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바라기

‘요셉의 꿈(창세 37,6-7.9) - 과연 중요한가?

깜장보석 2012. 9. 21. 13:23

 

 

배은주 수녀(부산가톨릭대 성서신학 교수)

 

목차

. 들어가는 글

. 요셉의 꿈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 첫 번째 꿈

. 두 번째 꿈

. 꿈들 사이의 관계

. 꿈장이 요셉

. 나가는 말.

 

 

. 들어가는 말

 

오랜 시간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요셉이야기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이야기라고 말해왔지만 성서학의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이야기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거부한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라는 말들이 심심찮게 나오곤 한다. 이는 이야기의 속뜻을 가슴이 시원하도록 명쾌히 알아듣지 못했다는 표현일 것이고 그 이유는 어쩌면 요셉이야기의 짜임새가 너무 정교하고 그 뜻이 깊기 때문인 듯도 하다. 실상 요셉이야기의 아름다움을 다 전하기에는 막중한 시간과 지면이 요구된다. 그래서신앙과 삶 8에서 그 미시안적 세계의 일부를 소개함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거시안적 세계의 일부를 요셉의 꿈’(창세 37,6-7,9)에 대한 연구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요셉의 꿈은 요셉이야기에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일까? 그 꿈이 전체 이야기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인가? 요셉의 꿈에 별 중요성을 두지 않는 학자들도 더러 있긴 하지만 대부분 학자들은 요셉의 꿈이 이야기의 전체적 전개에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따르는 설명들을 보면 전체의 범위를 규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그 꿈들의 실현여부, 실현되었다 할 때 실현의 방법, 꿈의 의미와 원천에 이르기까지 그 해설이 참으로 각양각색임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야기의 서막인 창세기 37장에 기술된 요셉의 꿈 이야기는 요셉을 가족들 가운데서 드높이 여겨지게 하는 계기들의 절정일 뿐 아니라, 가족의 분열에 가장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는 사건이기도 한다. 요셉을 극진히 사랑하는 야곱조차도 아들의 꿈의 무게를 견뎌내기 어려워하며,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한 동기도 실상은 그 꿈을 말살하자는 데서 나왔다. “저기 꿈장이가 오는구나. , 이제 저 녀석을 죽여 ()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37,20). 요셉의 꿈은 과연 그토록 대단한 것인가?

 

. 요셉의 꿈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꿈의 주인’(תוֹמ??? ל?? : 우리말로는 주로 꿈장이라고 번역한다)이라 불리는 요셉은 그 별명에 걸맞게 자신이 특별난 꿈을 꾸기도 했을 뿐 아니라 꿈 풀이도 잘 한다. 그의 해몽이 항상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볼 때 그가 꿈에 관해 하는 말은 믿을 만하다. 요셉에 의하면 꿈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며(41,25.32). 그분은 꿈 속의 표상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그러므로 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표상이 제시하는 의미를 따라서’(40,5; 41.11.12) 읽어야만 하는데 이는 하느님 그리고 그분께서 그 뜻을 알려주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40,8; 41,16.28.38-39 참조). 이런 까닭에 파라오의 두 시종장의 근심이 대단하였고(40,6.8) 파라오 또한 불안한 마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41,8). 그런데 창세 37장에서 요셉의 꿈을 해몽한 사람은 과연 누구였던가? 그의 가족들은 해몽의 원칙을 알지도 못했을 뿐더러 오직 자신들이 엎드려 절하는 행동에만 마음을 빼앗겨 왜 절을 하는지 또 그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물으려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 해몽의 진가는 실로 의심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요셉의 꿈의 뜻을 알아들을 것인가? 요셉이 파라오의 두 시종장의 꿈과 파라오의 두 꿈을 풀이한 것은 확실히 하느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한 일이었다. 그가 파라오의 꿈의 수수께끼를 푼 후 파라오가 하는 말은 정곡을 찌르다 못해 통쾌한 느낌마저 준다. “이 사람처럼 하느님의 영을 지닌 사람을 우리가 또 찾을 수 있겠소? ()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 주셨으니 그대처럼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또 있을 수 없소”(41,38-39). 그러므로 요셉의 꿈에 접근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천부적 꿈풀이꾼인 요셉의 해몽방식을 안내로 삼아야만 하겠다.

먼저, 요셉이 시종장들의 꿈이나 파라오의 꿈을 풀이하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꿈이 제시하는 표상과 실제 현실 사이에 확실히 유비적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포도나무/포도송이/술잔 헌작 시종장’; ‘빵바구니/제빵 시종장’; ‘사흘’; ‘파라오의 손 안에 올려드림 복직’; ‘머리 위에 바구니/새가 빵을 쪼아먹음 머리를 들어 올려 나무에 매달고 새가 살을 쪼아먹음’(=사형)이라는 관계이다(40). 이와 비슷하게 살찌고 잘 생긴 암소/여물고 좋은 이삭 대풍’; ‘가냘프고 마르고 흉한 암소/ 야윈 이삭 기근’; ‘일곱 일곱 해’; ‘잡아먹음 (대풍을) 잊게 함.’ 이삭의 표상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소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일에, 그리고 이삭은 추수하는 일에 관계됨을 알 수 있다(41). 과연 씨뿌리기와 추수 모티프는 파라오의 경제정책이 성공하고 기근이 끝날 때 실제로 나타나며(47,24), 가족이 당면한 가뭄을 두고 자기 형제들에게 씨뿌리기도 추수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요셉의 말(45,6)도 파라오의 꿈을 짙게 반영한다. 한마디로, 파라오의 꿈에 나타난 모든 표상들은 농경문제와 관련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 그런 꿈을 파라오에게 보여주신 목적은 슬기로운 농경정책으로 가뭄을 이겨냄으로써 땅을 살리고 나라를 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41,30.36) 그렇다면 요셉의 꿈도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요셉의 꿈 안에 나타난 여러 표상들 역시 각각 현실과 관련되는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아울러 그분께서 요셉에게 꿈을 보내신 목적 또한 있지 않았겠는가?

