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바라기

아브라함과 선조들 이야기의 문학적 접근

깜장보석 2012. 9. 21. 13:31

 

 

기수현 신부

(예수회, 서강대 명예 교수)

 

 

목차

. 들어가는 말

. 아브라함과 사라: 극적인 지향

. 아브라함과 이사악: 극적인 반전과 몽타주

. 이사악과 그 아들들: 몽타주와 은유

. 요셉과 그 형제들: 민담과 사실주의

 

 

. 들어가는 말

 

20세기 초반부터 우리는 성서 텍스트가 존재했던 본래의 구술적 형태에 대한 장르, 배경, 그리고 각 이야기들의 목적을 밝혀내는 소위 양식사비평(form criticism)의 도움을 받아 성서를 읽어 왔다. 또한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은 본래의 이야기들이 이스라엘 역사의 다양한 단계들 안에서 어떻게 수집되고 현재의 형태로 편집되었는지를 규명해 왔다. 본고는 그런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창세기 12-15장의 아브라함과 선조들 이야기들을 서사 문학비평의 방법을 통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창세기 12-50장은 야휘스트 계열과 다른 편집자들에게서 편집된, 이스라엘 전통의 중요한 선조들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을 중심으로 하는 자료들을 편집하여 세 개의 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 말씀과의 대화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선조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그리고 있는 원초적인 세계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인종, 즉 이스라엘 백성의 원형적인 종교역사의 세계로 옮겨 놓는다. 이 이야기들은 앞에 나온 이야기들에서 시작된 전개 방향들을 계속 따르나 더 구체적인 유다의 지리와 사회 배경 안에서, 좀더 확정된 시간적 흐름에 따라 이루어진다.

독자들은 성서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신학적 주석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교육받아 온 신학적인 해석은 제쳐두고, 창조적인 문학적 상상력의 결과물인 본래 형태 그대로의 이야기 텍스트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이, 때로는 신학적인 주석보다 더 크게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하느님 말씀과의 살아있는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본고에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인 이사악, 야곱과 요셉에 대한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추어, 성서 설화의 사건들과 문학적 구성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어떻게 그 의미를 드러내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난해한 문학 이론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을 문학 작품으로서의 이야기들이 지닌 구체적인 모습들에 초점을 맞추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성서 이야기를 읽을 때 먼저 제기하는 질문은 이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내가 이 이야기에서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든가 내가 거기에서 관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더욱 구체적인 질문이다. 상상 속에서,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세계 속에 머물면서, “이 이야기의 사건들이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등장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내가 놓인다면 나는 과연 어떤 체험을 하게 될까?”하는 질문을 해 보는 것이다. 본고는 그런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선조들의 이야기들이 초대하는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더 온전히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줄 것이다.

 

 

. 아브라함과 사라: 극적인 지향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사악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 첫 번째 장면은 창세기 1-11장의 이중적인 전개의 흐름을 계속 이어간다. , 하느님께서는 계속 당신이 누구인지 계시하시며, 인간들도 계속 자기들이 어떤 존재인지 보여 준다. 첫머리부터 야훼께서는 당신 인간에게, 적어도 아브라함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을 쏟는 분임을 보여 주신다. 한편 아브라함도 믿음과 희생으로 하느님께 응답할 수 있는 그런 인물로 등장한다.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만남은 극적인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방식은 중요한 장면들이 지니고 있는 대화 구조면에서뿐 아니라, 기대하는 미래를 향하는 장면들의 흐름과 새로운 사고와 감정의 방향을 여는 그 흐름의 급작스러운 반전들에서도 극적이다.

