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에 대해서 대항하는가. 우선 자기자신에 대해서 환상이나 마취에 빠지지 않고 끝없이 지속되는 잠재적인 굴욕상태에 살면서도 ‘결코 자기가 능욕당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능력, 또 자유스런 순간이나 사람과 연대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때마다 이 순간이야말로 영원히 계속할 것이라고 믿고 혼신의 힘을 다해 그것을 맛보는 능력’(<공장일기>)을 가져야 한다. 이 지독한 삶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이것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104
베이유는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이 ‘지적인 성실을 첫째의무’(<공장장에게 보내는 편지>)로 여겼으며 항상 사실 그 자체와 직접 접촉하고 그로부터 얻어진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사고를 확인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 사실은 한층 심화되면 현상의 배후에 은폐되어 있는 근본적인 현실에까지 이르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35
한 사람의 생애에는 가능한 외부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져 이유없이 자기내부로 깊게 침잠하는 때가 있다. 계시가 임박한 때이다. 144
베이유는 <페랭 신부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렇게 고백하고 있다. 머리가 아파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때 이 시를 낭송하고 있으면 ‘어느 샌가 그 낭송은 기도의 효과를 갖다 주었습니다.’ 그때 ‘그리스도 자신이 나타나서 나를 붙잡아 주었습니다.’
이 결정적인 만남에 대해 제3자인 내가 이러쿵저러쿵 말 할 수는 없다. 베이유는 이 불가사의한 체험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며, 마르세유를 떠나기 직전에서야 페랭 신부에게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의식적으로 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신비주의자들의 저작도 읽지 않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접촉하게 된 것이다. 어두운 밤을 극복하면서 숨죽여 가며 그가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3백 년 전 파스칼도 사교생활을 하던 어느 날 밤 돌연 한 줄기 빛과 열기에 자신의 마음을 환히 비추게 되었다. 임종 때까지 그가 항상 몸의 일부처럼 지니고 다녔던 조그마한 종이조각(이 종이조각은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에는 큰 글씨로 ‘불[火]’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확실하다. 틀림없이 ..... 예수 그리스도라는 신(神)이다’라는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베이유의 경험도 이와 같을 것이다. 자신의 고민을 통해 그는 ‘사랑받고 있는 사람의 웃음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랑과 매우 유사한 사랑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열리고 뜨거운 불이 몰려들었다. ...... ’라고 쓴 <조 부스케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소리가 아닌 소리, 소리보다 확실하고 짙은 침묵 속에 ‘태초보다도 더욱 나를 사로잡고 있는 사랑이라는 말’이 들려왔던 것이다. 이 고백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149
인간관계에서 시몬느 베이유라는 독특한 성격을 가진 사람도 많든 적든 타인으로부터 고통받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들은 악의로 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동료에게 상처 입은 한 마리 암컷이 있으면 그 위로 덤벼들어 부리로 쪼아 암컷들을 쫓아내다는 잘 알려진 현상을 그들이 실행한 것입니다.’ 이런 숨김없는 글을 페랭 신부에게 쓰고 있다. 그는 이런 타인의 동물적인 성질로 괴롭힘 당하는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숨기고 있는 그런 동물성에서 오는 기계적인 반격을 페랭 신부에게서는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이 성직자의 내면에서는 무엇인가 초월적인 부분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을 잘 알 수 있다. 시몬느 베이유도 역시 ‘신부님에 대한 나의 심정은 일 년간 빈궁에 처해 결국은 허기가 져서 부자집에 때때로 빵을 걸식하러 가는데 이곳에서만은 비로소 수치를 당하지 않는 걸임의 상태와 같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신부에게 언제나 감사의 말을 하고 있다. 173
시몬느 베이유를 맞아들이 티봉은 처음에는 뭔가 ‘분위기가 맞지 않음’을 느꼈다. 그는 단조롭고, 단호한 어조로 끝없는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티봉은 그 모습 때문에 피곤해졌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참을성 없는 모습을 베이유라는 사람을 알면 알수록 그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한 빛으로 인해 잊혀져 갔다.