둘째로, 요셉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꿈을 통해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계시하시고 한 사람이 이중 꿈을 꾸는 경우 즉시 그 실현을 위해 활동하신다고 한다(41,32). 설화의 행정을 따르면, 파라오의 이중 꿈은 확실히 요셉의 해몽(과 그에 잇단 등용) 후 즉시 실현을 향했다. 7년의 풍작과 가뭄이 연이어 들이닥친 것이다. 그러므로 꿈에 관한 요셉의 말을 신뢰하는 한 독자는 요셉의 이중 꿈 또한 하느님의 철저한 계획 아래서 즉시 실현을 향해 움직였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세 쌍의 꿈을 서로 비교해보면 파라오의 두 시종장들이 꾼 꿈 그리고 파라오의 두 꿈은 각각 서로 간에 대체로 비슷한 모양을 보이는데 요셉의 꿈들을 그렇지 않다. 가족들이 절하는 것(הוח)외에는 곡식단천체사이에 전혀 공통점이 없어 보일 뿐 아니라 숫자에도 차이가 난다. 시종장들의 두 꿈은 ‘3’, 그리고 파라오의 두 꿈은 ‘7’이라는 숫자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요셉의 두 꿈은 각각 숫자가 다르다 첫 번째 꿈은 요셉의 곡식단을 합쳐 ‘12’,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한 별을 합쳐 ‘13’이라는 숫자를 보인다. 나아가 시종장들과 파라오가 하룻밤에 꿈을 꾼 것과는 달리 요셉의 두 꿈은 하룻밤의 산물이 아니다. 이런 점들은 요셉의 꿈이 보다 복잡하며 해몽 또한 다른 꿈들에 비해 더 어려우리라는 것을 암시해준다. 그러므로 이제 위의 모든 고찰을 염두에 두고 요셉의 꿈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 첫 번째 꿈

 

내가 꾼 이 꿈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우리가 밭 한가운데서 곡식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37,7)

 

1. 꿈의 표상들에 대한 이해

 

요셉이 이집트에서 결정적으로 상승되고 파라오의 꿈이 맞아 들어가 기근이 온 땅을 휩쓸 때, 독자는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이집트에 내려와 요셉 앞에서 절하는 장면을 만난다(42,6). 그리고 설화자는 주인공 요셉이 이 순간 옛 꿈을 기억했다고 보도해 준다(42,9). 오직 절 때문일까 아니면 꿈의 모든 표상들이 그에게 함께 떠오른 것일까? 요셉에 의하면 꿈은 표상들이 합쳐 이루어내는 의미로써 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렇다면 지금 형제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과 꿈의 표상들 사이에 과연 어떤 유비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가? 앞서 요셉이 해몽한 방식을 참고로 하면 독자는 곡식단이 쌓였던 밭과 지금 형제들이 만나고 있는 장소인 곡식을 사고파는 마당, 그리고 곡식단기근 동안에 요셉이 제공하는 곡식을 쉽게 연관시킬 수 있다. 물론 형제들의 절은 꿈과 현실 사이의 연관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요소이다. 그런데 시야를 조금 넓혀 본문을 보면 형제들은 여기서만 절하는 것이 아니다. 1차 여행에서는 형들만 절하지만, 2차 여행에서는 베냐민도 확실히 거기 포함되어 절을 한다(43,26). 한마디로, 요셉의 열한형제들이 곡식을 얻기 위해 이집트의 재상이요 온 세상의 양곡관리자인 요셉, 일어나 우뚝 선요셉을 둘러싸고 큰절을 하는 것이다. 만약 독자가 요셉의 꿈을 이렇게 풀이한다면, 그는 요셉의 첫 번째 꿈에 관한 한 그 꿈이 각각의 표상이 제시하는 바를 따라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2. 꿈의 의미

 

가족들이 처했던 양식 문제는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냄과 함께 순조로이 해결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때 요셉이 형제들에게 하는 비교적 긴 담화이다. 이 담화의 전반부(45,5-8)에서 요셉은 처음으로 이제껏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하느님께서는 가뭄이 올 것을 미리 아시고 형제들이 이 가뭄에 살아남을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그래서 요셉을 파견하여 이집트의 양곡관리자가 되게 하심으로써 가족이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게 하셨다. 요셉의 이 이야기를 얼핏 들으면, 하느님께서는 형제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이 가족을 가뭄 중에 살려내기 위해 마치 요셉을 팔아넘긴 그들의 죄를 이용하신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가뭄을 일으킨 분은 분명히 하느님이 아니신가?(41,28) 만일 단순히 그들의 목숨을 부지시키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었다면 생명을 위협하는 가뭄을 보내신 것은 지극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히브리 설화자들이 말을 극도로 아끼며 뜻을 압축해 표현한다는 것은 널리 인정된 사실이므로 이제 요셉의 담화의 뜻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7절은 하느님께서 요셉을 보내신 목적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병행법은 물론 특별한 문장구조를 사용해 그 대상을 최대한 뚜렷이 부각시키려는 것이 눈에 뜨인다.

a. ם?י??? םי??? י?????? 하느님께서는 저를 여러분에 앞서 보내셨습니다.

b. ץ?? תי??? ם?? םוּשׂ?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을 이 땅에서 남은 자로

