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의 거울(정서하)
◇ 등장인물
■ 최 소정: 자기만의 공간에 스스로를 고 립시킨 만삭의 산모.
■ 닥터 민: 다소 비대한 몸매를 가진 정신 과 의사
■ 정 화: 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술 집 호스테스
■ 간호사
■ 오 형사.
무대 왼편, 주무대가 되는 닥터 박의 사무실은 상당히 고풍적인 분위기다. 임상적인 관찰이 주를 이루는 이론적인 치료의 허점을 상징하는 서가에 전공서적이 빼곡한 것이 특징. 무대중앙에 위치한 전신거울은 소정의 자아를 비추는 도구이나 그 또한 환상에 불과할 뿐 카오스를 반추할만한 절대적인 조건은 되지 못하며 이 거울 주위로 서너 평 정도의 부스로 이루어진 공간은 상황에 따라서 소정이 살던 방과 병실로 바뀐다.
● 제 1장 조울증
무대 밝아지면 배가 볼록한 소정,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밝은 모습. 닥터 민 등장, 소정에게 다가간다.
닥터 민: 소정씨….
소 정:(천진난만하게) 어머! 선생님 오셨어요?
닥터 민: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요?
소 정: 네…우리 그이가 온다고 했거든요.
거울을 보며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듬는 소정,
닥터 민: 참, 아기 아빠 직업은 뭐예요?
소 정: 경찰관이요.
닥터 민: 경찰관이요?
소 정: 나쁜 사람들을 잡아가는 경찰관이에요.(은밀하게) 이건 선생님한테만 살짝 말씀드리는 건데요. 저한테 큰소리치면 절대 안돼요.
닥터 민:(조금 크게) 왜죠?
소 정:(기겁하며) 앗, 큰소리를 치면 안 된다니까요!
닥터 민:(살짝) 왜요?
소 정: 큰소리를 치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래요,
(주위를 불안하게 살피며) 시끄러운 건 아주 나쁜 짓이라고 했어요….
닥터 민: 누가 그랬어요? 경찰관 아저씨가 그랬나요?
소 정:(말 돌리며) 선생님, 이거 어때요?(뜨개질하던 것을 보여준다.)
닥터 민: 아기 옷이군요.(보면 아기에게 입힐 원피스가 거의 완성 단계다.)
소 정: 전, 우리 아길 낳으면 공주처럼 키울 거예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하고 절대로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
닥터 민: 지금… 소정씰 홀로 내버려두는 그 사람이 밉지 않나요?
소 정:(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주문처럼)
밉지 않아요. 밉지 않아요… 밉지 않아요….
소정, 공황상태가 되어 정물처럼 꼼짝 않는다.
닥터 민:(관객에게) 소정씨는 중증의 조울증 환자입니다. 조울증은 의학적으로 '양극성 장애' 라고 하는데 조증은 자신감에 찬 기분이 과도한 것을 말하고 울증은 자신감이 줄어들고 피로가 쉽게 느껴지며,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멍한 상태가 되기 쉽습니다.
닥터 민, 자기 암시에 걸린 소정이 주시하고 있는 거울을 거꾸로 돌린다.
여전히 멍하니 있는 소정.
닥터 민: 소정씨…
소 정:(반응 없음)
닥터 민:(소정의 몸을 살짝 흔들며) 소정씨….
문득 정신이 드는 소정, 침울한 표정과 힘없는 말투가 이전의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하는 눈치다.
소 정:(닥터 민을 보고 새삼스레)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닥터 민: 오늘은 기분이 우울해 보이는군요?
소 정: 네… (간절히 매달리며) 저, 여기서 빨리 나가고 싶어요…우리 그 일 꼭 만나게 해주세요.
닥터 민: 아기 아빠 직업이 뭐죠?
소 정: 선생님…
닥터 민: 선생님?
소 정: 초등학교 선생님인데(사이) 그만 뒀어요.
닥터 민: 왜 직장을 그만 두셨나요?
소 정: 너무 울어서요.
닥터 민:(의아하게) 너무 울어서요?
소 정: 네, 제가 너무 울어서 그만 뒀어요… 그 이는 애들이 우는 걸 싫어해요.(은밀하게) 그러니까 선생님두요, 절 울리면 절대 안돼요.
닥터 민: 왜죠?
소 정: 제가 울면…(주위를 불안하게 살피며) 그 이가… 절….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화들짝 놀라는 소정.
닥터 민, 사무실로 전화를 받으러 가면 소정, 그녀의 동태에 주의를 기울인다.
닥터 민:(수화기 들고) 닥터 민입니다. (사이)아직까지 별 차도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닥터 민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소정, 통화내용이 궁금한 듯 귀를 기웃거리다 닥터 민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점점 안절부절 못 한다.
닥터 민: 제 환잘 죄인 취급하지 마세요.(점점 목소리가 커진다.)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죄를 어떻게 법대로만 처벌할 수 있습니까?. (답답한) 그러니까 제게 맡긴 것 아닙니까?
소 정:(귀를 막으며 버럭) 시끄러워!!
닥터 민:(놀라 보며)
소 정:(발작) 떠들지마!!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말란 말야!! 울지도 마!! 입벌려 말하지도 마!! 내 말 안 들으면 다 죽여버릴 거야!!
뜨개바늘을 들고 닥터 민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소정.
닥터 민, 당황한 나머지 저도 몰래 수화기를 떨어트린다.
소 정:(살벌하게) 왜 내 말을 듣지 않는 거야?