티봉의 베이유에게는 ‘사교상의 요구라든가 휴식을 전혀 양보하지 못하는’ 중대한 결점이 있지만 사귀어보면 ‘매력과 기지가 있는 친구’였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그가 몸과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교 신앙에 몰두하는 모습에 감탄했다. ‘나는 초자연적이라는 말이 그와 만날 때처럼 실재한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다,’(<중력과 은총>에 쓴 서문)
티봉이 일상적으로 만난 베이유는 단순히 ‘아는 것’과 ‘온 신경을 집중해서 아는 것’의 사이에 있는 간격을 될 수 있는 한 줄여 완전히 모든 힘을 기울여 내면에 있는 것을 전부 밖으로 드러나는 생활과 일치시키려고 노력했다. 177
티봉은 여러 가지에 반감을 느끼면서도 그와 차츰 깊은 영혼의 일치를 느꼈다. 철저하다는 점에서는 티봉 쪽도 빈틈이 없었기 때문에 친하게 되자 둘은 솔직하게 서로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티봉의 원고를 읽고 난 뒤 ‘당신의 글속에는 훌륭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 표현이나 사상에서 당신과 같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자기방기와 허식이 드러나 있어서 당신 자신의 날카로움이 나타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자신에 대해서 엄격할 뿐만 아니라 그는 벗에게 남아 있는 달콤한 말에도 가차 없는 공격을 하면서 ‘가장 어두운 밤을 넘어가야만 한다’고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조용한 영혼을 가지 티봉을 이런 베이유를 융통성 없고 너무나 완고하다고 비난했다. 그도 자기의 그런 결점을 인정했지만 진실로 아름다움 자체에 있는 것은 단순한 섬세함이 아닌 강인함이라고 호메로스나 그레고리오 성가 등의 예를 들어 지적했다. 시몬느 베이유 자신이 이 단판에 일치하며 단순한 것으로 가득 찬 현대 속에서 동떨어진 중세적인 것, 어쩌면 우리들의 평범한 감성에 정면으로 맞서 저항해 오는 하나의 준열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론 강 골짜기에서 내려올 때 ‘그의 눈은 강하고 푸른 기운이 돌며 감지할 수 없는 내념의 깊이를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티봉은 말하고 있다.
하루 일이 끝난 저녁에 그와 티봉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그리스어 공부를 했다. 성서에 있는 ‘주의 기도’를 교재로 삼아 한자 한자 기도말을 그리스어로 바꾸어 둘이서 암송하기로 약속했다. 나중에 <정신적 자서전>에 쓰인 글을 보면 그는 그 후 며칠간 ‘주의 기도’를 계속 암송하여 포도 따는 일을 하면서도 흥얼거렸다고 한다.
이렇게 매일 아침 한 번씩 ‘절대에게 순수한 주의를 기울여’ 주의 기도를 드리는 일을 일과로 했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기도로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이 기도를 하나하나 마음을 기울여 외울 때 자기의 사고가 육체로부터 떨어져나가 알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공간 밖에서 들려오는 느낌을 받은 일이 있었다. 2년 전 잠시 솔레메에서 체험한 것과 같이 깊은 침묵으로 열린 광대무변 속으로 내던져져 때로는 몸으로 다가오는 듯한 확실한 사랑의 재림을 본 일도 있었다. 179,180
그는 사회적인 것으로서 교회의 기능을 불가결하게 인정했다. 교의를 집단적으로 보존해야 하는 역할을 가지는 한 교회는 스스로 대립하는 자에게 ‘파문을 명한다’는 두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도 역시 지산에서 하나의 권위로서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회적인 것’의 하나이며 이 지상의 조국에 대해 동일한 애국주의의 감정을 사람들에게 고취하는 것이기도 하며 거룩한 것의 대용품으로 대리하려는 것, 따라서 악마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84
1942년에는 또 하나 중요한 만남이 있었다.
그 해 부활절에 그는 알비의 고향인 카르카손으로 여행했다. 안 카르카의 베네딕트 수도원장을 방문하고, 거기서 엄숙한 수행자의 모습과 로마네스크 풍의 훌륭한 건축미에 감격하기도 하며 또 르보 가(家)에서 하루 저녁을 지낸 뒤 신비사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밤이 깊어 인사를 치르고 나온 그는 새벽 2시경 조 부스케의 집에 겨우 도착했다. 부스케는 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로서 1차 대전에서 불치의 증상(척추부상으로 양쪽 다리 마비)을 입은 뒤 쭉 병상에서 오직 내면생활을 충실해 해옴으로써 자신의 불행을 극복한 사람이었다.
그와 베이유는 남은 밤을 열정적인 대화를 나누며 지새웠다. 새벽녘에 그 방을 나와 옆방에서 몇 시간 잠을 자고 돌아왔다. 고뇌라는 점에서 통하는 무엇인가를 가진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 이었다. .....