만들고,

b’. ה??? ה?י??? ם?? תוֹי??? (여러분을 위해서) 여러분을 생존자의 큰 무리로

살려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물론이요 온 가족 중 죽은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요셉은 남은 자’(תי???)생존자’(ה?י??)라는 독특한 어휘를 사용하고 있다. 이 두 낱말 다 생존의 위기나 위협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뜻하는데, 하느님과 연관될 때는 특별히 그분의 구원은총을 입은 사람들을 의미하며 아울러 자주 풍성한 미래를 위한 시작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ה??(hāyāh) 사역형 동사(hiphil)의 사용도 눈여겨 볼만하다. ה??의 사역형은 구약성서에서 23번 발견되는데 그 가운데 9번이 하느님 혹은 하느님의 천사가 동사의 주체가 된다(창세 6,19.20; 19,19; 45,7; 50,20; 민수 22,33; 여호 14,10; 이사 38,16; 에제 13,22). 흥미로운 것은 이들 문맥이 모두 어떤 식으로든 죄와 연관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동사는 특정 인간을 죄의 환경이나 죄로 인해 받아야 할 벌에서 빼내어 살리시는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법에 따르면 친족을 납치해 팔아먹은 자는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하는데(탈출 21,16; 신명 24,7). 그렇다면 형들의 죄가 언급되는 이 문맥에서(45,4) 위의 세 낱말 모두는 하느님께서 죽을 죄를 지은 형들에게 구원은총을 베푸셨음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어떤 식으로 구원하셨는가? 구약성서에서 가뭄은 죄지은 당신 백성을 벌하고 정화시키는 하느님의 도구로 자주 쓰인다(1열왕 17-18; 아모 4,7-8). 요셉이야기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가뭄은 갈라진 형제들을 필연적으로 만나게 하였고 바로 그 과정 안에서 요셉의 형들은 온갖 종류의 고통을 체험하며 통회하고 변화되어 갈 수 있었다. 옛날 잔인하게 아버지를 속이고 동생을 팔아먹던 이들이 늙은 아버지 야곱과 막내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내놓기를 마다하지 않는가 하면(42,37-38; 43,9; 44,19-34). 모두가 과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에 이른다(44,13-16). 그러므로 이제 독자는 요셉의 말(45,4-8)을 다음과 같이 알아들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죄지은 형들을 죽음에 맡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살리기로 작정하셨다. , 그분께서는 그들을 위하시는 마음에서(ם??). 가뭄을 보내심으로써 형제들이 만나 정화되게 하는 동시에 요셉을 통해 양식을 공급하시어 마침내 그들 종족이 이 땅에서 구원받은 자의 큰 무리가 되도록 하셨다. 이런 과정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요셉이 이집트로 오도록 섭리하셨다. 따라서 요셉이 형제들과 관련된 자신의 꿈을 기억하면서 대두된(42,6 이하) 가족에 대한 양식수급의 문제는 현실적 사건들이 꿈의 표상과 부응했다는 차원을 넘어, 그 꿈 안에 가족을 위한 하느님의 더욱 깊은 목적이 숨어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45,5-8의 담화야말로 요셉의 첫 번째 꿈에 대한 진정한 해몽이다. 그리고 이 말이 옳다는 것은 파라오의 꿈의 경우와 비교하면 곧 드러난다. 요셉의 꿈 안에 실린 내적 역동성이 파라오의 꿈의 경우와 대단히 흡사하기 때문이다. 사실 땅을 살리고 이집트를 구하기 위해서라면(41,30.36), 하느님께서는 구태여 가뭄을 보내실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집트인 모두가 안전하게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분께서는 백성의 정화와 나라 조직의 개편이 필요함을 아셨고 이를 가뭄을 통해 해결하려 하셨던 것이다(47,13-26 참조). 다시 말해, 가뭄은 이집트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 가뭄을 잘 견뎌가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미리 일곱 해의 풍년을, 그리고 기획가 요셉을 보내셨다. 요셉은 파라오의 꿈의 표상들에 대해 파라오에게 설명해주었던 이상으로 그 꿈의 속뜻을 이해했던 것에 틀림없다. 해몽을 해준 순간인지 아니면 가뭄정책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모르지만 그는 꿈을 통해 제시된 사건 아래 깔린 하느님의 깊은 의도를 이해하였고 따라서 그 꿈의 목적을 제대로 달성시킬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꿈의 근원이신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꿈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셨고, 형들과 만남의 오랜 과정 안에서 요셉은 그 꿈 아래 깔린 깊은 의미를 알아들었다. 그리하여 그 꿈의 실현이 완성되는 순간, 곧 형들과의 화해를 도모하는 감동적인 순간에 그것을 형들과 나누고 있는 듯하다.

 

3. 실현의 때

 

요셉의 첫째 꿈은 요셉과 형제들이 곡식마당에서 만나던 순간(42,6)부터 실현되기 시작하여 요셉이 양식공급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한 순간(45,11) 완성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꿈이 실현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집트에서 열두 형제들의 만남은 그 이전의 사건 없이는 불가능하였고, 그 이전 사건은 그 전의 사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사건들의 이러한 연속적인 고리는 마침내 야곱이 요셉을 형들에게 심부름 보낼 때까지 이어지며 그 직전의 사건이 바로 요셉의 이중 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 안의 다른 꿈들처럼 요셉의 첫 번째 꿈도 꿈 꾼 후 즉시 실현을 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1,32 참조).

