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다시 읽기

떨림

깜장보석 2015. 11. 10. 16:25

떨림 / 배용제

   

   

   

버드나무에서 새 한 마리 날아오르자

나뭇가지가 파르르 떨린다

일순 허공의 거대한 세계가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제 몸 깊숙이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나무는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다

   

어쩌면 버드나무는 평생

사소한 바람 소리에도 아득히 정신을 놓으며

떠나간 새의 안부를 물을 것이다

속울음 같은 떨림을 끌어안고

오래오래 제 속을 비워갈 저 버드나무

자신의 영혼이 펼칠 수 있는 마지막 날개 같은 것이어서

   

떨림이란 또 다른 너의 얼룩 같은 것이어서

없는 너를 품는 것이 얼마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지

   

내 가슴속 오래 멈추지 않는 울렁증,

어느 상한 마음이 머물다 떠나간 흔적일까

또다시 허공 속 수만의 길을 향해 안부를 묻는다

바람 한 줌이 들여다보는 빈자리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그림자만 버려져 있다

   

내 것이 아닌 나를 내가 사용하는 것 같은 죄스러움에

길바닥에 우두커니 세워두지만

어느새 어두운 내 속으로 따라와 웅크린 채

   

버드나무와 나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잎이 지거나 완전히 늙어버릴 때까지

서로의 떨림을 견주어본다

날 수 없는 날개를 품는 것이 어찌 보면 너무 막막함이라서

   

   

   

   

다정,배용제, 문학과 지성사, 2015, 18~19

   

제가 소개하는 시 중에서는 꽤 긴 편에 속하는 시이지만 이 시는 기쁜 마음으로 옮겨 적었습니다. 좋은 시입니다. ‘전형적으로 좋은 시입니다. ‘전형적이라고 쓴 이유는 좋은 시의 장점들을 골고루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묘사입니다.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르자 나뭇가지가 파르르 떨린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묘사이지만 일차적인 묘사입니다. 배용제 시인은 일차적인 묘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순 허공의 거대한 세계가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라고 내면에서 흔들리는 것에 대해서 얘기 합니다. 그리고 이 흔들림을 끈질기게 잡고 늘어집니다. 끈질김은 제 몸 깊숙이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나무는 천천히 어두워지고 있다라는 문장일 끌어냅니다.

   

그다음은 버드나무에 대한 서사입니다. 그 버드나무가 어떤 생을 살아왔는지 상상 속에서 묘사를 합니다. 그리고 시인이 하고 싶었던 얘기를 본격적으로 꺼내 놓습니다. ‘떨림이란 또 다른 너의 얼룩 같은 것이어서 없는 너를 품는 것이 얼마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지시인이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 문장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전형적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할 때 배용제 시인처럼 쓰면 구조는 어느 정도 완성됩니다. 문제는 구조로 시가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구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바, 바로 주체입니다. 만약 주체가 없다면 팥이 없는 붕어빵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습작은 배용제 시인과 같은 방식으로 하는 편이 좋습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시들을 보면, ‘전형적인 형식을 갖춘 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험부담을 가지기보다 안정성을 택하기 때문인데요, 그렇지만 이 정도의 능력을 갖춘 시인이라면 다른 형식의 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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