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카로 가는 길-아놀드 후가드 작
미스 헬렌에 관하여
친구의 농장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자동차를 타고 카루 사막지대로 접어들고 있던 나는, 내가 택한 노선으로 인하여, 그 순간까지는 지도상에 나타난 하나의 지명으로만 존재했던 "뉴 베데스다"라는 지역을 난생 처음으로 통과하게 되었다: 뉴 베데스다는 훌륭한 무대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그 마을을 지나가면서 나로서는 아무런 감흥도 없을 수는 없었던 것이, 내가 이 세상의 바로 그 부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 실제로 나는 뉴 베데스다에서 螡5마일 떨어져 있는 미들버그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친구의 농장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뉴 베데스다의 철저한 소외성이 뇌리에 깊이 박혀, 나는 속으로, 제길할, 언제고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도시에서 도망쳐나와 여기서 살면 딱 좋겠구먼, 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 말을 친구에게 하자, 그는, "실은 시골사람들이 도시로 옮겨가는 추세 때문에, 뉴 베데스다 집값은 똥값이라네. 거기라면 아무 집이나 아주 헐값에 살 수 있지." 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포트 엘리자베스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뉴 베데스다에 들려 마을을 한바퀴 둘러보았는데, 과연 아주, 아주 헐값에 내놓은 집들이 많이 있었다.
석달 후, 나는 집을 한 채 사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다시 뉴 베데스다를 방문했고, 그 때 구입한 집은 아직도 지니고 있다. 여러 집을 구경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마을사람들을 몇 사람 알게되는 과정에서,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아주 이상한 인물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이름은 헬렌 마르틴스라고 했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약간 미친 여자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서 변명조로 이야기해주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녀의 광기는 자신이 손수 만들어 집 안팍에 즐비하게 늘어놓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조상이나 조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발길을 미스 헬렌의 집 쪽으로 서서히 돌려, 처음으로 그녀의 "메카" 를 구경한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없었다. 그 당시 그녀는 생존해 있는 상태이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완전한 은둔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먼 발치에서 그녀를 한두번 본 것과 그 집을 지나치는 길에 어쩌다 그녀가 조각들 사이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간단히 목례를 한 것이 고작이고, 개인적으로는 그녀를 사귈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
집을 구입하고나서 내가 뉴 베데스다를 정규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한지 약 2년 후, 미스 헬렌은 자살했다. 이 기이한 작은 공동체 -마을사람들이 무릇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생활양식에서 이탈된 삶을 영위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삶과 작업이 적대시되고 있는 공동체- 에 속한 이 지극히 괴팍스러운 인물에게 흥미를 갖으면서, "여기 기막히게 훌륭한 이야기 소재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작가인 나로서는 아주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후 이삼 년 동안 미스 헬렌에 대한 생각은 나의 작은 공책에 자주 등장했다.
나는 또한 미스 헬렌의 실체에 대해서 보다 많은 정보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러니까 그녀가 50세가 될 때까지, 그녀의 삶에서는 앞으로 일어나게될 변화에 대한 기미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돌연히 그녀의 삶은 자신의 조각이라는 놀라운 형태로 분출되었던 것이다. 어느날 홀연히 그녀의 정원에 최초의 조상이 나타났으며, 그 후 15년에서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녀는 분명히 일종의 개인적인 비젼임에 틀림없을 그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혼신을 쏟아부어 작업에 열중했다. 그녀의 사망 후, 나는 그녀가 자기 집안에 해놓은 것을 구경하러 가보았다 - 내부는 그녀가 조각들로 꾸며놓은 정원에 못지 않게 놀라운 광경이었다. 17년 동안의 창작활동은 종결되었고, 그 후 18개월에서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그녀는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고,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며, 극도로 침울한 상태에서 극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밤, 그녀는 (한국 사람들이 양잿물이라고 부르는) 가성소다를 마시고 자살했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를 태워버렸다.
미스 헬렌의 이야기에 내가 어떤 의미에서 자극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이야기에 완전히 낚여졌던 적은 없었다. 나는 어부라서 내 미끼를 가지고 그저 장난이나 치는 물고기와, "써라! 그게 바로 나다!" 라고 외치면서, 내가 의자에 상채를 파묻고 낚싯줄을 물 속 깊숙히 넣으면 내 낚시대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물고기와의 차이를 알고 있다.
그러던 중 여러 요소들의 우연한 일치를 통해서 드디어 낚여졌다. 그로부터 4년 전 암스텔담에서 공연한 "A Lesson from Aloes"에 출연했던 어느 여배우에 의해 나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미 자극을 받은 바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릭스뮤지움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그녀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여자를 대상으로 만들어낸 역할은 모두 무척 훌륭한 것들이에요. 그 점에 대해서 난 당신한테 아주 감사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 작품들을 돌이켜볼 때, 당신은 한 작품에서 두 여자를 함께 등장시킨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에 난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 작품은 언제 쓰실 건가요?" 그러자 나는 지난 수년 동안 비록 내가 여자들 초상화로 흥미있는 화랑을 만들어내기는 했으나, 사건 전체의 촛점으로서 두 여인을 동시에 무대 위에 올려놓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내 삶에서 발생한 또다른 개인적 요소들이 그 자극을 보다 더 예리하게 만들었으며, 나로 하여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서 무엇인가 하도록, 그 자극에 일종의 요구를 첨가하여 나에게 다가왔다.
이러한 변화가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나는 미스 헬렌에 대해서 또다른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 생애의 마지막 몇년 동안에, 자살하기까지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마지막 기간 동안에, 그녀의 삶에는 케이프 타운에서 온 사회 봉사자인 어느 젊은 여성과 나눈 지극히 소중한 우정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여성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 것이 좋다 - 왜냐하면 이 희곡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는 전혀 아무 제약도 받지 않고 내멋대로 썼기 때문이다. 나는 나자신의 작업을 완수했던 것이지, 다큐멘타리를 써놓은 것이 아니다. 아주 우연히 그 젊은 여성을 만나게되어, 나는 그들의 우정이 매우 소중하고 의미있는 우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서 받은 인상은 매우 강한 것이었다 - 그녀는 강한 사회의식의 소유자로서, 남아프리카의 실체에 대한 강한 의식과 남아프리카가 행하는 불의에 대하여 강한 분노심을 지닌, 아주 강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봉건주의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뉴 베데스다에서, 백년 전에 이미 남아프리카 전역에서 사라져버린 이 뉴 베데스다에서, 이렇듯 근엄하고 정의로운 정신의 소유자를 접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사건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젊은 여성과 마을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대결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미스 헬렌에 대한 나의 존경심으로 인하여, 그 젊은 여성은 우리가 만난 자리에서, 일종의 징표로, 나에게 작은 기념물을 주었다 - 미스 헬렌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 힐끗 시선을 던진 순간 - 기막히게 아름다운 사진이었다 - 나는 거기에서 하나의 작품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우연의 일치가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낚여졌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미끼를 꿀꺽 삼켜버린 순간이었다.
등장인물
미스 헬렌
엘사
마리우스 빌레벨트
시간
1974년 가을
장소
남아프리카, 뉴 베데스다
1 막
뉴 베데스다의 자그마한 카루 마을에 위치한 어느 집. 거실과 거실로 연결되는 무대 뒷쪽으로 움푹 들어간 침실이 보인다. 가능한 한 많은 빛과 색을 사용한 까닭에 무척 독특해 보이는 방. 거울로 장식되어 있는 벽은 각기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고, 천정과 바닥은 여러가지 단색의 가하학적 무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방으로부터 받는 인상은 괴이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경쾌하고 극히 환상적이다. 그 방이 실제로 어떠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는 크기와 형태와 색깔이 각양각색인 촛불과 램프가 나중에 모두 켜질 때 완연히 드러나게될 것이다. 그러나, 하오의 빛은 앞으로 일어날 마술같은 일을 어느정도 암시해주고 있다.
미스 헬렌이 무대 뒷쪽으로 움푹 들아간 침실에 있다. 작은 새처럼 연약한 60대 후반의 여인. 낡고 후줄근한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몸치장에 무심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구식 세면대 주위에서 불안스럽게 수선을 떨면서 수건과 비누 등을 가지런히 정리하다가 이따금 거실에, 그리고 거실과 집의 나머지 부분으로 연결되는 문에 시선을 보낸다. 부산스레 돌아다니다가 거실 입구 바닥에 놓여 있는 작은 여행가방과 손가방에 눈길이 간다. 그녀는 이것들을 집어 침실에 가져다놓는다.
엘사 등장. 운동선수 차림이나 혹은 자동차로 장시간 여행한 사람에게 어울릴 차림을 한 20대 후반의 건강해 보이는 젊은 여성이다.
엘사: 아직은 차가 얼어붙을 정도로 춥진 않죠?
미스 헬렌: 그럼, 그럴 위험은 없어. 아직 서리도 내리지 않았는 걸.
엘사: 너무 지쳐서 차를 차고에 넣지도 못하겠어요. (무너지듯 침대에 쓰러진다.) 휴! 이제 끝났으니 망정이지, 1시간만 더 달렸더라면 완전히 녹아떨어졌을 거에요. 저 길은 내가 올 때마다 점점 더 길어지는 거 같다니까요.
미스 헬렌: 물이 이제 따뜻해졌을 거야.
엘사: 잘 됐네요. (자신의 간단한 여행가방을 풀기 시작한다.)
미스 헬렌: 수건도 깨끗하고 . . . 그리고 지난번에 갖다준 그 향수비누도 뜯어놨어.
엘사: 네? 아, 그거요. 그걸 여태 안 쓰셨어요?
미스 헬렌: 그걸 쓰다니! 특별한 경우를 위해서 아껴두었지.
엘사: 그런데 지금이 그 때라구요?
미스 헬렌: 물론이지. 오리라곤 생각지도 않았던 엘사가 이렇게 왔는데, 이거야말로 아주 특별 한 경우지. 짐이 이게 다야?
엘사: 잠깐 들리는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말, 정말이었다구요.
미스 헬렌: 그렇게 먼 길을 왔는데, 겨우 하룻밤만 있겠다니.
엘사: 글쎄 말에요.
미스 헬렌: 이럴 순 없을까, 그러니까 . . .
엘사: 좀 더 있다 가라구요?
미스 헬렌: 이틀도 안될까?
엘사: 안돼요. 지금 시험기간이거든요. 월요일 아침 8시 30분에는 교실에 있어야 돼요. 실은 지금 집에 앉아서 채점하고 있어야 하는 거라구요. 틈이 나면 여기서도 좀 하려고 시 험지 한뭉치도 가져왔는 걸요. (옷을 벗기 시작한다 - 운동복 상의, 운동화 그리고 양 말)
미스 헬렌: 빨 건 모두 한 쪽 구석에 놔둬, 내일 아침 카타리나를 오라고 해서 그 일부터 먼저 하라구 할테니까.
엘사: 이런 일로 카타리날 귀찮케 하지 마세요, 이런 건 나도 할 수 있어요.
미스 헬렌: 카타리나도 안 보고 갈 순 없지! 엘사가 왔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다간 나중에 내가 무슨 원망을 들으라구. 부탁이야 . . . 그저 잠시만이라도 . . .
엘사: 카타리날 안 보고 떠나진 않겠어요. 내 말은, 그 애가 내 바지나 브라자를 빨 필요는 없 다는 거죠. 난 내 빨래는 내가 해요.
미스 헬렌: 알았어. . . 난 그저 혹시나 해서 . . . . 여기 빈 서랍이 있으니까 넣어둘 게 있으면 여기다 넣어.
엘사 (목소리에 약간 날카로운 기를 띄며): 미스 헬렌, 제발 수선 좀 그만 떠세요! 나도 이젠 뭐 가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안다구요.
미스 헬렌: 이렇게 올 줄 진작 알았더라면, 모든 걸 제대로 준비해놓았을텐데.
엘사: 이대로 다 좋아요.
미스 헬렌: 아냐, 그렇찮아! 부엌에 저녁거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는 걸. 빵은 분명히 어제 샀지
만, 다른 건 . . .
엘사: 제발, 미스 헬렌! 뭐 필요한 게 있으면 레티프 영감님한테 가게 문 좀 열어달라구 할께 요. 어쨌든, 난 배 안 고파요.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기분 좋게 목욕하고 숨 좀 돌리 는 거에요. 그리고나면 12시간 동안 자동차 속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걸 입어버릴 수 있 을 거 같아요.
미스 헬렌: 나한텐 인내심을 좀 가지구 대해줘, 엘사. 속담에도 있듯이, "인내는 미덕이요, 미덕 은 자비요, 자비는 --"
엘사 (뜻밖에도 날카롭게): 제발, 미스 헬렌! 나 좀 잠시 가만 내버려두세요!
침묵
미스 헬렌 (소심하게): 내 더운 물 가져올께.
미스 헬렌 퇴장. 엘사,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침대 위에 몸을 던진다. 미스 헬렌, 몇 초 후에 더운 물 주전자를 들고 나타난다. 그 주전자를 힘겹게 다룬다.
차 만들 물은 작은 주전자에 올려놨어.
엘사: 그거 이리 주세요!
엘사, 벌떡 일어나 미스 헬렌으로부터 주전자를 빼앗아든다. 두 여인 잠시 서로를 응시 하며 서 있다. 엘사, 주전자를 내려놓고 미스 헬렌의 양 어깨 위에 두 손을 올려놓는다.
이제 내가 사과할 차례에요.
미스 헬렌: 그럴 필요는 없어.
엘사: 아녜요, 그러고 싶어요. 미안해요, 미스 헬렌. 그리고, 용서하신다는 말씀도 듣고 싶어 요.
미스 헬렌: 실은, 내 행동이 나한테도 좀 거슬리던 참이었어.
엘사 (그제서야 미소를 지으며): 자아, 어서요.
미스 헬렌: 알았어, 그러지 . . . . 하지만,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는데. 그래, 용서했어.
엘사 (미스 헬렌을 의자로 데리고가며): 자, 앉으세요. 그리고 이제 내 걱정은 그만 하세요. 우 리 둘 다 눈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에 다시 시작하는 거에요. 준비되셨어요?
미스 헬렌: 응, 됐어.
엘사: 하나, 두울, 세엣 . . .
두 사람,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이젠 어떡할까요?
미스 헬렌 (안정된 여인의 특징으로 인지될 장난기어린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글쎄, 정말 다 시 시작하고 싶다면, 그럼, 다시 차를 타고, 이 동네를 한바퀴 돈 다음에 다시 도착하라 구. 그리고, 이번엔, 늘 하던대로, 경적을 세 번 울리라구, 그래야 불쑥 나타나도 유령이
걸어들어온 걸로 생각지 않지.
엘사 (미스 헬렌의 도전에 맞서): 좋아요. 자동차 키 어딨더라? (키를 쁹아들고 현관으로 향한 다)
미스 헬렌: 어딜 가는 거야?
엘사: 말씀대로 하려구요. 동넬 한바퀴 돌고나서, 다시 도착할께요.
미스 헬렌: 그렇게 입구?
엘사: 아니, 뭐 잘못 됐나요?
미스 헬렌: 엘사! 지금 그 차림 보면 스털링 레티프 영감 심장마비 일으킬 걸.
엘사: 하지만 해변가에선 이거보다도 더 벗어버리는데요. 좋아요, 그럼. 흥을 깨놓으시네. 우 리 그냥 흉내만 내기로 하죠.
엘사, 다른 방으로 뛰어들어가, 차의 시동을 모조리 훑은 다음, 다시 "도착한다". 세 번 의 경적 소리. 두 여인은 "도착놀이"를 한다 (세부사항은 리허설에서 결정한다). 놀이 끝에 두 사람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케이프 타운에 있는 내 친구들이 이 꼴을 봤다면! 미스 헬렌, 이 엘사 바로우는 "진지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실은, 지식인 축에 들죠, 별로 재미라곤 없는 무리들이지만. 어쨌거나, 그런 나를 미스 헬렌께서는 우리가 만난 첫 날부터 나의 그 지식인 껍질을 벗겨놓으셨어요. 내가 바보 짓을 하게 만드시고 . . . 그걸 즐기게끔 만드 시는 희귀한 재능을 지닌 유일한 분이세요.
미스 헬렌: 엘산 바보 짓 한 적 없구먼. 그럼, 난 어떻구? 일흔이 다 되가지고 일곱 살짜리처 럼 구는 나는 어떻구?
엘사: 이 점은 서로 인정하기로 하죠, 우린 둘 다 아직도 가슴 속 어딘가에 어린 계집애를 숨겨
놓고 있어요.
미스 헬렌: 그리고 그 애들이 같이 놀고 싶어해.
엘사: 내 속에 있는 애는 오랫동안 놀아본 적이 없어요.
미스 헬렌: 난 내 애가 아직 살아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는 걸.
엘사: 살아 있고 말고요. 놀자고 먼저 뛰어나온 애가 바로 그 애잖아요. 기분이 좀 나아지셨 어요?
미스 헬렌: 훨씬 좋아.
그 순간 모든 긴장이 사라진다. 엘사, 물과 향수비누와 세수수건이 허용하는 한도 내
에서 아주 깨끗이 씻는다.
엘사: 세상에, 여기 카루 먼지는 털구멍으로 곧장 들어가네요. 먼지 맛까지도 볼 수 있겠네.
아까 마신 차가 첫번째 한 모금은 진흙이 될 거에요. 내일은 주전자마다 물을 잔뜩
채워서 한바탕 북북 문질러 닦아야지. 마지막으로 목욕하신 게 언제죠? (미스 헬렌,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보아야만 한다) 좋아요, 됐어요. 미스 헬렌 이
름도 목욕할 사람으로 적어놓겠어요. (몇 초 동안 열심히 문질러댄다. 미스 헬렌, 엘사 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 하세요?
미스 헬렌: 여러가지! 진짜 도착했을 때의 엘사 태도에 대해서. 아까 내가 한 말 농이 아니 었어. 한 순간 난 내가 유령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다구.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 . . 카타리나려니 했지, 걔도 노크하는 법이 절대 없어 . . . 그랬는데, 뜻밖의 사람이
턱 나타나더라구. (더 말하고 싶지만 자제한다)
엘사: 계속하세요.
미스 헬렌: 아주 이상했어. 처음엔 엘사가 날 정말로 보고 있는 거 같지도 않았구, 그렇다구
뭐 다른 걸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구 . . . 보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 같았어. 그리고
무척 화가 나 있더군.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나 있는 건 오늘 처음 봤어.
엘사: 이번은 다른 때하고는 좀 다르잖아요, 미스 헬렌.
미스 헬렌: 글쎄 말이야. 다른 땐 다 즐거웠는데. (침묵) 그래, 이번은 어떨 거 같애? 하나도 재미없을 거 같애?
엘사 (침착하게): 그렇지 않길 바래요.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요. 미스 헬렌한테 달렸어요.
미스 헬렌, 엘사의 시선을 회피한다. 엘사, 방안을 둘러본다.
하지만 미스 헬렌 말씀이 옳아요. 지금까지는 내가 정말로 도착했던 게 아니었어요.
미스 헬렌: 어디 있었누, 엘사?
엘사 (대답하기 전에 그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갈림길에 . . . 아니, 지금쯤은 아마 그 길 따라서 서너 마일 지나 . . . 크래독으로 걸어가고 있을지도
모르죠.
미스 헬렌: 무슨 소린지 난 모르겠네.
엘사: 그라프 라이酛 외곽에서 어떤 여자를 태워줬어요. 그 여자 지금은 아마 거기쯤에
있을 거에요.
미스 헬렌: 누구였는데, 그 여자가?
엘사 (노골적인 무관심을 표명하듯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그냥 아프리카 여자에요.
미스 헬렌: 크래독이라! 걸어가기엔 꽤 먼 거린데.
엘사: 나도 알아요.
미스 헬렌: 갈림길에서 80마일 정도 더 가야 할 걸. (엘사가 말을 더 하기를 기다린다)
엘사: 태워주지 않을 뻔했어요. 태워달라든가, 뭐, 그런 표시도 없었거든요. 내 차가 지나가는 데 쳐다보지도 않더라구요 . . . 난 백미러로 그 여잘 보고 있었어요. 고갤 숙이고 그냥 걸어만 가는 모습을 보고 . . . 갈 길이 먼 여자라는 걸 짐작했죠. 등엔 아기도 업고
있었고. 밖은 뜨겁고 . . . 뜨거운 땡볕에다 건조하고 허허벌판이고 . . . . 농가
하나 눈에 띄지 않더군요. 그 모든 것들 속에서 그 여잔 아주 작고 하찮아 보였어요.
어쨌든, 난 차를 후진해서, 타라고 했죠. 별로 상냥하게 말하지도 않았어요. 이미
10시간이나 운전하고 있던 상태라서, 가능한 한 빨리 여기 도착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거든요. 그 여잔 차를 탔고, 서너 마을 지난 후에야 우린 입을 열었죠. 그 여자,
영어가 퍽 서툴었지만, 나한테 하려는 말을 종합해보니까 남아프리카에서는 아주 흔한 얘기더군요. 남편은 농장 일꾼이었는데 최근에 죽었고, 남편을 묻자마자 백인 주인 나리 께서는 그 여자더러 짐 싸가지고 농장에서 나가랬대요. 그래서 그렇게. . . 크래독으로 가고 있던 중이었어요. 거기서 먼 친척도 쁹아보고 살 곳도 쁹아보려고. (가능한 한 그 여인을 눈 앞에 떠올리려고 애를 쓰며) 내 또래였어요. 아기는 태어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거 같았고.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수퍼마앛에서 식료품 넣어주는 비니루 봉지
하나 뿐이고. 낡은 슬리퍼 한 켤레도 보이더군요. 그 여잔 맨 발이었어요.