그는 부스케를 향하여 ‘당신은 세계의 현실을 고스란히 자신에게 실재시키는 특권을 지녔습니다’라고 했다.
그것은 몸에 ‘전쟁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었다. ‘불행에 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불행을 몸에 못처럼 깊이깊이 박아 넣어 그것을 지니고 있어야만 합니다. 사고가 그것을 줄곧 뚫어지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함을 지니기까지, 그것을 오래 지녀야만 합니다.’
이 말은 베이유 자신의 가슴 깊숙이에서 울려오는 고백으로 들을 수 있다. 자기 몸을 파먹을 정도로 불행을 짐 진 사람만이 이 세계의 불행에 진실로 공삼하며 불행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사랑의 손을 뻗칠 수 있다.
‘육체 속에 들어 있는 불행이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불행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사람들을 행복합니다. 그 사람들은 세계의 불행을 있는 그대로 진실되게 인식하고 현실의 그 자체를 바르게 보는 힘과 활동을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 속죄입니다. ... 이 힘을 가지고도 그것을 완수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2천 년 전 로마 제정하에서 가장 큰 불행은 노예의 처지였다. 노예가 된 이는 십자가 위해서 살해당했다. ...’ 다뷔 여사는, 시몬느 베이유의 이 말이야말로 ‘예수는 세상 끝까지 고통으로 번민한다’(<팡세>)고 하는 저 절규에 매달린 것이라고 한다. 시몬느 베이유도 역시 ‘그래서 우리는 잠들지 못한다’고 하는 파스칼과 함께 호소한다. 베이유의 말은 이렇게 언제나 우리의 정신을 향하여 화살을 당긴다. 186,7
그리스도교의 위대함은 고통의 치유를 초자연적인 것으로 해결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이용해 주기를 구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불행은 근절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일단 상처를 받은 인간의 본성은 결국 이 세상에서는 치유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의 심부에 있는 가락을 들을 수 있다. 193
신의 주관 안에 있는 이 무한한 간격, 십자가로 상징되는 갈갈이 찢기는 고통 - 그러나 사랑은 이긴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이별이 어떠한 고통을 가져온다 해도 이별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도 행복한 것의 하나이다. 고통을 떠맡아 보면 모든 것이 중력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이 세상 모든 것이 어떤 맹목적인 필연성으로 움직이는 메카니즘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일단 자기 밖으로 ‘껍질을 깨고’ 나올 때 혹은 이 세상을 바깥에서 볼 때, 필연성으로 보이던 것이 복종으로 된다. 때때로 예술작품이 이 세상 것 같지 않게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예술가가 신의 빛을 받은 것이지만 자신은 알지 못하는 물질과 같은 순종을 따르기 때문이다.
시몬느 베이유는 이전부터 스토아 파의 ‘운명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어 오는 모든 상황을 그대로 수용할 것을 자기의무로 여긴 것을 생각하자. 세계도 역시 신께 복종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역시 배워서 아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의 수업이다. 모든 수업과 마찬가지로 노력과 시간이 요구된다.’ 195
무한한 공간과 시간이 우리를 신으로부터 떼어놓고 있다. 우리가 너무나 안달복달하기 때문에 신이 있는 곳으로는 수직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다만 신만이 우주를 가로질러 우리가 있는 곳으로 끝없는 사랑을 퍼부어 주는 것이다.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은 미리 조그만 종자를 우리에게 남겨 두었다. 이 종자가 커나가면 고통을 가져온다. 그것이 우리 속에 들어 있는 피조성을 때려 부순다. 신은 오직 영혼을 통하여 스스로를 사랑할 뿐이다. 영혼은 사랑이 옮겨오도록 자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내가 무(無)가 되도록 이끌어서 신은 나를 통해서 자기자신을 사랑한다.’<(노트)> 시몬느 베이유가 말하는 ‘탈피조(脫被造)’란 이런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창조하지 않은 이전의 상태 즉 무로 바꾸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신은 무한 저편에서 우리에게까지 사랑을 준다. 그러면 우리는 역으로 나갈 수 있을까? 인간은 불행 속에 묶여 살아서 곤충 채집상자에 핀으로 꽂힌 곤충처럼 발버둥치고 있다. 이런 두려움 속에서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시몬느 베이유는 어떤 불가능도 장애도 어려움도 없다고 한다.