 

 

 

 

 

 

 

 

 

 

 

 

 

 

 

 

 

 

 

. 두 번째 꿈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절을 하더군요.” (37,9)

 

1. 꿈의 표상들에 대한 이해

 

요셉의 두 번째 꿈에 나타나는 표상들을 첫 번째보다 난해하다. 따라서 먼저 학계의 주요 의견들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천체의 표상 : 천체의 표상을 두고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경향은 근동신화들을 배경으로 이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열두 별을 황도대(十二官 星座)나 월신(月神) 마르둑(木星)에 연계시키며 요셉을 천상존재들에게 경배를 받는 신화적 인물에 비교하였다. 그러나 이런 해설은 다음 몇 가지 이유들로 말미암아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첫째로, 제시된 신화들과 창세 37,9의 정황 사이에 너무 큰 간격이 있다. 여기서는 열두 별이 아니라 열한 별이 절하며, 더구나 해와 달과 별이 한꺼번에 절하는 것은 어느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둘째로, 만일 설화자가 열두 별을 목성에 비교했다면 해나 달에 정관사를 붙인 것처럼 이 별에도 붙여야 마땅했다. 마지막으로, 요셉이야기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신화적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 요셉이 천상의 지고한 존재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화적 해석은 요셉의 꿈 해몽에 적합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위와 다른 식으로 꿈을 이해하려는 학자도 물론 더러 있다. 코츠(Coats)는 이 천체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을 의미한다고 보는가 하면, 알터(Alter)는 훗날 요셉이 관장하게 될 빛나는 이집트 제국의 조정을 상징한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학자들은 천체의 표상을 너무 갑작스럽고 이상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자주 성서 밖에서 그 뜻을 찾거나 혹은 두 번째 꿈이 후대 삽입부분이라는 결론으로 끝맺기도 하고, 아예 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든지 뜻이 분명치 않다면서 해석을 기피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성서본문으로부터, 곧 이스라엘인들이 천체에 대해 갖고 있던 개념으로부터 답을 찾아볼 수는 없겠는가?

전체 구약성서에서 해와 달과 별(때로 해와 달은 두 큰 별로, 별들은 하늘의 군대로 불리어진다)이 같이 나타나는 곳은 13군데로서 다음과 같은 용례를 보인다. (1) 그들은 다 함께 합쳐 낮과 밤을 다스리고 지상에 빛을 비추는 등의 역할을 하며 하느님의 창조물 중 보다 뛰어난 한 종(species)을 이룬다(창세 1,16; 시편 136,8-9; 148,3; 이사 60,19.20; 예레 31,35; 시편 72,5; 104,9; 욥기 38,7 참조). (2) 그들이 지닌 특수성 때문에 종종 하느님과 혼동되어 쉽게 신들로서 경배를 받는다(2열왕 23,5; 신명 4,19; 17,3; 예레 8,2; 욥기 31,26; 이사 24,23 참조). (3) 하느님께서는 때로 그들을 세상을 향한 통교의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 해와 달(과 별들)을 통해 기적을 행하신다(이사 13,10; 에제 32,7; 집회 12,2; 요엘 2,10; 여호 10,12-13; 이사 30,26; 예레 31,36; 하바 3,11 참조). (4) 때로 탁월한 사람들을 하늘의 밝음(해와 달)과 별들에 비유한다(다니 12,3; 아가 6,10 참조).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이스라엘인들이 해와 달과 별을 다른 어느 피조물보다도 하느님 가까이에 존재하며 세상에 대해 특별한 역할을 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하느님의 피조물 중 빼어난 한 무리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곱은 요셉의 꿈을 해석하며 그 천체들을 자신의 가족에 빗대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가족을 세상의 다른 어느 가족보다 빼어난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는 말일까?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야기의 후반부 전체가 제시하는 야곱 가족의 상은 이 해석에 굉장히 잘 부합한다. 46,31-50,14까지 성서본문은 탁월한 문학 기법을 통해 야곱의 가족이 어떻게 이집트인들이나 세상의 다른 종족들과 구분되어 지극한 영예와 공경 가운데 드높여지는가를, 강도를 높여가며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면 야곱은 아들들을 하느님의 종들로 요셉은 자기 종족을 큰 백성으로 규명하고 있다(50,17.20). ‘이란 노예의 뜻도 되지만 높은 이의 측근에 있는 사람들을 일컬을 때는 대신’(大臣)이라는 뜻도 되니, 결국 하느님의 종이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하느님 가까이에서 하느님을 모시며 세상에 대해 그분에게서 사명을 위탁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도 견줄 수 없는 귀한 신분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해와 달과 별들이 이스라엘인들에게 주는 상징성성서본문이 제시하는 야곱 가족의 이미지가자연스럽게 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괄목할 만한 사실은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갖고 있던 자아상이 또한 이와 통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을 하느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종족으로(탈출 19,5). 온 세상을 위한 복의 근원으로(창세 12,3; 22,18; 28,14). 신적 지혜를 담고 있는 율법을 지닌 자들로(시편 147,19-20). 따라서 온 세상 민족들에게 생명의 길을 비추어줄 존재로(이사 2,1-5). 사제적 백성이며(탈출 19,6) 예언자들로(1역대 16,22). 하느님께로부터 영광을 부여받고 그분을 가까이 모시는 자들로(시편 148,14) 여겼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라는 신명기 4,7의 표현은 야곱 가족을 규정짓는 두 대표적 어휘인 하느님의 종들큰 백성을 사실적으로 풀어놓은 말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해와 달과 별이라는 각각의 표상을 어떻게 풀이할 것인가? ‘가 아버지 야곱을, 그리고 별들이 그 아들들을 상징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은 헛된 표상이거나 꿈의 이루어지지 않은 한 부분인가? 적지 않은 수의 학자들이 라헬의 부재를 이유로 요셉의 꿈의 허구성 내지 둘째 꿈의 실현을 부정한다. 하지만 천체 표상의 중요성은 무엇보다 그들이 하느님의 창조물 중 뛰어난 한 무리라는 점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해와 별만으로는 천체라는 한 종()으로서의 표상은 불완전하게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을 빼어난 백성(ב?־ם?, ‘am-rāb)이라는 한 무리()로 내세우기 위해, 나아가 그 원천이 되는 야곱가족을 나타내기 위해 아버지, 어머니, 자녀라는 요소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은 필요한 설화적 요소일 뿐 이 달이 꼭 라헬이어야 할 까닭은 없다. 만일 이 이스라엘의 3대 조모를 가리킨다면 레아 또한 이 자리에 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화자는 그런 필요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절의 표상 : 두 번째 꿈은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הות 어근을 포함하고 있다. 대부분 학자들이 이 어근을 37,5-11의 가장 핵심요소로 간주하므로 요셉의 두 번째 꿈을 흔히 첫 번째 꿈과 별로 구분하지 않고 그와 같거나 강조를 위한 보완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취급하였다. 따라서 이미 42,6만으로 많은 학자들이 두 꿈이 실현되었다고 간주한다. 요셉의 꿈에 대해 가장 길고 상세히 연구했다고도 볼 수 있는 터너(Turner)를 그 대표적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는 47,31을 우회 해석하여 야곱이 요셉에게 절한 사실을 부정하는 한편 형제들의 마지막 절(50,18)이 첫 번째 꿈의 계속적인 실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이야기의 말미에 나타나는 야곱과 형제들의 절(47,30; 50,18)이 앞서 형제들이 했던 절(42,6; 43,26)과 성격상 몹시 다르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 마지막 절들은 곡식문제와 아무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절하는 이들은 자기들이 절하는 대상이 정체불명의 이집트 재상이 아닌 자기 가족 요셉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독자가 야곱과 그 아들들을 빼어난 민족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들(천체)로 간주한다면, , 야곱을 이스라엘 민족의 성조로, 그리고 요셉과 그 형제들을 미래의 12부족장들로 간주한다면, 그는 천체와 절의 표상에 관한 요셉의 두 번째 꿈이 그대로 실현되었음을 쉽게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이집트 안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상승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곧 세상이 요셉의 덕을 입고 그들 민족의 영예로움이 이집트 안에서 찬연히 빛날 그는 분명히 야곱과 형들이 각각 요셉에게 절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요셉을 나무라기는 하였지만 옛날 야곱의 해몽은 옳았다.

