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는 왜 읽어야 하는가?
성서(聖書, 聖經)를 뜻하는 대부분의 서양 말(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독어, 불어, 영어 등)은 본디 ‘책’을 뜻하는 그리스 말 ‘비블리온’(biblion)의 복수형 ‘비블리아’(biblia)에서 나왔습니다. 그 이름 그대로 성서는 ‘책’의 대명사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서를 모르고는 고전음악을 비롯한 서양의 전통예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저런 이유에서 비신자 역시 때때로 성서를 읽게 되고 그러다 신앙을 얻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교 신자 아닌 분들에게 성서를 읽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신자가 성서를 읽는 것은 소가 풀을 뜯어먹듯이, 붕어가 아가미로 물을 들이키고 내뱉듯이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신자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지요. 가톨릭의 대표적 경신예배(敬神禮拜)인 미사의 내용 대부분도 성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들판에 벼가 누렇게 익기까지 물과 공기는 필수적 요소겠지요. 벼를 신자로 비유할 때 물은 기도로, 적당한 바람과 공기는 아마도 성서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에 단순히 먹고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배우고 싶어하고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며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이성적 동물이기에 그렇습니다. ‘배우기 위해 살고 또 살기 위해 배우라’는 말이 있듯이, 나아가 그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그리움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신자나 비신자나 진리를 찾는 이는 흔히 성서에서 그 답을 찾게 됩니다. 성서는 신비의 세계를, 인간 삶의 신비를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신자(信者)는 누구입니까? 하느님을 믿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인간입니다. 존재론적(存在論的)의미에서 영세한 사람은 이미 온전한 신자입니다. 그러나 실존론적(實存論的) 의미에서 그는 아직 갈 길이 먼 사람입니다. 42,195킬로미터 마라톤을 이제 막 뛰기 시작한 초보자에 불과합니다. ‘틀림없는 신자’이지만 아직 ‘더 나은 신자’가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 성서는 가장 가깝고도 틀림없는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성서의 이야기는 실제인가?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꽤 많습니다. 가장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꼽을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 안에 인간으로 태어난 나자렛 예수, 그분은 2천여 년 전 골고타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묻히셨습니다. 네 복음서 맨 뒷부분에 나오는 예수 수난기, 이는 부분적인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밖에 바오로 서간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들도 역사적 사실이며 그의 신앙체험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구약성서 안에도 역사적 사실이 수없이 들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사건 두 가지라면, 출애굽사건과 바빌론 유배사건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자잘한 이야기들은 많은 경우 마치 여인이 화장하고 몸치장하듯, 잘 다듬어지고 각색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발전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 있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통하여 저자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가가 중요합니다. 곧 그 안에서 하느님 뜻을 찾는 자세가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성서 안에서 실제 이야기라고 보기 어려운 것 두 가지를 꼽아보겠습니다. 하나는 예언자 엘리야의 승천이야기(2열왕 2,1-11)입니다. “야훼께서 엘리야를 회오리 바람에 태워 하늘로 데려가실 때가 되어 엘리야가 길갈을 떠나는데, 엘리사가 따라나섰다.… 그들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길을 가는데, 난데 없이 불말이 불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동시에 두사람 사이는 떨어지면서 엘리야는 회오리 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다”(2열왕 2,1.11)
엘리야는 언제나 변함없는 야훼 신앙의 수호자요 대변자였습니다(1열왕 17-19장). 그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의롭고도 정열적인 하느님 사람이었습니다. 이같은 점 때문에 그는 백성으로부터 두터운 신뢰와 깊은 존경을 한몸에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 삶을 마친 엘리야의 몸은 뭇사람들과 같이 죽고 썩어 없어지는 고깃덩어리로 남을 수 없다는 희망과 믿음이 어우러져 결국 엘리야는 전설적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는 예언자 요나 이야기(요나 1~4장)입니다. 요나서는 예언서로 분류되지만 실상 그 내용은 페르샤 시대의 지혜를 담은 책입니다. 예언자 이야기를 다루었기에 예언서로 분류된 듯하나 실은 지혜서 또는 교훈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스라엘을 늘 위협하던 아시리아인들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싫어했던 요나, 그는 결국 그분을 등집니다. 서쪽을 향해 배를 타고 도망치던 요나는 바다 속 큰 물고기에게 잡아먹힙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견딥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숨을 참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지체없이 요나를 꼽겠습니다. 그 어떤 해녀(海女)도 그렇게 오랫동안 숨을 참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고기 뱃속에서 그는 주님께 기도를 올리기까지 합니다(요나 2,2). 이렇게 죽다 살아난 요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니느웨로 가서 설교하여 주민들은 회개하고 그 거대한 도시는 파멸 직전에 구원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 이야기가 어떤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음을 감지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나 이야기의 목표는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을 알리는 데 있습니다. 그분은 이방인의 구원, 죄인의 회개를 원하시는 분임을 알리고자 합니다. 아울러 ‘사흘’이란 숫자 안에서 우리는 유다교 전통과 신학사상을 엿보게 됩니다. 하느님은 의인이나 당신이 선택한 사람을 사흘 이상 곤경 속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믿음이 그것입니다(호세 6,2). 나아가 이 이야기는 예수님 죽음과 부활신앙의 예표가 됩니다(마태 12,40; 16,4; 루가 11,29).