미스 헬렌: 가엾어라.
엘사: 갈림길에서 내려줬어요. 남은 음식하고 돈도 좀 주고요. 그리고 그 여잔 그냥 계속 걸 어갔고, 난 이리로 왔죠.
침묵
미스 헬렌: 또 다른 일은 없었구?
엘사: 네, 그게 전부예요.
미스 헬렌: 누군가가 틀림없이 그 여잘 태워주겠지.
엘사(너무 쉽사리): 그러길 바래요. 안 그러면, 그 여잔 오늘 밤을 아기하고 같이 길에서 보내야 해요. 카루까지는 80마일이나 더 가야 하니까요. 그 여자가 차에서 내렸을 땐 초원에 는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었거든요. 거대한 카루! 마침 카루에 익숙해지고 있던 참 이 었는데, 실은 내 맘에 들기 시작했었죠. 케이프 타운에서는 카루의 광대함과 황량함, 그 경이로운 정적과 침묵에 대해서 같잖은 소릴 지껄여대기도 했어요, 저 아래 사는 거투 르 다 할머니처럼 말이에요. 카루는 사실 그렇기는 하죠, 다만 다른 모든 게 존재하지 않 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당신네 아프리카 백인들이 신에 대한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는지는 아주 명백해요. 여기서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참고 살아오셨는지, 난 도저히 모르겠어 요. 거의 70년이죠? 세상에, 상 하나 받으실만하네요. 나라면 기회가 생기자마자 짐 싸들고 떠났을텐데 . . . 그리고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그런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잖아요.
미스 헬렌: 엘사, 난 여기서 태어났어.
엘사: 안됐네요, 미스 헬렌. 정말 안됐어요.
미스 헬렌: 엘사가 말하는 것처럼 여기가 실제로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냐. 나도 몇 번 여길 떠 났었지만, 결국엔 여길 그리워하면서 돌아오고 싶어했다구.
엘사: 자신의 작업으로 되돌아오고 싶어하신 거겠죠.
미스 헬렌 (머리를 저으며): 아냐. 그런 감정이 일어나기도 전에 여기가 그리워져. 살다 보면 정이 들게되나봐.
엘사: 그게 바로 카루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거겠죠. 그걸 제외하면, 카루는 여기서 설교하 는 종교만큼이나 무자비해요. 오늘 오후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나는 당신네 아프리카 백인들에 대해서 마침내 어느정도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 . . 그리고나니까 맘이 별 로 편치 않더군요.
미스 헬렌: 지금 하고 있는 말엔 전부 내가 포함돼 있군.
엘사: 그래요. 이제 교회에는 더이상 안 나가실지 모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프리카 백인이시 니까요. 오래고도 오랜 세월 동안 일요일마다 찬송가를 부르며 그 사람들과 같이 교회 에 계셨죠. 지금은 약간 변절하셨다는 거,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아직도 마음은 그 사 람들과 하나에요.
미스 헬렌: 그런데 그 마음이 무자비하다, 그 말인가?
침묵
엘사: 아녜요. 그건 절대 아니에요. 다른 면은 얼마든지 있을지 모르지만, 무자비한 면은 전혀 없으세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 . .
미스 헬렌: 아직도 무척 화가 나 있군, 안 그래? 그리고 또 뭔가 다른 일도 있구. 목소리에 뭔 지 새로운 게 있는 걸. 전엔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야.
엘사: 무슨 말씀이시죠?
미스 헬렌: 이를테면 길에서 만난 여잘 얘기하는 투가 그래.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얘기했지 만,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걸 난 알아.
엘사: 물론 관심이 있었죠. 차를 세워서 태워주고, 돈하고 음식을 줄 정도로요. 하지만 난 자 신을 속이고 싶지도 않아요. 그렇게 한 건 내 양심에 비위를 좀 ꁹ춘거지, 그 이상은 아 무것도 아니었어요. 그 여자 인생이나 그 여자가 부닥친 상황에 진정으로 공헌한 건 없 었어요. 어쨌거나, 그 여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죠? 지금 이 순간 그 여잔 폭풍우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겠죠 - 차를 얻어 타지 못하면 폭풍우 속에서 자게될 거라고 그러더군요 - 그리고 난 깨끗히 씻고나서 기분 좋아하고 있구요.
미스 헬렌: 저 봐, 또 시작이네.
엘사: 하지만, 그게 사실인걸요.
미스 헬렌: 난 그 얘길 했던 엘사 말투를 말하는 거야.
엘사: 지금 괜히 상상을 하고 계신 거에요. 자, 우리 다른 얘기나 해요. 심각해지기에는 너무 이르잖아요. 그 얘긴 나중에도 할 시간이 충분히 있고, 또 나중에 해야 할 이유도 있어 요. 마을에선 그 동안 무슨 일 없었어요? 얘기 좀 해주세요. 지난번 보내신 편지에는 마을 소식은 별로 없더군요.
엘사,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미스 헬렌, 팽개쳐진 운동복 상의를 개기 시작한다. 엘사, 미스 헬렌의 행동을 저지한다.
그건 나도 할 수 있어요.
미스 헬렌: 그냥 좀 돕고 싶어서.
엘사: 맛있는 차 한잔 끓여주시고 마을 소문이나 들려주시면 날 도와주시는 거에요.
미스 헬렌, 거실로 들어간다. 식기대에서 컵, 컵받침 등을 가져다 탁자 위에 놓는다.
미스 헬렌: 얘깃거리랄 게 뭐 있어야지. 날 쁹아오는 사람이라곤 카타리나 밖에 없는데, 요즘 걔 관심사는 지 갓난아기 얘기뿐야. 마리우스 목사도 물론 오긴 하지만, 그 사람은 남의 얘긴 절대 안해.
엘사: 그 사람, 아직도 여길 기웃거리나보죠?
미스 헬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엘사. 그 사람은 나하고 아주 오랜 친구야.
엘사: 잘 되길 바래요, 그 사람. 그리고 그 우정, 오래 지속되길 바래요. 나라면 그 사람을 친 구로 하고 싶지 않다는 거뿐예요. 미안해요, 미스 헬렌, 하지만 오랜 친구 되시는 그 분 을 난 못 믿겠어요. 그리고 그 분도 나에 대해서 마찬가지 감정을 가지고 계신 게 확실 해요. 카타리나 얘기나 좀 해주세요. 그 앤 요새 어떻게 지내요?
미스 헬렌: 잘 지내. 아기도 잘 있구. 엘사가 보내준 옷 덕분에 요즘엔 어느 백인 아기 못지 않게 아주 예쁘게 입혀가지구 다녀. 나한테는 무척 잘 해줘. 우리 집 앞을 지나갈 땐 잠시라도 꼭 들려서 내 말동무가 되주구. 카타리나가 없으면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겠어. 헌데, 쿠스가 또 술을 시작한 모양이야. 그리구 카타리나하고 아기한테 온갖 행패를 다 부리구. 그 아기가 자기 애라는 걸 아직도 믿질 않아요.
엘사: 카타리날 때려요?
미스 헬렌: 아니. 지난번 왔을 때 엘사가 그 사람한테 경고하고 갔잖아? 그래서 그 짓은 이제 못하는 거 같애.
엘사: 세상에, 역겨워라! 카타리난 왜 그 남자하고 헤어지질 않는 거죠?
미스 헬렌: 헤어진 담엔 어떡하라구?
엘사: 다른 사람을 쁹아야죠! 자기를 인간으로 존중해주고 아기도 제대로 돌봐줄 사람 말이에 요.
미스 헬렌: 그럴 순 없지. 아, 결혼까지 했는 걸.
엘사: 맙소사. 꼭 아프리카 백인처럼 말씀하시네. 여자를 학대하는 결혼엔 신성한 거라곤 아 무것도 없어요! 내일 카타리나한테 얘길 좀 해야겠어요. 내일 여길 꼭 들리라고 연락해 놓죠.
미스 헬렌: 엘사, 걔한테 더 힘들게 일을 만들지 마.
엘사: 주정뱅이 건달한테 결혼한 것보다 더 힘들 일이 뭐가 있죠? 미스 헬렌, 카타리나한텐 권 리가 있어요. 그 권리가 뭔지 그 애가 알고나 있는지 확인하려는 거뿐이에요. 걔가 지 금 몇 살이죠?
미스 헬렌: 열 일곱일 걸.
엘사: 그 나이에 난 미래를 꿈꾸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여기 카타리나는 애 엄마에 상처 투성이라니. 어서, 다른 얘기나 해주세요.
미스 헬렌: 글쎄 . . . 아이, 내 정신 좀 봐, 그래, 그렇지! 중대한 뉴스가 있어. 거투르다 할멈 때문에 마을이 온통 난리가 났어. 잘 들어봐, 엘사. 그 할멈, 주류점을 내겠으니 허가해 주시오, 했다니까.
엘사: 무슨 점요?
미스 헬렌: 주류점. 알콜을 팔겠대요.
엘사: 이 뉴 베데스다에서 술을 팔아요?
미스 헬렌: 그걸 꼭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면 . . . 그래, 그렇다구.
엘사: 아, 그건 정말 특종감이네요. 거티 할머니 멋있네. 그 할머니, 해가 지면 한 잔 즐기시 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을 그렇게까지 끌고나갈 배짱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미스 헬렌: 농으로 받아들일 일이 아니야.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라구. 마을사람들이 모두 흥 분하고 있어.
엘사: 보나마나 오랜 친구 분이신 마리우스 빌레벨트 목사님께서 앞장 서셨겠군요.
미스 헬렌: 그래. 지난번 설교는 알콜의 해악과 알콜이 흑인들 건강과 삶에 끼치는 해악에 대한 거였어. 그런데, 거투르다 할멈 얘기는, 마리우스 목사가 설교단을 자기 쪽으로만 유리 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흑인들은 그라프 라이酛에 가면 얼마든지 마 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냐면서.
엘사: 그럼, 자기한테도 차례를 달라고 요구하라고 하세요.
미스 헬렌: 무슨 차례?
엘사: 설교단을 이용할 차례요. 설교단 앞에 서서 자기 입장을 밝힐 권리를 요구하라고 일러주 세요 . . . 그리고 그렇게 하기 전에, 예수의 첫번째 기적은 물을 술로 만든 것이었다는 걸 상기시켜주시라구요.
미스 헬렌(웃지 않으려고 애쓰며): 몹쓸 소리도 하는군! 거투르다 할멈이 설교단 앞에 서?!
엘사: 그러시는 미스 헬렌께서는 늙은 위선자세요. 내가 교회를 가지고 놀리는 걸 재미있어하 시면서.
미스 헬렌: 아냐, 그렇찮아. 난 거투르다 할멈을 비웃었지, 교횔 비웃은 건 아니야. 그리고 이 런 일로 엘사가 날 웃길 수도 없구. 이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라구.
엘사: 물론 심각한 일이죠! 그렇기 때문에 누가 더 나쁘다고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어요: 흑인 들을 위한답시고 옳고 그른 것을 자기가 대신 결정해주는 목사님이신가요, 아니면 흑인 들의 불행을 이용하려는 거투르다 할멈인가요?
미스 헬렌: 일이 그보다도 훨씬 복잡한 것 같아. 마리우스 목사는 오로지 흑인들에게 최상의 것 이 무엇인지만을 생각하고 있는가 하면, 한편 거투르다는 자기 수입의 일부를 이곳 학교 건물 적립기금으로 기부하겠노라고 제의했거든. 쿠스는 또 어떻고? 쿠스가 이 동네에 서도 술을 구할 수 있게되면 카타리나에겐 상황이 훨씬 더 악화되지 않겠어?
엘사: 그건 별개 문제에요, 미스 헬렌. 어떤 한 남자가 자기 주량을 조정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마을 전체 사람들에게 벌을 줄 수는 없어요. 그리고 이건 또 다른 문제를 대두시키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 흑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사림들 의견을 물어보 기라도 했나요?
미스 헬렌: 그 논쟁을 지금 또 하려는 건가?
엘사: 논쟁을 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결정을 하려면 우선 본인들의 의사부터 알아보는 것이 당연하고도 타당한 일이라는 말이에요.
미스 헬렌: 항상 같은 논쟁인데, 여기선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엘사도 알잖아.
엘사: 그런데 이젠 그렇게 할 때가 됐다구요. 난 학생들에게 발언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들에 게 영향을 끼칠 결정은 하지 않아요.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우리 는 1974년 성인 남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구요.
미스 헬렌: 그런 태도가 케이프 타운에선 통할지 모르지만, 이런 마을은 또 그 나름대로 생활방 식이 있다는 걸 이젠 알고 있어야지.
엘사: 그렇다고 이 마을이 20세기에서 영원히 고립될 수는 없어요. 정말이지 여기 오는 건 마 치 체홉 무대 한 가운데로 걸어들어오는 것 같다구요. 세상 사람들은 폭탄이 오늘 떨어 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과수원 주인이 누군지를 따지고 있거든요. 여기 이 조그만 세계는 여기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는만큼 그렇게 안전하지 않아요. 남 들이 20세기가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판에, 이곳만은 홀로 19세기에 머물러 있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앞으로 엄청 놀랄 일이 닥쳐올 걸요. 그리고 그건 흑인 들로 시작될 거에요. 그 사람들 바보가 아니에요. 신문도 읽어요. 내 말 믿지 못하시 겠으면, 다음에 카타리나가 들르면, 날씨라든가 갖난애 얘기 말고 뭐 다른 얘길 한번 해 보세요. 그 작은 머리에서 어떤 생각이 돌아가고 있는지 알면 깜짝 놀라실 걸요. 난, (미스 헬렌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 속에 들어앉은 모순 덩어리들 때문에 가 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어요. 왜 언제나 앞장 서서 이 독선자들을 변호하시죠? 그자 들이 미스 헬렌을 어떻게 취급해 왔는지 보시라구요.
미스 헬렌 (불안해하기 시작하며): 이젠 날 가만 내버려두는 편이야.
엘사: 지난번 편지에서 하신 말씀은 그게 아니잖아요!
미스 헬렌: 지난번 편지?
엘사: 네.
침묵. 미스 헬렌, 긴장한다.
기억 안 난다고 하실 건가요?
미스 헬렌: 아니 . . . 기억나.
엘사: 그럼, 거기에 뭐라고 쓰셨죠?
미스 헬렌 (회피하려 애쓰며): 부탁이야, 엘사. 지금은 그 얘기 하지 말고, 나중에 하자구. 이렇 게 온 게 너무 뜻밖이라서 난 아직도 얼떨떨해. 정신 차릴 틈은 줘야지, 응? 그동안 부 탁했던 차나 준비할께.
미스 헬렌, 부엌으로 퇴장. 엘사, 방을 찬찬히 뜯어본다. 심심풀이로 훑어보는 것이 아 니라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객관적으로 관찰하고자 노력한다. 정원에 있는 조각들을 응시하면서 한동안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구석에 놓여 있는 상자곽에 눈길이 가자, 그것을 열어본다 - 한 웅큼의 유색 요업용 칩이 들어 있다. 가리려는 어설픈 시도 가 엿보이는 흉하게 탄 자국 또한 발견한다. 미스 헬렌, 차와 비스앛을 가지고 다시 등 장한다.
이거 어떻게 된 거죠?
미스 헬렌: 아, 그거, 신경 쓸 거 없어. 쿠스나, 뭐, 누굴 불러서 그 위에 덧칠하라고 할 꺼야.
엘사: 어쨌든, 어떻게 이렇게 陖냐니까요.
미스 헬렌: 내가 방에 없는 동안에 램프에서 연기가 심하게 나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
엘사: 새 커튼이네요.
미스 헬렌: 응. 옛날 커튼에 싫증이 나서. 찬장에 마리 비스앛이 좀 있든데. 엘사가 차 좀 따 를래?
방에서 불빛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엘사, 차를 따르면서 미스 헬렌을 관찰한다. 미스 헬렌, 불안함을 감추려 애쓴다.
이젠 내가 엘사 소식 좀 물어봐도 되겠지?
엘사: 아뇨.
미스 헬렌: 왜?
엘사: 내 얘기 하자고 여기 온 건 아니니까요.
미스 헬렌: 그건 불공평해.
엘사: 내 얘긴 따분해요.
미스 헬렌: 나한텐 그렇지 않아. 자, 엘사, 우리 공평하게 하자구. 나한테 마을 소식 묻기에, 난 내가 아는 건 다 얘기해줬어. 이젠 내가 들을 차례야.
엘사: 뭘 알고 싶으세요?
미스 헬렌: 나한테 편지하겠다고 약속했던 대로 편질 썼더라면 거기다 썼을 이야기 전부 다.
엘사: 좋은 소식, 나쁜 소식, 다요?
미스 헬렌: 전부 다라니까 . . . 그래도 나쁜 얘기 보단 좋은 걸 더 많이.
엘사: 좋아요. "엘사 바로우 에드버타이져"! 방금 나왔습니다! 뭐부터 시작할까요? 경제면, 범죄면, 아니면 스포츠면?
미스 헬렌: 1면, 머릿기사.
엘사: 이건 어때요? "바로우, 징계조치 타진 차 학교당국 이사진 앞에 출두하다."
미스 헬렌: 아니, 또?
엘사: 넵!
미스 헬렌: 세상에! 이번엔 또 무슨 일이었누?
엘사: 들어보세요. "엘사 바로우, 28세의 영어교사, 케이프 타운 교육위원회 조회진 앞에 출두 예정이며, 엄격한 징계조치의 가능성에 봉착하고 있다. 조회진은 바로우양 이 담당하고 있는 중학교 3학년 학급 부모들의 많은 불평에 주시하고 있으며, 금년 4월 바로우양은 학생들에게 인종적 불평등에 관한 주제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500자 길이의 편지를 과제 물로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바로우양은 유색인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 다."
미스 헬렌: 그게 사실이야?
엘사: "에드버타이져"지의 정확성과 진실성을 의심하시는 거에요?
미스 헬렌: 엘사! 어떤 때 보면 일부러 말썽을 만들어내는 거 같단 생각이 들어.
엘사: 내가 "일부러 만들어 낸 건" 다름 아니라 내 학생들이 자기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 회에요.
미스 헬렌: 그래, 앞으로 어떻게 될 거 같아?
엘사: 나한테 달렸겠죠. 그 사람들 앞에 가서 깊이 뉘우치고 사과하는 척하면 엄한 징계를 받 는 걸로 끝날 테고, 내 생각대로 행동한다면, 아마 쫓겨나겠죠.
미스 헬렌: 내 충고 듣고 싶어?
엘사: 아뇨.
미스 헬렌: 아니라도 해야겠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다신 그런 짓 안하겠다구, 그렇게 말 해.
엘사: 그건 둘 다 거짓말이에요.
미스 헬렌: 해될 거 없는 거짓말인데, 뭘.
엘사: 아! 이사진 앞에 나가서 내가 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자기들 교육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생각 그대로 정확히 말할 수 있다면 어떤 댓가라도 치르겠 어요. 하지만 지금 하신 말씀이 옳아요. 나한텐 학생들이 있고, 또 내가 교실에 있는 동안에는 조금이라도 개혁이 가능하니까요. 미스 헬렌, 반란이란 한 남자나 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싫다, 더 이상 못참겠다!" 라고 외칠 때 시작되는 거에요. 알베르 까 뮈가 한 말이죠. 불란서 작가에요.
미스 헬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걸 들으면 난 불안해.
엘사: 꼭 어는 학부모처럼 말씀하시네. 내 뭣 좀 알려드릴까요? 내 생각에, 미스 헬렌, 당신께 서는 역사상 최초의 반동적 혁명가예요. 이중첩자시라구요.
미스 헬렌: 좋은 소식은 뭐 없어?
엘사: 많죠. 아직도 담배 안 피우고, 술은 아주 적당히 마시고, 아침마다 이삼 마일 조깅하려 고 노력하구요.
미스 헬렌: 데이비드 얘긴 한 마디도 안하네.
엘사: 그럼, 애인 구인란으로 넘어가죠. 여기 딱한 구절이 있네요. "젊은 여성이 젊은 남성과 의 교재를 원합니다. 어쩌구 저쩌구."
미스 헬렌: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네. 난 데이비드 얘길 묻고 있었는데.
엘사: 그리고 난 대답하고 있었구요. 할 말이 없어서 아무말도 안했던 거에요. 끝났어요.
미스 헬렌: 그러니까 . . . 데이비드하구 . . ?
엘사: 네, 바로 맞추셨어요. 끝났어요. 우린 이제 안 만나요.
미스 헬렌: 걸어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뭔가 잘못됐구나, 내 알았지.
엘사: 지금 이 내가 걱정 있는 사람으로 보이신다면 두 달 전의 나를 보셨어야만 하는 건데. 그 토록 귀여워해주시는 이 엘사가 기막히게 불쌍한 꼴이였죠. 하마터면 훨씬 전에 기대찮 은 방문을 받으실뻔 했어요.
미스 헬렌: 왔었으면 좋았을 걸.
엘사: 거의 올뻔 했죠. 하지만 보내주신 편지 보니까 이쪽 역시 그리 즐겁게 지내고 계신 것 같지는 않더군요. 그때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더라면 동반자살을 시도했을지도 모르 죠.