닥터 민: 소정씨… 진정하세요.
소정에게 쫓겨 거울 근처로 밀리는 닥터 민, 문득 발 밑에 뜨개질 감이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한다.
서둘러 뜨개질 감을 드는 닥터 민.
닥터 민: 소정씨! 이 거 기억나요?
소 정:(옷을 보며)
닥터 민: 이거 아기에게 줄 선물이잖아요. (뜨개옷을 내밀며) 소정씬 곧 행복한 엄마가 될 부드러운 여자잖아요.
소 정:(뜨개옷을 받아들고 찬찬히 보면) 얼른 거울을 돌려 소정의 모습을 비추는 닥터 민.
소정, 거울 속 자신의 모습과 옷을 번갈아 보며 서서히 몽환적으로 변한다.
소 정:(홀린 듯이) 전, 우리 아기를 낳으면 공주처럼 키울 거예요. 아무도 못 만지게 하고 절대로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거예요.
닥터 민: 아긴 인형이 아니에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야죠.
소 정: 아뇨, 아긴 제 사랑만을 필요로 해요. 엄마의 사랑만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될 수 있다구요.
닥터 민: 소정씰 이곳에 내버려두는 아기 아빠가 밉지 않나요?
소 정:(거울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주문처럼) 미워요… 미워요… 죽이고 싶도록 미워요.
거울을 보며 우는 듯 웃는 듯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정. 서서히 암전.
● 제 2장 공황장애
무대 밝아지면 병실의 소정, 거울 앞에 모로 누워 있고 닥터 민과 정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대화를 나눈다.
정 화: 아직까지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하나요?
닥터 민: 글쎄요… 이렇게 자기만의 공간에 숨어있는 동안엔 뭔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닥터 민, 정화와 사무실로 이동, 상담석을 사이로 마주 앉는다.
닥터 민: 소정씨완 어떻게 되는 사이죠?
정 화: 이웃사촌이에요.
닥터 민: 그럼 소정씨의 남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군요.
정 화:(질린 듯) 그 사람 얘기라면 말도 꺼내지 마세요. 경찰서에서 질리도록 했던 말을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닥터 민: 전 경찰과는 달라요. 그들은 결과를 두고 판단하지만 전 원인을 파악하여 치료하는 의사니까요… 정화씨, 탁이에요… 소정씨가 현실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정 화: 만일 그게 소정이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면?
닥터 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라 해도 남은 생을 허수아비처럼 살순 없어요.
정 화: 소정인 저 안에서 나오면 죽어요.
닥터 민: 이렇게 사는 건 삶이 아니라 사육 당하는 거예요. 닭장 속의 닭처럼, 어항 속의 물고기처럼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죠.
정 화: 그럼 소정이의 병이 치료되면 닭장 속의 닭은 날 수 있는 건가요?
닥터 민: 날 수 있어요… 하지만 반드시 길들여진 날개를 꺾어야만 가능하죠.
정 화: 새 날개가 돋아나기 전에 외로움에 먼저 지쳐 죽을 걸요?
닥터 민: 그래도 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저버려선 안돼요.
정 화: 하지만 저 곳에서 나온다고 해도 누가 소정일 책임져 주죠? 설령 비상할 수 있다고 해도 언젠간 사람들에게 잡아먹히겠죠.
닥터 민:(주지하듯) 정확히는 남자들이겠죠?
정 화: 네?
닥터 민: 실례지만 혹시 유흥업소에 다니나요?
정 화:(당황) 지, 직업은 못 속인다더니… 상당히 예리하시군요.
닥터 민: 날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잡아먹힐 생각부터 하나요?
정 화: 남자들이 원하는 건 저처럼 뽀얀 피부에 날씬한 몸매죠. 하긴 선생님 같은 몸매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일 테지만…
닥터 민: 성을 매개로 삶을 유지하는 것이 언제까지 가능하다고 생각하나요?
정 화: 최소한 전 하늘을 날고 싶다는 황당무계한 꿈 따윈 꾸지 않아요.
닥터 민: 그래서(사이) 소정씨의 남편과 내연의 관계를 맺었나요?
정 화:(버럭)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 문젠 충분히 경찰서에서 해명을 했고…(버벅대는) 서, 설령 그랬다치드래도 그게 그렇게 큰 죄가 되나요?
닥터 민: 전 지금 정화씨와 신경전을 하자는 게 아니에요. 정확히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만 말해 줘요.
정 화:(방백) 어휴, 기 막혀… 꼭지 돌겠네… 지가 무슨 형사야?
닥터 민: 당신은 이곳에서 소정씰 처음 본 순간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하느냐고 내게 물었어요.
정 화: 그 그건…(여기서부터 밀리기 시작한다.)
닥터 민:(비수를 꽂듯) 혹시 소정씨가 뭔가를 기억해 내는 게 두려워서 그렇게 묻지 않았습니까?
정 화:(닥터 민의 확신에 찬 표정을 보며 이내 체념하는 투로) 그래요, 소정이 신랑과 몇 번 만나기는 했어요. 하지만 그저 단순히 즐기는 사이였을 뿐이고 그 사람도 그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았어요.
닥터 민: 그 사람에게 소정씨는 어떤 존재였나요?
정 화: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웬수였죠.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징징거리는 것 밖에 없는 바보등신이라고 늘 불평을 했으니까요.
닥터 민: 당연히 폭력적인 성향도 있었겠군요?
정 화: 요즘, 맞고 사는 여자들이 더 문제 아닌가요?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는 소정, 좁은 부스 안을 이리저리 피해 다닌다.