영감을 받아 씌어진 성서의 진실성
성서 저자들이 성서를 집필할 때 그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 하느님 이끄심, 성령의 작용 등을 일컬어 영감(靈感=inspiratio)이라 합니다. 하느님 이끄심 아래 성서 저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지식과 재능을 십분 발휘해가면서 성서를 기록합니다. 창세기로부터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부분도 하느님 입김이 작용하지 않은 성서는 한 권도 없습니다. 동시에 성령께서 직접 저자의 손을 붙잡고 써 내려간 성서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 부류의 저자들을 그분 친히 선택하셨지만 저자 자신들의 문학적 재능과 표현력을 이용하여 자유롭게 집필하도록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하느님 영은 사람의 두 귀를 붙잡고 요리조리 방향을 돌려가며 한 글자 한 글자 모두 간섭하시는 옹졸하고 소심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은 성서 저자들을 통하여 “당신 자신이 활동하셨고 그들이 참된 저자로서 하느님 자신이 원하시는 것만을 모두 다 기록하도록” 이끄셨습니다(계시헌장 11항).
성서 기록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영감이 작용한다는 유다인들의 확고한 믿음은 기원전 400년경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에 생겨났습니다. 사실 이 시기에 대부분 성서가 문자로 정리됩니다. 성서 저술에 하느님 영감이 작용한다는 표현은 신약에도 나옵니다. “성경은 모두 하느님의 영감에 의거한 것입니다”(2디모 3,16ㄱ;2베드 1,20-21 참조).
어떤 시각으로 읽을 것인가?
먼저 마음을 넓게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미소한 인간이 신비의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초자연적 세계에로 발을 들여놓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분이 누구신지 깨우쳐주는 성서 말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다면 이는 분명 무엇보다도 큰 은총입니다. 그래서인지 성서를 읽으면서 때때로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끼게 됩니다.
어느 작가는 자신의 체험담을 이렇게 전합니다. “저는 1987년 6월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대로 교리공부도 하지 않고 세례를 받았던 저는 그 무렵 한 여관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작업을 하던 배창호 감독은 신앙심이 돈독해서 늘 현장에 성서를 놓고 있었는데 저는 그곳에서 영세한 후 처음으로 성서를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놀라운 사실을 체험하였습니다. 성서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제 가슴에 와닿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먼 바다의 모래사장을 핥는 파도소리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지던 성서의 말씀들이 제 가슴의 한복판까지 해일처럼 밀려들어와 영혼을 적시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주님의 성령이 제 마음에 오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우연히 거울을 본 순간 저는 제 얼굴이 변화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 얼굴이 서너 개의 표정을 거쳐 마치 하이드에서 지킬박사로 변하는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신앙체험을 지금껏 아무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백하여도 좋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최인호, 1998년 5월 31일자 서울대교구 주보 2면).
성서를 읽어갈수록, 공부해갈수록 차츰 그 깊은 맛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유학시절 한때 저는 마르코복음서 1장을 독일말로 거의 외워갔습니다. 독일어 실력도 키우고 성서의 깊은 맛도 음미해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한 루츠(U. Luz)라는 개신교 성서학자가 제가 공부하던 스위스 루체른대학에서 마태오 복음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주 멋진 강의였습니다. 그분은 매우 단순한 제안을 하면서 명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먼저 마태오 복음서를 새롭게 읽어보세요. 한 번 또는 두 번….” 물론 저는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리스말로 또 독일 말로…. 읽을 적마다 새로운 맛, 깊은 맛을 감지했다면 과장일까요? 저는 그때처럼 신나게 또 감동적으로 성서를 읽은 적이 없답니다. 물론 마음이 아주 뜨거워졌었고…. 그때 다른 대학에서 유학중인 선배 신부님께 그런 감동도 말씀드렸었답니다. 지금도 자주 그때가 생각납니다. 저는 지금도 그런 마음 자세로 성서를 읽고 싶답니다.