엘사: 난 그렇게 생각지 않아.
엘사: 농담이었어요.
미스 헬렌: 그런 일을 가지고 농담을 하다니. 나한테 얘기할 생각이 아니었나?
엘사: 난 그 일을 잊어버리려고 애쓰고 있어요. 내가 여길 오지 않은 데는 이유가 또 있어요. 그 일로 인해 극심한 수치심을 느꼈어요.
미스 헬렌: 뭐에 대해서?
엘사: 나 자신요. 그리고 엉망진창인 그 일에 대해서요.
미스 헬렌: 엉망진창?
엘사: 네, 엉망진창요! 자기 자신에 대한 유일한 감정이라곤 혐오감뿐일 정도로 거짓과 허위로 썩어문드러진 상황을 엉망진창이라는 말보다 더 잘 묘사할 단어가 있나요?
미스 헬렌: 지난번에 왔을 땐 그 사람 얘길 하면서 그렇게나 행복해하더니.
엘사: 아, 그 땐 그냥 행복한 정도가 아니었어요. 그 땐 내 생애 최초로 인간존재이유, 여성존 재이유를 발견한 것 같았어요. 그리고 좀 두려웠어요 . . . 다른 누군가가 나의 인생과 나의 존재에 그토록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좀 두려웠어요. 일이 아주 틀어지기 전에도 난 내가 그러한 상황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가끔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었죠.
미스 헬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무슨 말다툼이라도 있었나?
엘사 (씁쓸하게 웃으며): 말다툼요? 아, 미스 헬렌! 네, 말다툼 엄청나게 많았죠.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시끄런 소리도 좀 필요하기에 가끔 서로에게 소릴 질러댔죠. 둘 다 울기도 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일어날만한 건 모조리 다 했죠.
미스 헬렌: 내가 엘사한테 들어서 아는 걸로는 무척 예민하고 선량한 사람 같던데. 박식하고 지 적이고. 그래서 둘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엘사: 네, 정말 그런 사람이었어요. (한순간 망설인다. 무언가를 말하려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다가 그냥 하기로 결정한다.) 그 사람에 대해서 말씀드리지 않은 게 하나 있어요. 결혼한 남자였어요. 헌신적인 사랑스런 아내와 -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에요 - 아이도 하나 있어요. 여자 애요. 놀라셨죠?
미스 헬렌: 응. 진작 얘기했어야지. 그럼 경골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엘사: 바로 그래서 말씀드리지 않았던 거에요. 그러실 줄 알았거든요. 그런 경고는 필요없다 는 걸 증명해보일 작정이었죠. 어쨌든 난 경고 같은 건 필요 없었어요. 나한테 하셨을 경고는 처음부터 내가 나자신한테 이미 했으니까요. 그리고 나 자신의 경고도 쓸데없는 것이었다는 걸 증명하려고 했죠. 결론을 내리자면, 벌어진 일에 대해서 두 사람이 서로 아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였어요. 우린 그런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죠. 사실, 나한테는 그 일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어요. 둘이 다 상처를 입게 되리라는 것도, 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상황의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도 난 알고 있었어요. 그러면서도 선택의 순간이 오면 난 행운의 승리자가 되고, 그 사람은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내게 오 리라 믿었죠. 맙소사! 잘못 생각해도 이만저만 잘못 생각한 게 아니었어요. 땡, 땡,
틀렸다. 마지막 순간에 엘사의 종이 울렸죠.
미스 헬렌: 그러지 마.
엘사: 자기방어에요. 아직도 마음이 아파요. 그런 일쯤 웃어버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좀 왔으 면 좋겠어요. 그 사람이 철저하게 나쁜 놈인 것처럼 말할 순 없어요. 양심이 없는 사람 은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그 반대였죠. 너무 양심적이어서 탈이었어요. 그냥 문 닫고 떠나가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훨씬 덜 복잡했을 거에요. 마침내 그럴 시간 이 실제로 닥치니까 그 사람, 고통과 고뇌에 싸여 자리에 앉아 울더군요. 세상에, 끔찍 해라! 내가 자기에게 아내와 자식에게 돌아가라고 말해주길 기다리면서 말이죠. 그 사 람을 보셨어야만 하는 건데. 그 순간의 자태란 미켈란젤로가 질투했을 정도로 근사한 절망의 포즈였거든요. 남의 고통을 역겹게 여긴다는 건 옳지 않다는 거 나도 알아요. 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되고 만 셈이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이 내 거실 소파에서 고통스 러워하는 모습에, 나, 토할 것 같더라니까요. 나한테 상처를 준 자신을 자기가 얼마나 증오하는지를, 좀 지나칠 정도로 여러번 되풀이하더군요.
미스 헬렌: 뽸, 뽸, 가엾은 것, 이리 와.
엘사 (빳빳이 굳어져):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요. (침묵) 진정으로 중요한 말이 뭔지 아세요? 난 그걸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어요. 대부분 사람들처럼, 난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었 죠. 물론, 사랑이란 말도 중요한 말이죠. 그리고 사랑이 쁹아오면, 그건 엄청난 사건이 구요.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말이 있어요. 신뢰. 사랑보다 훨씬 더 위험한 말 이죠. 왜냐하면 자기 방어기재를 풀고 자신을 활짝 열어보일 때, 만약 그때 실수라도 하 게되면 정말로 엄청난 곤경에 빠지게 되니까요. 그때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자기 아들에게 사업상 첫번째 교훈을 준 아버지 얘기 들어본 적 있으세요? (미스 헬렌, 고개를 젓는다) 웃기려고 만들어낸 얘기 같으니까 웃는 거 잊지 마세요.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높은 데 올려놓고 이렇게 말했대요: "뛰어내려. 겁내지 마. 아빠가 받아줄께." 물론 아이는 불안했지만 아버지가 자꾸 "아빠가 받아줄께," 하면서 안심시키는 거에요. 마침내 아이는 잔뜩 용기를 내서 뛰어내렸죠. 그리고 아버지는, 물론, 꼼짝도 않고 서 있고요. 아이가 울음을 그치자 - 다쳤거든요 - 아버지가 하는 말이, "이게 네가 배운 사 업상 첫번째 교훈이다. 절대로 아무도 믿지 마." (침묵) 이걸 유태인 악센트로 하면 더 재밌는데.
미스 헬렌: 난 하나도 재미없네.
엘사: 흉한 얘기죠. 그 앤 다시는 뛰어내리는 일이 없을 거에요. 그리고 이 순간 그건 엘사 바로우에게도 해당되구요.
미스 헬렌: 너무 성급하게 말하지 마. 산다는 게 무서웠던 적이 나한테도 한 두번 있었다구.
엘사: 남 지금 신뢰에 대해서 말하는 거에요. 앞으로 난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겠죠. 지금 당 장은 전혀 관심도 없지만,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확률은 반반이에요. 사랑하는 일에 관 한 한 당사자로서는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거든요. 하지만 신뢰는 달라요.
미스 헬렌: 신뢰없이 사랑이 가능할까?
엘사: 아, 물론이죠. 그 정도는 이번에 배웠어요. 데이비드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깨달 은 후에도 한동안 그 사림을 사랑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당장은 복잡한 거에요. 그 사랑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요.
미스 헬렌: 난 그런 일에 대해선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
엘사: 나도 없었어요. 그런 걸 알려면 배신이란 걸 겪어봐야만 해요.
미스 헬렌: 그럼 이제까지 난 운이 좋았네. 난 배신이 두려울 정도로 남에게 신뢰를 가져본 적 이 없었으니까 . . . 엘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내 결혼이 남들에겐 그렇게 보였을 른진 모르지만, 스테파누스와 나를 한데 묶어준 건 습관이었어. 난 한번도 남편한테 . . . 글쎄 . . . 마음을 연 적이 없었다고나 할까? 아까 사용한 표현이 바로 그거였지?
엘사: 그냥 여는 게 아니라 "활짝" 여는 거에요.
미스 헬렌: 그래, 바로 그거야! 참 좋은 표현이야. 난 단 한번도,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활짝" 연 적이 없었어. 하지만 엘사를 알고부터는 그런 게 전부 다 변했어. 그러니까 실은 그 게 아주 간단한 거야. 신뢰. 난 엘사와 같이 있으면서, 엘사를 내 인생의 모든 것과 그 토록이나 다르게 만드는 게 뭔지 이해하려고 늘 노력해왔는데, 그런데 지금 보니까 바로 그거야. 난 엘사를 신뢰해. 그래서 내 속에 있는 어린 계집애가 밖으로 나와 놀 수 있 게된 거라구. 모든 문이 활짝 열린 거야!
엘사: (그 기분을 깨며): 그건 그렇고, 내 소식을 물으셨는데 . . . .
미스 헬렌: 묻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
빛이 사라진다. 미스 헬렌, 성냥을 가져다 탁자 위 초에 불을 붙인다. 거울과 벽에 달 린 화려한 장식이 촛불을 반사하면서 방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밝아진다. 엘사, 촛불 하 나를 집어들고 방안을 거닌다. 관객은 어떤 신비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걸 예측할 수 있 다.
엘사: 여전하네요, 미스 헬렌. 차를 타고 오면서 그동안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사라졌을까봐 걱 정했었는데. 그런데 그대로네요. 정말 작은 마술사세요 - 거울과 장식으로 마술을 만 드는 마술사. "절대로 촛불을 함부로 켜지 말고, 불어끌 때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 는지 확실히 할 것." 그 말씀 기억나세요?
미스 헬렌: 응, 나 자신에게 한 말이지, 수없이.
엘사: 그리고 나한테도요 . . . 처음 촛불을 키셨을 때, 내 얼굴 표정을 보시고 한바탕 웃으신 다음, "미스 바로우, 빛은 기적이에요. 가장 평범한 사람이라도 행할 수 있는 기적이에 요," 라고 말씀하셨죠. 함께 차 한잔을 마악 마시고 난 후였어요. 어쩌면 난 그 모든 것을 지금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르지만 . . . 그러나 처음엔 . . . 카루 한 가운 데 있는 저주받은 마을에서, 열기와 파리떼와 정적에 넌더리를 내면서, 먼지투성이 황량 한 길을 걸어가다가, 그러다가 그 모든 것들에 의해 정지당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려드 릴 수만 있다면 . . . 그리고 거기에서 간신히 벗어나자마자 이렇게 안으로 들어와 이런 걸 발견하다니! 여기 와서 "메카"를 처음 본 순간, 난 입이 딱 벌어졌어요. "도대체 내 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낙타와 피라미드? 세 명이 아닌 수십 명의 동방박사? 눈 대신 낡은 헤드라이트가 달린 올빼미? 진짜보다 더 화려하게 번쩍이는 공작? 일사병인 가? 내가 헛 것을 보고 있나?" 그리고는 미스 헬렌을 보았어요! 맥주병으로 만든 회 교 사원 옆에 서서, 자신이 만들어놓은 올빼미처럼, 날 빤히 마주보고 계셨죠. (그 기억 을 떠올리며 한바탕 웃어댄다) 미친 여자야. 분명해. 사람들이 이 여자에 대해서 한 말이 다 사실이군. 순종 카루산 미치광이야. (미심쩍어 세심히 살펴보는 척하면서 미 스 헬렌의 주위를 조심스레 왔다갔다 한다) 헌데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 걸. 잠깐 . . .이 여자, 웃고 있잖아! 조심해, 바로우! 속임수일 수 있다구. 하지만 난폭하다구는 않던데. 미치기만 한 거랬어. 완전히 돌아버렸댔지. 어디, 한번 해보자. 안녕하냐구 인사부터 하고나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 두고봐야지. "안녕하세요!"
두 여인, 소리내어 웃는다.
미스 헬렌: 과장이야. 그렇지는 않았어.
엘사: 아녜요, 그랬어요.
미스 헬렌: 아니라니까. 처음부터 틀렸어. 그건 회교 사원이 아니야. 난 그때 인어를 손질하고 있었다구.
엘사: 어머, 인어를 깜빡 잊었네!
미스 헬렌 (침착하게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나였어. 메카가 어느 방향인 지 가르켜보라고 했더니 틀리기에 내가 고쳐줬구. 그리고나서 정원으로 데리고 나가서 구경시켜주고, 그 다음에 차 한 잔 마시려고 집안으로 들어왔지.
엘사: 내 말이 바로 그거라구요! 그걸 누가 믿겠어요? 카루 한 가운데서, 시멘트로 만든 낙타, 올빼미 . . . 인어 같은 것들에 둘러싸인 채, 새처럼 자그마한 여인에게서, 런던이나 뉴욕 이나 파리가 아니라, 메카로 가는 길을 가리켜보라는 질문을 받았다는 걸 누가 믿겠어 요? 그리고 (방을 가리키며) 이걸, 빛과 색으로 만든 이 작은 기적을. (미스 헬렌, 억압 된 자부심과 기쁨으로 미소짓는다) 자랑스러우셨죠? 자, 솔직히 인정하세요.
미스 헬렌 (감정을 억제하려 몹시 애쓰며): 그래, 인정해. 조금 자랑스러웠어.
엘사: 미스 헬렌, 조금뿐이세요?
미스 헬렌 (더이상 억제하지 못하며): 알았어, 좋아. 아니야, 조금이 아냐. 아, 절대로 조금이 아냐. 실은 내 일생 그 어느 때보다도 그날, 난 내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웠어. 그 전에 도, 그 이후에도, 엘사처럼 날 대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조각들을 바라보며 정원을 거닐면서, 난 흥분으로 온 몸이 떨렸다구. 메카를 작업해오던 그 오랜 세월이 마침내 보 상받은 거야.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우리가 처음 만난 날에 대해서 고백할 게 있어. 우리 둘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여기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밖이 어두워지 기 시작해서 촛불을 켤 때가 됐는데 . . . 난, 내가 갑자기 수줍어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신혼 첫날 밤보다도 더 수줍어했지. 어찌나 수줍던지 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갈 시간 이 됐다고 말해주길 바랬을 정도였다구. 촛불을 켜는 순간, 마침내 나의 전부를 보여주 게 될 테니까. 내 얼굴이나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말하는 게 아니야 - 그런 건 정원에서 이미 다 봤으니까 - 내 말은, "진정한 나를 보게될 거라는 말이지. 왜냐하면 이 방이 바 로 나 자신이었으니까 . . . 이 방이 엘사 맘에 들기를 간절히, 아, 정말, 간절히 바랬어. 우리가 만났을 즈음해선, 난 사람들이 나하고 내 작품을 거친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둘 다 흉측하다고 무시해버리는데 익숙해져 있었어. 그런 눈총을 받으면서 15년 동안 살아 왔고, 그리고 이젠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아. 그런데 엘사의 눈은 달랐어. 그저 잠시 함께 있었지만, 내가 느끼기에 . . . 아니, 느끼는 정도가 아니었어, 난, 알았어. 엘사의 눈은 신뢰할 수 있다는 걸. 우리 두 사림의 소중한 단어가 또 튀어나왔네! 성냥을 쁹 아 촛불을 켤 용기를 그러모으려고 애쓰면서 앉아 있는데 너무 흥분이 되서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니까. 마침내 촛불을 켰어. 그러자 엘사는 방안을 둘러보더니, 기 뻐하면서 깔깔 웃었어! 눈에 보이는 것들이 마음에 들었던 거야! 엘사, 이게 나의 최상 이야. 이게 나의 정체라구. 다른 건 모두 잊어버려. 내 이름, 내 얼굴, 모두 다. 동쪽 으로 떠나는 동방박사, 낙타, 그리고 이 방의 빛과 장식들, 이게 진정한 나야. 인어, 현 명한 늙은 올빼미, 화려한 공작 . . . 이 모든 게 바로 나야. 그런데 그것들을 보더니 기 뻐하더라구! 아, 세상에, 그날 엘사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나한테 인생에 대 한 용기와 믿음을 얼마나 많이 주었는지 결코 모를 꺼야. 정신나간 늙은 여자로 조롱받 으면서 살아온 그 오랜 세월들이 보상받은 거였어. 그날 오후 엘사가 내 인생 속으로 걸어들어왔을 때, 난 거의 아무 일도 못하고 있던 중이었어.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아무 것도 만들지 못할 거고, 난 이미 끝장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었지. 내가 살아 있는 유일한 아유는 나의 메카뿐이야. 그것 없이는 난 . . . 아무것도 아니야 . . . 남들 신경이나 거슬리게하는 쓸모없는 늙은이 . . .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던 때였어. 그런 데 엘사가 내 인생을 소생시켜준 거야. 엘사가 떠난 후, 난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 었어. 내 메카가 끝나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거든! 해야 할 일들, 만들어야 할 조각들이 마구 몰려들어와서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았어. 내 평생 어둠에 대해서 그토록 초조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구. 어서 내가 작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쉬지 않고 일만 할 수 있 도록, 어서, 어서 날이 밝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면서 침대에 앉아 밤을 꼴딱 세웠지.
엘사: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하셨죠. 그 다음에 내가 왔을 땐 아주 근엄한 불상을 나한테 자랑스 레 보여주셨죠. 기억하세요? 시멘트가 채 마르지도 않았었죠.
미스 헬렌: 정확하게 맞혔어. 그게 내 다음 작품이었지.
엘사: 그 다음엔 이스터 아일랜드 두상이었죠, 왜, 그, 머리 올려 묶은 두상 말이에요.
미스 헬렌: 정확하군.
엘사: 그런데 그게 왜 메카에 있는지 아직도 내게 설명해주지 않으셨어요. 설명 안한 걸로 치 자면, 현명한 늙은 올빼미나 인어들도 마찬가지지만.
미스 헬렌: 엘사, 나의 메카는 자기만의 논리를 지니고 있어. 그건 나 역시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해.
엘사: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그 이상하게 생긴 거 말이에요, 반은 수탉이고 반은 남 자, 바야흐로 바지를 벗어버리려고 하는 남자 말이에요.
미스 헬렌: 그 작품은 완전히 상상이야. 어디서 그런 착상이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어. 그리고 그때도 말했지만, 그건 바지를 벗으려는 게 아니라 끌어올리려고 하는 거라구.
엘사: 그 말씀은 아직도 납득이 안 가요. 그 얼굴 표정을 다시 한번 잘 들여다보세요. 그건 만 족한 표정이 아니라 기대에 찬 표정이라구요. 이번엔 뭐 놀랄만한 새로운 거 없어요?
침묵
미스 헬렌: 이번에?
엘사: 네.
미스 헬렌: 없어. 이번엔 놀래줄만한 게 하나도 없어.
엘사: 진행중인 작업은요?
미스 헬렌: 당장은 없어. 지난번 엘사가 다녀간 뒤로는 시작한 게 아무것도 없어.
엘사: 그 달 모자이크는 어떻게 됐어요? 생각나세요? 뒷벽에 걸려 있던 거 말이에요. 내가 갖다드린 도자기 조각들을 사용하려고 하시더니.
미스 헬렌: 그건 잘 보관해놨어. 저기 구석에.
엘사: 네, 나도 봤어요 . . . 석달 전에 내가 놓고간 자리에 그대로 있네요. 아주 근사한 아이디 어 같았는데. 그 구상을 나한테 들려주시면서 굉장히 흥분해하셨구요.
미스 헬렌: 흥분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직도 그런 기분이 가시지 않았어.
엘사: 그럼, 뭘 기다리시는 거죠? 어서 소매 걷어붙이고 시작하세요.
미스 헬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엘사. 실은 . . . 그게 문제라구.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아직도 생각에 불과해. 그걸 작업화할 수 있을만큼 선명하게 눈에 보이지가 않아. 내 전에도 말했지, 우선 아주 선명하게 눈으로 볼 수 있어야만 일을 시작할 수 있다구. 머 리 속에서 그림처럼 떠올라야만 해. 그렇지 못할 땐 그냥 기다리는 수 밖에 없어 . . .
그림으로 떠오르길 바라면서 . . .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지 알면 좋겠지만, 모르겠어. 그런 그림들이 어디서 오는 건지 나도 몰라. 그렇다고 있지도 않은 걸 보라구 나 자신 한테 강요할 수는 없지. 예전에, 아주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두번 그렇게 해봤는데, 그 때마다 작품이 생기도 없고 형체도 없는 잡동사니가 되고 말더라구. 선명한 그림이 떠 오르지 않으면, 그냥 기다리는 수 밖에 없어 . . .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바로 그거야. (내적 동요를 일으키는 것이 눈에 띈다)
엘사 (조심스럽게): 계속 말씀하세요.
미스 헬렌: 인내심을 가지고 나 자신을 대하려고 노력하지만, 힘들어. 남은 시간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 . . 그리고 내 눈이 . . . 손도 . . . 예전 같지가 않아. 그렇지만 제일 두려 운 건 . . . 혹시 내가 있지도 않은 걸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내 속에서 더 이상 아무 런 그림도 떠오르지 않으면 어떡하나, 이번엔 정말로 끝장이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아, 안돼!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안돼. 엘사는 날 이해하지, 그렇지?
엘사: 네, 이해할 수 있어요. (그녀는 조용히 말한다. 앞으로는 말하는 것이 쉬울 것 같지 않 다) 이리 오셔서 내 곁에 앉으세요. (미스 헬렌, 그렇게는 하지만 불안해한다) 이제 지 난번 보내신 편지에 대해서 얘기할 때가 됐어요.
미스 헬렌: 그 얘기 지금 해야만 하나? 나중에 하면 안될까?