달려와 부스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란히 서는 닥터 민과 정화.
소 정:(손을 허공에 뿌리치며) 왜 이래요! (비명 지르며) 제발 때리지 말아요. 난, 더러운 년이 아니에요… 억울하다구요….
(문득 정화를 발견하고 죽일 듯이) 이 나쁜 년!!
(밖으로 나오기를 갈망하나 차마 나오지 못한다.)
감히 내 남편을 유혹해!! 더러워! 불결해!! 이 천박한 년!!
정 화: 그러는 넌? (경멸하듯) 밤마다 외간남자를 끌어들인 주제에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소 정:(충격으로 말문이 막힌다.)
닥터 민:(놀라 민정에게) 소정씨에게 내연의 남자가 있었나요?
정 화:(비웃는) 흥, 직접 물어보시죠!
닥터 민:(소정에게) 그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남편이 아닌 정분가요?
소 정:(혼란스러운 듯 시선을 피한다.)
닥터 민:(추궁하듯) 그래서 그 사실을 안 남편이 당신을 학대한 건가요?
정 화: 흥, 이제와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분명 공범이 있다구요.
소 정:(놀라) 공범? 그게 무슨 말이야?
정 화:(닥터 민에게 어이없다는 투로) 이 기집애,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로 모르고 있는 거예요?
소 정:(닥터 민에게 손을 내밀며) 도와 주세요… 제발….
닥터 민: 할 말이 있으면 나와서 해요.
소 정: 제가 믿을 사람은 이제 선생님 밖에 없어요. (간절히) 제발 도와 주세요. 제발….
닥터 민: 스스로 그곳에서 나오지 않는 한 아무도 소정씰 도와 줄 수 없어요.
소 정: 제발…
닥터 민: 용길 내세요… 그곳은 소정씨의 무덤입니다.
소 정: 여긴… 너무 어두워요… 꿉꿉한 곰팡이 냄새와 습기….
정 화:(냉큼) 얘가 살던 방이 지하였거든요.
소 정: 여긴…불을 켜지 않으면 남편 얼굴도 못 알아볼 만큼 어두운 곳이에요.
정 화: 둔하긴… 서방을 몸으로 알아보지, 얼굴로 알아보니?
닥터 민:(소정에게 조금 다가가며 예리하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소 정:(닥터 민의 손을 꽉 잡으며) 모르겠어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아요.
닥터 민, 부스 안으로 성큼 들어가 소정의 몸을 거울 쪽으로 돌린다.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는 소정.
뭔가 찔린 데가 있는 듯 슬그머니 사라지는 정화.
닥터 민:(소정의 손을 그녀의 배에 대며) 소정씬 혼자가 아니에요.
소 정:(배를 어루만지며) 우리… 아기….
닥터 민: 아길 낳아 이곳에서 키울 셈인가요?
소 정: 여긴 너무 어둡고 무서운 곳이에요.(간절하게) 그 사람은 언제 오나요?
닥터 민: 소정씨가 기다리는 그 사람은 오지 않아요.
소 정:(슬프게) 정말로… 절 버린 건가요?
닥터 민: 그는 망령이에요….
소 정:(충격) 망령…
서서히 암전.
● 제 3장 히스테리
무대 밝아지면 사무실의 닥터 민, 차트를 넘기며 연구 중이다.
닥터 민: 히스테리… 히.스.테.리…(관객에게) 그리스어인 hystera가 어원인 히스테리는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고대에는 자궁병으로 불리며 여자에게만 있는 병으로 알려진 이 히스테리는 감정이 극단적으로 동요되어 정신적인 흥분 상태를 일으키는 일종의 신경증입니다. (사이) 그 날 이후 소정씨는 광장공포증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병세는 심인성 정신장애의 일종인 소아성 퇴행증으로 전이 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사소한 일에 분노를 터뜨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죠.
소정 등장. 닥터 민, 소정을 못 본 척 서류만 들여다본다.
아이처럼 시선을 맞추려고 주뼛거리는 소정. 끝낸 못 본 척하는 닥터 민.
화가 난 소정, 탁자를 신경질적으로 친다.
닥터 민:(놀라는 척) 어머, 소정씨 언제 왔어요?
소 정:(정색하고) 선생님, 저 무시하는 거예요? 사람이 왔으면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닥터 민: 미안해요. 정말 소정씨가 오는 걸 못 봤어요...
소 정:(억지) 제가 정신병자라고 무시하는 거죠?
닥터 민: 아니라니까…
소 정:(집요하게) 그럼 왜 못 본 척 했어요?
닥터 민:(조금 짜증)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소 정:(부화를 돋구듯) 사과할 짓을 왜 해요? 나 같은 정신병잔 자존심도 없는 줄 알아요?
닥터 민:(버럭) 소정씨!!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요?
소 정:(흠칫 놀라 닥터 민의 눈치를 보면)
닥터 민:(표정이 굳는다.)
소 정:(돌변하여 아부하는 투로) 헤헤… 선생님, 장난한 거예요.
소정, 혀를 날름 내밀면 기가 막혀 웃고 마는 닥터 민.
상담석을 사이로 마주 앉는 두 사람.
소 정:(닥터 민에게 손가락을 내밀며 아이처럼 어리광) 선생님 여기가 아파요. 호오~ 해주세요.
닥터 민:(소정의 손가락을 잡고) 손톱이 많이 길었네요. 이렇게 살을 파고드니까 아플 수밖에 없죠. 내가 잘라 줄까요?