한 권의 성서에 담긴 여러 이야기
성서 안에 있는 이야기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형성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이를 구두전승(口頭傳承)이라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더 다듬어지거나 잊혀진 부분도 있으며 뒤섞이거나 첨가된 내용도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영감을 받은 성서 저자가 그것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한번 기록된 내용은 변함없이 그대로 전승되는 것은 아닙니다. 훗날 다른 저자는 같은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전승된 내용들은 다시금 최종편집인 또는 편집인단(編輯人團)에 의하여 다시금 종합되고 정리됩니다. 특히 모세오경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최종편집인(단)은 자신(들)이 수집한 모든 문헌을 차례대로 배열해놓지 않고 내용에 따라 주제별로, 그것도 그들의 의도대로 정리합니다. 일종의 짜집기식 편집 작업을 한 셈입니다. 같은 내용이 두 번 거듭 등장하는 것은 이간은 이유에서입니다(창조설화: 창세기 1장 및 2장; 아브라함의 소명: 창세기 12장 및 15장; 모세의 소명: 출애굽기 3장 및 6장; 십계명: 출애굽기 20장 및 신명기 5장).
이렇게 볼 때 성서는 거대한 도서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서관에는 문학전집을 비롯하여 사전류, 전문서적, 논문집, 잡지류 등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집필된, 갖가지 서적이 다 보관되어있지 않습니까? 성서에도 이스라엘 남북왕조 역사 이야기를 비롯하여 전설류, 신화적 이야기, 꿈 이야기, 지혜, 시편집 등 갖가지 문학양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해석
그렇습니다. 일정한 시간과 공간의 틀 속에 매여 사는 인간이 초월적인 하느님을 파악한다는 일 자체가 이미 세상사를 뛰어넘는 차원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이간은 이해의 지평이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음 또한 부인 못할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미 맨 처음 질문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정신적 차원과 영적 차원을 접어두고는 인간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끔 저는 묻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이 무엇인가?’ 흔히들 ‘빛’이라 답합니다. 저는 웃으며 ‘인간의 생각이 그보다 훨씬 빠르지 않겠느냐?’고 되묻습니다. 한순간에 우리 생각은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습니까?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 강의 합류 지역을 장악하고 개혁정책을 펴면서 종합 법전을 반포한 바빌론 함무라비 왕(기원전 1792-1750년경)을 생각해내는데 1초도 안 걸릴 수 있습니다. 10년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모든 추억을 회상하는 것도 순식간의 일입니다.
지고(至高)의 하느님을 부르며 그분께 찬미드리고 감사하며 청원하고 탄원하는 것 또한 일순간에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이같이 인간은 정신적 영적 능력을 선사받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고 그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하느님 뜻을 파악하고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크나큰 은총입니다. 성령의 비추심 없이는 불가능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흔히 신앙은 은총이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가운데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신앙인은 크게 빗나가는 일없이 성서에 맛들일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해설서나 주석서 사용
읽은 성서의 내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는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성서를 읽다보면 궁금한 점이 자꾸 나타납니다. 매번 누구에게 묻기도 쉽지 않고, 이때 좋은 성서해설서는 마치 비 내리는 우산처럼, 늘 곁에 있어주면서 바른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물론 해설서나 주석서가 시원스레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또 서로 해석이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 못하는 때도 많습니다. 신구약성서가 씌어진 지 2천여 년이 다 되어가지만 보면 볼수록 새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금강산을 보고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금강산은 창조세계의 극히 일부분 아닙니까? 그렇다면 성서를 보고 무어라 표현하면 좋겠습니까?
해설서는 자신이 읽기 편한 수준이면 좋을 듯합니다. 신구약 입문서도 있고 낱권으로 된 주석서도 있습니다. 성서를 전공한 분이나 많은 경험을 쌓은 분에게 추천받는 방법도 아주 좋으리라 봅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먼저 선택하는 것도 좋습니다(예: 예언서, 시편, 복음서 해설집 등).
성서 내용이 바뀌거나 새로운 내용이 첨가될 가능성은?