창세기 11장 끝 부분에 나오는 남성 중심의 족보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도입하는 배경을 구성한다. 화자는 아브라함(처음에는 아브람이라고 불린다)과 그의 아내 사라(처음에는 사래라고 불린다)를 소개하는 것으로 족보 이야기를 끝맺는다. 그리고 족보 속에 넣기에는 어색하게도 사래는 잉태를 하지 못하는 몸이었으므로 자식이 없었다(11,30)는 말을 덧붙인다. 화자는 또한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아브라함과 사라와,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을 데리고 고향인 갈대아 우르는 떠나 가나안으로 가다가 도중에 하란이라는 곳에 정착했다고 밝힌다(11,31). “자식을 낳고 번성하라는 창세기 1장에서 주신 하느님 명령에서 출발하고, 삶의 흐름을 가계의 번성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하는 이 이야기 안에서,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언급에는 아브라함과 그 가족이 품고 있는 후손에 대한 갈망과 사라가 겪는 좌절과 한의 세월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자식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과, 가나안으로 옮겨 가고자 하는 의도는 그로부터 전개되기 시작하는 이 이야기에 자연적인 추진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야훼는 즉시 이 이야기의 지향을 다른 차원으로 바꾸어 놓는다. 뜻밖에도 야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곳을 떠나서 당신이 자손을 번성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새로운 땅으로 떠나라고 명령한다(12,1-2). 그러나 약속된 운명은 1130절에 나이 든 사라는 잉태를 하지 못하는 몸이었으므로 자식이 없었다는 사실과 모순을 이루고 있다. 사라에게 주어진 현실 상황과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운명의 역설적 결합은 이야기의 발단에서부터 아이러니컬한 긴장을 자아내고 있다. 아브라함은 일흔 다섯의 나이에도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한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조카 롯과 하람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떠나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렀다(12,5).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은, 현대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외적인 장면과 인물의 내적인 생각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와는 다르다. 이 간결한 구절의 이야기 제시 양식은 박완서의 소설미망의 첫머리에 나오는 짧지만 구체적이고 자세한 묘사와는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이 소설에서는, 개성 인근의 샛골이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소작인인 전서방의 칠 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처만이 이생원에게 불경을 저지른 후, 아비인 전서방이 대신하여 애꾸가 되고, 나이 많은 아브라함처럼, 그러나 종교적인 믿음과는 무관하게, 젊은 처만은 출세를 꿈꾸며 고향 마을인 샛골을 떠난다.

 

아비는 소년에게 전대 속의 은자를 내 주었다. 소년은 구태여 그것을 사양하지 않고, 그 중 몇닢 만을 받았다. 소년에게 그것은 밑천인 동시에 아비가 먼저 닦아 놓은 장삿길이기도 했다. 샛골에서 개성 성내까지는 이십 리 길이었다. 마지만 고개인 용수산(龍岫山)에 오르니 개성 시가지가 한 눈에 바라보였고 시가지를 사이에 끼고 수려한 송악산이 우뚝 서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대처에 소년은 황홀한 눈길을 보냈다. 소년의 눈에 그 고장은 온통 은백색으로 빛나 보였다. 사람이 밟고 사는 땅이 어찌 저리 새하얄 수가 있을까. 그 영화로운 이름이 사해에 떨쳤다고 전해지는 고려의 서울다운 위엄은 찾아볼 길 없었으나 어딘지 기품이 서린 고장이었고, 상업의 중심지다운 활기가 소년의 심장을 울렁거리게 했다. 소년은 발 아래로 바라보이는 도시를 두고 엄숙하게 맹세했다. 큰 부자가 되리라고. 샛골땅을 다 살 만큼 돈을 벌기전엔 절대로 용수산을 넘지 않으리라고.

 

이 이야기들은 둘 다 문학비평가 랭거(Susanne Langer)가 극적 양식의 특징으로 지적한 운명에 대한 예감에서 시작된다. 랭거는 드라마가 인간의 삶을 동물적 생존과 구별짓는, 다시 말해서 과거와 미래를 연속체의 부분으로 의식하고 따라서 삶을 단일한 실재로 의식하게 하는 경험의 근본 양상들을 모방한다고 말한다. 드라마는 인과적(因果的) 행위의 전진(前進)적 진행은 나타내고 그 양식은 운명의 양식인 것이다.” 본래 한국인이 지닌 운명의 개념은 전진적으로 진행되는 운명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노출되는 한 인간의 운명적 한계이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적인 시간 개념은 인과적 전진이 아니라, 농부의 삶이 예시하듯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 곧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으로 돌아오는 순화에, 항상 새로이 반복되는 생사(生死), ()와 한()의 리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박완서의 소설에서 처만은 자기 가족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질곡의 고리를 끊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고 한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그 운명이 아브라함에 대한 야훼의 선택과 분부에 좌우되는데, 그것은 사라의 한이 풀리고, 땅과 명예, , 그리고 후손에 대한 야훼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미래를 향한다.