불행은 신이 만든 교모한 장치다. 쇠망치로 맞은 충격이 날카로운 못 끝으로 전해오듯 맹목적이고 거칠며 냉혹한 무한한 힘이 조그만 못 끝을 통해 영혼의 중심에 구멍을 뚫으려 한다. 그러나 영혼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한 이 한 점은 끝내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노력하는 방향’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못을 박아 넣어도 외줄기 영혼을 신으로 향하는 자는 이를테면 세계의 중심에 못 박힌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참중심인 신 그 자체라고 베이유는 말한다. 오로지 한 줄기만을 응시하며 자기 몸에 뿌리박한 못의 통증을 참아내는 베이유의 엄청난 노력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사랑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 ‘사랑은 신적인 것이다. 사랑이 사람 마음에 들어올 때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부서뜨린다’(<초자연적 인식>)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 사랑을 연약한 몸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버틴 것, 시몬느 베이유의 사명을 이것으로 다한 것이다. 196,7
이렇게 자신이 언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도 모르는 사랑이야말로 참인간애이며, 또 그것은 간접적으로 신에 대한 사랑이다. 신과 일치되어 있지 않아도 무의식중에 어느 샌가 신을 향한 사랑이 되어 있다. 시몬느 베이유는 그것을 ‘신을 향한 암묵적인 사랑’이라 부른다. <신을 기다리며> 중에 들어 있는 긴 논문에서 이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신에 대한 암묵적인 사랑에는 세 개의 대상밖에 없다. 즉 인간애, 세계의 아름다움, 종교적인 성실이다. 그리고 이것에 우애를 덧붙일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이 신에 대한 사랑을 대신 할 수는 없다. 또 암묵적인 사랑을 가장 고도로 키워나가지 않으면 영혼 속에 신의 정신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다. 인간애에 관해서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들 하나하나가 가지는 사랑의 모습에서도 베이유의 생각은 극히 순수하고, 엄격하다. 다만 이 논문을 읽으면 우리에게는 끝없는 희망이 비치는 듯하다. 그것은 교회의 독점물로 된 신앙이 사실을 가장 폭넓은 것이라는 것, 영혼을 높여 신에 가깝게 가는 길은 결코 하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 하나를 깊은 주의를 가지고 추구한다면, 그의 말에 따르면 ‘광기와 같은 소망’을 가지고 순수하기 자기를 버리고 보다 높은 것을 지향하며 추구한다면 (자기는 의식하지 못해도) 신과 만나는 것이다. 199,200
마지막으로 베이유가 이런 사랑에 대한 의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허기가 있어야 한다고 쓰고 있음에 주목해 보자. 위험한 것은 자기의 허기를 모른 채 자기를 둘러 싼 암흑 속에서 병적인 쾌락을 일삼는 데 안주하는 일이다. 이 진실을 직시하는 두려움, 그러나 어떤 우상숭배의 유혹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여러 가지 공격을 참아내며 줄곧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사랑이란 영혼의 눈이다. 뭔가를 혼자서 직시하며 주의를 기울여 하나의 진실만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갈망이 가득할 때야 비로소 소리를 지르며 영혼의 갈증을 호소할 수 있다. ‘어딘가에 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배고픔을 울며 호소하는 어린아이처럼’. 이런 참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을 잊어버린 이 시대에 그의 말을 가슴을 후벼 파는 절실함을 보여주고 있다. 202
<어떤 수도사에게 보는 편지> 중에 그는 이런 글을 쓰고 있다. ‘다양한 종교의 전승은 모두 동일한 진리를 다양하게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진리가 귀중한 것은 한결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개개 사람은 이 전승 중에 하나만을 선택하며 그 외의 전승은 외부에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 사상이나 그노시스 설화, 힌두교사상의 형이상학, 민속종교 등을 연구하여 이들 모두를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고 보며 그가 가까이에서 하나의 진리로 체험한 그리스도의 수난사랑에 그것들이 연결된 것을 확인한 것이다.
유럽이 과거에 잃어버린 고대의 풍부한 문명과 영적연결을 이제 다시 부활시키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세계의 아름다움이나 영혼에 관한 고찰을 인용하고 있는 그의 논설 속의 고통하는 의인의 모습에서 십자가 위의 예수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플라톤의 사상에서 ‘복음서의 균열’을 이해한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스도교를 준비한 플라톤’이라고 쓴 파스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를 상징한 노아의 방주와 그리스 밀교의 <디메텔의 찬가> 중에서 신이 인간을 찾아 헤매는 신화의 원형을 발견한 그의 생생한 고찰은 흥미롭다.