 

보론(補論) : 야곱과 형제들은 왜 요셉에게 절하였나?

 

옛날 어린 요셉이 해와 달과 별 열하나가 자기한테 절하는 이상한 꿈을 꾸었을 때 야곱은 요셉을 꾸짖었다. 그러나 꿈 때문에 질투하던 그의 형들과는 달리 야곱은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37,11). 이는, 루가복음의 성모님처럼, 그가 늘 그 꿈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며 잊지 않고 있었다는 말이다. 마침내 어느 날 이집트에 곡식을 사러 갔던 아들들이 화려한 마차에 온갖 좋은 것들을 싣고 돌아왔을 때, 특히 요셉이 형제들을 통해 전한 말들을 다 들었을 때(45,9-13 참조). 그는 그동안의 모든 사건을 요셉의 꿈과 연결시켜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야곱이 이집트에 내려와 마중 나온 요셉을 만날 때의 장면을 히브리어 본문은 야곱은 요셉을 보았다라고 하는 대신 야곱에게 요셉이 보여졌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수동형은 하느님의 현현을 목격할 때 쓰는 용법이니, 야곱이 요셉 안에서 하느님을 뵈었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풀어 설명하면 야곱은 요셉을 하느님께서 파견하신(חלשׁ, 45,5 참조) ‘하느님의 대리자로 알아보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을 적극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중 하나가 바로 47,30에 나타나는 야곱의 절이다. 야곱이 절을 한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을 넘어 임종 직전 침대에서 절하는 장면의 병행문이 성서 안에서 발견된다. 1열왕 1,47을 보면 다윗이 솔로몬에게 왕위를 이양한 후 침대에서 절하는데, 그는 자신의 삶이 충일의 지점에 온 것을 인식하며 지난 세월 동안 입은 은혜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셉의 꿈 이야기를 마음에 품어 간직했었기에(37,11)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그 빛 안에서 볼 수 있었던 야곱은 마침내 지상에서 품었던 마지막 소원까지도 다 채워지자 일생동안 입은 은혜에 감사드리는 뜻으로 자기 곁에 있는 대리자를 통해 하느님께 절한 것이다. 야곱의 죽음 후 독자는 형제들이 요셉을 찾아와 절하는 것을 본다(50,18). 그리고 요셉이 그들에게 제가 하느님 대신이기라도 합니까?”(50,19)라고 응대하는 것에서 형제들 또한 그를 하느님을 대신하는 이로 대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사려 깊은 독자는 이제 요셉의 이어지는 담화를 통해 이 마지막 장면이 지닌 보다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꿈의 의미

 