박완서는 길을 떠나는 처만의 내적인 감정과 동기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제시하는 반면에, 성서 화자는 아브라함의 감정이나 동기에 대해서 아무런 단서도 나타내지 않는다. 성서 이야기들의 제시 양식은 어떤 인물에 대해서, 그가 신인가 인간인가 등의 핵심적인 신비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다. 구약성서 문학 비평가인 올터(Robert Alter)의 말을 빌리자면 이 양식은 등장 인물의 바탕에 깔려 있는 성서적 개념을 담고 있다. 즉 인물은 대개 예측이 불가능하며, 어떤 면에서는 뚫고 들어갈 수 없으며 모호한 경계선 상에 끊임없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시 양식은 현대의 사실주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양식과는 다른 것으로서, 거기에는 실재에 대한 아시아의 전통적인 자세가 담겨 있다. , 인간 존재의 신비를 설명하려는 서양의 경향보다는 그것을 음미하는 아시아적인 경향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여행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세계는 부분적으로는 삶의 자연적인 행복에 대한 본능적인 바람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바람은 모든 독자가 동감하는 것이며, 풍년을 기원하는 전통적인 무속 풍어제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흔 다섯 살 먹은 노인이 하느님께서 약속한 축복을 얻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가기로 결심하는 일은 그러한 문맥에서 이해하기 힘들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신앙 세계는 해마다 변함없는 계절의 순환에 따라 동료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거행하는 의식(儀式)을 통해서 기복하는 그런 세계와는 멀리 떨어진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은 근본적으로 상상의 이야기지만 그녀는 탁월한 솜씨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황을 현실로 옮겨 놓는다. 성서 화자도 현실적인 장면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일종의 역사이지만 그는 사실주의적인 기준들을 멋대로 무시한다. 처음부터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 아브라함과 그 아내의 나이를 과장하고 나서는 늙은 사람이 결코 지닐 수 없는 특징으로 그들을 그리기도 한다. 즉 사라는 미인이며 아브라함은 군사적인 솜씨가 대단한 사람이다.

기근을 피해 에집트로 가는 길에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 덕으로 죽음을 면하고 대접도 받을 것이오(12,12-13). 사랑의 아름다움에 반한 파라오는 그녀를 자기 궁으로 데려가며, 그녀를 위해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가축과 종을 하사한다. 그런데 파라오는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너그럽게 그 둘을 보내 준다. 이제 부자가 되어 다시 베델에 살게 된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두 무리들 사이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서로 헤어진다(13,1-14,16).

사막은 사라의 불임성을 상징적으로 부각시키는 듯하며 현실적인 배경이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등장 인물들은 개성이라든지 주체적인 생활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소설가 포스터(E.M. Forster)평면적인(flat) 인물과 입체적인(round) 인물이라고 부르는 인물들 간의 차이점에 관해 관심을 환기시킨 바 있다. 전자는 한 이야기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유형적인 인물이지만 사실적인 인간 존재가 되어 독자의 관심을 끌어내지는 않는다. 반면, 후자는 실제로 살아있는 존재로서 내적인 동인과 변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까지 아브라함 이야기의 저자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평면적인 인물로 제시한다. 사라는 약속에 대한 장애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지, 완전히 살아 있는 생생한 인물로 극화되어 있지는 못하다. 아브라함은 영적인 문제에 골몰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는 진부한 평면적인인물이며 그의 아내만큼도 생생한 인물로 극화되어 있지 않다. 현대 한국 작가의 경우라면 유머나 비애감, 혹은 열정을 가지고 다루었을 사건들이 무미건조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장황한 시간과 공간 - 가나안의 베델, 네겝 사막, 에집트, 헤브론 - 을 통해 서서히 진행된다. 성서 화자는 야훼의 반복된 약속의 후렴을 통해서 이야기의 중심적인 방향을 유지하지만, 그는 앞에서와 같은 일화들을, 약속의 성취를 연장하여 극적인 기대감을 증진시키는 방편으로 포함시킨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오랜 동안 약속은 성취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그러나 야훼께서 환상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 비로소 화자는 아브라함에게 약간의 입체성을 부여하며, 처음으로 야훼와의 능동적인 대화로 들어가게 한다. 의심을 품은 아브라함이 자손과 땅의 약속에 대해 다소 비꼬듯이 묻는다. 야훼 나의 주여, 나는 자식이 없는 몸입니다. 가문의 대를 이을 사람이라고는 다마스커스 사람 엘리에젤 밖에 없는데, 나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전지적 화자는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셨다고 말한다(15,2-8). 사실주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덧붙여 그려 놓은 한 사건 안에서, 야훼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몇 마리 짐승들의 몸통을 반으로 쪼개 놓고, 그것들을 제물로 내놓게 한다. 그리고는 해가 져서 캄캄해지자, 연기뿜는 가마가 나타나고 활활 타는 횃불이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날 야훼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에집트 개울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는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준다’”(15,17-18).