이렇게 ‘그를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의 걸음’(페기)과 모든 사상이 동일한 인간성의 본질에서 출발한 대류 속으로 흘러드는 모습을 웅장한 전망과 함께 그려 보이고 있다(그가 만약 법연이나 정토교의 사상을 알았다면 무척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 흐름을 방해하고, 유럽을 뿌리째 뽑아버린 민족적인 집단으로 신을 받드는 이스라엘과 우상숭배의 지상국가인 로마를 격렬한 말로 비난한다. 203,4
다시 두 번째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에는 이 불행에 대한 사랑이 통렬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숭고한 외침이 들어 있다.
‘..... 고난과 위험은 나의 정신적 구조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성질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랜 경험으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구상에 점점 확대되어 가는 불행이 나에게 붙어 다니며 나를 깨뜨리고, 부서뜨리며 무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내가 그 능력을 회복하고 불행에서 해방되는 것은 위험과 고통을 끝까지 받아들이는 일뿐입니다. 소원입니다. 어떡하든지 내가 슬픔에 빠져 그 힘을 헛되게 소모하지 않도록 되도록이면 많은 고통과 위험을 무릅쓰게 해주십시오. 나는 이제 오늘과 같은 이 상태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절망밖에 없습니다.’
그는 일 년간 기계공장에서 노동했던 일, 농장에서 6주 정도 포도따기를 했던 일 외에는 아무런 전문기술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술적 지식이 없이도 고도의 위험과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맡고 싶다고 청원한 것이다. 그에게는 위험과 고통이 빵처럼 필요했다.
‘그런 일을 주지 않는다면 런던에서도 뉴욕과 마찬가지로 슬픔으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성격을 가진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있어 그 어떤 본질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내가 확신하건데 그것은 단순히 성격문제만이 아니라 사명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213,4
“종말이 결정되지 않은 짧은 이 세상에 살 동안 다만 이처럼 울부짖는 것, 그리고 무로 소멸해 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좋은 일이 아닌가.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지금부터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 영혼은 영원한 침묵 소r에서 끝없이 울부짖는 일 외에는 그 어떤 말도 필요 없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 앞에서 신이여 어떻게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한 저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되고 싶다. 그 특권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천국이라 부르는 것은 모두 버릴 것이다.”
모든 것을 벗어 버리는 것, 자기를 위해선 무엇 하나 바라지 않는 것, 자신을 위해서 더욱 수난과 십자가를 지려 하는 것이다. 시몬느 베이유에 따르면 창조란 신이 자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리스도란 형태를 취하여 자기를 부정하며 죽음에 넘겨줌으로써 ‘사랑’을 보여주었다. 인간이 에너지를 끝까지 사용하여 오로지 침잠하는 것도, 자기의 특권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외의 존재, 자기보다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을 살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자기자신을 철저히 내던져 버리고 신에게도 버림받은 상태에서 깨어지고 부서질 때, ‘초자연의 빛이 자기를 통해’ 움직이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밖에 이룰 수 없는 것이다. 216
시몬느 베이유는 이렇게 수치스런 시련을 받고 죽음에 이른 전형으로서 그리스도를 흠모한다고 고백한다. 이즈음 그는 ‘십자가를 짊어질’ 결의를 다졌다고 볼 수 있다. “자기를 뿌릴 뽑지 않으면 안 된다. 나무를 잘라 십자가를 만들어 항상 그것을 져야만 한다. 사회적으로도, 자연스런 성장에서도, 자기를 뿌리 뽑아야만 한다.”
그러면 뿌리뽑기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이름없는 자가 될 것. 인간이라는 물질이 될 것. 몸에 붙은 장식을 떼고 알몸이 되는 일을 인내할 것. 자기를 낮출 것. 죽음을 받아들일 것. 성인이란 살아 있어도 사실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이다.”
여기서 우리의 마음을 뒤집어놓는 것과 같은 그의 기도가 용솟음쳐 나온다.
“신을 향하여 부르짖는다. 아버지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을 내가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 저의 사랑이 신 당신에 대한 신의 사랑과 같이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는 불이 되듯이. 이 모든 것이 내게서 찢겨나가 신과 같이 설욕을 당하며 육체의 양식과 정신의 양식도 모두 부족한 불행한 자들에게 음식으로 줄 수 있도록. 그리고 나는 마비환자, 맹인, 백치, 병든 노환자로 전락해 버리도록. 영원히 나는 찢겨지고 찢겨지게 해주십시오. 나는 없어지는 일밖에 남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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