소 정: 싫어요.(손을 얼른 뒤로 감춘다.)
닥터 민: 왜 손톱을 기르는 거죠? 상당히 불편할 텐데…
소 정:(심술 맞게) 할켜 줄 테야…
닥터 민: 누굴요?
소 정: 엄마요…
닥터 민: 엄마?!
소 정: 네. 우리 엄마를 할켜 줄 거예요.
닥터 민: 그럼, 오늘은 소정씨 어머니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 볼까요? 소정씨 고향은 어디예요?
소 정: 바닷가요.
닥터 민: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소 정: 아버진 어부였는데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대요.
닥터 민: 딱해라… 그럼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겠군요.
소 정: 네…
닥터 민: 소정씨 키우느라고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겠어요?
소 정:(고개 끄덕인다.)
닥터 민: 그런데 왜 가엾은 어머니를 할퀴려고 하죠?
소 정:(원망 어린 투) 엄만, 항상 날 혼자 내버려뒀어요. 선생님이랑 같이 있기 싫은데….
닥터 민: 선생님? (뭔가 직감하고) 선생님이 소정씰 괴롭혔나요?
소 정:(울먹이며) 네… 자꾸 제 몸을 만져요.
닥터 민:(예리한 지적) 어딜 만졌죠?
소 정:(대답 없이 양 허벅지 안쪽을 어루만진다.)
닥터 민:(성추행을 직감하고) 그 사실을 어머니께 말씀 드렸나요?
소 정: 아뇨…
닥터 민: 왜 말하지 않았죠?
소 정: 선생님이 그 사실을 말하면 엄말 죽일 거라고 했어요…너무 무서워서 울었는데… 시끄럽다고 절 마구 때렸어요…
닥터 민:(한숨) 나쁜 사람은 선생님인데 왜 엄말 할켜 주고 싶은 거예요?
소 정: 선생님은…(주저하다) 제 새 아빠예요.
닥터 민:(예상하고 있었듯이 고개 끄덕이며) 언제까지 선생님과 함께 살았죠?
소 정: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요.
닥터 민: 어머니가 또 재혼을 하셨나요?
소 정: 네…
닥터 민: 혹시 두 번째 새 아버지가 경찰관인가요?
소 정: 네…(허벅지 위를 자꾸 어루만진다.)
닥터 민, 답답한 듯 담배를 피운다. 그 사이 점점 꿈을 꾸듯 황홀해지는 소정, 마치 약물중독자 같다.
소 정: 두 번 째 새 아빤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누구보다 절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줬죠.
닥터 민:(예리하게 관찰)
소 정: 새 아빤 시끄러운 걸 싫어했어요. 큰 소리로 우는 것도, 아프다고 소리치는 것도 모두 나쁜 짓이라고 말했죠. (사이) 난 너무 아팠지만 새 아빠가 고통을 참아야만 어른이 된다고 해서 꾹 참았어요.
닥터 민:(뭔가 미심쩍어) 소정씬 그런 새 아버질 사랑했나요?
소 정: (황홀하게) 예… 난 우리 새 아빠를 사랑해요. 아주 많이….
닥터 민: 결혼 후에도 새 아버지를 자주 만났나요?
소 정: 새 아빤 남편이 없을 때마다 절 찾아왔어요. (음흉한 중년 남자의 음성처럼) 소정아…시끄럽게 떠드는 건 아주 나쁜 짓이야…(속삭이듯) 조용히 해… 그래, 넌 착한 아이야…아빠가 하라는 대로만 가만히 있어….
닥터 민: 소정씨 어머닌 그 사실을 전혀 몰랐나요?
소 정:(발작적으로 앙칼지게) 알면 어쩔 건데? 새 아빤 날 사랑하는데 지 따위가 뭘 어떻게 할 거냐구!
닥터 민:(나무라는 투로) 어머닌 당신의 연적이 아니에요!! 그게 얼마나 부도덕한 일인지 알기나 해요?
소 정:(분노) 닥쳐! 네 까짓 것들이 뭘 안다고 난리야!
닥터 민:(다그치며) 소정씨, 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요! 당신들의 부도덕한 행실을 어머니가 알았나요?
소 정: 도대체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가소롭다는 듯) 흥! 당신, 나 질투하는 거지? 사랑도 한 번 못해본 주제에 질투하는 거 맞지?
닥터 민:(무시하고) 혹시 소정씨 어머니, 그 일 때문에 돌아가신 거 아닌가요?
소 정:(손톱을 치켜들며) 그래 맞아! 우리 엄마 대신 네 얼굴을 할퀴어 줄까?
때마침 등장하는 간호사. 아무렇지 않은 듯 얼른 딴전을 부리는 소정.
간호사: 선생님… 경찰서에서 손님 오셨는데요….
닥터 민: 들어오시라고 해요…(지친 듯) 환자, 데리고 나가구요.
간호사, 소정을 데리고 나간다.
나가면서 애매한 미소를 닥터 민에게 던지는 소정.
두 사람 퇴장하면 곧 오 형사 등장.
오 형사:(너스레) 아이고 민 박사님! 지난번엔 별 일 없으셨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릴 듣고 살인사건이라도 난 줄 알았습니다.
닥터 민: 항상 겪는 일인데요, 뭘…
오 형사:(서류봉투를 건네며 확신에 찬) 드디어 범행 목적을 알아냈습니다.
닥터 민:(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확인하는 순간 놀라) 보험?
