仙巖書院)과 운강고택(雲岡古宅)이 있다. 선암서원은 도지정 유형문화재 79호이다. 운강고택은 중요 민족자료과 문화재 106호이다. 이 집은 쌍구(口)자형의 짜임새 있는 구조 및 필요에 따라 세분된 단면배치, 합리적인 공간 구성이 돋보인다. 조선조 시대의 양반 주택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야견
글쓴이 : 산신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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