권위있는 규범으로 인정된 성서 모음을 정경(正經)이라 하지요. 그런데 성서에 있어서 개신교, 가톨릭, 동방정교의 정경이 각기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경의 기준이 바뀌어 어떤 성서(예: 판관기, 룻기 등)는 통째로 빠지게 되고 또 다른 성서가 그 자리를 메꾸게 되는 현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앞서 말씀드린 성령의 비추심, 곧 성서의 영감 자체가 문제시되겠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헌정이 답을 줄 것입니다. “영감을 받은 저자인 성서 저술가들이 진술하는 모든 것은 성령이 진술하신 것이라고 믿어야 하며, 따라서 성서는 하느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서에 기록되기를 원하신 진리를 확고하게, 성실하게, 그르침없이 가르친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이며…”(계시헌장 11항).
사실 트리엔트 공의회(1546-1564)는 1천년 이상 끌어온 논란과 의혹을 마무리짓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제2경전입니다. 이는 유다교 히브리어 성서에 포함되지 않고 그리스어로(70인역, Septuaginta) 전해오던 구약 일곱 권입니다(구약 입문서 참조).
설령 엄청난 가치를 인정받는 초세기 문헌이 새로 발견된다 해도 그것을 추가로 성서 목록 안에 넣게 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로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물론 전세계 공의회 등을 통하여 부분적인 수정 보완 등의 작업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발견된 성서의 원본은 하나도 없으며, 발견된 수천 개의 사본들을 비교 대조하여 묶은 것이 오늘의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성서입니다.
성서를 읽기 전에 사전 지식
우선 신구약을 한두 번쯤 통독하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있다고 봅니다. 올바른 사전 지식은 도움이 되겠지만 어설픈 지식은 잘못된 선입견을 만듭니다.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그 진면모(眞面貌)를 체험하는 것이 성서 이해의 지름길이라 여겨집니다.
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흥미를 느끼는 창세기나 복음서 중 하나를 먼저 정독합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정독하면서 떠오르는 의문점을 메모해둡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생긴다면 전문가에게 문의를 구하십시오. 또는 자신에게 적합한 해설서나 주석서 추천받으십시오. 아니면 아예 구약이나 신약입문서를 먼저 공부하고 나서 구약이들 신약이든 읽기 시작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성서를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나 그것만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해도 원주민의 가정에서 얼마간이라도 지내보지 않으면 그들의 가정생활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할 것입니다. 성서 읽기도 양적으로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을지 몰라도 질적 효과는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좋은 성서강의에, 또는 지속적 성서연구모임 등에 참여하면 예상하지 못했던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깊은 내면세계에서 솟구치는 기쁨과 참 평화를 맛보고 삶의 방향을 전적으로 새롭게 정립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꾸준히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습관은 규칙적인 식사가 건강에 좋듯이 신앙인에게 유익합니다. 또한 성서는 볼 때마다 새롭게 다가옵니다. 반드시 해설이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스스로 터득하게 되는 내용 또한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서 속의 같은 내용, 같은 인물에 대한 다른 시각의 것들에 대한 이해
루가 복음서를 저술한 루가 복음사가가 사도행전을 저술했습니다. 루가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날 제자들에게 발현하시고 이어서 하늘로 올라가십니다(루가 24,50-53). 부활과 승천은 사실상 하나의 사건으로 묘사된 셈입니다. 그런데 루가 복음사가는 그의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에서는 부활 후 곧바로 승천하시지 않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발현하신 다음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왜 그렇게 달리 표현했을까요? 무엇보다도 40일이란 신학적 숫자를 통하여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신 예수님을 강조하고자 해서일 것입니다. 루가 자신의 신학적 입장이 좀더 발전되고 보완되었다고 할까요?
승천 이야기를 좀더 하지요. 마태오 복음사가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을 복음선포의 우선적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그리스도 공동체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복음서 맨 앞부분부터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임마누엘:1.23)을 강조합니다. 중간쯤에 가서 다시 나옵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습니다.”(28,20). 이렇게 볼 때 마태오 복음서에는 승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음이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니까요.
같은 예수님을 묘사하는 복음사가들의 관점은 이와같이 때때로 달랐습니다. 강조점이 다르다고 보면 더 좋겠지요? 여러분도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의 모습을 그리라 해보십시오. 아마도 조금씩 다른 모습이 될 겁니다. 같은 하느님이지만 여럿이 모여 하느님 얘기를 나누면 꽤나 다른 모습이 될 겁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이 잘못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요.
