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묵상하라

초연함

깜장보석 2010. 1. 2. 16:54

 

 

변화하는 유일한 길은 이해를 바꾸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해에 착수할까요? 우리가 갖가지 집착들에 얼마나 예속되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이 애착들을 고수하기 위해 우리는 세상을 재정리하려고 분투중입니다. 세상이 그것들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으니까요. 친구가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까봐 내가 두려워합니다. 그이가 또는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로 돌아서지 말아야 할 텐데. 내가 이 다른 사람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나 자신이 매력적이도록 해야지. 그이 또는 그녀의 사랑이 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도록 누군가가 나를 세뇌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그런 건 아닙니다. 나에게 다른 사람의 사랑이 필요한 게 아니죠. 현실과 접촉할 필요가 있을 따름이죠. 나의 이 감옥을, 이 설계화를, 이 조건화를, 이 그릇된 신념들을, 이 환상들을 부수고 나올 필요가 있는 겁니다. 탈출하여 현실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는 겁니다. 현실은 사랑스럽습니다. 한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영생은 지금입니다. 우리는 영생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물고기가 바다 속에 있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애착이 너무나 큰 방해가 되고 있는 겁니다. 일시적으로는 세상이 우리의 애착에 맞게 재배치되고 그래서 우리는 "야, 신난다! 우리 편이 이겼다!" 합니다. 그러나 기다려 보세요. 변할 겁니다. 내일이면 우울해질 겁니다. 왜 우리는 이런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요? 잠시 이런 조그만 실습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애착하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달리 말해서, 없다면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런 무엇이나 누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일·출세·직업·친구·돈 … 뭐든지 좋겠죠. 그런 다음 그 대상이나 그 사람에게 말해 보십시오. "내가 행복하기 위해 정말 네가 필요하지는 않아. 네가 없으면 내가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신념으로 내가 나 자신을 속이고 있을 뿐이야. 실은 내 행복을 위해 네가 필요치 않아. 너 없이도 나는 행복할 수 있어. 네가 나의 행복은 아니야. 네가 나의 기쁨은 아니야." 애착의 대상이 사람이면 이 말은 썩 기분좋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말하십시오. 마음 속으로 은밀히 말할 수도 있겠죠. 어느 경우든 여러분은 진실과 접촉하고 있을 것입니다. 환상을 깨뜨리고 있을 것입니다. 행복은 환상이 없는, 환상을 떨쳐 버린 상태입니다. 달리 실습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비탄에 잠겨서 다시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를 상기해 보십시오 - 남편이 죽었다, 아내가 죽었다, 절친한 친구에게 버림받았다, 돈을 잃었다 등등.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시간이 흘렀고 그래서 또 다른 애착을, 매력을 느끼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대상을 찾아내게 되었다면, 옛 애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복하기 위해 정말 그게 필요했던 건 아니잖아요? 여기서 교훈을 얻어야 했던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배우는 일이 없는 겁니다. 우리는 설계되어 있습니다. 조건지어져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홀가분한 일입니까. 단 일 초만이라도 그런 체험을 얻을 수 있다면 그때는 감옥을 부수고 문득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느 날 어쩌면 날기까지 할 것입니다. 두려운 일이었지만 나는 하느님께 말씀드렸는데, 나는 하느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의 첫 반응인즉 "이건 어느 모로 보나 내가 자라나며 배운 것과는 아주 반대되는 건데"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한 애착만은 예외로 삼고 싶어합니다. "하느님이 만일 내가 그분은 당연히 그런 분이라고 생각하는 그 하느님이라면 내가 그분에 대한 애착을 버릴 때 좋아하시지 않겠지!" 좋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을 얻지 못한다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이 "하느님"이란 진짜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겁니다. 꿈꾸는 상태를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개념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 때로는 "하느님"을 버려야 합니다. 수많은 신비가들이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사에 의해 하도 눈이 멀어서 애착들이 관계들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해친다는 기본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절친한 내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하자니 몹시 두려웠던 일이 기억납니다. "난 실상 자네가 필요한 건 아닐세. 자네가 없어도 난 완전히 행복할 수 있다네. 그리고 이렇게 말함으로써 난 자네와 함께 있기를 철저히 즐길 수 있다는 걸 발견한다네 - 인젠 불안도, 질투도, 집념도, 애착도 없거든. 애착이 없는 바탕 위에서 내가 자네를 좋아하고 있을 때 자네와 함께 있다는 게 기쁜 일이지. 자네는 자유야, 나도 그렇고." 그러나 틀림없이 여러분 중 많은 분들에게 이 말은 무슨 외국어처럼 들리겠죠. 내가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는 여러, 여러 달이 걸렸습니다. 아시다시피 난 예수회원이고 예수회의 영성 수련들은 모두 바로 이와 연관된 것인데, 그럼에도 나는 그 요지를 놓쳤던 겁니다. 우리 문화와 우리 사회 일반이 나의 애착들에 따라 사람들을 보도록 날 가르쳤기 때문이죠. 심리치료사나 영적 지도자 같은 일견 객관적인 사람들까지도 누군가를 두고 "그 사람 대단한 친구야, 대단한 친구라구. 난 정말 그가 좋아"라고 말하는 걸 보면 썩 재미날 때가 더러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건 그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죠. 나 자신을 들여다보노라면 똑같은 고질이 새삼 도지는 걸 발견하게 되죠. 인정과 찬사에 집착하면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그 집착을 위협하느냐 아니면 조장하느냐와 관련지어 보게 됩니다. 당선을 바라는 정치인이라면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어떤 방향으로 나타낼까요? 자기에게 투표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겠죠. 섹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자나 여자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권력에 애착한다면 권력에 물든 색안경을 통해서 인간을 보게 되죠. 애착은 사랑의 능력을 파괴합니다. 무엇이 사랑입니까? 사랑은 감수성입니다. 깨어 있는 의식입니다. 한 예로, 교향곡을 들으면서 드럼 소리만 듣고 있다면 교향곡을 듣는 게 아니죠. 무엇이 사랑하는 마음입니까? 사랑하는 마음은 생명의 '전부'에, '모든' 사람들에게 민감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라도 혹은 무엇에 대해서라도 모질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이 사랑이라는 말에 집착하게 되는 순간 다른 많은 것들을 배제해 버리게 됩니다. 집착의 대상을 보는 눈만 있을 뿐, 드럼 소리를 듣는 귀만 있을 뿐, 마음은 모질어진 겁니다. 게다가 눈마저 멀게 되죠. 집착의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게 되니까. 사랑에는 지각의 명료성이, 객관성이 따르는 법입니다. 사랑처럼 눈밝은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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