엘사: 안돼요.
미스 헬렌: 부탁이야.
엘사: 미안하지만, 우리한텐 오늘밤 밖에는 시간이 없어요.
미스 헬렌: 그럼, 그걸 망치지 마.
엘사: 미스 헬렌, 내가 여기 온 건 그 편지 때문이에요. 그건 아시죠?
미스 헬렌: 알아. 그거 때문에 온 건 줄은 알아. 그렇지만 그때 상황을 참작해야지. 그 편진 마음이 아주 언짢았을 때 쓴 거라구.
엘사: 그 정도는 나도 알아요.
미스 헬렌: 그런데 그 이후로 기분이 아주 많이 좋아졌어. 정말이야. 게다가 엘사까지 이렇게 쁹아와주었구 . . . 앞으로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야. 그 편지 썼을 땐 아주 우울했거든. 심각할 정도로 침울했었어. 하지만 우체통에 넣는 순간 후회했지. 돌려받을 수 없냐고 우체부한테 물어볼 생각까지 했다니까.
엘사: 왜 안그러셨어요? (침묵) 아니면 내게 전보를 치실 수도 있었구요. "이번 편지 무시. 기분 무척 양호." 딱 여섯 마디. 그러면 해결됐을 텐데.
미스 헬렌: 그 생각은 미처 못했어.
엘사: 우린 지금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요. 편질 쓰셨고, 그 편질 부치셨고, 그리고 난 그 걸 받았어요.
미스 헬렌: 그래도 우리 이젠 그걸 그냥 없었던 일로 할 순 없을까?
엘사 (못 믿겠다는 듯): 미스 헬렌, 그 편지에 뭐라고 쓰셨는지 기억하세요?
미스 헬렌: 어렴풋이.
엘사: 그래 가지곤 안돼요. (무대 뒷쪽 움푹 들어간 침실로 가서 자신의 여행가방에서 편지를 꺼내온다)
미스 헬렌: 뭘 하려는 거지?
엘사: 읽으려구요.
미스 헬렌: 싫어! 난 듣고 싶지 않아.
엘사: 이미 알고 계신데요, 뭘. 자신이 쓰셨잖아요.
미스 헬렌: 그래도 거기 대해서 얘기하고 싶진 않아.
엘사: 아녜요, 해야 돼요.
미스 헬렌: 날 윽박지르지 마, 엘사. 난 되받아 싸울 줄 모른다는 거 알잖아. 제발 . . . 그 얘 긴 나중에 하자구. 우리 이럴 순 없을까 . . . .
엘사: 아뇨, 그럴 순 없어요. 답답하게 굴지 좀 마세요. 시간이 오늘밤밖에는 없어요. 내일 좀 있을지 말지 하고요
미스 헬렌: 내 편질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안돼.
엘사: 너무 늦었어요, 미스 헬렌. 난 이미 심각하게 받아들였구, 그거 때문에 800마일을 쉬지도 않고 달려왔다구요. 그리고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세요. 편지 내용 한마디 한마디 모두 진심이셨어요. (침묵) 그런 편지 쓰셨다고 책망하려는 게 아녜요. 도움이 되드리고 싶 어서 온 거라구요. (탁자에 앉아, 촛불을 가까이 끌어당긴 후 편지를 읽는다. 판독하느 라 약간 애를 쓴다. 난필임이 분명하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 엘사에게,
마침내 엘사까지도 나를 잊어버렸나? 이게 네번째 편진데 아직도 답장이 없군.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오늘밤은 내 영혼이 가장 암울한 밤이야. 15년 전에 이미 겪었 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내가 잘못 생각했어. 지금이 더 힘들어. 비교도 안되게 더 힘들어. 그날 밤에는 잃어버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 내 인생의 그 어느것도 붙 잡고 매달릴만큼 소중하거나 가치있는 것은 없었으니까. 지금은 그런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걸 모두 잃게 되었어 . . . 엘사, 이 집, 내 작품, 나의 메카 . . . 모두 다. 나 혼자서는 그 사람들을 대항해서 싸울 수가 없어. 엘사, 난 도움이 필요해. 이제 더이상 내 걱정은 안하나? 시력이 너무 나빠져서 내가 쓰고 있는 글씨조차도 잘 안보여. 난 엘사의 눈을 통해서만 비로서 나의 메카를 볼 수 있어. 난 도움이 필요해. 펜을 잡는 것도 힘에 겨워. 날 좀 도와줘, 엘사.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는데 난 암흑 속에 홀로 있어. 남은 빛이 없어. 이런 식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낫겠어.
항상 엘사를 사랑하는, 고통스러워하는,
헬렌으로부터.
(엘사, 조심스레 편지를 접어서 다시 봉투 속에 넣는다) 집을 잃는다니, 그게 무슨 말씀 이세요? 누가 미스 헬렌을 이 집에서 내쫓으려고 하죠?
미스 헬렌: 내가 좀 과장했어. 그 사람들, 그 일로 날 정말 괴롭히는 건 아니야.
엘사: 그 사람들이라뇨?
미스 헬렌: 교회위원회 말이야. 그게 다 날 위해서 그러는 거래. 그리고 나도 그 사람들이 하 는 말을 이해는 한다구, 그런데, 그냥 . . .
엘사: 천천히, 미스 헬렌, 천천히 말씀하세요. 난 아직도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어 요. 처음부터 다시 해보세요. 교회가 미스 헬렌이나 이 집하고 무슨 상관이 있죠? 난 이게 미스 헬렌 집인 줄 알았는데요.
미스 헬렌: 그래, 내 집야.
엘사: 그런데요?
미스 헬렌: 문제는 집이 아니라, 나야. 위원회에서 나를 논의했어 . . . 내 상황을 . . . 어느 회 의에서 그랬대.
엘사(불신과 분노로): 그 사람들이 어쨌다구요?
미스 헬렌: 마리우스 목사가 그러더군. 그 사람이 그러는데, 교회위원회는 내가 이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걱정스러워했대.
엘사: "그 사람들"이 "당신" 걱정을 한다구요?
미스 헬렌: 응. 그 사람들이 걱정하는 건 내 건강이야.
엘사 (머리를 가로 저으며): 위선에 관해서라면 . . . 그것도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위선에 관 해서라면 . . . 당신네 아프리카 백인들을 따를 자 없죠. 그래, 말해보세요. 그 사람들이 거투르다 할머니 상황에 대해서도 논의했대요? 마을 저쪽 끄트머리에 사는 반 히르덴 부인에 대해서는 어떻구요? 그 부인네들도 미스 헬렌과 비슷한 나이에다가 또 혼자 살 고 있잖아요.
미스 헬렌: 나도 그 말을 했지. 그런데 마리우스 목사 말이, 난 그 여자들하곤 다르대.
엘사: 어떤 면에서요?
미스 헬렌: 글쎄, 다들 알다시피, 내 손하고 또 디른 여러가지 때문에 위원회 사람들은 내가 자 신을 제대로 보살필 수 있다고 믿질 않아.
엘사: 그래, 그 시람들 말이 맞나요?
미스 헬렌: 아니야, 나, 혼자서 얼마든지 잘 꾸려나갈 수 있어.
엘사: 그래, 마을을 떠난다면 어디로 가시기로 되어 있나요? 더반에 산다는, 평생 두어번 밖에 본적이 없는 사돈의 팔촌 벌 되는 조카한테 가실 건가요?
미스 헬렌, 뒤켠에 놓인 작은 탁자로 가서 웬 서류를 가져다 엘사에게 건네준다.
(엘사, 읽는다) "연로자를 위한 썬샤인 홈". 이제 알겠네요. 그래, 이렇게 됐군요. 그 라프 라이酛으로 들어가는 길 왼쪽으로 교회 옆에 있는 오래된 아담한 저택이 바로 그거 군요. 실은 그거 교회가 운영하고 있죠, 그렇죠?
미스 헬렌: 응.
엘사: 그럴 줄 알았어요. 아름다운 정원도 있더군요. 여기 올라오느라 지나칠 때 보면 언제나 서너 명의 "황혼기" 노인네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햇살을 즐기고 있던데요. 이름 한번 잘 붙였네. 무척 아늑해 보이더라구요. 그래, 그 사람들은 미스 헬렌을 그런 식으로 처 리하고 싶어한단 말이죠? 이건 다른 사람 필첸 데요.
미스 헬렌: 응. 마리우스 목사가 대신 써줬어.
엘사: 사려가 깊으시기도 해라.
미스 헬렌: 오늘밤 이거 가지러 올 거야.
엘사: 오랜 친구치고는 미스 헬렌을 보내버리는 데 좀 지나치게 열의를 보이는 거 같네요.
미스 헬렌: 마침 빈 자리가 생겨서 그러는 거야. 평소에는 완전히 꽉 차거든. 거길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퍽 많대. 어쨌든, 난 아직 서명은 안했어.
엘사, 잠시 아무 말 없이 미스 헬렌을 관찰한다.
엘사: 손이 어느 정도로 나쁘세요? 나한텐 솔직히 말씀하세요.
미스 헬렌: "그렇게" 나쁜 건 아니야. 내가 편지에 좀 과장했어.
엘사: 원하시면 그 손으로 아직도 일한 수 있으시겠어요?
미스 헬렌: 그럼.
엘사: 하실 수 없는 일도 있으세요?
미스 헬렌: 엘사, 난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 . . 하려고 노력만 하면.
엘사: 손 좀 보여주세요.
미스 헬렌: 아이, 보지 마. 창피해.
엘사: 어서 보여달라니까요.
미스 헬렌, 두 손을 내민다. 엘사, 찬찬히 살펴본다.
이 딱지들은 뭐죠?
미스 헬렌: 아무것도 아니야. 난로에서 대수롭잖은 사고가 있었어 . . . 엘사 오면 먹이려고 과 일 시럽 만들다가 그랬어.
엘사: 최근엔 대수롭잖은 사고들이 많았던 것 같네요. 좀 더 조심하셔야겠어요.
미스 헬렌: 그럴께. 꼭 그럴께.
엘사: 아프세요?
미스 헬렌: 그냥 조금. (엘사가 손을 관찰하는 동안에) 지난번 여길 다녀간 뒤론, 무사히 도착 했고 곧 편지 또 쓰겠다고 한 그 편지 한 통 뿐이구, 그 후로는 전혀 편지가 없었지, 석 달 동안이나.
엘사: 쓰긴 썼어요. 아주 긴 편지, 두 통이나.
미스 헬렌: 난 하나도 못 받았는데.
엘사: 부치질 않았으니까요.
미스 헬렌: 엘사! 왜 그랬어? 그걸 받았더라면 내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을텐데.
엘사 (머리를 가로 저으며): 그렇잖아요. 뒤죽박죽, 혼란스럽고, 자기 연민에 가득 찬 편지였어 요. 그 동안 어떤 일로 고생하고 계셨는지 이제 알고보니, 내가 썼던 편지들은 여기서 필요로 하는 게 전혀 아니었어요.
미스 헬렌: 그건 잘못 생각한 거야. 어떤 편지였더라도 무소식보다는 나았을텐데.
엘사: 아녜요, 미스 헬렌, 내 말 믿으세요. 그 편지 두 통보다는 차라리 무소식이 훨씬 더 나아 요. 아직도 집에 그 편지들이 있어요.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때마다 그걸 다시 읽어본다구요, 내가 겪었던 혼란을 상기시켜주거든요.
미스 헬렌: 지난번 내가 보낸 편지에 대해서 지금 내가 아주 언짢게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그거 라구. 내 문제는 엘사 거에 비하니까 별로 중요해보이지도 않네.
엘사: 그런 식으로 시작하지 마세요. 누구 문제가 더 중요한지 가려내는 건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돼요. 어쨌거나 내 문제는 이미 완전히 끝난 거고 . . . 그러니 우리한테 남은 건 미스 헬렌 문제 뿐이에요.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미스 헬렌, 대답하지 않는다. 엘사, 인내심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말씀해보세요! 오늘밤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마리우스 목사가 오면 뭐라고 하실 거였 죠?
미스 헬렌: 생각해볼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어.
엘사: 시간을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부탁한다"구요? 어쨌거나,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시는 데 시간이 정말로 더 필요하세요? 원하시는 게 뭔지 자신은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미스 헬렌: 물론 알고 있지.
엘사: 그럼 나한테 말씀해보세요. 그리고 간단히 말씀하세요. 난 그걸 꼭 들어야겠어요.
미스 헬렌: 내가 여길 떠날 수 없다는 건 엘사도 알잖아.
엘사: 잠시 긴가 민가 했어요. 그렇다면 뭐가 문제죠? 오늘밤 마리우스 목사가 들리거든 이거 도로주시고 . . . 서명하지 않은 채로요 . . . 싫다고 말씀하세요. 수고해주신 건 고맙지 만, 지금 계신 이 집에서 아주 행복하고, 또 자신을 돌볼 능력도 있다고 말씀하세요. (미 스 헬렌, 주저한다. 감정적 혼란과 불확신이 증가한다) 미스 헬렌, 자신이 원하시는 게 바로 그거라고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미스 헬렌: 알아. 문제는 마리우스 목사가 아주 설득력 있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서 . . . .
엘사: 맞서 대꾸하세요!
미스 헬렌: 나, 그런 거 잘 못해. 좀 도와줘, 응? 엘사, 부탁이야, 그 사람한테 말 좀 해줘. 엘 사가 나보단 훨씬 조리있게 말 잘 하잖아.
엘사: 싫어요, 난 안해요! 그리고, 제발, 교장실에 불려간 말썽꾸러기 아이처럼 굴지 마세요. 미안하지만, 친구분 마리우스 목사에 대해선 들으면 들을수록 더 맘에 안드네요. 그 사 람하고 나는 서로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으세요. 미스 헬렌을 대신해서 그 사람하고 논 쟁할 게 전혀 없으니까요. 집은 그 사람 집이 아니고, 또 교회위원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생도 그 사람 인생이 아니거든요. 빌어먹을, 지네들이 도대체 뭐야? 탁자에 둘러앉아 서 남의 앞날 일을 지네들이 결정해?!
미스 헬렌: 마리우스 목사가 그러는데, 그 사람들은 날 위해서 최선의 방법을 쁹아내느라고 애를 쓰고 있대.
엘사: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게 아닌 것만은 분명해요. 너무 오래 목숨이 붙어 있어서 모두들 귀찮아하는 늙은이들 무리 속 에 미스 헬렌을 집어넣겠다구요? 미스 헬렌은 아직 자신의 인생을 살고 계셔요, 질질 흘려버리고 있는 게 아니라구요. 그 사람들이 미스 헬렌을 이 집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법적 방법은 미스 헬렌이 정신병자라는 걸 증명하는 것 뿐이에요. (어색한 침묵)
미스 헬렌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 니에요. (또 한번 침묵) 한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혹시, 자살해버리겠다구 떠들면서 돌아다니신 건 아니겠죠?
미스 헬렌: 내가 만나는 사람은 카타리나 밖에 없다구 그랬잖아.
엘사: 그리고 마리우스 목사요. 그 사람 잊지 마세요. 어쨌든, 그게 누군지는 문제가 아니에 요. 그런 말하는 걸 들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으로 충분하니까요.
미스 헬렌: 어쨌거나, 난 그런 말한 적 없어.
엘사: 만약 그러셨다면,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싶어할 땐 그 말한 마디가 그이들 일을 아주 순조롭게 해주는 거라구요. 그러니, 그 얘긴 더 이상하지 말죠. 됐죠? 미스 헬 렌, 아시겠어요?
미스 헬렌: 응, 알았어.
엘사: 기왕 아무에게도 말 안하시기로 하는 김에, 앞으로는 그 얘기 안 듣는 사람들 축에 나도 넣어주세요. 그 얘긴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고 읽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미스 헬렌: 알았다니까! 왜 그걸 갖구 자꾸 그러는 거야?
엘사: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얘기는 "연로자를 위한 썬샤인 홈"에다 누군가를 처넣을 수 있는 근거가 되니까요! 미안해요, 미스 헬렌.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세요? 그런 말 씀은 절대 안하신 척 할까요? 우리 두 사람 처지가 뒤바뀌었다면 나한테 그렇게 하셨을 건 가요? 복잡하고 혼란한 정신상태에서 내가 그런 데로 들어가겠노라고 위협했다면, 그럼 날 그냥 내버려두셨을 건가요? 그러고 싶은 유혹을 두어 번 느꼈었죠. 모든 것이 기막히게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좀 맛도 보았구요. 내가 견딜 수 있으면, 그 럼 미스 헬렌께서 포기하신다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 더군다나 그 사람들과 맞서서 대항한 모든 싸움에서 이미 이기고난 지금에 와선 더 더욱 그럴 수 없어요. 그 러니까 목사가 쁹아오면 용감하게 나서세요. 그 목사하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양로원 에 대한 그 사람의 등신 같은 생각을 자신의 삶에서 쫓아내버리세요. 이따가 "싫다"고 말씀하실 거니까요, 아셨죠? 얼마든지 공손하고 상냥하게 대하셔도 괜찮아요 - 차하고 비스앛을 대접한 다음, 날씨하고 술의 해악에 대해서 얘기하자구요 - 그러다가 때가 오 면 미스 헬렌께서 그 사람의 소고와 배려에 감사한다고 인사하시고, "고맙지만 거절하겠 읍니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면서 이걸 되돌려주시라구요. (또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미스 헬렌의 뜻을 그 사람이 확실히 알아듣도록, 다음 주에는 의사도 만나보고 안경도 ꁹ추러 그라프 라이酛에 가신다는 말씀도 덧붙이세요.
미스 헬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엘사: 내가 말한 그대로에요: 의사들하고 약속이 있으세요.
미스 헬렌: 아니야, 난 아무 약속도 없어.
엘사: 월요일에 있을 거에요. 다음 주에 미스 헬렌을 그라프 라이酛에 모시고가라고 내일 아침 떠나기 전에 내가 거투르다 할머니한테 부탁할 거에요. 이번엔 꼭 가셔야 해요. 그 손 을 치료하는 방법이 뭐든 있겠죠. 적어도 통증이라도 좀 낫게 해줄 거에요. 그리고 요 즘 우울증에도 도움이 될 거구요. (미스 헬렌, 무슨 말인가 하고 싶어한다) 다른 말씀 마세요! 허영심 따윈 좀 집어치세요. 자신이 이 마을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고 계시 는 거, 우리 다 알아요. 하지만 안경이 필요하면 안경을 써야죠. 의사 만날 약속은 내 가 해놀테니까,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지 나중에 전화로 알려주세요. 나, 지금, 재밌자구 이러는 거 아녜요. 자신을 제대로 보살필 능력이 있다는 걸 마을사람들한테 증명해보이 셔야 한다구요. 그것만이 사람들 입을 다물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미스 헬렌: 너무 빨라서 정신을 못 차리겠네. 나한텐 말할 기회도 안 주구.
엘사: 옳은 말씀이세요. 과거에도 이런 일에 대해서 우리 두 사람이 마주앉아 수도 없이 얘
기했죠? 그리고 매번 같은 소리예요: "생각해볼께, 엘사". 미스 헬렌 생각은 한번도
결론을 내려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 이번엔 그냥 동의나 하세요 . . . 그리고 그 동의엔
카타리나가 일주일에 두어 번 와서 집안일 거드는 것도 포함되는 거예요.
미스 헬렌: 걔가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걸. 나 혼자서 다 할 수 있다구.
엘사: 아녜요, 못하세요. (가구 위를 손가락으로 훑어서 미스 헬렌이 먼지를 볼 수 있도록 그 손가락을 들어보인다)
미스 헬렌: 이렇게 올 줄 미리 알았더라면 모든 걸 깨끗하게 청소해놨을텐데.
엘사: 항상 깨끗해야죠! 내가 올 때하고 휴가 때는 그까짓 거 아무래도 괜찮아요. 여기서 사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미스 헬렌이에요. 난 지금 "내 생활"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구요. 그리고 난 장님이 아니에요. 그 큰 물주전자 들고 쩔쩔매시는 거 봤다구요. 그래, 그 얘기나 좀 해보죠. 물 데워서 목욕다운 목욕 해보신 게 얼마나 됐죠? 말씀해보세요. 생각도 안 나죠? 자신에 대해 신경을 안 쓰시는 이유가 게으른 탓인가요, 아니면 신경 쓸래야 쓸 수도 없게 됐기 때문인가요? 말씀해보세요.
미스 헬렌: 더이상은 못 듣겠군. (방에서 나가려 한다)
엘사: 나한테 그런 식으로 나오지 마세요! 지금 이 방에서 나가시면 나 당장 케이프 타운으로 돌아가버릴 거에요. 그 편진 당신이 쓰신 거에요. 내가 만들어낸 편지가 아니라구요. 난 지금 거기에 대처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뿐이에요.
미스 헬렌: 아니야, 그러고 있는 게 아니야.
엘사: 그렇다면 난 기권이에요. 도대체 우리가 무슨 얘길 하고 있었죠?
미스 헬렌: 안경하고, 내 관절염 약하고, 카타리나가 집안 청소하는 거하고 . . .
엘사: 편지 다시 읽어드릴까요?
미스 헬렌(그 말 무시하며): 그 편질 무슨 쇼핑목록처럼 취급하고 있는데, 내가 쓴 얘긴 그게 아 니야.
엘사: 그럼 뭐에요?