이와는 조금 다른 차원이지만 사도 바오로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 그의 서간들 곳곳에서 서로 다른 점들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유다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으며 노예도 없고 자유인도 없으며, 남성이랄 것도 여성이랄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갈라디아서에서 바오로는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다른 곳에서는 이같이 확고한 남녀동등사상이 퇴색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성도들이 모든 교회에서 다 그렇듯이 부녀자들은 교회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발언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오히려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무언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집에서 제 남편에게 물어야 합니다. 부녀자들이 집회에서 발언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1고린 14,33ㄴ-35). 이외에도 많은 예를 서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여성을 대하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지 못하고 한 발짝 후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스승의 모범을 따르는 데 있어 당시 사회의 문화전통적 차원을 뛰어넘는 데 한계에 부딪혔던 것입니다. 당시 문화 전통적 차원이라면 유다교의 전통을 말합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이해하며 서간을 읽어나간다면 혼동되는 경우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국내 개신교와 가톨릭 성서의 차이와 여러 번역본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 신약성서는 27권으로 된 같은 그리스어 본문에서 번역을 합니다. 문제는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경우는 신구교가 문제가 아니라 번역을 누가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또한 단락을 나누는 것도 제목을 붙이는 것도 학자마다 다릅니다. 단락나누기와 제목 등은 본래 그리스어 본문에는 없는 것들이니까요. 독자를 위해 번역자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곳에 사이를 띄우고 또 각 단락에 적절한 제목을 달아줄 뿐입니다. ‘독자를 위한 서비스’를 하는 셈이지요. 이는 어느 나라 성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서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즉 앞에 설명한 원리는 같지만 제2경전(토비트, 유딧, 지혜서, 집회서, 바룩, 마카베오 상권, 마카베오 하권 등 일곱 가지 성서)을 개신교에서는 외경(外經)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 성서에는 빠져 있거나 뒷편에 부록처럼 첨부되어 있습니다. 이 점을 제외하면 구약도 신약의 경우처럼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에 성서 자체에서 오는 차이점은 없습니다. 해석은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겠습니다.
국내에는 〈공동번역 성서〉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일치운동의 일환으로 1968년 ‘성서공동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번역에 들어간 후, 1971년에 신약성서가, 1977년에 구약성서가 완간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일치를 위한 공동출판이라는 처음 목적과는 달리 개신교 측에서는 거의〈공동번역 성서〉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프랑스, 독일 등에도 공동번역이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공동번역은 매우 잘 된 번역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신자가 인구의 절반이 넘은 독일의 경우만해도, 우리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동으로 번역한 성서를 개신교에서는(예배 때는 물론이고) 거의 읽지 않습니다.
성서의 장절
본디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서 저자는 아무런 사이도 떼지 않고 장절 구분도 없이 대문자로 쭉 붙여썼습니다. 성서 각 권의 장(章) 구분은 서기 1226년에 와서 프랑스의 에티엔 랑통(E. Langton)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후 1551년에 이르러 인쇄업을 하던 로베르 에티엘(R. Estienne)이 이미 구분된 각 장에 번호를 붙여 절(節)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장절이 적절히 구분되었지만 적지 않은 경우 구분을 따르기 힘듭니다. 급하게 나눈 탓도 있을 것이며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나눈 탓도 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장절 구분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그저 참조할 뿐입니다. 각 단락에 붙여진 제목도 독자에게 도움을 주려고 번역자가 붙여놓은 것이므로 그저 참조할 뿐이지 절대적인 가치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또 그래서 번역성서마다 제목이 다르게 붙어 있습니다.
성서의 가르침
성서는 하느님의 계시를 담은 책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해줍니다. 성서의 내용을 해석하는 양상은 바뀔 수 있지만 성서의 가치는 변함없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은 정신적, 영적 존재라는 데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언제나 알게 모르게 자신의 뿌리를 캐고자 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인간은 결국 그분 안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게 됩니다(창세 1,26-27 참조). 더 깊이 연구할수록, 나이가 들수록, 병이 깊어갈수록, 많이 알게 될수록 사람들은 그만큼 더 하느님을 알고자 하고, 성서를 읽고자 합니다. 창조주 하느님께로 돌아갈 때가 다가오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리라 봅니다.
성서는 단순히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담아놓은 책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오늘 내게 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으며,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이끌림을 받습니다. 성서는 이론서나 관념을 담아놓은 책이 아닙니다. 실제로 살아 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 옛날 성서가 씌어질 당시의 지금은 문화적으로나 생활 면에 있어서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외적인 것일 뿐 인간 본성과 감성, 느낌 같은 내적인 면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오늘도 인간에게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생활성서」98년 9월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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