오 형사: 보시다시피 부부공동 명의의 생명 보험 증섭니다… 불행히도 살인자에겐 보상금이 돌아가지 않겠지만.
닥터 민:(다소 의아하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 자체가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오 형사: 이거,이거…그새 용의자에게 정이라도 드셨나요? 명심하세요, 정신병원은 치외법권지역이 아닙니다.
닥터 민: 무심히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습니다.
오 형사: 그러니까 제 2, 제 3의 개구리가 나오지 않도록 범인의 자백을 부탁드리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최 소정씨 의붓아버지 말씀인데요… 잠깐만 귀 좀….
닥터 민에게 귓속말로 정보를 알려주는 오 형사
듣고 놀라는 닥터 민에서 암전.
● 제 4장 밥상을 차리는 여자
무대 중앙에 간이 식탁이 있고 닥터 민과 소정, 각각 식판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다.
소 정:(불평) 어휴, 무슨 국이 이렇게 싱거워? 또 김치는 왜 이렇게 짜고… 선생님 여기 조리사 바꿔야겠어요.
닥터 민:(국과 김치를 먹으며) 음, 괜찮은데. 내 입에는 딱 맞는 것 같아요.(문득) 참, 소정씨 조리사였다고 그랬죠?
소 정: 네…(아련한) 그땐 저도 인기가 꽤 많았는데…우리 그 이도 제 음식 솜씨에 반해서 같이 살자고 했거든요.
닥터 민:(의미심장한 성적 뉘앙스) 무엇보다 값이 저렴했겠죠?
소 정: 네?
닥터 민: 값이 싼 데다 싱싱해서 맛도 좋으니 일석이조 아니냐구요.
소 정:(까르르 웃으며) 맞아요.
닥터 민: 남편이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뭐였어요?
소 정: 제육볶음… 매운탕… 낙지전골… 해물탕….
닥터 민: 모두 술안주네요…
소 정: 네… 우리 그인, 술을 너무 좋아해서 큰 일이에요.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라 술을 많이 마시면 안 되는데…
닥터 민: 그래서 남편이 일을 나가면 불안했겠군요…
소 정: 네… 그이가 돌아올 때까지 전 한 잠도 자지 못했어요. 늘 깨어있었고 잠을 잘 때도 깨어 있었죠.
다시 밥을 먹는 두 사람. 소정, 몇 숟가락 뜨다가 갑자기 끽끽댄다.
소 정:(밥알을 튀기며) 하하하! 그 멍청이들, 내가 잠든 줄 알고 (교성)
아~ 예~ 오~… 난, 정화 방에서 나는 소릴 다 들었어요.
닥터 민: 두 사람의 불륜 관계를 알고 있었군요…
소 정:(시무룩) 하지만 난…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해야 했어요.
닥터 민: 왜죠?
소 정:(주저하듯) 정화 그 기집애가 제 비밀을 알아버렸거든요.
닥터 민: 비밀?
소 정: 우리 새 아빠가 남편이 없을 때마다 다녀간다는 사실을 눈치 챘어요. (새 아버지 말이 나오자 갑자기 행복해진다.) 새 아빠도 내가 만든 음식을 아주 좋아했어요. 엄마가 만든 것은 맛이 형편없다고 타박을 하셨죠.
닥터 민: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질릴 때까지 배를 채우고 나선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 그런 남자들의 속성이에요.
소 정: 새 아빤 우리 엄마한테서 기분 나쁜 냄새가 난다고 했어요. 비린내…부패한 바람 냄새…남편을 잡아먹은 과부 냄새가 아주 재수 없다고 했죠.
닥터 민: 소정씨도 그 어머니의 딸이라는 생각 안 해봤어요?
소 정:(민감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엄마에 대한 기억 따윈 다 잊었어요.
닥터 민: 여전히 어머닐 미워하는군요.
소 정: 하지만 엄마가 먼저 날 질투했어요!
닥터 민: 어머니에게 소정씬 여자가 아니라 딸이에요!
소 정:(흥분하여 식판을 내리치며) 당신이 뭘 안다고 이러는 건데….
닥터 민:(얼굴에 튄 음식 찌꺼기를 손수건으로 닦는다.)
소 정:(당황하여 급히 수습) 어머 죄송해요…밥상머리에서 이러는 건 실롄데…우리 엄마가 이러는 건 아주 재수 없는 짓이라고 했는데….
닥터 민: 괜찮아요.
소 정: 아니에요. (죄인처럼)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소정, 닥터 민에게 굽신거리다 자기 방으로 달아나듯 들어간다.
닥터 민:(관객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던 여자…하지만 아무나 주인이 될 수 있는 대중식당의 밥상처럼 그녀가 차리는 밥상은 망령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닥터 민, 담배를 피우는 사이 소정은 밥상을 차려 거울 앞에 놓는다.
붉은 조명이 비치는 장소는 소정이 살던 지하방을,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가상의 상대(새 아버지)를 의미한다.
소 정:(거울 속 대상에게 음식을 권하며) 그 사람, 요즘 바람 피우는 것 같아요. (사이) 네? 남자의 바람은 철이 바뀌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외투 같은 것이라구요?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참을게요. 그사람이 무슨 짓을 하건 꾹 참을게요. (서글픈) 제겐 당신만 있으면 되지만…당신은 여기 오래 있지 못하잖아요.
닥터 민:(관객에게) 소정씨에게 두 번 째 새 아버지의 존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점령한 정복자이자 보호자였기에 그에 대한 맹종은 삶의 희망이자 신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소 정:(거울 속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나 당신이랑 살고 싶어요….