미스 헬렌: 암흑! 암흑이라구! (엘사로 하여금 말없이 귀기울이도록 하는 강렬한 감정과 권위 를 가지고 말한다) 15년 전 어느 날 밤 이 집에서 내 인생을 질식시킬뻔 했던 바로 그 암흑 말이야. 어렸을 때, 한밤중에 굴뚝에서 내 방으로 밀려들어와 날 두려움에 떨게 했 던 것과 똑같은 암흑. 아직도 내 말 못 알아듣겠으면 촛불을 불어꺼봐. 하지만 그건 이 겨내기 쉬운 암흑이야. 내가 지금 말하는 암흑은 훨씬 더 무서운 거야. 엘사, 그게 내 속에 있어. 마침내 그 암흑이 내 속으로 들어왔는데 거기에다는 촛불을 켤 수가 없어. (침묵)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는 정말 몰랐어. 난 내가 안전한 줄 알았거든. 이젠 어른이 되었구, 나한테 양초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 . . 엄마가 몸을 굽혀 키스한 후 촛불을 가져 가버리는 순간이 너무 무서워서, 취침기도를 될 수 있으면 오래 끌어보려고 애쓰며 침대 에 누워 있는 어린애 머리 속엔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어 . . . 언젠간 자기도 자기만의 촛불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 그건 약속이었어: 내가 좀더 자라면 내 맘대로 촛불 을 켤 수 있도록 엄마가 내 침대 머리맡에 양초 하나를 남겨놓으리라는 약속. 그리고 "자란다"는 건 나한테 그것만을 의미했어 - 머리맡에 내 촛불을 갖는다는 거.
용감하기 그지없는 작은 불빛! 그 불빛은 어떻게 하면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 그 어린 여자애한테 가르쳐주었어! 한밤중에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면서 그 애는 용기가 무엇 인지 알았지. 그래, 일생동안 내가 용기를 내도록 도와준 건 촛불이었어 . . . 지금까지 는 그랬어. 엘사, 난 무서워. 그 어린애가 무서워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워하고 있어. 이젠 가다려봐야 더 자랄 일도 남아 있지 않고,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할 기도도
없고 . . . 그리고 이젠 촛불도 아무 도움이 안돼. 그게 바로 내가 하려던 말이었어. 난 무서워. 그리고 마리우스 목사는 내가 무서워하는 걸 알고 있다구. 그 사람 바보는 절 대 아니거든. 드디어 자기가 개입할 순간이 왔다는 걸 알고 있다구.
엘사: 개입할 순간이라뇨?
미스 헬렌: 그 사람은 내가 나의 메카의 끝에 이르기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어. 기다리지 않 도록 내가 그 사람을 속인 줄 알았는데, 그런 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도록 말이야.
내가 일에 몰두하면서 보낸 그 숫한 세월 동안, 메카가 서서히 형체를 잡아가고 있는 동 안, 그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지 . . .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면서, 가다리면서.
이따금 커튼 사이로 그 사람을 훔쳐보곤 했지. 우리집 앞을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는, 문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서 내 동방박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어. 아무 말도 하진 않 았지만 내 작품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걸 난 알아. 난 일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 는 버릇이 있었는데, 한번은 내 노래소릴 듣고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렇게 물어보더라 구: "헬렌, 정말 그렇게 행복하오?"
난 웃었어. 그 사람을 보고 웃은 게 아니라, 그 사람은 절대 이해 못할 비밀이 있었기 때문에 웃었어.
이젠 그 사람이 웃을 차례야. 물론 웃진 않겠지만.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니까. 다 시 아주 상냥해지겠지 . . . 15년 전 그날 밤처럼 . . . 커튼을 치고 덧문을 닫아줄꺼야 . . . 죽음이 다녀간 집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되니까.
엘사, 내 메카가 끝나면, 그 땐 내 인생도 끝이야.
엘사, 무력감과 패배감에 뒤덮인다.
엘사: 그만하세요. 하루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요. 길에서 만난 그 여자, 그리고 이제 미 스 헬렌. 솔직히, 이걸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어요. 사실, 이 순간, 난 아무것도 모 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애를 등에 업고 크래독까지 80마일을 걸어서 간다는 것이 어떤 건지 난 몰라요. 미스 헬렌의 메카가 끝났는지 안 끝났는지도 모르겠구요. 그리고 암흑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어두울 땐 불을 켠다는 게 고작이에요. 빌어먹을! 누가 와서 이게 다 무슨 뜻인지 말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래, 이제 우린 어디에 와 있는 거죠?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목사가 오면 어떻게 할 작정이세요? (대답이 없다) 제발,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실 건 가요? 내가 지 금 당장 말씀드릴 수 있는 거 하나는, 그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만약 오늘밤 "싫다"는 말씀을 못하시면 앞으로도 계속 못하실 테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오늘밤 그 서 류에다 서명해서 그 일을 깨끗히 끝내버리시는게 나아요. (가혹하고 매정한 어조로) 그 일이 결정될 때까지는 다른 얘긴 할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보 시는 게 좋을 거에요. 생각하시는 동안에 난 저녁 준비나 하겠어요.
엘사, 부엌으로 퇴장. 무대 뒤에서 남자 목소리: "아무도 안 계신가?" 마리우스, 집안 으로 들어선다.
마리우스: 미스 헬렌! 어둔 데서 혼자 있소? 난 아무도 없는 줄 알았구먼.
엘사, 부엌에서 등장.
아, 미스 바로우!
1막 끝
2막
몇 분 후 같은 무대. 마리우스와 엘사는 미스 헬렌과 함께 탁자에 둘러앉아 있고, 모두 의 관심의 대상은 마리우스가 가져온 야채 바구니이다. 마리우스는 미스 헬렌과 동년배 이며, 단정하면서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다. 그는 꾸밈없고 성실하게 호감이 가게끔 이 야기한다.
마리우스(감자 하나를 집어들며): 이것 좀 보십쇼, 미스 바로우! 스네우버그 토종 감잡니다! 소 금 좀 치면 이거 하나로도 식사가 되고, 사치스럽고 싶을 땐 여기다 버터를 조금만 바르 면, 정말 근사한 잔치가 되죠. 지난 주에 감투스 마을에서 농부 한 사람이 우리한테 감
자를 팔려구 여길 왔더군요! 내 말 못 믿겠죠? 헬렌, 당신, 그 농부 보았소? 우체국 앞에다 자기 트럭을 세워놓더라구. 미스 바로우, 그런 경우에 영국에서 쓰는 표현 있잖 습니까 - 석탄을 어디로 가져간다더라?
엘사: 뉴캐슬 탄광으로요.
마리우스: 바로 그겁니다! 헌데, 이 경우에는 거의 모욕적인 행위라고도 볼 수 있죠. 우린 진짜
감자가 어떤 건지 안다는 데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여기선 그 진짜 감
자를 맛볼 수 있답니다. 불란서 사람들이라면 아마 "대지의 사과" 라고 불렀을 걸요. 어쨌든, 그 불쌍한 농부, 다신 나타나지 않을 겝니다. 딱하기도 하지! 나중엔 정말 측은 한 생각이 들더군요. "여기 사람들은 감자를 좋아하지 않나요?" 라고 나한테 묻는데, 거 기다 대고 뭐라고 하겠소? 여기까지 오느라고 시간 낭비했고, 스네우버그에 감자 팔러 오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매정하게 말해줄 수도 없고. 그리고나서 내 마음 을 정말로 아프게 한 건, 그 농부, 떠나기 전에 나한테 감자 한 푸대를 거저 주겠다구 우 기는데. . . 집에 돌아갈 휘발유 값만큼도 팔지 못했을 텐데 말이오.
당신 줄려고 순무하고 토마토 좀 가져왔어요. 순무철은 지났지만, 절여서 병에 넣어두면
먹을 만해요. 여기 우리 친구에게 그 맛 보여준 적 있나? (엘사에게) 우리 지방 특산 물중 하납니다. 내가 두 숙녀분께 장담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신선한 야채는 처음이실
거라는 거죠. 오늘 오후에 내가 직접 캐냈거든요.
미스 헬렌: 친절하기도 하세요, 그렇게까지 수고하실 필욘 없으셨는데.
마리우스: 수고라니, 원. 나 먹을 건 식품고에 넉넉히 저장해놨어요. 그리고, 헬렌, 우리 나이엔 신선한 야채를 먹어야 되요. (헬렌에게 손가락 하나를 좌우로 흔들어 보이며) 비스앛 하고 차는 균형잡힌 식사가 아니에요. (엘사에게) 옛날엔 헬렌도 저 마당에다 썩 훌륭한 야채밭을 갖고 있었죠. 하지만, 보시다시피, 비천한 토마토는 다른 것들한테 자릴 뺏겨 서 지금은 무우하나 심굴 자리도 남아 있지 않아요. (바구니 쪽으로 몸을 돌리며) 선량 하신 하느님께서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셨지요. 우리가 그런 은혜 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적시에 비를 내려주셨어요. 너 무 많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게. 미스 바로우, 이곳 사람들은 가뭄과 홍수 두 가지에 다 경험이 많답니다. 그렇잖소, 헬렌?
엘사: 오늘 오후 차를 타고오면서 보니까 카루가 아주 건조하고 황폐해 보이던데요.
마리우스: 건조한 건 분명하지만, 황폐하진 않아요. 도회지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비칠지도 모 르지만 - 실은 여기 처음 왔을 땐 내 눈에도 그렇게 비쳤으니까요! - 그런데 그렇게 보 이는 건 가을이 깊었기 때문이죠. 비를 보려면 앞으로 서너 달은 족히 걸릴 겁니다.
엘사: 여기 이 세상에도 사계절이라는 게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온화한 계절은 말 할 나위도 없구요. 나한텐 항상 양 극만 있는 풍경이었으니까요 - 너무 덥거나 너무 춥거 나, 너무 건조하거나 아니면 마을을 외부와 단절시킬 정도의 심한 홍수가 있다고 미스 헬렌이 나한테 편지를 보내거나 - 여긴 언젠가 읽은 책에서 나오는 "인간없는 신의 세 계"라고 묘사한 사막을 연상시키는 곳이에요.
마리우스: 흥미있는 착상이군요. "인간없는 신의 세계"라. 그게 가톨릭적 생각인지 기독교적 생각인지 잘 모르겠군. 혹시 알고 있소?
엘사 (머리를 저으며): 아뇨.
마리우스: 누가 쓴 거요?
엘사: 불란서 작가요. 발자크. 내가 카루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요약해주는 표현이죠.
그 전지전능하신 분께서는 인간이 여기 있는 걸 특별히 반가워하시지는 않는 것 같은데, 안 그런가요? 실은, 인간이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불쾌해하시는 것 같아 보일 정도에요. 죄송합니다, 목사님. 이곳 세상을 야박스럽게 본다거나, 신성을 모독할 의도는 전혀 없어요. 난 그저 여기보다는 훨씬 온화한 세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에 요.
마리우스: 여길 너무 가혹하게 판단하시는군요, 미스 바로우. 여기도 나름대로의 온화한 순간과 분위기가 있지요 . . . 흔치 않기 때문에 그만큼 더 소중하구요. 우린 그걸 당연히 받아 들일 수는 없어요. 보시다시피, 그게 우릴 먹여 살립니다. 그 어느 누가 자신이 살고 있는 땅덩이에서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있겠소?
엘사: 그런 일에 대해서 여기 사는 흑인들도 목사님처럼 느낄 거라고 생각하세요?
마리우스: 그 사람들한테라고 다를 까닭이 있겠소?
엘사: 그 사람들도 목사님처럼 만족할만한 이유를 많이 갖고 있는지 그냥 궁금해서요.
마리우스: 미스 바로우, 난 소박한 감사의 마음에 대해서 말한 겁니다. 만족이란 좀더 복잡한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지 않소? 아주 쉽게 동요될 수 있는 감정 말이요. 하지만, 감사하 는 마음? 물론 우리 흑인들도 감사해야 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죠. 그 사람들한테 물어 보시오. 미스 헬렌을 성실하게 찾아오는 카타리나한테 자신이나 어린 것이 한번이라도 먹을 게 없어서 곤란한 경우가 있었는지 물어보시오 . . . 남편 쿠스가 번 돈을 술로 날 려버렸을 때조차 말이오. 미스 바로우, 이 마을엔 백인이던 흑인이던 굶는 사람은 없어 요. 그리고 남들보다 운이 좋은 우리들은 그런 행운에 수반되는 책임에 대해서도 잘 알 고 있지요. 난 논쟁을 벌일 의사는 없소. 여긴 나의 세계요, 또 헬렌의 세계니, 외부 사 람이 우리처럼 우리세계를 사랑하고 이해하길 기대할 순 없겠죠.
엘사: 미스 헬렌, 이거 (야채를 가리킨다) 내가 치워드릴께요.
마리우스: 애써 바구니 비우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일 예배 후에 갖고 갈 테니까. (방을 나가는 엘사 등을 향하여) 야채는 씻을 필요 없어요. 내가 벌써 씻었으니까. 그냥 곧장 냄비에 넣기만 하면 되요.
엘사 퇴장.
잘못하다간 당신 젊은 친구하고 나하고는 쉽사리 논쟁을 벌일 것 같군 그래. 내 생각으 론, 미스 바로우는 우리네 구식 사고방식이나 태도가 답답한가봐, 하지만 우리로선 그걸 바꾸기엔 너무 늦었지. 그렇잖소, 헬렌?
미스 헬렌: 그것 때문에 이미 논쟁이 있었어요.
마리우스: 우릴 대신해서 훌륭하게 변호했길 바래요.
미스 헬렌: 나로선 최선을 다 했어요.
마리우스: 그런데도 당신네 두 사람은 여전히 사이좋은 친구군.
미스 헬렌: 아, 물론이죠.
마리우스: 그래야지. 진정한 우정이란 자기 의견과 다른 의견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하구말구. 지난번에 우리가 만났을 땐 저 친구 온다는 얘긴 없었는데 . . .
미스 헬렌: 그 땐 몰랐거든요. 이번에 온 건 뜻밖이었어요.
마리우스: 오래 있을 건가?
미스 헬렌: 오늘밤 자구 내일 돌아간대요.
마리우스: 저런! 하룻밤 지내러 그 먼 길을 오다니. 무슨 일이 생겼나?
미스 헬렌: 아뇨.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서 왔는데, 학교 일이 바빠서 빨리 돌아가야 한대요. 시험기간이래요.
마리우스: 그랬군. 나, 잠깐 앉아도 괜찮겠소?
미스 헬렌: 물론이죠, 마리우스. 아이, 미안해라. 이젠 내가 예의도 잊어버리고 있네.
마리우스: 오래 있진 않을 거요. 내일 할 설교를 좀 정리해놔야 되거든. 그리고 내일 설교는, 당신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게 됐어요.
미스 헬렌: 나 때문에요?
마리우스: 음, 당신 때문에. (미스 헬렌을 놀리며) 당신이 책임져야 해요.
미스 헬렌: 어머, 이를 어쩌나!
마리우스 (조용히 웃고나서): 안심해요, 헬렌. "당신 때문"이라고 말한 건, 오늘 오후에 여기 가 져올 야채를 캐면서 그 생각이 났기 때문이오. 마당에 나가 야챌 캐면서, 삽에 기댄 채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아. 등이 다시 또 좀 아프고, 솔직히 말하면, 게으름도 좀 피우고 싶었구.
뭘 특별히 생각했던 건 아니구 . . . 그냥, 늙은이들이 하듯이, 주위를 둘러보고, 새삼스레 이름들을 불러보는 거야 . . .저 멀리 있는 건 스쾻스캅, 그리구 저 아래 보이는 건 아스 보엘크란스. 가을 잎이 무성한 채 주변에 늘어서 있는 포풀라는 마치 저 촛불처럼 샛노 랗고 꼿꼿해!
그리고는 지난 일들을 회상하는 거야.
당신도 알잖아, 헬렌. 여기 처음 왔을 때 내 영혼은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지. 결코 치 유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상처들이었어. 여긴 내가 인생으로부터 도망쳐서, 인생에 등을 돌리고, 당신네들의 소박한 요구에 봉사하는 것으로 내 남은 생애를 정당화시키려던 장 소였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어. 여기서 난 인생을 회피하기는커녕 인생을 발견했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 충만함과 선량함을 발견했어. 알레타가 살아서 그러 한 발견을 함께 나누지 못한 게 참으로 한이 돼. 어쨌든,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웬 작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감사합니다" 하더라구. 부삽 하나 가득 흙을 떠낸 다음, 무릎 을 꿇고 흙 속에서 감자를 캐낼 때마다, "감사합니다"라고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어.
그런데 그게 바로 내 목소리였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우리 늙은이들이 하듯이 내 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던 거야.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게 바로 나였다구.
내일 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라오.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이제까지 전혀 시도해 본 적이 없었던 새로운 방법으로.
설교단에 서서 당신네들에게 바로 그렇게 하라고 수없이 말해왔지.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 마리우스 빌레벨트의 영혼이 그 얼마나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었는지 상상도 못할 거요. 헬렌, 난 배우의 허영심을 가지고 설교단에 섰었오. 철저한 위선자였다는 말은 아니지만, 하느님께 대한 감사 설교 속에서 난 목사로서의 내 목소리를 듣고 있었고,
내 마음 속에 있는 참된 목소리, 오늘 오후에 내가 분명히 들은 그 참된 목소리에 귀기 울이듯이 자신의 희망찬 열변에 현혹되어 있었오.
내일 설교엔 내 마음 속의 그 작은 목소리로 말할 거요. 그렇게 하기 위해선, 오늘 오후 내 머리 위에 있던 하늘처럼 소박하고, 삽질로 들어올린 흙처럼 소박한 말을 찾아내야 해요. 하늘과 땅은 허영도 없고 기만도 없으니까. 그냥 존재할 뿐이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 땅에 비를 내려주시어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가 일 용할 감자를 주시옵소서 . . . (이 온화한 말장난에 미소지으며) 헬렌,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말이 되나? 솔직히 말해봐요.
미스 헬렌: 네, 좋아요. 그리고 지금 나한테 들려주신 이야기를 그대로 하시면 무척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설교가 되겠네요.
마리우스: 정말이오, 헬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미스 헬렌: 물론 정말이죠.
마리우스: 그럼, 그렇게 해봐야지.
다음 달이면 내가 이곳에 온지 20년이 되오. 그래, 20년 동안이나 여기 있었지. 21년 전, 5월 16일, 하느님께서 나의 알레타를 당신 곁으로 불러가셨고, 그 다음 해 6월 11일, 뉴 베데스다에 와서 내 첫번째 설교를 했고 . . . (그때를 회상하며 조용히 웃는다) 잊지 못할 순간이었어.
사람들이 눈치챘는지 모르지만, 헬렌, 지금 고백하겠는데, 설교단 앞에 서서 줄줄이 늘어 선 준엄하고 강인한 얼굴들을 내려다보는 순간, 난 그냥 약간 떨린 정도가 아니었다오. 그때까지 내가 설교해온 도회지 회중들과는 완전히 달랐거든. 설교가 끝나고 미스 드 클러크가 찬송가 첫 소절을 연주했을 때에야 비로소 난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 단 한 사람도 졸지 않았거든! (미스 헬렌, 머리를 가로 젖는다) 왜?
미스 헬렌: 미스 드 클러크는 나중에 온 사람이에요. 처음 예배를 봉헌하시던 땐 미세스 니우트 가 우리 올간 연주자였구요.
마리우스: 확실해요?
미스 헬렌: 네. 나중에 반 히르덴씨 집에서 당신을 위해 열었던 환영회에서도 미세스 니우트가
연주했는 걸요. 피아노는 그 여자가 치구, 스털링 레티프가 노래를 불렀죠.
마리우스: 듣고 보니 정말 당신 말이 맞아! 세상에, 헬렌, 당신 기억력이 나보다 더 좋군!
미스 헬렌: 그리고 떨 이유가 하나도 없으셨어요. 아주 인상깊은 설교였죠.
마리우스 (다른 일을 회상하느라 잠시 침묵): 그래, 맞아. 그 회중 속에 당신도 있었지. 스테파 누스가 당신 옆에 있었고. 그 후 일요일마다 빠지지 않고 나왔지. 얼마 동안이었더라?
5년?
미스 헬렌: 네, 5년요.
마리우스: 아주 오래 전 일이었지.
미스 헬렌: 오래 전 정도가 아니라 마치 전생에서 있었던 일처럼 느껴져요.
엘사, 차와 샌드위치를 담은 쟁반을 들고 등장.
마리우스: 아, 저녁식사가 오는군. 난 이만 가보겠오.
엘사: 그냥 샌드위치에요, 목사님. 우린 두 사람 다 별로 배가 안 고파서요.
마리우스: 괜찮다면 내일 저녁쯤 들르리다, 헬렌.
엘사: 차라도 한 잔 같이 하지 않으시겠어요? 저렇게 좋은 야채를 가져오셨는데, 우리로서 최 소한 차대접은 해야죠.
마리우스: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헬렌 말이, 단 하룻밤만 머무실 거라던데. 두 분께서만 나 눌 얘기들이 있을테죠.
엘사: 그런 얘긴 벌써 많이 했어요, 그렇죠, 미스 헬렌? 나 때문이라면 제발 가지 마세요. 난 학교 일도 할 게 좀 있거든요. 차 가지고 다른 방으로 갈께요.
미스 헬렌: 엘사, 가지 마!
엘사: 미스 헬렌, 채점할 게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두 분께서 말씀 나누시는 동안 난 조용히 채점이나 할래요.