바오로(로마 4,1-25)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셨다(15,6)는 이 계약의 선언 속에 담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전지적 화자가 주목하는 것에 대해 수많은 논평을 해왔다. 그러나 성서 설화 안에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야훼께서 말씀하시는 구체적인 발언이나,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는 화자의 해석의 테두리에 갇혀 있지 않다. 그 말씀은 언어, 극적인 장면, 전체적인 설화적 긴장과 지향들이 통합되어 이루어진 하나의 문학 작품 전체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 아브라함과 이사악: 극적인 반전과 몽타주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나안에 정착한 지 10년이 되었으나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은 야훼께서 이 약속을 이행하시리라는 것을 확실히 믿지 못해 스스로 후손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올터는 많은 성서 이야기들의 기본적인 구성 원리가, 우리가 영화나 음악 비디오로 친숙한 필름 몽타주의 원리와 비슷하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즉 성서 편집자들은 두 개의 이야기나 장면들을 연이어 병치하여,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에 간접적인 주석을 제시하는 몽타주 방식에 따라서 설화 텍스트들을 배열해 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방금 보았듯이 아브라함과 사라의 믿음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으키는 기적을 극화해 놓은 장면과 두 사람의 불신을 묘사하는 장면을 연이어 배치함으로써 몽타주 효과를 만들어 내며, 그들과 야훼의 관계가 전개되는 과정 속에 존재하는 아이러니컬한 긴장을 강조한다. 사라는 아마 야훼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서가 아니라 후손을 낳아 주고 싶은 히브리 여성으로서의 갈망에서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야훼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내 몸종을 받아 주십시오. 그 몸에서라도 아들을 얻어 대를 이었으면 합니다(16,2). 아브라함이 사라의 뜻을 받아들여 사라의 몸종인 하갈은 임신을 하고 안주인을 업신여기게 되었다. 그러자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호소하였다. ‘내가 이렇게 멸시를 받는 것은 당신 탓입니다’”(16,4-5). 사라가 하갈을 박대하자 하갈은 도망을 쳤다.

히브리 사람들의 전형적인 이야기 전달 방식을 따라 화자는 장면에서 물러서고, 등장 인물들이 정면으로 마주보는 대화를 통해서 행위가 극적으로 전개되어 나가게 한다. 히브리 저자들은 서술체로 시작하지만, 대화체로 넘어간다. 순간순간, 또는 다소 길게 서술체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항상 지극히 구어체적인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삼으며, 그 인물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스스로를 발견하며, 자신들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거나 드러내 보인다.

이 일화는 하느님을 묘사하는데, 카인 이야기에 나타나는 추방당한 자에 대한 야훼의 관심을 강조한다. 동시에 남성 인물 아브라함과 야훼의 계약은 여성 인물 하갈과의 약속과 균형을 유지한다. 이 일화는 인간의 불신과 갈등, 질투를 그리면서,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심리적 사실주의를 약간 가미하며 두 여성 등장인물에게 다소 입체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그리고나서 이야기는 아브라함에게 거듭하여 계약이 주어지는 13년 뒤로 건너뛴다. 이 일화는 제관계 편집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보이는데, 여기에서 하느님은 계약에 대한 헌신의 영원한 표지로 남자 아이들에게 할례를 베풀라는 명령을 덧붙이며, 약속한 자식이 하갈이 아닌 사라에게서 곧 태어날 것이라고 아브라함에게 보장하신다(17,10-16). 여기에서는 아브라함도 좀 더 입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있으면서도 속으로는 우스워서 나이 백 살에 아들을 보다니! 사라도 아흔 살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 하고 중얼거렸다(17,17). 아직도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을 서둘러 지키려 하지 않는다. 화자는 이전의 구전되는 이야기들에서 빌어온 듯한 신비한 만남, 심리적 사실주의, 민화, 조야한 성적 사실주의 등을 엮어 넣음으로써 독자의 시간 감각을 계속 조작하여 하느님 약속의 실현에 대한 기대감을 연장시킨다.