형제들의 절을 받은 후 요셉이 형제들에게 하는 두 번째 담화가 나타난다(50,19-21). 그 가운데 형님들은 나를 거슬러 악을 꾸미셨지만 하느님께서는 오늘처럼 큰 백성으로 살려내시기 위하여 (그것을) 선을 향하도록 꾸미셨습니다50,20의 말은 담화의 요체가 된다고도 할 수 있는데 여태껏 한 백성을 이룰 만큼 큰 무리가 되도록 이스라엘을 증가시켜 준 하느님의 은총을 찬양하는 말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이를 인구증식에 의한 숫자의 전폭적인 증가로 간주하기에는 몇 가지 힘든 점이 발견된다. 무엇보다 탈출기 1장이나 창세기 15,13과 비교할 때, 야곱 가정이 이집트에 이주한 후 보낸 17년이란 시간은 한 가족이 한 무리의 백성이 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구약성서가 후손 증가에 대한 하느님의 행위를 나타낼 때 특별한 양식을 사용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독자가 읽어 온 요셉이야기는 후대삽입으로 간주되는 창세 46,3; 47,27; 38; 48 외에는 가족 수의 증가나 후손번성에 우선적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요셉이 사용하고 있는 어휘들로 미루어 볼 때 이 말이 나타내고자 하는 뜻은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50,20의 문장은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하느님의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풀이하는 데서 요셉이 자신의 첫 번째 꿈을 풀이하던 때와 공통점을 보인다. 이번에 그는 형들의 죄에 대해 더욱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지난번과 같은 ה??(hāyāh) 사역형 동사를 큰 백성’(ב?־ם?, ‘am-rāb)이라는 단어와 연결시키고 있다. ‘남은 자생존자가 종종 풍성한 미래를 위해 생명을 간직한 자를 뜻함을 생각할 때 지금 그들이 보는 큰 백성은 그 열매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실상 열 명의 형들이 친족(납치)살해 죄로 죽었다면 오늘과 같이 많은 수의 가족은 상상할 수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50,20은 하느님께서 죽음의 위기 속에 놓였던 그들을 최대한으로 구원해 살려 오늘 이처럼 괄목할만한 숫자의 백성으로 만드셨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한편, 형들이 비록 큰 백성의 중요한 구성원들이지만 이 큰 백성안에는 그들의 범죄에 동참하지 않은 야곱, 요셉, 베냐민과 그들의 후손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큰 백성(벌과 가뭄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을 전제하지만, 확실히 그 이상이다. 이들은 야곱의 후손 전체다. 그런데 오늘처럼이라는 말은 특정시간에 느끼는 특수한 체험을 의미하니, 이 가족이 전에 비해 스스로 무언가 크게 변한 것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말 으로 번역된 형용사 ב?(rab)많은이라는 양적인 뜻뿐 아니라 질적인 뜻도 지니는데 사람과 결합될 때 대체로 위대한, 존귀한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사실 요셉이 죄지은 그의 형들을 상대로 남은 자생존자에 대해 이야기한 45,4-8 이후, 45,9부터 설화자는 주로 야곱과 그의 온 집안에 카메라의 초점을 모으고 예리한 문학기법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주변 민족 가운데서 점점 탁월한 존재로 부상되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그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야곱의 장례는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온 이집트인들이 다 참여한 가운데 마치 파라오의 장례식을 능가하는 모습으로 장엄하게 묘사되고 있다(50,3.7.9.11). 따라서 위대한 민족이라는 요셉의 표현이 형제들 모두의 눈에 결코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큰 백성을 이렇게 질적 의미로 해석하면 이 말은 야곱이 그들의 신분에 대해 정의한 하느님의 종들과 한 쌍을 이룰 만큼 잘 어울린다. 그러므로 50,20에서 요셉이 한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겠다. ‘가나안에서 형들이 악을 저지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은 신을 향해 이끄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함께 한 길이었다. 야곱의 가족을 위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죽이는 대신 정화하여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부터 그들을 들어 높여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만만치 않은 위대한 한 민족을 만드셨다.’ 지금 요셉과 그 형들이 보고 있는 것은 죄의 상처로부터 치유되고 세상 가운데서 뛰어난 백성, 곧 하느님의 종들이 되기에 걸맞은 이스라엘 백성의 탄생이다. 그렇다면 이는 구원과 새 창조의 이야기이며, 하느님께서는 이 작업을 당신의 대리자 요셉을 통해 이루셨다. 그러므로 가족이 절해야 한다면 그 감사의 절을 받으실 진정한 대상은 마땅히 하느님이시다. 어릴 적 요셉이 두 번째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자신이 별들 중의 하나인지 아닌지에 대해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가 해와 달과 별 열하나에게 마치 하느님처럼 절을 받았다고만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제가 하느님 대신이기라도 합니까?”하며 그 자리를 하느님께 내어드린다. 50,20은 천부적 꿈풀이꾼 요셉이 천체들이 절하는 꿈’(37,9)의 속뜻을 풀이하는 것이라 하겠다.

 

3. 실현의 때

 

앞의 고찰을 통해 요셉의 두 번째 꿈이 언제부터 실현되기 시작했나에 대답하는 것이 어렵잖게 된다. 넓은 안목에서 보면 두 꿈은 두 단계에 걸쳐 당신 계획을 실현하려는 하느님의 하나의 청사진이므로 요셉의 꿈 사건 후 즉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좁은 안목에서 보면 요셉의 첫 번째 꿈에 대한 해몽 직후부터이니, 하느님께서는 저를 파라오의 아버지로, 그 온 집안의 주인으로 삼으시고 이집트 전국을 다스리는 자로 세워주셨습니다”(45,8)를 고리로 하여 두 꿈이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야곱 가족의 이집트 이주는 즉시 그들 신분의 상승으로 이어졌고 야곱의 생애가 끝날 즈음, 곧 요셉이 두 번째 꿈을 풀이하는 순간 독자는 그 실현의 완성을 본다.

 

 

 

 

 

 

 

 

 

 

 

 

 

 

 

 

 

. 꿈들 사이의 관계

 