미스 헬렌: 제발!
엘사: 알겠어요. 내가 이 방에 있길 원하시면, 그럼 일거리를 가지고 나와서 여기서 하죠.
마리우스: 아니요, 이거 내가 불편한 시간에 왔구먼.
엘사: 전혀 그렇지 않아요, 목사님. 미스 헬렌이 목사님을 기다리시고 있었는 걸요.
엘사, 양로원 응시서를 가져다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엘사와 마리우스 사이에 잠시 침 묵이 흐른다. 마리우스, 확인하기 위해 미스 헬렌을 돌아본다.
미스 헬렌: 그래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엘사: 차 어떻게 드시겠어요.
마리우스: 좋소. 정히 그렇다면, 설탕은 넣지 말고 우유만 좀 넣어주구려.
엘사, 차를 따른 후 침실에서 여행가방을 가지고 나와 방 뒤쪽에 놓여 있는 작은 탁자에 서 일할 준비를 한다.
헬렌, 이 문제를 분명히 지금 상의하고 싶소?
미스 헬렌: 네, 그래요.
마리우스: 내일 해도 돼는 데.
미스 헬렌: 아녜요. 나, 지금 준비됐어요.
마리우스: 알았소. 얘기 시작하기 전에, 헬렌, 좋은 소식이 있소. 그라프 라이酛에 있는 게리크 목사하고 다시 얘길 했는데, 그 방은 이제 확실히 당신 거래요 - 내 말은, 당신이 원한다 면 말이오. 그렇지만 그 방을 무한정으로 비워놓을 순 없는 게 당연하고. 실은, 개인적 으로 봐줘서 당신을 신청자 목록 첫번째로 올려놓은 것도 규칙위반이거든. 그 사람들이 당신 상황을 이해하니까 가능했지만. 그러니, 가든 안 가든 결정은 빨리 할 수록 좋아요. 이 일이 당신한테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나도 잘 알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서둘러 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말고, 당장 짐을 싸야 한다거나, 뭐, 그런 일을 해야 한다 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양단간에 결정은 해야겠지만, 일단 결정한 후엔, 마음을 느긋이 먹고 서서히 움직이면 된다구.
마리우스, 안경과 작은 수첩, 연필, 만년필을 상의 주머니에서 꺼낸다. 모든 것을 조심스 럽고도 정확하게 다루는 그의 태도에서 꼼꼼하고 깔끔한 성격이 엿보인다. 그리고 나서 지원서를 펼친다. 미스 헬렌, 앞으로도 여러 번 있을 절망적이고도 호소하는 듯한 눈길 을 엘사에게 최초로 보낸다. 엘사, 자기 일에 몰두해 미스 헬렌의 눈길을 의식하지 못한 다. 마리우스, 안경을 낀다.
지난 번에 같이 훑어보긴 했지만, 아직도 몇 가지 문제가 남았군. 그래 . . . 스테파누스 부친 성함은 페트루스 요하네스 마틴스로 적었는데, 교회등록부에는 페트루스 야코부스 로 기록돼 있더군. (안경을 벗는다) 헬렌, 어떤 게 맞소? 생각나요? 지난 번엔 페트 루스 요하네스가 확실하다고 했잖소.
미스 헬렌: 지금도 확실해요. 그런데 그 다른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마리우스: 페트루스 야코부스.
미스 헬렌: 야코부스 . . . 요하네스 . . . 아냐, 확실치 않은 거 같아요.
마리우스: 그렇다면, 페트루스 제이. 마틴스로 적는 게 좋겠군. 확인해보길 잘 했네. (다시 안 경을 쓰고 서류를 들여다본다) 다음은 . . . 그래, 그렇지. 당신이 견진례한 날짜야, 그 증서 찾을 수 있읍디까?
미스 헬렌: 아니, 못쁹았어요. 죄송해요, 마리우스. 쁹아보긴 했는데, 서류뭉치가 온통 뒤섞여 있어서 . . .
마리우스 (안경을 벗으며): 교회 기록을 다 들춰보았는데, 그것만은 전혀 비슷한 것도 없더라구.
물론, 아주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견진례 날짜도 알면 좋았을 텐데. (다시 안경을 쓴다) 어디 보자 . . . 어떡할까? 12살쯤이었을 거 같소?
미스 헬렌: 그 정도 됐었을 거에요.
마리우스: 이렇게 합시다. 1920년이라고 써넣고 한번 더 찾아봐야지. 견진례 날짜만은 포기하 기가 정말 싫거든. 헌데, 헬렌, 난 정말 놀랐오 - 하고 많은 날짜 중에서 그 날을 잊어 버리다니.
이제 서류는 이걸로 다 됐고. (수첩을 들여다본다) 그렇지. 게리크 목사가 묻는 질문 두개만 대답하고 나면 편히 쉬고 저녁식사를 할 수 있어요. 그 사람이 나한테 묻습디다 - 내 말 믿어요, 헬렌, 그 사람이 물어보는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현실적으 로 도움이 되고 싶은 생각에서 그러는 거에요 . . . 당신이 마지막 유언하고 유서를 다 작성했냐구 물어보더군. 그래, 모르겠노라고 했소.
미스 헬렌: 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마리우스: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당신 집과 재산이 당신 원하는 대로 처분될 거라는 말인데, 그 걸 이미 해놓았소?
미스 헬렌: 남편 유언장 사본은 아직도 나한테 있어요. 스테파누스는 모든 걸 나한테 남겨주었 어요.
마리우스: 헬렌, 우린 지금 당신 얘길 하고 있는 거에요. 변호사는 만나봤오?
미스 헬렌: 아뇨, 난 . . . 난 그런 건 전혀 생각도 안 해봤어요.
마리우스: 그럼 게리크가 그걸 물어보길 잘 했군. 헬렌, 난 목사로 있으면서 그런 면을 간과했 기 때문에 일어난 딱하고 불행한 상황을 너무 많이 봐왔오. 서로들 말도 안하고 사는 가족들이 없나! 몇 개 되지도 않는 가구 때문에 소송을 걸고! 이 문제만은 꼭 당신이 알아서 처리해야 돼요. 우리 나이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구. 나도 내 유서를 수정했지. (수첩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능한 한 빨리 당 신이 양로원을 방문하도록 주선해놓자고 하더군. 원장하고 거기 있는 다른 사람들을 한 번 만나보고, 당신 방도 구경해볼 겸해서. 방을 보고 나서야 가져와야 할 물건들도 뭔지 알게 된다고, 방은 꼭 미리 보길 바라던데. 몇 달 전에 어느 여자가 방에 자기 집 살림 살이를 전부 가져다 옮겨넣으려고 하는 통에 골치께나 썩혔다더군. 그렇다고 너무 걱정 하진 말아요. 개인 물건하고 서너 개 . . . 장식품 넣어둘 자리는 충분히 있으니까. 이 만하면 할 얘기 다 한 것 같군. 이제 남은 일이란 여기다 서녕하는 거 뿐이네. 물론 그 러길 원한다면 말이오. (만년필 뚜껑을 열어 서류 위에 올려놓는다)
미스 헬렌: 저어 . . . 나, 얘기 좀 해도 되죠?
마리우스: 거야 물론이지, 헬렌.
미스 헬렌: 지난번에 얘기한 후로 그 동안 생각 많이 해봤어요.
마리우스: 그래야지! 생각이 필요하다는 건 우리 둘 다 같은 생각이었잖소. 이건 절대로 가볍 게 결정할 일이 아니지.
미스 헬렌: 그래요, 그래서 생각 많이 했고, 그리고 계획도 하나 세웠어요.
마리우스: 계획이라니?
미스 헬렌: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는 계획요.
마리우스: 거, 아주 훌륭하군!
미스 헬렌: 다음 주에 그라프 라이酛에 갈 거에요, 의사 보러요. 약속은 월요일에 해놀 거에요.
거투르다한테 좀 태워다달라고 부탁할 생각이구요.
마리우스: 심각한 것 같군.
미스 헬렌: 아녜요, 그냥 관절염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약이나 좀 받아올려구요.
마리우스: 난, 또, 잠시 걱정했구먼. 화상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줄 알았지. 그렇다면, 돈도 절약할 겸 양로원에 있는 닥터 루브를 만나보지 그래요? 닥터 루브가 거기 사람들을 모 두 무료로 봐주고 있는데.
미스 헬렌 (계속해서): 그리고 안경도. 시력검살 받고 안경도 하나 마련하려고요.
마리우스: 아주 좋은 생각이요, 헬렌. 그 동안 과연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군.
미스 헬렌: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타리나더러 일주일에 두세 번 와서 집안 일 좀 거들어달라기 로 결정했어요.
마리우스: 카타리나?
미스 헬렌: 네, 쿠스 처 말이에요.
마리우스: 누구 얘기하는 건지는 나도 알아요. 그게 아니라 . . . 원, 참, 이런 말을 하필이면 내 가 하게 되다니 . . . 어쨌든, 카타리나는 잊어버려야 될 것 같소.
미스 헬렌: 그게 무슨 말씀이죠?
마리우스: 쿠스가 애버딘 군수창고로 이전시켜달라고 요청했는데, 내 생각엔 그렇게 될 것 같소.
미스 헬렌: 그래서요?
마리우스: 카타리나하고 아기도 같이 가겠지.
미스 헬렌: 카타리나가 . . . ?
마리우스: 마을을 떠날 거요.
미스 헬렌: 아녜요, 그럴 리가 없어요.
마리우스: 사실이오, 헬렌.
미스 헬렌: 하지만 나한텐 그런 얘긴 한 마디도 없었는 걸요. 바로 이삼 일 전에도 여길 왔었는 데 떠날 거라는 말은 전혀 없었어요.
마리우스: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 게지.
미스 헬렌: 마리우스,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중요하다 마다요! 내가 자기한테 얼 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걔도 잘 알고 있다구요. 카타리나가 떠나면, 당신하고, 가끔 찾아 오는 엘사를 제외하면, 난 여기서 완전히 혼자에요. (점점 고민에 빠진다)
마리우스: 그만해요, 헬렌. 그 정도로 나쁜 건 아니오. 카타리나가 아주 착한 여자고, 또 당신 이 그 애를 아주 좋아한다는 건 나도 알지만, 일을 과장하지는 말아요. 여기 와서 당신 을 도와주고 짐 싸는 일 거들어줄 선량한 여자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 . . 만약 당신이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하면 말이오. 이렇게 하도록 하지. 당신 물건이 낯선 사람들 손에 맡겨지는 게 싫다면 우리집 논나 할멈을 보내리다. 그 할멈은 10년이나 나를 돌봐주었 는데, 그 동안 잃어버린 게 단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그 사람은 완전히 믿어도 돼요.
미스 헬렌: 난 지금 하인 얘길 하고 있는 게 아녜요, 마리우스.
마리우스: 난 그런 줄 알았는데 . . .
미스 헬렌: 카타리나는 이 마을에서 나한테 남은 하나밖에 없는 친구에요.
마리우스: 그렇게 말하는 건 좀 심하군, 헬렌. 우린 모두가 예나 다름없이 당신 친구라고 생각 하는데.
미스 헬렌: 당신은 제외하고요, 마리우스. 당신은 달라요. 하지만 다른 이들은 . . . 모두 나한 테는 이방인들이 됐어요. 그 사람들 모르는 게 차라리 나아요. 그리고 그 사람들 역시 날 이방인 대하듯 하는 걸요.
마리우스: 그건 아주 부당한 말이오, 헬렌. 그 사람들은 당신이 자기들한테 바라는 대로 당신 을 대하는 거에요.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건 자기를 완전히 홀로 있도록 내버려두라는 거고. 이방인들이라니, 너무 심하군. 거투르다 할멈, 스털링, 제리, 보에트, 미세스 반 히르덴이? 당신은 그 사람들과 같이 이 마을에서 자랐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헬렌, 그 사람들이 당신한테서 멀어지는 건 당신 태도 때문이지. 지난 수년 동안 당신이 얼마 나 많이 변했는지 아마 자신도 모를 거요. 15년 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이 지금의 당신 이라고는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당신 취미로 말하자면, 글쎄, 그걸 취미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인데 . . . 당신 취미는 상황을 더 악화시켰오. 이 방은 마을 부인네들이 마음 편히 차를 즐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방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그리고 저 바깥에 있는 것들로 말하자면, 글쎄 . . . 그 얘긴 안하는 게 낫겠군.
미스 헬렌: 난 아무도 귀찮게 하거나 괴롭히지 않아요, 마리우스!
마리우스: 그런데 당신을 귀찮게 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이 있소?
미스 헬렌: 네! 모두들 날 내 집에서 강제로 쫓아내려고 하고 있어요.
마리우스: 강제로 당신을 쫓아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헬렌!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 게 됐오? 이 서류에 서명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당신의 자유의사로 하는 거요.
오늘밤 굉장히 흥분해 있군, 헬렌. 뭐, 흥분할 일이라도 있었오? 지난 번 같이 얘기했 을 때는 매사에 대해서 퍽 이성적이었는데. 이쪽의 유일한 동기란 당신에게 최선인 걸 이행하려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같더니만. 그리고 그것조차도 충고 형식으 로 말이오. 무린 당신한테 뭘 하라고 지시할 순 없어요. 하지만 당신한테 무슨 일이 일 어나던 상관 말라고 한다면,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 . . 우리 그리스도교인의 양심으로서는 꺼려지는 일이지만.
미스 헬렌: 난 남들이 날 걱정해준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마리우스. 모두들 날 없애버리고만 싶어하죠. 지난 15년 동안 이 마을도 많이 달라졌어요. 달라진 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 구요. 이제 여긴 내가 자란 그 소박하고도 순수한 세계는 아니에요.
마리우스: 그토록 나쁘다면, 헬렌, 지금 여기서 그렇게 불행하고 고독하다면, 그렇다면 여길 떠나 는 거에 대해서 왜 미련을 가지는지 이해할 수가 없소.
미스 헬렌, 감정상태가 서서히 흔들린다. 마리우스의 만년필이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 다. 신청서를 내려다본다. 몇 초간의 침묵 후 절망적인 외침.
미스 헬렌: 엘사, 왜 날 막지 않지? 나, 서명할 거야!
엘사 (자신의 일에 몰두해 있던 척하던 가식을 저버리고): 그럼 어서 하시죠! 그 옘병할 놈의 신청서에다 서명하시라구요! 자신의 인생에다 그런 짓을 해놓는 게 소원이시라면, 어 서 빨리 해치워버리세요, 빌어먹을!
마리우스: 미스 바로우!
엘사 (그를 무시하며): 뭘 기다리시는 거죠, 미스 헬렌? 우리 시간을 낭비하고 계시네요. 시간 도 늦었으니 잠을 자야죠.
미스 헬렌: 하지만 여기 서명해서는 안된다구 그랬잖아.
엘사 (거칠게): 그새 마음이 변했어요. 하세요. 빨리 해버리세요. 당신 인생을 그렇게 처분해 버리셔야 우리도 우리 인생을 살아가죠.
미스 헬렌: 그만 해, 엘사. 날 도와줘. 제발 좀 도와줘.
엘사: 미안해요, 미스 헬렌. 오늘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거 이상으로 여자학대 문제에 대해서 시달렸거든요. 당신은 적어도 "싫다"고 말씀하실 수 있죠. 아까 길에서 만난 그 여자는 그럴 수도 없어요. 싫다고 거절할 배짱도 없으시다면, 참 안됐네요. 어쨌거나, 난 미스 헬렌을 위해서 그런 일을 대신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미스 헬렌: 난 하려고 노력했어.
엘사: 그걸 가지고 노력했다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싫다"는 한 마디면 충분했다구요.
미스 헬렌: 제발 날 믿어줘, 엘사 . . . 난, 노력했어!
엘사: 그 정도론 안돼요, 미스 헬렌!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으시다면, 차라리 양로원으로 가시 는 게 더 나아요.
마리우스: 미스 바로우, 상냥하게, 제발, 말 좀 부드럽게 하시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요?
엘사: 지쳐서 그래요, 목사님.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기진한 상태거든요, 비명이라도 지르 고 싶을 정도로. 오늘 이미 한번 질렀으니까, 지금 한번 더 질러도 그만이죠. 정말이지, 미스 헬 렌, 난 이제 손들었어요. 어둠 속에서 날 소리쳐 불렀던 이유가 뭐죠? 자신의 인생을 서명해서 날려버리는 걸 구경시켜주실려구요? 내가 여기 있는 이유가 그건 가 요? 그럴려고 12시간을 미친 사람처럼 달려왔나요? 세상에! 나, 참, 꼴불견이네! 케 이프 타운에 그냥 구구로 있을 걸.
마리우스: 그러지 않은 게 유감일지도 모르겠군. 헬렌이 오늘밤 이토록 흥분해 있는 이유를 내 이제야 알 것 같소. 어쨌든, 불행히도 당신은 이미 여기 와 있으니, 혹시 헬렌에게 할 말이 있으면, 제발, 헬렌이 처해 있는 상황을 유념해서 말하시오. 헬렌이 필요로 하는 건 도움이요. 혼란하게 만들고 더욱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게 도움이라고 할 수 있겠오?
엘사: 미스 헬렌은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잘 알고 계세요. 목사님이 오시기 전에 우린 많은 얘길 했거든요.
마리우스: 미스 바로우, 내가 염려하는 건 "헬렌"의 감정이요, 당신 기분이 아니라. 혹시 당신도 헬렌의 기분을 염려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헬렌의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공손한 태도를 좀 보이시오. 헬렌은 당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소. 그런데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 소릴 지르고 있다니.
엘사: 미스 헬렌을 어린애 취급했다구요? 내가요? 기가 막혀서! 방금 직접 보고 들은 게 있 는 이 나한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비난을 하실 수 있죠?
마리우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군.
엘사: 그렇다면 말씀드리죠. 목사님은 미스 헬렌이 서명하게끔 만들려고 공갈 협박을 하셨다구 요. 미스 헬렌이 정신이 혼란하고 무능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실은 그 점을 최대한으로 악용하셨죠. 난, 미스 헬렌한테 자신의 "정신"이 혼란하지도 않고, 또 무능력하지도 않다 는 걸 말해주려고 여지껏 애쓴 사람이에요.
마리우스: 그래, 당신은 뭐가 헬렌에게 최상의 건지 안다는 거군.
엘사: 아뇨, 아뇨, 아뇨! 또 틀리셨네요, 목사님. "미스 헬렌"은 그게 뭔지 알고 있다고 난 생 각해요. 그리고 만약 목사님께서 미스 헬렌에게 기회만 좀 주셨더라면, 인생 종말에 가 있는 늙은이들이 득실거리는 양로원으로 떨어지는 것이 자신을 위한 최상의 방법은 아니 라고 목사님께 말씀드렸을 거에요. 미스 헬렌은 아직 인생의 종말에 이르지 않았다구요. 그리고 한가지 잊으신 게 있어요: 난 미스 헬렌이 그 서류에 서명하는 거 말리지 않았 어요. 본인 스스 로 안하신 거죠.
마리우스: 그건 전신이 혼란했기 때문이오.
엘사: 또 그러시네요! 혼란이란 말 좀 그만 하실 수 없나요? 미스 헬렌의 정신은 절대로 혼란 하지 않아요!
마리우스: 헬렌하고 같이 며칠 전에 그 문제를 상의했을 때만 해도 . . .
엘사: 미스 헬렌이 여기 계신 건 무시하는 투로 말씀하지 마세요. 바로 목사님 옆에 계시니까요. 하느님 맙소사. 직접 여쭤보세요 . . . 그리고 이번엔 대답할 기회를 드리세요.
마리우스: 미스 바로우, 신성을 모독하는 언동으로 날 자극하려 들지 마시오. 헬렌이 자신으로 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 못지 않게 당신으로부터도 보호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 각이 드는군.
엘사: 아직도 미스 헬렌에게 직접 여쭤보지 않으시는군요.
마리우스: 난, 헬렌의 상태에 동정을 느끼기 때문이오. 보쇼! 당신 덕분에 헬렌은 아무것도 명 확히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구.
엘사: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미스 헬렌은, 목사님 덕분에, 명확히 느낄 수조차 없는 상태 에 있었다구요. 목사님이 미스 헬렌에 대해서 진정으로 염려하신다고 내가 믿을 것 같 아요?
마리우스 (극도의 자제력을 발휘하며): 미스 바로우, 마지막으로 말해두겠는데, 당신이 뭘 믿건 믿지 않건 난 전혀 관심 없소. 헬렌의 경우는 달라요. 내 관심사는 헬렌이 남은 여생을 가능한 한 가장 안전하게,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찾아주는 것이오. 그런 기회란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속에 갇혀 있는 위험을 포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오.
엘사: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마리우스: 헬렌이 일으킨 사고, 촛불 사고가 일어난 밤. (엘사, 눈에 띄게 당혹해한다) 그 일을 모르고 있었나? 헬렌, 그게 언제였지? 4주 전이던가? (침묵. 미스 헬렌, 대답하지 않 는다) 알겠오. 당신, 당신이 어떻게 간신히 위험을 모면했는지 친구 분에게 말 안했군. 미스 바로우, 당신한테 사과해야겠오. 난 당신도 다 일고 있는 줄 알았오.
엘사: 사과하실 거 하나도 없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나 말씀해주세요.