그 다음에 나오는 다소 신비한 일화에서는 야훼께서 세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천막에 나타나 그와 함께 식사를 한다. 세 사람은 떠나면서 사라가 아들을 낳은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한다. 사라는 속으로 웃으며 내가 이렇게 늙었고 내 남편도 다 늙었는데, 이제 무슨 낙을 다시 보랴!”하고 중얼거렸다(18,12). 이렇게 갑자기 터져 나온 조소에 가까운 웃음은 그녀의 불행을 두고 장난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야훼를 향해, 오랜 동안 맺혀온 한으로부터 나왔을 것이다. 그녀의 웃음으로 인해 이 이야기는 히브리 설화가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심리적 사실주의의 맛을 띠며, 한국 여성들이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현실적인 감정으로 생기가 돈다. 한국 여성들은 오랜 세월 억눌러온 한()과 좌절이 어떻게 한 순간의 웃음으로 터져 나오는지 잘 알고 있다.

세 사람은 길을 따라 야훼께서 그 죄의 대가로 멸하기로 계획하신 소돔으로 향한다. 점증 반복과 강자에 대한 약자의 우세라는 주제로서 민화적인 뿌리가 드러나는 상상력 가득한 장면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야훼께 자비에 대해 한 수 가르친다. 아브라함은, 그가 소돔 성 안에서 50명의, 그리고 45명의, 40명의, 30명의, 20명의, 마침내 열 명의 선한 사람을 찾아낸다면 그 도시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야훼께 얻어낸다(18,24-32). 그러나 야훼께서는 끝내 그 두 도시를 멸망시키기로 결심한다. 소돔 사람들은 성적 문란으로 인하여 멸망당하였으며, 롯의 두 딸도 더욱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는 성적 문란에 빠져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만든 뒤 근친상간을 범하여 각각 아버지의 아들을 가진다(19,30-38).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자식을 낳아 사회적 역할을 완수하려는 그릇된 조바심 때문인지, 아니면 그 전에 자신들을 소돔 사람들에게 내어준 롯에 대한 한스러운 마음 때문인지 알 수는 없다. 화자는 이 점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다.

그리고나서 아브라함은 네겝 사막으로 가서 두 번째로 사라를 자기 누이 동생이라고 속여 왕에게 넘겨 주는데, 이번에는 그 지방의 지배자인 아비멜렉에게 넘겨 준다(20,1-8). 소돔 시민들과 롯의 가족에 관한 일화들과 아비멜렉에 관한 이 일화는 불필요하게 삽입된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비생산적이고 자연의 도리에 어긋나는 성애(性愛)와 대비되는 주제로써 이 일화들은 기대감을 고조시키면서도 야훼의 약속에 의한 경이로운 선물로서의 생산성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킨다.

이야기는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구십대의 나이라고 하는 사라가(17,17) 잉태하여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는 대목에서 전체적인 서사 드라마의 첫 번째 절정을 이룬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신들을 두고 야훼께서 하고 있다고 느꼈던 그 농담은 이제 갑자기 행복한 현실이 된다. 그러나 화자는 오래 기다려온 기적과 같은 이 사건을 내재적인 놀라움을 감춘 채 불쑥, 대수롭지 않은 모습으로 제시한다. 사라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시니, 사라가 임신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때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낳아 준 아들을 이사악이라 이름지어 불렀다(21,1-3).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에게 이사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할례를 베푼다. 그러나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해 유일하게 감정을 가지고 응답하는 것은 사라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주셨구나(21,6).