닥터 민:(관객에게) 가해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소정씬 아직도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처 성에 대한 정체성을 깨닫기 이전부터 잘못 길들여진 애정의 방식은 때때로 가학과 피학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죠.
조심스럽게 등장하는 정화, 소정의 방 근처로 가서 가만히 엿듣는다.
소 정: 벌써 가시게요? (교태) 아이,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 남편은 언제 돌아올지 몰라요. (거울을 애무하며)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교성) 사랑해요. 사랑해요…정화, 놀라는 순간 소정이 있는 쪽, 조명이 어두워진다. 정화에게 다가오는 닥터 민.
닥터 민: 당신이 소정씨 남편에게 그 사실을 일러바쳤군요?
정 화: 제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곧 발각됐을 걸요? 동네에서 저 기집애하고 붙어먹지 않은 남잔 병신이라는 말까지 나돌았으니까요.
닥터 민: 그 소문도 당신이 퍼트린 것 아닌가요?
정 화: 어휴, 그래서 고소하시게요? 증거 있어요?
닥터 민: 한 가지만 물어보겠어요.
정 화: 언제는 내게 허락 받고 물어봤어요?
닥터 민: 당신, 소정씨 남편과 함께 도피할 계획을 세웠죠?
정 화:(기겁하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이런 식으로 애꿎은 사람을 모함한다면 당장 고소하겠어요!
닥터 민:(오 형사가 준 서류 봉투를 소정의 눈앞에 대고 흔들며) 이게 뭔지 알아요?
정 화: 뭔데요?(봉투 겉면을 보고 이내 놀란다.)
닥터 민: 당신들, 소정씰 죽일 공모를 했죠?
정 화:(당황) 아니에요!
닥터 민: 그럼 보험은 왜 들었습니까?
정 화: 그, 그건…
닥터 민: 부부 공동으로 가입한 거액의 생명보험…당신이 이 상품을 소개했더군요.
정 화: 전 단지 보험회사에 다니는 제 친굴 소정이 신랑에게 연결해 줬을 뿐이에요.
닥터 민: 내연의 남녀가 상대 배우자의 목숨을 담보로 계약을 할 경우 보통 불순한 목적을 위장하기 위해 부부 동시계약을 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불행히도 상대가 바뀌고 말았죠? (추리) 햇볕도 들어오지 않는 협소한 지하방, 불을 켜지 않으면 남편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강도에게 저항하다 정당방위로 저지른 우발적인 살인인지, 아니면 남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한 계획적인 살인인지….
정 화:(엉겁결에) 범인은 죽었잖아요!
닥터 민:(허를 찌르듯) 지금 분명 범인이라고 했죠?
정 화:(헉!)
닥터 민: 정확히는 보험금을 노리고 강도로 위장해 임신 중인 아낼 살해하려했던 파렴치범!
정 화: 그, 그건 저도 몰래 실수로 튀어나온 말이에요! 그 사람은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 아닌가요?
닥터 민: 그래요. 범인은 죽었고 오히려 피해자가 됐죠. 하지만 만일 소정씨가 죽었더라면 당신도 공범이 되었겠죠?
정 화: 생사람 잡지 마세요!
닥터 민: 지난 번에 정화씬 소정씨에게 공범이 있을 거라고 단정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투사한 것 아닙니까?
정 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건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아무도 날 처벌하지 못해요.
닥터 민: 죽은 자는 말이 없죠. 하지만 당신의 양심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요?
닥터 민, 정화를 노려보면 정화, 그 시선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서서히 고개를 떨군다. 암전.
● 제 5장 싸이코 드라마
무대 밝아지면 무비카메라가 설치돼 있고 빈 의자 앞에 소정과 닥터 민이 서있다.
소정의 어깨에 손을 얹고 빈 의자를 보게 하는 닥터 민.
닥터 민: 지금 이 의자에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앉아있다고 상상해봐요.
소 정:(뇌까리듯) 가장 보고 싶은 사람….
닥터 민: 누가 가장 보고 싶죠?
소 정:(주저하다.) 엄마요….
닥터 민: 어머닌 소정씨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아닌가요?
소 정: 너무 미워서, 그래서 더욱 보고 싶어요.
닥터 민: 그럼 이 의자에 어머니가 있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해보세요.
닥터 민, 무비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르면 조명, 소정에게 집중된다. 이제부터 닥터 민은 극을 주도하는 연출자이자 보조자아의 역할을 한다.
극 중 극의 형태.
소 정:(빈 의자에 대고) 그렇게 병든 닭처럼 앉아만 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 엄마가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알아?
닥터 민: 어머니가 많이 아프신가요?
소 정: 항상 이래요…
닥터 민: 지병이 있으신가요?
소 정: 새 아빠한테 맞아서 골병이 들었어요.
닥터 민: 어머니가 폭행을 당할 때마다 당신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습니까?
소 정:(잠시 침묵하다 빈 의자를 마구 흔들며 버럭 소리) 아프면 소리치란 말야!! 그렇게 참지만 말고 악이라도 써! 이 바보, 멍충이!! 그러다가 정말로 맞아 죽으면 난 어떡해!! 난 어떡하냐구!!
닥터 민: 어머닌 당신이 마음의 상처를 받을까봐 이를 악물고 참았을 거예요.