마리우스: 그러지, 한 달쯤 전 일인데 . . . 어느 날 밤 헬렌이 초를 쳐서 넘어뜨리는 바람에 커 튼에 불이 붙었어요.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스털링이 그 순간 불길을 보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 . . 생각도 하기 싫소. 스털링이 달려갔지. 아슬아슬하게. 그런 데 헬렌은 불을 끄려고도 않고 불길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그냥 서 있더라는군. 그래서 양손에 그 심한 화상을 입었다오. 화상을 치료하려고 자고 있던 라테간 수녀를 깨웠구. 훨씬 더 위험했을 수도 있었오. (엘사, 미스 헬렌을 노려본다) 그렇게까진 생각하고 싶 지도 않아. 그러니까, 미스 바로우, 우리 행동이 당신에겐 그렇게 보였겠지만, 실은 당신 생각처럼 그렇게 맹목적이거나 무책임한 건 아니오.
엘사: 램프 하나에서 지독하게 연기가 났고, 날 위해 과일 시럽 만들다가 난로에서 대수롭지 않 은 사고가 있었다구요! 세상에! 아주 훌륭하게 해내시네요, 미스 헬렌. 앞으로 다시는 우리 두 사림 사이의 신뢰에 대해서 운운하지 마세요. 어쨌거나, 그걸로 문젠 결정됐네 요. 이제 그 문젠 두 분이 해결하시도록 난 손 떼겠어요. 선한 자가 승리하시길 바래 요! 난 자러 가겠어요.
미스 헬렌: 엘사, 설명할 기회를 좀 줘.
엘사 (그 애원을 무시하며): 안녕히 주무세요. 아침에 뵙죠. 아침 일찍 떠날 거에요.
미스 헬렌: 날 버리지 마, 엘사!
엘사: 이미 스스로 자신을 버리셨어요! 내가 미스 헬렌을 버렸다고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먼저 포기하신 거에요. 자신의 인생과 작업을 옹호한 만큼 인생이나 자기 일에 대한 신 념이 없으세요. 나한테 거짓말을 하셨고 . . . 그것도 등신 같기 짝이 없는 거짓말을! 도대체 이유가 뭐죠? 그리곤 신뢰에 대해서 실컷 떠들어댔죠! 세상에, 기막히게 우습네 요. 날 또 완전히 바보로 만드셨는데, 이번엔 별로 재미없네요. 실은 드럽게 불쾌해요.
미스 헬렌: 엘사가 그 사람들 생각에 동의할까봐 겁이 나서 얘기하지 않았던 거야.
엘사: 아무 말씀도 마세요, 미스 헬렌. 일만 더 악화시키고 계시니까. (미스 헬렌을 매정하도 록 냉담하게 살펴본다) 허긴, 그 말씀에 일리가 있을지도 몰라요. 이제 그 "대수롭지 않은 사고 얘길 듣고 보니, 그 사람들 생각이 옳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방 을 가리킨다) 함석하고 나무죠? 기회를 슬쩍 비추기만 해도 화톳불 같이 타오르겠네 요. (한마디 한마디에 미스 헬렌이 상처 입는 만큼 자신도 상처 입으며 스스로를 증오 하지만, 그러나 말을 중단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냥 서서 바라보고만 계셨다구요? 대체 왜 그러셨죠? 도망갈 순 없었나요? 허긴, 공포에 대해서 하는 말을 들어보면, 너무 무 서우면 미친듯이 달아가거나, 아니면 그 자리에 꼼짝도 못하고 서 있는다대요. 일종의 마비죠. 그냥 사고였으니까요, 그렇죠, 미스 헬렌? 내 말은, 뭐 다른 걸 시도하고 계셨 던 건 아니였죠? 최후의 영광의 불길 속에서 이 집과 함께 사라져버림으로서 모든 사람 에게 앙갚음한다! 극적이네요! 끝내버리는 방법치고는 너무 대단한데요. 더 쉬운 방법 도 얼마든지 있는데.
미스 헬렌, 엘사에게 다가가 그녀를 빤히 쳐다본다.
미스 헬렌: 당신, 누구요?
마리우스: 자, 자, 됐어요! 이제 그만들 해요!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돌아가고 있는진 모르 겠지만, 제발 그만둬요. 미스 바로우, 내 생각엔 헬렌이 이젠 그 일의 위험성을 알고 있 는 것 같소. 그리고 어떤 위험스런 일이 있었는지 안 이상 우리와 함께 헬렌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설득하는데 우릴 좀 도와주겠오?
엘사: 내 도움이 필요하시다고요?
마리우스: 그래요. 양로원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우리가 왜 헬렌을 설득하려고 했는지 이젠 이해 했다면, 그렇다면 헬렌을 위해서 우릴 도와주길 간절히 바래요. 우린 무해한 노인들을 박 해하진 않아요.
엘사: 아주 무해한 건 아닌 노인은요?
마리우스: 이젠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엘사: 저 미스 헬렌은 남에게 무해한 건 아니죠.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아녜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네들이 미스 헬렌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거구요.
마리우스: 지난 15년 동안 우리가 해온 게 바로 그거였오.
엘사: 한밤중에 집에 돌을 던지거나 조각들한테 돌을 던지는 걸 그냥 내버려두는 거라고 할 순 없죠. 그건 무해한 노인들을 다루는 방법이 아니에요.
마리우스: 원, 세상에! 그 얘길 다시 끌어들일라구? 미스 바로우, 그건 아이들 장난이었오. 게 다가 아주 오래 전 일이구. 그런 일이 다신 없었오. 정말 그렇게 부당하게 나올 참이오? 헬렌의 상황에 대해 이해하는 만큼 다른 일들도 이핼 해줄 수는 없나? 저 밖에 있는 거
봤을 게요 . . . (창 밖, 미스 헬렌의 "메카"를 몸짓으로 가리킨다) 단순한 마을 아이들이 저런 거에 달리 어떻게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했오? 미스 바로우, 아이들은 저걸 무서워 해요. 난 지금 우스개 소릴 하는 게 아니오! 감수성이 예민했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 시오. 사실 말이지, 마을 아이들은 이 짐에서 유령이 나오고 한밤중엔 도깨비가 돌아다 닌다고 딛고 있어요. 걔들을 비웃지 말아요. 당신도 어렸을 땐 괴물이니 귀신이니 하 는 거 믿었을 테지. 어쨌든, 되풀이 말하지만, 그 일은 아주 오래 전 얘기라오. 애들이 무 슨 일을 하는지 알아낸 즉시 그 짓 못하게 하려고 우린 별 짓 다 했오. 라테간 교장 선 생님하고 나, 우리 두 사람은 아주 엄격히 그 애들을 꾸짖었고. 미스 바로우, 이 마을 을 드나들기 시작한지 몇 년이 됐는데, 그 동안 우리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배운 게 없소? 엘사: 필요 이상으로 많이 배웠죠. 미스 헬렌에 대한 아이들의 태도는 그 애들 혼자 생각에서 나온 게 아녜요. 그 개구장이 녀석들은 자기 부모들한테서 들은 말이 있기 때문에 용기 를 내서 돌을 던지기 시작한 거라구요. 그리고 그런 어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미스 헬 렌은 절대 무해한 늙은이가 아니에요. 참 기막힌 아이러니죠. 우린 "겁에 질린 가엾은 미스 헬렌"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지만, 실은 정말로 겁에 질린 건 당신네들이에요.
마리우스: 난 헬렌에게 이미 한 말을 되풀이할 수 밖에 없소: 지금 당신이 얘기하고 있는 이들 은 헬렌과 함께 자라왔고, 당신보다 훨씬 오랫동안 헬렌을 알아온 사람들이오.
엘사: 이젠 그렇잖아요. 목사님도 말씀하셨죠, 생각나세요? 당신네들 기대와는 달리, 15년 전, 미스 헬렌이 온순하고, 교회에나 열심히 나가는 과부가 되기를 거부했을 때, 그때 이미 모든 관계는 끝난 거에요. 그대신 미스 헬렌은 옹졸한 마음과 옹졸한 영혼들이 결코 용 서할 수 없는 일을 감행했죠 . . . 감히 남들과 다르고자 했다구요! 그러다보니 목사님께 서 한가지는 맞히셨네요. 저 밖에 있는 조각들은 정말 괴물들이에요. 저것들은 미스 헬 렌의 자유를 표현한다는 이유만으로 괴물이 된 거죠. 정말이지, "자유"가 목사님이 좋아 하시는 단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어요. 여기선 그게 대죄만큼이나 끔찍한 거죠? 자 유로운 여인이라! 당치도 않지!
내가 왜 여기 오는지 궁금하게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말동무조차 없는 외롭고 쓸쓸한 노파에 대한 동정 때문만이라면, 아시다시피 드럽게 먼 이 길을 올 리가 없죠. 이 곳 경 치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구요.
목사님, 미스 헬렌은 나한테 도전을 해왔어요. 내 자신과 내 인생을, 그리고 미스 헬렌 을 만나기 전까지는 없었던 그 둘에 대한 책임을 깨닫도록 도전해 왔어요.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선 자유에 대한 토론도 엄청 많고, 또 별별 종류의 자유가 다 있어요. 하지 만 주로 말뿐이죠. 하기 쉬운 말뿐이고 그 외엔 아무것도 아녜요. 미스 헬렌의 경우는 달라요. 자유가 말이 아니라 삶이에요. 5년 전 어느 날, 먼지투성이 오후, 미칠 지경으 로 몰려드는 파리떼를 벗어나려는 생각만으로 정신없이 바로 저 길을 따라 걸어오다가, 난 평생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인간을 만났어요. (미스 헬렌을 바라본 다) 내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그 모든 걸 미스헬렌이 오늘밤 배신했기 때문이 에요.
침묵. 마리우스,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그 어떤 것에 직면하고 있다.
마리우스: 밖에 있는 . . . 저 악몽들을 자유의 표현이라 부르는 거요?
엘사: 그래요. 겁나시죠? 좀 전에 그걸 뭐라고 부르셨죠? 미스 헬렌의 취미? (소리내 웃는 다) 아녜요, 목사님. 그보다는 훨씬 더 위험한 거에요 . . . 목사님도 아실텐데요.
마리우스: 시대가 달랐더라면 우상숭배라고 불렸을만한 것들이요.
엘사: 들으셨어요,미스 헬렌? (마리우스에게)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셨는지 아시죠?
마리우스 (완전한 신념을 가지고): 아, 물론 . . . 물론, 알고 있다마다. 미스 바로우, 나도 내가 사용하는 어휘를 신중히 선택하는 사림이오.
헬렌을 양로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친구로서,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의 나의 의무라는 걸 내가 최초로 깨달았을 때, 난 헬렌의 건강과 안전만을 근거로 그 일을 이행하기로 결심했오. 우리가 줄곧 이야기한 건 그것 뿐이라는 걸 헬렌도 시인할 거요. 오늘밤에도 오로지 그 얘길 다시 한번 하려는 의도로 여기 온 거요. 그런데 당신 이 다른 문제들을 들고나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다른 문제들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됐오. 난 헬렌의 육체적 건강 이외의 많은 것들을 걱정하고 있소 - 그것도 아주 심각하 게. 단신이 말한 소의 그 "자유의 표현"이란 것들은 마당에서 신선한 야채만을 몰아낸 건 아니오. 난 이제 그것들을 그냥 가볍게 보진 않소.
헬렌, 난 당신의 첫 작품을 아주 생생히 기억하오. 외로워서, 심심풀이로 일시적인 기분 에서 만들었겠지 하고 난 그걸 보면서 웃는 실수를 범했지. 실은 당신 자신도 그것들은 시간 보내는 소일거리라고 나한테 말한 걸로 생각되는데 . . .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었 지, 안 그렇소? 그리고 진정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불안한 감이 들기 시작했 지.
회중 앞에 선 순간, 난 당신 자리가 비어 있다는 걸 알았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난 당신 이 아픈가 보다고 생각했지. 예배 후 서둘러 여길 왔더니,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바깥에 나와 마당에서 또 다른 . . . 걸 만들고 있더군 . . . (적절한 어휘를 찾지 못해 하 면서) 그걸 뭐라구 불러야 할지 정말 모르겠군.
미스 헬렌 (작지만 차분한 목소리. 꼼짝도 않고 앉은 자세로): 그건 올빼미였어요, 마리우스. 내 첫번째 올빼미.
마리우스: 예배가 끝난 후에 할 순 없었오?
미스 헬렌: 절대 그럴 순 없었어요! (조용히, 그러나 강하게): 바로 그 전날밤 그 그림이 내 머 리 속에 떠올랐고, 기억이 아직 생생할 때 즉시 작업에 착수해야 하니까요. 그런 그림은 오래 가는 게 아니에요, 마리우스. 시간이 좀 지나면 다시 기억해내기가 힘들어요. 엘 사에게 그 과정을 설명하려고 해봤지만 . . .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해하리라곤 생각지 않아요.
마리우스, 그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은 걸 내가 가볍게 결정한 일로 생각해서는 안돼 요. 앞으로는 삶이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걸 깨닫지 않고는 평생 동안의 습관을 중단한 수는 없는 거에요. 이미 예배차림으로 갈아 입고 있었죠. 성경책과 찬송가를 손 에 들고, 여늬 일요일처럼 방을 마악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 . . 그 순간 방을 나가면 결 코 그 올빼미를 만들 수 없다는 걸 깨달았죠. 만약 나가지 않는다면, 만약 성경책과 찬 송가를 한 켠으로 밀어놓고, 모자를 벗고, 옷을 갈아입고, 작업을 시작한다면 . . . . 그 래요! 그건 나의 첫번째 올빼미였어요!
마리우스: 헬렌, 헬렌! 당신이 가엾어! 그것 때문에 교회에 등을 돌리고, 당신 믿음에 등을 돌 리고, 그리고 우리들에게 등을 돌렸오? 바로 그것 때문에 지금 이토록 철저하게 외롭고
곤경에 처해 있는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소? 저 밖에 있는 조각들은 당신에게 사랑을 줄 수도 없고, 또 우리가 원하는 식으로 당신을 보살펴줄 수도 없어요. 그리고, 진심이 오, 우린 그럴 준비가 돼 있어요. 하지만, 헬렌, 당신은 우릴 거부했오. 저 시멘트 괴물 들과 함께 있으려고 우리들 사랑에 등을 돌리고 우리에게서 떠나버렸오.
조용히 듣고, 바라보기만 하던 엘사, 차츰 이해하기 시작한다.
엘사: 미스 헬렌,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내 말을 이해하신다면 모든 일이 다 순조로워질 거에 요. 사람들은 미스 헬렌을 두려워만 하는 게 아니에요: 질투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사 람들을 겁나게 했던 건 저 조각들뿐만이 아녜요. 조각보다 훨씬 더 큰 것에 돌을 던졌 던 거에요 - 당신에게, 당신 인생에게, 아름답고 찬란한, 빛으로 가득 찬 당신 인생에다 돌을 던졌던 거에요. 너무나, 너무나 질투했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던 거에 요.
미스 헬렌 (차분히): 마리우스, 그게 사실인가요?
마리우스: 헬렌,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볼 정도로, 그 정도로 나에 대한 신뢰가 허물어졌오? 저 여자 영향력이 그토록 대단해서 이젠 저 여자가 하는 말은 뭐든 다 믿는단 말이오?
미스 헬렌: 그럼 . . . 사실이 아닌가요?
마리우스: 세상에,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저 여자 말에 귀기울이듯이 내 말에도 귀를 기울
이겠오?
미스 헬렌: 마리우스, 난 당신 암은 늘 열심히 들어왔어요.
마리우스: 아니, 그렇지 않아! 만약 그랬다면 당신에 대한 나의 감정이 어떤 건지 나무것도, 전 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비난에 맞서 나한테 해명해보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요. 난 지금 심판을 받고 있는 기분이야, 헬렌. 뭐 때문에? 당신 걱정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미스 헬렌에게 맞서며) 당신 스스로가 당신 인생에 한 짓이 난 두렵소. 그래, 그건 사 실이오! 우리가 소로 알고 지내온 20여년이, 그동안 우리가 나누어온 모든 것이 저 여자 의 방문 몇번으로 짓눌린 사실을 알게되니, 그래, 그것 역시 두렵소. 당혹스럽기도 하고 질투심도 나는 게 사실이오. 헬렌, 당신은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오? 그 건 저 여자도 스스로 인정했다구. 자유에 대한 얼빠진 개념을 증명하기 위해서 당신이 이용당하고 있단 말이오. 그리고 "자유"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난 그 말이 아주 싫 소. 당신은 자유로운 게 아냐, 헬렌. 오히려 그 정반대요. 저 여자한테 속지 말아요.
당신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한가지 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겠다면, 그걸 이걸로 합시다: 내가 당신을 보듯, 당신이 당신 스스로를 본 다음에 그 모습이 바로 당신이 말하는 "자 유"의 상태인지 나한테 말해주오. 내가 그토록 가슴 깊이 염려하는 한 인생, 유일한 방 문객이나 친구라고는 흑인 문맹의 어린 여자 하나와 다른 세계에서 쁹아오는 이방인뿐으 로 . . . 결국에는 악몽이 되어버린 이 지집에 갇혀버린 인생! 그게 "자유"의 상태라니! 내가 이제 여기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건 나도 일고 있오. 걸어들어오는 순간에 그걸 느낄 수 있었오. 헬렌, 이건 자연스러운 게 아니오. 당신 인생은 저 밖에 당신이 만들어놓은 것들처럼 괴기스러워졌오.
이유가 뭐요, 헬렌? 이유가 뭐야? 이 질문은 줄을 때까지 내겐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거요. 도대체 무슨 아유로 당신이 가졌던 인생과 믿음을 저버렸단 말이오?
미스 헬렌: 무슨 인생요, 마리우스? 무슨 믿음요? 일요일마다 날 교회에 나가게 한 그 믿음요? (머리를 가로젖는다) 아녜요. 내가 내 자리를 비웠던 드 첫 주일에야 비로서 나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했다면 이미 너무 늦으셨던 거에요. 최악은 그보다 훨씬 전에 일어났죠. 정말이에요. 엘사가 말했듯이, 스테파누스 곁에 아주 얌전히 앉아 있던 그 모든 세월들 은 모두 끔찍한, 끔찍한 거짓이었어요. 마리우스, 난 열심히 노력했어요. 그렇지만 당신 의 설교나 기도, 찬송가, 그게 모두 말로만 들렸어요. 그러다가 그런 말조차도 의미를 잃게된 때가 왔죠.
믿음을 잃었을 땐 "하느님"이란 단어가 어떻게 보이는지 아세요? 작은 돌처럼, 차갑고
둥근 작은 돌처럼 보여요. "천국"이란 말도 마찬가지에요. 다만 "천국"은 부자연스럽고 쓸모없는 돌인데, "지옥"은 납작하고 매끄럽게 생긴 돌이죠. 모든 게 다 - 저주, 은총, 구원 - 그 모든 게 다 한웅큼 돌처럼 보여요.
마리우스: 왜 내게 오지 않았오, 헬렌? 나에게 털어놀만큼 날 신뢰했다면, 우리 둘이 함께 그걸 대면했더라면, 당신이 믿음을 되찾도록 난 내 영혼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도왔을 텐데.
미스 헬렌: 너무 늦은 것 같았어요. 난 그걸 받아들였죠.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공허한 걸 제 외하면 더이상 아무 일도 일어날 게 없었고, 또 거기 익숙해졌죠 . . . 스테파누스의 장례 식 날 밤까지는. (침묵. 결심한다)
그날 밤에 대해서 당신한테 한번도 얘기하지 않았어요. 아무에게도, 엘사에조차 하지 않 았어요. 비밀었으니까. 아주 특별한 비밀이었죠. 그리고 내가 메카를 작업하는 동안에 는 비밀로 남아 있어야 했어요. 하지만 오늘 밤 여기서 하도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 에 지금은 이야기해야만 할 것 같아요. (침묵)
당신이 날 묘지에서 집으로 데려오셨죠, 기억나세요?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오자, 코트를 벗겨주시고 찻 주전자를 올려놓으신 다음 . . . 지극히 사려깊게 . . . 커튼을 치고 덧문을 닫으셨죠. 그토록 미세한 일을 . . . 선의에서 그렇게 하신 건 나도 알아요. 사람들이 나를, 나의 슬픔을 바라보게 하고 싶지 않으셔서 . . . 하지만 그렇게 하시면서 동시에 내 인생을 완전히 격리시키고 있으시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마치 그날 오후 장의사가 관 뚜 껑을 닫으면서 스테파누스의 인생을 완전히 격리시켜놓았던 것처럼 말이에요. 우리 두 사람 주위에선 죽음의 냄새까지도 나는 것 같았어요, 그렇잖아요? 둘 다 검은 옷을 입 고 무릎 위에 성경책을 올려놓은 채 어둠 속에 앉아 이야길 나누었죠. 당신의 위로의 말씀은 아무 도움도 인됐어요. 당신 잘못은 아니에요. 내가 스테파누스의 죽음을 슬퍼 하고 있지 않았다는 걸 당신은 모르셨거던요. 그이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렇게 젊은 나 이에 죽은 건 슬픈 일이었죠. 하지만 난 그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마리우스, 내가 그 토록 슬퍼했던 건 내 인생 때문이었어요. 스테파누스가 살아 있을 땐 적어도 살아가는 척이라도 했었죠. 그러다가 그이와 더불어 그것마저 가버렸어요! 마리우스, 당신은 여 기서 어린 여자애와 함께 계셨던 거에요 . . . 아는 가오란 기도는 죄다 하고, 엄마가 몸 을 숙여 촛불을 끄고 어둠 속에 자기를 혼자 남겨두는 그 순간을 두려워했던 그 어린 여 자애 말이에요. 떠나시기 전에 당신은 날 위해서 촛불 하나를 켜주셨죠 - 이 방 은 무 척 어두웠어요 - 당신이 떠나신 다음 난 그 촛불하고 같이 여기 앉아 있었어요. 서럽도 록 작은 그 촛불 . . . 작은 눈물 방울을 줄곧 흘리면서! 내겐 눈물이 없었어요. 스테파 누스를 위해서도 없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없고, 더 이상 아무것도 날 가슴 아프게 하지 못했어요. 그 작은 촛불이 그날 밤 여기서 혼자 다 울어주었고, 그러느라고 몸이 녹아 아주 작아졌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어요. 난 그냥 그 불꽃을 바라보면서 여기 앉아 있었죠. 촛불이 꺼질 때 생길 일을 그대로 내버려두려고 했는데 . . . 그런데 계속 타들어가다 없어지지 않고, 암흑이 자신을 무찌르도록 허용하지 않고, 가물거리던 그 작은 불꽃이 다시금 용기를 찾은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더니 점점 더 밝아지기 시작 했어요. 신기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 . . 그 불빛이 나를 인도하는 듯한 . . .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아주 먼 곳으로 나를 인도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난 내가 깨 어 있는지,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방을 둘러보고 권위 있게 말한다) 엘 사, 촛불을 켜요, 저거 먼저.