아리스토텔레스는 드라마가 우리는 감동시키는 힘의 대부분은 일련의 반전과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극적인 행위가 지난 감정적 지향 속에 갑자기 반전을 구성하면서 동시에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비극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런 종류의 극적 설화에도 적용된다. 약속의 성취가 늦어짐으로써 아브라함, 특히 사라는 그것이 모두 농담에 불과했다고 느끼지만 이사악의 탄생이라는 사건을 통한 반전 속에서 그들은 그것이 놀라운 현실임을 깨닫는 것이다.

사라의 기쁨은 말로는 거의 표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약속이 성취되지 않던 오랜 세월이 극적으로 반전되는 사건 속에서 느낌으로 전해진다. 독자들은 처음에 사라가 야훼께서 자기를 노리개로 삼고 있다고 느꼈던 그 한()에 깊이 동감했던 그만큼 이제 갑작스러운 상황의 반전 속에서 그녀가 느끼는 강렬한 감정을 함께 느낀다. 화자는 이제까지의 사건들에서는 설화의 극적인 행위를 지연시켜 왔지만 이제 이 사건 이후로 전개되는 몇 년 동안의 행위에 대해서는 서둘러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그리고 나서 이사악의 탄생 이야기와 몽타주 형식으로 붙여 놓은 중심적인 절정 안에서 아브라함과 모든 독자들은 계약의 의미와, 또 계약을 중심으로 하는 이 설화 전체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바라보라는 요구에 직면한다. 이 가장 유명하고 인상적인 일화에서, 야훼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는데, 이제 젊은 그의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번제물로 바치라고 분부한다. 아담에게는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라(1,28)하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에게는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12,2) 하고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이제 그에게,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22,2) 하고 말씀하신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얹고 두 종과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제물을 사를 장작을 쪼개 가지고 하느님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서둘러 떠났다(22,3). 늙은 아브라함과 아기를 낳지 못하는 그의 아내에게 자손을 약속하는 아이러니 위에 우여곡절 끝에 얻은 자식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끔찍한 아이러니가 보태어지고, 신이 부여한 출산 능력에 대한 경이감은 야훼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경외감으로 바뀐다. 그리고 장면의 절정에서의 이러한 극적 반전은 독자들로 하여금 극도로 격렬한 감정에 이르게 한다.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겠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창세 22,10-12).

 

장면은 또 한 번의 계약 선언으로 끝을 맺는다.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 22,16-18).

여기에서 선포된 계약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주로 이 선포 자체의 텍스트와 이전의 선포들의 텍스트를 비교하는 선에서 머무를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하신 야훼의 첫 약속은 무조건적인 축복으로 선포된 것이다(12,2-3). 약속을 형식적인 계약으로 승인하는 동물 희생제의 기적과 같은 장관을 통해서 이 축복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선포된다. 그가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시어(15,6). 뒤에 가서 다시 반복되듯이 이 선포에는 아브라함 쪽에서 보여야 할 표지로써 할례를 베풀라는 요구가 수반된다(17,9-14). 이제 이 계약은 자기의 외아들을 기꺼이 바치려고 함으로써 시험을 통과한 그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선포된다.

문학적인 독서는 장면 전체의 의미와 효력을 밝혀내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이 장면이 지니고 있는 활력의 한 부분은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들 때 천사가 갑자기 개입하는 그 장면 자체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이 장면이 지닌 내적인 힘은 오히려 설화 제시의 전체적인 양식과, 이 일화가 아브라함 이야기와 나아가 창세기 설화 전체의 지향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서, 그리고 앞의 사건들과 함께 어울려 만들어 내고 있는 긴장으로부터 나온다.

창세기 이야기의 이와 같은 엄숙한 사건이 다소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끈질긴 병마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어린 자식을 잃은 부모라면 즉시 그 사건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라는 도전을 철저한 현실로 인식할 것이다. 이 창세기 이야기 속에서 하느님은 결국 아이를 희생시키도록 요구하지 않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자주 그렇게 요구하신다.

창세기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화자는 생기있는 대화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화자는 단순히 감동적인 이야기로 독자들을 감동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초대하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라는 체험이 본질적으로 극적인 것이기에 그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담, 하와, 카인, 노아, 아브라함, 사라에게 건네시는 말씀의 극적인 구조 그 자체가, 이 이야기들에 나오는 그분의 어떤 구체적인 말씀보다도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더 잘 계시할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하느님과의 극적인 만남이라는 사실을 이 구조 자체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다.