소 정:(절규) 아니야! 아니야…아니야…(사이 두고 애처롭게) 엄마…나 다 듣고 있었어…잠든 척했지만 다 듣고 있었어…새 아빠들이 엄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나, 다 알고 있었단 말야…그때부터 난, 잠이 들어도 늘 깨어있었어…단 한번도 편한 잠을 자 본적이 없었다구…(닥터 민에게) 당신은 몰라요. 엄마가 매를 맞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알아요? 엄마가 날 혼자 내버려둘 때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의자에 대고) 엄마… 나, 새 아빠 따윈 필요 없었어…아무리 춥고 배가 고파도 엄마만 내 곁에 있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단 말야….
닥터 민: 어머니를 빼앗아간 새 아버지들이 미웠겠군요.
소 정: 아뇨…(차츰 혼란스럽다.) 난 날 예쁘다고 어루만져주고 입 맞춰주는 새 아빠랑 같이 잤어요.
닥터 민: 당신은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했을 뿐이에요. 그들의 희롱을 단지 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인 거죠?
소 정: 네…. 하지만 엄만 날 용서하지 않았어요. 더럽다고 발가벗겨서 살갗이 벗겨지도록 쑤세미로 내 온 몸을 빡빡 문질러 댔죠.
닥터 민: 어머니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습니까?
소 정: 제가 임신을 했거든요…
닥터 민: 임신이요?
소 정: 네, 두 번째 새 아빠의 아기였죠.
닥터 민: 그 때가 몇 살 때였습니까?
소 정: 열 다섯…(사이 두고 조금 억울한) 엄만 날 병원으로 데려갔어요. 그리고 아길 강제로 낙태 시켰죠. (배를 어루만지며) 아긴 반년 동안이나 이 안에 있었는데…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 같았는데…내가 어른이 되면 엄말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문득)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죠? 난, 너무 무서웠지만 새 아빠들이 그 사실을 말하면 우리 엄말 죽여버린다고 해서 말하지 못했어요. 단지 엄말 잃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 뿐이라구요…멍하니 서있는 소정.
닥터 민: (소정을 의자에 앉히며) 이젠 소정씨가 어머니의 입장이 돼 보세요.
소정, 잠시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다 조금씩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소 정:(어머니의 음성처럼) 소정아….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청상과부에게 세상은 너무 가혹했단다…젖이 나오지 않아서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 널 볼 때마다 엄만 죽고 싶었지…(목이 메여) 난 널 살리기 위해서라면 몸이라도 팔고 싶은 심정이었다….
닥터 민: 그래서 재혼을 했습니까?
소 정:(고개를 끄덕이며) 팔자 사나운 과부의 딸…굶주림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우리 소정이가 감수해야 될 괄시였어요. (눈에 띄게 몸을 흔들며) 그래서 제 사정을 잘 아는 동네 이장과 재혼을 했고 소정인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어요.
닥터 민: 그 자가 딸을 성추행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요?
소 정: 그 놈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지만…우리 모년 그냥 그 마을을 떠났어요
닥터 민: 그런데도 또 재혼을 하셨더군요.
소 정: 그때까지만 해도 어딘가에 아버지의 얼굴을 가진 남자가 있을 거라고 믿었던 거죠.
닥터 민: 두 번 째 남편은 아버지의 얼굴을 가진 남자였나요?
소 정: 그는 제가 다니던 회사의 공장장이었어요. 강한 남자였죠…우리 소정이도 그 사람을 경찰관 아저씨라고 부르며 좋아했어요. 그런데(점점 몸을 심하게 떤다.) 그 짐승 같은 놈이 그런 짓을….
닥터 민: 그래서 그 남자를 죽이고 자살했나요? 아니, 표면상으론 동반자살이 되겠군요.
소 정:(심하게 몸을 떤다.) 우리 소정일 지옥에서 벗어나게 해줄 방법은 그 길밖에 없었어요. 평생 살인자의 딸로 살게 할 순 없잖아요. (시니컬하게) 우린 청산가리를 탄 술을 함께 마셨죠.
닥터 민: 죽음으로 끝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살아서 극복하지 못하면 망령으로 떠도는 업이 되니까….
소 정:(버럭 소리)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아요! 내가 치가 떨리도록 끔찍한 고통을 참으며 폭행을 당할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죠? 내 아이가 그 추악하고 더러운 손길을 사랑으로 오해하는 그 순간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요? (흥분상태에서 서서히 소정의 자아를 회복하다가 불현듯) 아파요…(가슴을 쥐어뜯으며) 아,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파요! 누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아요!
닥터 민:(예리한) 강도군요!!
닥터 민, 무릎을 꿇어 소정과 눈높이를 맞춘다.
닥터 민: 그 날 밤에 있었던 일이 기억나나요?
소 정:(고통스러운) 남편이 들어온 줄 알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날 때리고 목을 졸랐어요. 아, 너무 어두워요. 너무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우리 아기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숨이 막힐 듯 고통스러워한다.)
닥터 민: 그가 누군지 잘 기억해봐요.
소 정: 모르겠어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요.
닥터 민: 당신은 잠들지 않았어요. 아니 잠들 수 없는 사람이에요!!
소 정:(공포에 질려) 모르겠어요!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닥터 민: 살려고 몸부림치는 당신의 손에 가위가 잡혔죠? 그리고 그걸로 강도의 목을 찔렀죠? 한 번! 두 번! 세 번!
소 정:(가위로 찌르는 시늉하며 격앙) 나쁜 놈! 나쁜 놈! 나쁜 놈! (사이 두고 불현듯) 헉!! 내가 남편을 죽인 건가요?