요셉이야기에는 요셉의 이중 꿈 외에도 파라오의 두 시종장의 꿈과 파라오의 이중 꿈, 곧 모두 여섯 개의 꿈이 나온다. 꿈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는 얘기다. 파라오의 두 시종장의 꿈들은 표상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서로 비슷하지만 내용은 반대인 두 개의 꿈으로서 요셉을 파라오와 만날 수 있게 하는 디딤돌의 역할을 한다. 반면에 파라오의 두 꿈은, 요셉의 말 그대로 하나의 꿈이어서(41,25.26) 7년씩 차례로 닥쳐올 풍년과 기근을 알렸다. 요셉의 두 꿈은 내용이 서로 다르다. 하나는 양식 문제에 연계된 가족들의 생존문제를,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종들이며 위대한 종족인 이스라엘 가문의 특수신분을 주제로 한다. 그러나 두 꿈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위대한 민족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재해에서부터 살아남도록 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본 것처럼 가뭄은 형제들이 거듭 만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었고 이것은 정화의 과정, 곧 가족 전체가 성숙되어가는 과정이 되게 하여 마침내 하느님의 백성이 될 만한 자질을 갖추게 하였다. 따라서 첫째 꿈의 실현은 둘째 꿈의 실현을 위한 준비이며 전제조건이었고, 둘째 꿈의 실현으로써 하느님은 당신의 목표를 궁극적으로 달성하였다. 따라서 요셉의 꿈은 둘이지만 하나로 이어지는 꿈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만한 것은 파라오의 꿈과 요셉의 꿈 사이의 관계이다. 하느님께서는 기근에 대한 계획을 파라오의 꿈을 통해 계시하시고 요셉을 통해 그 의미는 물론 기근을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그 결과 요셉은 기근 가운데서 펼친 지혜로운 정책으로 이집트 백성을 정화시키고 오분의 일조 세법(稅法)을 통해 온 국민이 항구하게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게하였다. 하지만 그 기근은 파라오가 꿈을 꾸기 훨씬 이전 요셉의 첫 번째 꿈에서 이미 암시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파라오의 꿈은 요셉의 꿈 안에 배태되어 있었으며, 그 기근 덕분에 야곱의 가족 또한 정화의 기회를 얻어 마침내 큰 백성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한편, 이 이야기의 가상독자인 이스라엘은 이 큰 백성안에서 이미 세상을 향한 그들의 역할을 본다. , ‘이 큰 백성(과 그들의 법)을 통해 온 세상의 민족들이 항구하게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찾아 얻을 수 있게될 것이다(이사 2,1-5 등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집트의 넓은 땅을 이용하셨으며, 이집트인은 물론 온 세상 사람들이(41,57 참조) 하느님의 종 이스라엘이 지닌 신적 지혜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요셉이야기 전체는 구원사라는 신적 지혜의 플롯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느님이야말로 진짜 계획하시는 분이시요 숨은 주인공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다툼 가운데서 누가 누구를 누르거나 착취해서 얻는 생명 말고, 과정이 좀 힘들더라도 평화 가운데서 얻어지는 생명, 모든 이가 다 함께 누리게 되는 생명을 주려하신다. 그런데 인간의 죄, 인간 각자의 이기심, 좁은 시야가 방해물이다. 하느님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없도록 모두 제 생각, 제 살길에만 몰두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종족을 대표하는 요셉의 꿈과 이교 세상을 대표하는 파라오의 꿈은 이런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역사를 구원으로 이끄시고자 세운 하느님의 계획이 제시된 곳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무턱대고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을 바로 누릴 수 있도록 단계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구원사를 이끌어 가신다. 그리고 이 구원사의 가장 기본적인 청사진이 바로 요셉의 이중 꿈이었다.

 

 

 

. 꿈장이 요셉

 

앞에서 고찰한 결과에 대해 중요한 의문점이 남을 수 있다. 만일 요셉의 형제들에게 한 담화가 정말 자신의 꿈에 대한 해몽이었다면 왜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가? 이에 대한 답은 요셉이라는 인물을 살피는데서 얻어질 수 있다고 본다.

이집트 땅에서 형제들이 처음 만난 순간 형들을 알아본 요셉은 즉시 그들을 몹시 거칠게 대한다(42,7). 그는 거짓증언으로 으름장을 놓고 그들을 감옥에 처넣으며 이국땅에 억류하고 사형에 처할 기세가지도 보이니(42,20) 이는 확실히 형들의 과거 행동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왜 형들에게 단번에 복수하지 않았는가? 독자는 그 이유를 첫 만남에서는 쉽게 감지하지 못하지만 이야기가 진전됨에 따라 점점 확실히 알게 된다. 형들의 당황스런 변명은 요셉의 편에서 볼 때는 가족에 대한 소식이었고 그것은 그의 내면에 오랫동안 눌러온 갈망과 사랑(41,51 참조)을 자극시켰다.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져 동생을 붙들어 놓기 위해 거짓 혐의를 씌울 만큼 저항할 수 없는 내적 힘이 되어간다. 이런 과정 안에서 형들을 향한 요셉의 태도도 조금씩 변화해가니, 형들을 감옥에 가둔 지 사흘 후 독자는 이미 그에게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이 경외하는 하느님가족에 대한 염려때문에 형들에게 살 길을 제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42,