창세기 설화의 다른 대부분의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성서 화자는 아브라함에 대한 야훼의 갑작스러운 요구와 외견상 차분해 보이는 아브라함의 응답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은 채 남겨 둔다. 그는 하느님과의 조우(遭遇)와 인간의 현실 그 자체 양쪽 모두를 측량할 수 없는 신비로 제시한다. 유명한 문학비평가인 아우어바흐(Auerbach)가 말하듯이,

 

이사악 이야기에서는 이야기의 시작과 말미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는 일뿐 아니라 그 중간에 있는 사실적이고 심리적인 요소들까지도 신비하다. 이러한 요소들은 간단히 언급되면서도 풍부한 배경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요소들에 대해서도 면밀한 검토와 해석이 필요하다. 이 이야기 속에는 많은 어두운 부분과 불완전한 부분이 존재하고, 독자는 하느님이 숨겨져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해석하려는 독자의 노력은 끊임없이 새로운 무엇인가를 발견해 낸다.

 

아브라함의 내적 응답에 대해 주목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독자는 이 이야기를, 그를 몰입시키는 소설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보고 응답할 수 있다. 그래서 각 독자는 아브라함이 되어 자기 삶의 이야기 속에서 아브라함의 응답을 다시금 체험한다. 성서의 이 장면이 지닌 내적인 힘은 그 이야기 양식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설화 행위의 급작스러운 반전이 지닌 극적인 효과에서도 나온다. 아이를 낳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나이에 아브라함과 그 아내에게 아들을 주셔서 축복하신 하느님께서 갑자기 아들의 희생을 요구하신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려고 할 때, 하느님께서는 급작스럽게 그 명령을 취소하고 축복을 재확인하신다. 측량할 수 없는 인물인 아브라함은 외견상 평안하게 이런 급작스러운 사건들의 반전을 받아들이지만, 이러한 반전은 독자들을 자극하여 계약의 전혀 새로운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 장면의 전체적인 의미는 그 어디에도 말로써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드라마 자체가 보여 주듯이 계약으로 약속된 풍요로운 생명 또한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라(1,28) 하고 인간에게 명하신 그 생명은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을 떠나 자손을 이으려고 했던 그런 핏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하느님께 매인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축복의 생명인 것이다.

약속된 복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독한 요구를 평온하게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은 헤아리기 어려운 행동이다.미망과 같은 현대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심리적 동기의 사실주의는 결코 여기에 적용할 수 없다. 여기에서 하느님과 인간 양자가 우리 앞에 펼쳐 보이는 세계는 신비로운 힘으로 가득찬 세계이다. 이 세계는 아시아의 전통적 인간관에는 전혀 낯설지 않으나, 심리적 사실주의 소설의 인간관이나 인간의 심리가 궁극적으로는 이해 가능하다고 전제하는 현대 심리학으로부터는 동떨어진 세계이다.

유다 편집자들은 유명한 종교사가 엘리아데(Eliade)가 이 장면에서 발견한 시간 개념의 변화에 대해 몰랐을 것이다. 엘리아데는우주와 역사(Cosmos and History)라는 책에서 하느님이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의 사건들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아브라함의 믿음 속에서, 아브라함뿐 아니라 더불어 유다 민족도 변화를 겪으며, 그럼으로써 인류의 시간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시간은 더 이상 변함없는 자연이나 인간 사건들의 끝없는 반복이기를 멈추고 하느님의 새롭고 놀라운 개입으로 점철된 앞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이 된다.