헬렌, 작은 탁자 위에 매우 눈에 띄게 올려놓은 나뭇가지 모양의 촛대를 가리킨다. 엘 사, 그것에 불을 켠다.
왠지 아시겠어요, 마리우스? 그게 동방이에요. 저기 마당에 나가면 내 동방박사들이 모 두 낙타를 타고 동쪽으로 가고 있는 걸 보실 거에요. 그 촛불을 계속 따라가면 언젠간 메카에 도착할 거에요. 아, 마리우스, 정말이에요! 난 이미 경험했어요. 그날 밤 내가 간 곳이 바로 메카였고, 당신이 켜놓은 그 촛불이 날 거기로 인도했어요.
(자신의 비전으로 빛나도록 생기가 넘친다) 마리우스, 거긴 도시에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찬란한 빛과 찬란한 색으로 가득찬 도시에요. 어디를 가나 눈부시게 흰 벽과 반짝이는 뾰족탑이 있는 왕궁과 아름다운 건물뿐이고, 궁정 뜰은 신비스러운 조각 들로 가득 차 있어요. 거리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터반 두른 사람들과 낙 타로 북적거렸지만,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 . . 난 알았으니까요, 아, 그냥 알았어 요, 거기가 메카라는 걸! 그리고 난 웅대한 사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어요.
메카 한가운데 사원이 있어요, 마리우스. 그리고 그 사원 한가운데 벽마다 수 백개의 거 울이 걸려 있고 수많은 램프가 달려 있는 거대한 방이 있는데, 그 방이 바로 동방박사 들이 빛과 색의 천상의 기하학을 연구하는 곳이에요. 그날 밤 난 견습생이 됐어요. 엘 사, 그거 다 켜요, 마리우스에게 내가 배운 걸 보여줄 수 있도록!
엘사, 방안을 돌아다니며 모든 촛불에 불을 붙인다. 그러는 동안에 방안의 모든 마술과 장려함이 서서히 드러난다. 미스 헬렌, 환희에 넘쳐 웃어댄다.
보세요, 마리우스! 보세요! 빛이에요. 불안해하지 마세요.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그 냥 장난치고 싶어하는 거에요. 여기서 내가 하는 게 바로 그거에요. 끊임없이 즐겁고 기쁘게해주는 요술 장난감을 갖은 아이들처럼 우린 빛을 가지고 놀아요. 여기에다 작 은 촛불 하날 켜놓고, 작은 별빛 하나를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면 그것으로 무도회가 시 작 되는 거에요. 촛불과 별빛에게 모퉁이를 뛰어넘는 방법도 가르쳐주었어요. 정말, 그랬 어요! 여기 이 침대에 누워 저 거울 을 들여다보면, 그 거울 속엔 내 어깨 너머 스니우 버그 위로 떠오른 보름달이 보여요. 그래요, 이건 내 세상이고, 난 내 세상으로부터 암 흑을 추방해버렸어요.
마리우스, 난 미친 게 아니에요. 미친 사람은 실재와 허구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한다고 말들 하죠. 난 부간 할 수 있어요. 난 저 밖에 있는 나의 메카와 이 방을 둘 다 알아 요. 동방박사와 낙타를 만들려면 녹슨 철사를 어떻게 구부려야 하는지, 어떻게 모래와 시멘트를 섞어야 하는지, 맥주병을 커피 분쇄기에 넣고 곱게 빻아 어떻게 벽을 반짝거 리게 만드는지, 모두 배워야 했어요. 내 두 손 때문에라도 난 결코 잊지 못할 거에요. 네 두 손이 내 정신을 온전하게 지켜줄 거에요. 진정한 메카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여행은 이제 끝났어요. 나로서는 갈 수 있는 만큼 간 거죠.
난 이거 (양로원 신청 서류) 필요 없어요. 난 내 세계를 양로원 어느 작은 방안에 있는 서너 개 장식품으로 축소시킬 순 없어요.
마리우스, 양로원 서류를 집어든다. 그가 다시 입을 열 때는 품위를 지키려는 그의 조용 한 동작 이면에는 불가피한 것에 대한 수용을 지각하는 패배자의 모습이 엿보인다.
마리우스: 메카! 그래, 거기가 당신이 갔던 곳이라 . . . 오는 밤 집에 가서 내 세계지도에서 거 길 찾아봐야겠군. 거기까진 아주 먼 길이오. 헬렌, 당신이 나한테서 그렇게까지 멀리 가 있는지는 몰랐오. 그러니까 당신을 찾으려면 촛불을 켜서 그걸 따라 동방까지 가야 한단 말이지! (무기력한 몸짓) 틀렸어. 그런 여행을 하기엔 난 너무 늙은 거 같아 . . .
그리고 당신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리란 생각이 드는군.
헬렌: 마리우스, 나 역시 다른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어요. 여기까지 오는 데 내 일생이 걸 렸어요.
내가 당신을 실망시켜드렸다는 거 알고 있어요 - 그것도 아주 심하게 - 하지만 믿어주 세요, 고의가 아니었다는 걸. 내가 태어난 날을 선택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제까지 일 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나로선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마리우스: 아니, 난 당신을 믿어요, 헬렌 . . .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지. 오랫동안 난 항상 당신에게 가까이할 수 있다고 느껴왔오. 우리가 다시 서로를 발견하 고, 같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남은 얼마 안되는 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이 당연하고도 불가피한 일처럼 보였는데. 우리가 그럴 수 없다는 게 . . . 잘못된 . . . 아주 잘못된 일 같소. 그런 의미에선 알레타의 죽음도 잘못된 거지.
침묵.
미스 헬렌: 왜 그러세요, 마리우스?
마리우스: 가려고 하고 있소. 쉬운 일이 아니야 . . . 완전히 잘못된 것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야 만 하는 인생의 첫 순간을 찾아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미스 헬렌: 우린 지금 서로에게 작별인사를 하려고 애쓰고 있는 거죠, 그렇죠, 마리우스?
마리우스: 그래요, 그런 시점에 와 있는 거 같소. 오늘 밤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상상도 못했 지만, 그것밖엔 더 할 말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군. (문쪽으로 걸어간다. 엘사를 바라본 다. 잠시 주저하나, 그녀에게 역시 할 말이 없다) 잠자리에 들 때 촛불 끄는 거 잊지 말아요, 헬렌. (문 앞에서 잠시 멈춘다) 이처럼 행복해하는 당신은 오늘 처음 보았오. 당신 촛불들을 모두 밝혀놓은 것보다도 당신이 훨씬 더 밝게 빛나고 있소!
마리우스, 떠난다. 뒤따라 침묵이 흐른다. 엘사, 이윽고 촛불을 끄기 시작하려는 동작을 취한다.
미스 헬렌: 아니, 하지 말아요. 내가 해야 돼! (이 순간부터 계속해서 방안을 돌아다니며 촛불 을 불어끈다 - 조용하나 신중하고도 엄숙하게, 종지부를 찍듯, 하나씩 차례로 촛불을 끈 다)
엘사: 그 분 부인 얘기 좀 해주세요.
미스 헬렌: 이름은 알레타 빌레벨트. 사진으로만 봤는데 굉장한 미인이었어.
엘사: 어떻게 그렇게 됐죠?
미스 헬렌: 죽은 거 말인가?
엘사: 네.
미스헬렌: 내가 아는 거라곤 오랫동안 아팠다는 거 뿐이야. 아주 고통스러운 병으로. 아이도 없었지. 마리우스 목사가 처음 여기 왔을 땐 아주 침울하고 외로운 사람이었어. 그런 데, 그건 왜 묻지?
엘사: 왜냐하면 그 분은 예전에, 아니, 아마 지금도 여전히 미스 헬렌을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미스 헬렌: 엘사 . . .
엘사: 정말이에요. 오늘 밤만 아니었더라면, 난 아마 그런 건 상상도 못했을 거에요. 아프리카 선량한 백인들처럼 그 분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솜씨가 뛰어나네요. 하지만 지금은 명백해요.
미스 헬렌 (동요되어): 그렇잖아, 엘사. 그 사람이 "사랑"이란 말을 썼을 땐 무슨 의미로 사용했 냐 하면 . . .
엘사: 아녜요, 미스 헬렌. 난 지금 착한 목자가 자기 양떼 중 어느 한 마리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감정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아녜요. 남자, 마리우스 빌레벨트는 여자, 미스헬렌을 사랑한다구요.
미스 헬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날 좀 봐요, 내 손을 좀 봐 -
엘사: 바보! 우리가 미스 헬렌을 볼 때 그런 걸 보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촛불들을 모두 밝 혀놓은 것보다도 당신이 훨씬 더 밝게 빛나고 있소"라고 하신 말씀 생각나시죠? 그 분 말씀이 옳아요. 당신은 빛나요. 그렇게까지 고지식하고 순진하시단 말씀에요?
미스 헬렌, 부정하고 싶어하나, 엘사가 한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강하다.
무척 감동적인 이야기에요. 20년 동안이나 자신의 사랑을 한 영혼에 대한 종교인의 심 려와 우정으로 가장해오다니. (어조가 부자연스럽다) 어쨌거나, 그건 그 사람 문제에요, 그렇죠? 미스 헬렌께선 해야만 할 일을 하신 거에요. 난 미스 헬렌이 자랑스러워요. 내가 절대 필요없을 거라고 그랬잖아요. 그리고 그 분한테 그냥 싫다고 말씀하신 거 이 상을 하셨어요. 미스 헬렌의 권리를 확고히 하신 거라구요, 여자로서의 . . . (침묵) 그 분 사랑하세요? 그 분이 미스 헬렌을 사랑하는 식으로?
미스 헬렌, 대답하기 전에 생각한다. 이윽고 입을 열 때는 자신의 대답에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스 헬렌: 아니, 그렇지 않아.
엘사: 그냥 물어본 거에요. 미스 헬렌 역시 아프리카 백인이세요. 그 분처럼 미스 헬렌도 자 신의 진정한 감정을 감추실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더욱 훌륭한 얘기가 될텐데! 신이 저버린 이 작은 마을에서 두 사람은 상대방이 모르게 서로를 사랑한다!
미스 헬렌: 엘사, 지금 제 정신이야?
엘사: 아뇨.
미스 헬렌: 왜 그래?
엘사: 이젠 내가 질투할 차례에요.
미스 헬렌: 뭘?
엘사 (무기력한 몸짓을 해보이며): 모든 걸요. 미스 헬렌과 그 분 . . . 그리고 등신 같은 소린진 모르지만, 나, 빌어먹게 쓸쓸해요.
미스 헬렌: 질투를 한다구? 우리를 . . . 마리우스하고 나를? 아직도 앞날이 창창한 엘사가?
엘사: 길에서 만난 그 여잔 적어도 이 순간 자기 품안에 아기를 안고 있어요. 갖은 게 있다구 요. 지금 밖은 춥다는 걸 잊지 마세요. 아길 다시 업고 있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폭풍 우를 빠져나와 몸을 녹히려고 다시 걷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구요.
미스 헬렌: 그 가엾은 여자 얘긴 이제 그만해 둬.
엘사: 그만 둘 수가 없어요.
미스 헬렌: 어쩌면 차를 얻어 탔을지도 모르잖아.
엘사(돌연히 잔인하게): 그러지 못했기를 바래요.
미스 헬렌 (경악해서): 엘사! 그건 엘사답지 않은 말이야. 진심은 아니겠지.
엘사: 아뇨, 진심이에요! 도대체 치를 얻어타고 아딜 가겠어요? 그 여자가 가는 길 끝엔 그 여잘 기다리는 메카는 없어요. 자신의 남은 인생만이 있을 뿐이구, 그 인생엔 반짝이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어요. 자기 운명이 진정으로 어떤 건지 빨리 알수록 그 여자한텐 그 만큼 더 낫다구요.
미스 헬렌: 그 아기 생각도 좀 해야지.
엘사: 아니, 그럼,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전혀 개의치 않는 줄 아세요? 미스 헬렌, 그 아긴 내 아기였을 수도 있어요! (침묵. 이윽고 결심한듯) 오늘 밤 다 털어놓는 게 낫겠어요. 데이비드가 날 떠난 다음 2주 후에 임신했다는 걸 알았어 요. 유산시켰죠. (침묵) 내가 지금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이해하시겠어요?
미스 헬렌: 음, 이해해, 엘사.
엘사: 내 인생 최초의 진정한 결실에 돌연하고도 난폭한 종지부를 찍었죠.
미스 헬렌: 난 엘사를 이해해.
침묵.
엘사: 그 여자를 차에 태워준 얘기에는 짤막한 후편이 있어요. 갈림길에서 차를 멈추고 그 여 잘 내려주고나서, 남은 음식하고 지갑에 있던 돈을 준 다음, 그리고 그 여자가 하느님의 은총이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끝낸 다음, 이름이 뭐냐고 내가 물어봤어요. "영어 이름은 페이션스에요"라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아기를 등에 업고 비니루 봉지를 집어들고는 길을 떠났어요.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렇 게 잔 걸음으로 80마일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비명을 지르고 싶더군요. 1마일 정 도 달린 후 벌판에서 그렇게 했죠. 차를 세우고 엔진을 끈 다음, 눈을 감고 비명을 지르 기 시작했어요. 자제심을 잃었던 것 같아요. 내 평생 그렇게 크게, 그렇게 오랫동안 소 리질러본 적이 없었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미스 헬렌. 그 아인 내 아이에요. 페 이션스는 내 언니고, 미스 헬렌은 내 어머니에요 . . . 그리고 난 아직도 빌어먹게 쓸쓸해 요.
미스 헬렌: 우리 자신한테 너무 잔인하군. 오늘 밤 엘사가 낯선 사람처럼 여겨진 적이 몇 번 있었다구.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뭐지?
엘사: 우리한테 벌을 주고 싶었어요.
미스 헬렌: 뭘 했다구? 무슨 죄를 졌다구 벌을 받아?
엘사: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나이 먹어 늙는 죄, 흑인인 죄, 태어난 죄 . . . 나이 스물 여덟에 남을 신뢰한 죄. 등신 같은 무기력도 벌받아 마땅하구요.
미스 헬렌: 그런 걸로는 사람들을 벌주는 게 아냐, 엘사. 오늘 밤 내가 무력감을 느꼈던 건 엘 사를 잃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엘사: 그래, 내가 뭘 어떻게 하길 바라세요?
미스 헬렌: 비명은 지르지 마.
엘사: 울까요, 그 대신?
미스 헬렌: 우는 게 뭐 어때서 그래? 그게 어디 수치스러워 할 일인가? 난 아직도 울 수 있었 으면 좋겠어 . . . 날 위해서가 아니라 . . . 엘사를 위해서, 페이션스와 갓난아기를 위해
서. 사내애였어, 계집애였어?
엘사: 몰라요. 영원히 모를 거에요.
마침내 감정 방출의 순간이 왔다. 엘사, 운다. 미스 헬렌, 엘사를 위로한다.
괜찮을 거에요.
미스 헬렌: 물론이지.
엘사 (완전히 기진해서): 세상에, 기막힌 날이네! 난 죽었어요, 미스 헬렌, 죽었어, 죽었어, 죽었 어.
미스 헬렌: 아냐, 죽지 않았어. 너무 피곤한 거야 . . . 피곤할만한 이유도 있고 권리도 있지. (담요를 가져다 엘사의 어깨에 덮어준다)
엘사: 나 오늘 밤 별로 도움 되드리지 못했죠?
미스 헬렌: 도움 정도가 아니었어. "도전"이었어. 그 말, 내 맘에 들어.
엘사: 그렇지만 해결한 게 별로 없잖아요.
미스 헬렌: 당찮은 소리! 해결했다 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큼은 충분히 했지. 난 의사 도 만나보고 안경도 맞출 거야. 그리구 카타리나가 . . .(기억해낸다) 아니면 누구 다른 사람이 일주일에 서너 번 와서 집안일 거들게 하겠어.
엘사: 내 쇼핑 목록!
미스 헬렌: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야, 엘사. 나머지는 내 할 탓이구. 그리고 혹시 알아, 오늘 밤이 지나면 일이 좀 수월해질지. 다신 거짓말하지 않을게.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말은 못하겠어. 그렇지만 이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메카로 가는 길은 나 혼자 가야 했던 길이었어. 어느 누구도 동행할 수 없었던 여행이었지. 그렇기 때문에 끝나고 난 지금에 와서보니 나 홀로 있는 거야. 다른 방법은 있을 수 없었어. 마리우스에게 한 말 은 진심이었어. 내가 갈 수 있는 만큼 간 게 이거야. 나의 메카는 완성됐고, 그것과 더 불어 - (침묵) 이걸 꼭 말로 해야겠지, 그치? - 그것과 더불어 내 인생의 유일한 참된 목적도 성취됐어.
(촛불 하나를 불어끈다) 암흑을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잘못이었어. 촛불을 밝 히는 법을, 그리고 그 의미를 나에게 가르쳤듯이, 이제는 촛불을 끄는 법을 . . . 그리고 그 의미를 나자신에게 가르쳐야만 해.
(용기를 보여주는 미소를 지으려 애쓴다) 수련생으로서의 마지막 단계지 . . . 그리고 만 약 이 단계를 통과할 수 있으면, 난 대가가 되는 거라구!
엘사: 난 좀 춥네요.
미스 헬렌: 차 한잔으로 몸을 덥히구나서 잠자리에 들라구. 내, 주전자 올려놓을게.
엘사: 마침 차하고 잘 어울리는 게 나한테 있어요. (침실로 가서 화장 지갑을 가지고 나온다. 지갑에서 작은 약병을 꺼낸다) 신경안정제에요. 맛이 좋아요. 미스 헬렌도 하나 드셔 야 할 것 같은데요.
미스 헬렌 (아주 순진하게): 아유, 요렇게 작아! 이게 뭐라구? 신경감미료?
헬렌의 질문에 내포되어 있는 전혀 의도치 않은 아이러니를 엘사는 포착한다. 처음엔 킬킬거리다가 이윽고 웃음을 터뜨린다.
엘사: 아주 완벽한 표현이에요, 미스 헬렌. 네, 이건 신경감미료에요.
미스 헬렌: 내가 어떻게 해서 엘사를 웃겼는진 모르지만, 어쨌든, 그 웃는 얼굴을 보니 저 밖에 있는 조각 보는 거 못지 않게 내 맘이 아주 흐뭇하네.
헬렌, 주전자를 불에 올려놓으려고 퇴장. 엘사, 창문으로 다가가 메카를 바라본다. 헬 렌, 다시 등장.
엘사: 미스 헬렌, 나 방금 월 생각해냈어요. 미스 헬렌의 모든 문제의 진짜 이유가 뭔지 아세 요? 한번도 천사를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이에요.
미스 헬렌: 원, 세상에, 싫어. 내가 왜 천사를 만들어?
엘사: 천사를 만드셨더라면 사람들이 미스 헬렌을 가만 내버려뒀을 거 같거든요.
미스 헬렌: 이 마을엔 천사 더 필요없다구. 묘지에 잔뜩 있는 걸 . . . 날개에다 후광까지 있는 천사들이지. 그렇지만 빛나지는 않아. 내가 (장난기 서린 농으로) 만약 내가 천사를 만 든다면 내 천사는 다른 천사들처럼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진 않을 걸.
엘사: 그래요? 그런 어떡하고 있을 거에요?
미스 헬렌: 알면서 괜히 그래! 난 동방을 가리키고 있게 할 거야. 거기 말구 어딜 가리키겠어? 그래가지구, 이 마을에 사는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방향을 틀리게 가르쳐줘서 모두들 메카로 가는 길로 가게 할 거야!
두 사람 모두 웃음을 터뜨린다.
엘사: 아! 난 미스 헬렌이 좋아요! 너무 좋아서 아플 정도에요.
미스 헬렌: 신뢰는 안 하구?
침묵. 두 여인, 서로를 응시한다.
엘사: 두 팔 벌리고 날 받으세요! 나, 뛰어내립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