닥터 민:(소정을 와락 끌어안으며 세뇌하듯) 아뇨 당신은 남편을 죽이지 않았어요. 강도를 죽인 것뿐이에요.
소 정:(잠시 멍하니 있다가 통곡) 엄마…엄마…엄마….
닥터 민:(다독이며) 괜찮아요…다 끝났어요…이제 다 끝났어요….
암전.
● 제 6장 망령의 집
무대 밝아지면 사무실에서 전화 통화 중인 닥터 민
닥터 민: 녹화 테이프를 소명자료로 첨부합니다. 아, 물론 제가 증인으로 출석할 거구요. (사이) 검사님, 최소정씨가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강도로 오인한 남편을 죽였다는 상처를 평생 간직하고 살아갈 불쌍한 여자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헤아려 주십시오. (전화 끊는다.)
등장하여 닥터 민에게 다가오는 일상복 차림의 소정, 소박하고 수더분한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인다.
상담석에 마주 앉는 두 사람.
닥터 민: 드디어 마지막 날이군요.
소 정: 그동안 고마웠어요.
닥터 민: 소정씨, 이렇게 보니까 꼭 다른 사람 같군요.
소 정: 촌스럽고…뚱뚱하고…못생겼죠.
닥터 민: 아뇨, 아주 예뻐요…이렇게 소정씰 보니까 이 세상에서 아길 가진 산모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또 있을까싶은 생각이 들어요….
소 정: 선생님은 아길 낳아 본 적이 있나요?
닥터 민: 그럼요, 날마다 낳고 또 날마다 갖죠.
소 정:(의아하게) 네?
닥터 민: 환자들이 제겐 자식과도 같은 존재예요. 불완전한 모습으로 잉태된 태아처럼 시간이 갈수록 차츰 제 형상을 갖추게 되죠.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성숙한 인간으로요.
소 정:(걱정스럽게 머뭇거리며) 저….
닥터 민:(소정의 손을 잡아주며)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정상참작이 될 거예요. 그 일은 아주 불행한 사고였을 뿐이잖아요? 슬픈 기억은 슬픈 대로…기쁜 기억은 기쁜 대로….
소 정: 슬픈 기억은 슬픈 대로… 기쁜 기억은 기쁜 대로….
닥터 민: 그대로 소정씨 마음 속의 방에 넣어두세요.
소 정: 그럴게요. 선생님 말씀대로 제 마음 속의 방안에 꼭꼭 넣어 둘게요.
닥터 민: 아직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요?
소 정: 네….
닥터 민: 그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나요?
소 정: 네….
닥터 민: 혹시 그 사람….
소 정:(단호히) 내가 기다려온 사람은 어머니였어요.
닥터 민:(웃으며) 역시 그랬군요.
소 정: 어머닌 항상 제 곁에, 아니 내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슬플 땐 슬픈 어머니…내가 기쁠 땐 기쁜 어머니….
닥터 민: 지금은요? 지금의 어머닌 어떤 모습이죠?
소 정: 할머니….
닥터 민: 할머니?
소 정: 곧 할머니가 되잖아요.
닥터 민: 아, 그렇군요!
사이렌 소리.
소 정: 이제 가야할 시간이 다됐군요.
닥터 민: 보고 싶을 거예요.
소 정: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닥터 민: 자식이 독립하게 되면 누구보다 기뻐하는 게 부모지만 그때부턴 더욱 노심초사하는 법이랍니다. 하지만 우리, 다음에 다시 만날 땐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게 되길 바래요.
소 정: 저, 곧 아기를 낳게 될 거예요. 우리 아길 선생님께 제일 먼저 보여드리고 싶어요.
닥터 민: 하하, 벌써부터 할머니가 된 기분이네요.
소정, 자리에서 일어난다. 포옹으로 작별인사를 하는 두 사람.
닥터 민: 잘 가요.
소 정: 안녕히 계세요.
소정, 허리를 굽혀 공손히 인사하고 자리를 뜬다.
닥터 민:(문득) 참, 소정씨!!
소 정:(걸음을 멈추고 보면)
닥터 민: 재혼할 거예요?
소 정:(평온하게) 이 세상 어딘가에 아버지의 얼굴을 한 친절한 남자가 분명 있을 거예요.
닥터 민: 그래요, 행운을 빌어요.(손을 흔들어 준다.)
소정, 활짝 웃으면서 퇴장.
소정이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면 닥터 민, 무대 중앙으로 나온다.
닥터 민:(관객에게) 한때 소정씬 자신이 남편을 죽인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살해 현장에서의 기억을 잃어버린 자아상실증세…하지만 그녀는 분명 남편을 사랑했을 것입니다.(사이) 변칙적이었기에 더욱 절실했던 사랑…사랑에 빠졌을 때 자아을 잃어버리는 쪽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합니다. 특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성적 학대와 정서적인 학대를 당했던 여성들의 경우가 더욱 심하죠. (거울을 가리키며) 어쨌든 소정씬 자아를 회복한 모습으로 이 망령의 집을 떠났습니다. (무대 끝으로 나와 특정 관객의 얼굴을 주시하며) 과연 그녀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까요? (반응을 살피다 다른 관객에게 시선 던지며) 아니면 이곳에서의 기억을 완벽하게 지우고 평범한 어머니의 인생에 충실하게 될까요? 사실, 전 모성의 절대성을 확신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보호받아야 할 어린 자식에게 어머니는, 단지 여자가 아닌 견고하고 신성한 인생의 거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천히 퇴장하며 암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