18-19). 그리고는 과거 자기에게 했던 짓에 대해 쓰라린 후회를 하는 형들의 말을 듣다말고 물러가 몰래 운다(42,21-24). 하지만 요셉은 왜 자루에 돈을 넣고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형제들을 극심한 공포와 절망 안으로 몰아넣었을까? 요셉이 돈을 어떤 마음으로 돌려주었는지 성서본문은 설명하지 않지만 돈에 관한 요셉의 태도에서 적어도 긍정적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이 돌려준 돈에 대해 한 번도 묻지 않는다. 이 말은 그에게 그 돈을 빌미로 벌을 주거나 시험하려는 의사가 없었음을 드러낸다. 오히려 그 돈은 청지기의 입을 빌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43,23)로 풀이된다. 다시 말해, 두 번 다 (42,25; 44,1-2) 돈은 요셉이 아버지의 가족을 배려하는 한 방식으로 보이니, 형들을 거칠게 다루는 가운데서도 가족의 생존을 걱정하고 여행용 양식을 챙기는, 그 똑같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하겠다(42,19.25-26,33; 44,1 참조). 자루에 은잔을 넣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베냐민을 곁에 잡아두려는 올가미였다. 실제로 베냐민을 잡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 외에는 요셉은 점차 형들에 대한 거친 태도를 버리고 오히려 한 핏줄로서의 정을 느껴가는 듯하다(43,34). 마침내 유다의 청원(44,19-34)을 통해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는 동시에 가족을 위한 유다의 자기희생적 모습을 접하게 되자 요셉은 크게 감동을 받아 그들의 아우로 돌아온다. “나는 요셉, 당신들의 아우입니다.” 형제애가 복수심을 이겼고, 이는 형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포함한다. 독자는 요셉의 마음을 그가 하는 행동을 통해 읽을 수 있다. 그는 형제들을 가까이 오게 해(45,4) 사랑하는 동생 베냐민에게 한 것과 똑같이 형들 하나하나에게 입을 맞추고 그들을 붙잡고 운다(45,15).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의 첫 번째 꿈을 풀이한 것은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용서를 하고 화해를 도모하는 자리에서 형들의 질시와 죄의 원인이 되었던 꿈,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힌 사건을 상기시키기에는 요셉의 감성은 너무나 섬세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정서세계 외에도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의 꿈을 들먹거리지 않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다. 요셉에게 형들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인생의 모퉁이마다에서 역사를 항상 하느님의 활동이라는 시각으로 돌아본다는 점이다(41,51-52; 45,5-8; 50,19-21). 요셉은 자신이 겪은 행복과 불행, 실패와 성공 모두 안에서 그리고 자신의 가족이 겪은 모든 일들 안에서 생명을 향해 자신들을 이끌어 가는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형들의 죄악까지도 넘어서는 힘이었다. 이 힘이 요셉을 이집트로 오게 했고, 보디발의 집과 감옥으로, 그리고 마침내 파라오의 궁정으로 인도했다 하겠다. 그가 파라오의 아버지며 온 세상의 양곡관리자가 된 것도 가뭄 가운데서 형제들이 만나게 된 것도 모두 섭리가 지닌 힘 덕분이었다. 따라서 역사 안에 깊이 깔린 섭리의 움직임을 알아듣는 만큼 요셉에게는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 용서가 가능하였다(45,5-8). 그 후 섭리에 대한 요셉의 이해는 더욱 깊어져 마침내 그는 자기 가족 안에서 하느님의 종들, 위대한 백성이라는 놀라운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50,19-21). 곧 그들 종족은 다 함께한 조상의 후예로서 하느님의 종들인 위대한 백성이다(50,20).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을 선택하며 약속하신 대로 그들은 세상 가운데서 하느님 축복의 근원이 되는 탁월한 백성이 되었다. 옛날 가나안 땅에서 문제가 생겨났던 핵심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윗자리만을 원하여 요셉의 꿈을 지배와 피지배, 권력과 복종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요셉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 앞에서 마냥 뽐내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야곱의 가족 가운데서 요셉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특별한 지혜를 주신 것은, 그가 가족 위에 왕처럼 높은 신분으로 우뚝 서서 지배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맡겨주신 특별한 역할을 통해 야곱 가문이 정화되고 불어나 하느님의 종들이 되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출 수 있게 하려는 것과 동시에 그 가문을 통해 세상(이집트) 또한 축복하시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 지난날의 죄에 대해 용서를 청하며 종으로 삼아주기를 청하는 형들의 말을 듣고 요셉은 또다시 한 번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이 순간이 요셉이 두 번째 담화를 하는 순간이다. 그는 큰 백성이라는 말로써 그들 모두가 형제로써 온전히 하나라는 사실뿐 아니라 자신과 형들이 결코 주종관계에 놓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아울러 표현하며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라고 부인함으로써 높으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심을 고백한다. 역사 안에서 모든 것을 합쳐 선으로 이끄시는 크신 하느님을 만나게 되면 인간은 과거의 영광이나 허물을 더 이상 뒤적여낼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용서란 오직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요셉은 자신을 전적으로 비우는 겸손을 지니고 형제들 안으로 끼어 들어와 마치 사랑하던 아버지께 하던 것처럼 그들 가족 모두를 돌보아줄 것을 부드럽게 확인할 뿐이다.

 

 

 

 

 

 

 

 

 

 

 

 

. 나가는 말.

 

요셉이야기는 하느님의 섭리와 그 섭리 안에서 이해된 이스라엘인의 정체성’, 그리고 그 둘이 세상과 맺는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주제이긴 하지만 아브라함이나 야곱이야기 또는 탈출기와 다르게 요셉이야기의 설화자는 이를 나름의 독특한 개성을 지닌 아름답고 깊이 있는 이야기로 표현하였다. 이 이야기 안에서 요셉의 이중 꿈은 신적 지혜와 자비의 플롯의 선포’, 곧 구원사적 청사진에 해당한다. 그래서 요셉의 꿈이 완전히 실현되었을 때 이야기도 끝나게 된다. ‘요셉의 꿈의 플롯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뻗쳐있으면서 이야기의 모든 부분(부수적 플롯들)을 통괄해 조직적이면서도 통일된 한 세계를 이루어낸다.

요셉의 이중 꿈은 이야기 안에 나오는 다른 꿈들, 특히 파라오의 이중 꿈과 원칙을 같이 함으로써, 곧 꿈의 표상들의 풀이법이나 꿈의 목적, 실현과정에서의 내적 역동성을 같이 함으로써, 그것이 한 분 하느님에게서 나온 일관성 있는 구세사적 활동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요셉의 꿈이 지닌 비밀을 풀어내는 것은 이야기 안에 감추인 깊은 신비를 풀어내는 것이 되며, 독자는 거기서 설화자의 신관, 인간관 및 세상관을 만난다. 또한 독자는 이 이야기가 왜 그런 특별한 구조를 갖고 있는지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요셉의 꿈이야말로 요셉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열쇠이다. 요셉의 꿈이 없는 요셉이야기란 상상할 수 없다. 설화자는 이 꿈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 안에 다양한 문학적 기법들을 동원함으로써 이야기에 다채로움을 부여하고 균형과 조화를 갖춘 생동감 있는 신학적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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