엘리아데가 말하는 관념은 독자 자신의 개인적이거나 문화적인 체험과 관련시켜야 잘 이해할 수 있다. 독자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체험과 자기자신이나 시간에 대한 체험과, 앞에서 언급했던 계절에 따라 행해지는 마을굿 안에서 양성되는 신과 시간에 대한 체험 사이의 차이점들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보통 봄이나 가을에 거행하곤 하는 마을굿은 노래, , 음식과 술로 마을의 보호신을 즐겁게 하고, 새해에 건강과 풍년을 베풀어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을 그 중심으로 삼는다. 이러한 의식은 변함없이 순환하는 자연과 끝없이 되풀이하여 부침하는 인생 속에서 자연과 공동체와, 영적인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체험을 제공한다. 바닷가에서나 진달래꽃이 만발한 상쾌한 봄날 산에서 막걸리 한 모금을 마시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춤을 추게 된다면 무속 신앙의 신들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러한 조화를 체험할 수 있다. 앞으로의 삶이 지금까지의 삶과 조금이라도 다를 것이라는 생각 없이 삶 속에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부침에 대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복을 찾아서 고향을 아주 떠나 단 하나의 행위, 그리고 유일무이한 끔찍한 희생 안에서 하느님과 만나는 아브라함의 체험은 마을굿의 체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기 삶의 세월에 따라서 중요한 행운과 고통 속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체험도 역시 마을굿의 체험과는 다르다. 구체적인 사건 안에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은, 시간을 하느님께서 정해 주는 미래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으로 파악하는 감각을 키워 주며, 걱정하기도 하며 신뢰하기도 하는 각자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장차의 또 다른 새로운 변화를 향해 앞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 대한 드라마는 끝이 나지만 그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된다. 화자는 세월의 흐름에 더욱 속도를 붙인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정착하고, 그의 아우도 자손을 보는데 부인에게서 여덟 아들과 작은 부인에게서 네 명의 아들을 낳는다. 사라는 죽고 아브라함은 사라를 안장할 땅을 산다(22,19-23,20). 이제 이사악은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며, 아브라함은 이사악의 신부감을 데려 오라고 믿을 만한 종을 보낸다. 자기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고향 땅에서 신부감을 찾아 오도록 일러서 보낸다.

이사악의 희생이라는 놀라운 드라마 뒤에 나오는 이 일반적인 일화는 절정에서 다소 가라앉는 모습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 일화가 아브라함 이야기의 결말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이사악과 그 아들들 이야기의 서두를 이루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모든 인간사가 그렇듯이, 시작과 끝이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고, 아들의 이야기는 보통 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나기 전부터 시작된다.

문학 비평가 프라이(Northrope Frye)는 성서 설화에 가장 적합한 문학 양식은 희극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사악의 결혼으로써 아브라함이 받은 자손의 번창에 대한 약속을 확정하는 이 일화는 일반적으로 희극에서 사용되는 결말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보통 희극은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문학 양식으로서의 희극은, 아브라함 이야기처럼 좌절 뒤에 이루는 성공, 갈등 위에 이루어지는 조화, 가뭄 뒤에 찾아올 봄과 같은 희망찬 가능성을 기리는 이야기이다. 불임의 세월과, 사막에서의 방랑과, 견디기 힘든 희생의 요구를 거치고 이제 이사악의 결혼으로 하느님 약속의 지속성에 대한 확증이 찾아온다.

이 일화는 직설적이고 사실적인 방식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잠깐씩 보기만 했던 새로운 설화 양식을 구성하고, 이사악의 결혼을 새로운 시작으로서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일화에서 화자는 자기가 듣고 보는 것을 단순히 기록할 뿐 전능한 화자처럼 사건들에 대한 결정적인 해석은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중요한 신학적 진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화자는, 지금까지 아브라함 이야기가 우리를 이끌어 온 주님과의 성숙한 대화의 길을 따라서 우리를 한 걸음 더 데리고 나아감으로써, 하느님께서 연극적인 개입이나, 환상이나 기적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인간사의 과정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브라함의 종이 그의 고향에 도착하면서 새로운 일화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는 도시 바깥의 우물가에서 잠시 쉬며, 물을 달라는 자기의 요구에 이사악의 아내가 될 여인이 응답하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한다. 야휘스트 계열의 화자는 보통의 경우 말을 아끼고 수수께끼 같은 설화 양식을 택하지만 일화가 시작되는 이 장면에서는 감각적인 세부까지도 자세히 묘사하여 이야기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한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브가가 어깨에 항아리를 메고 나왔다. 리브가는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이었다. 그런데 밀가로 말하면 나홀의 아내이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제수뻘이었다.

그 아가씨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 아주 예쁜 처녀였다. 그가 샘터에 내려 와서 항아리에 물을 채워가지고 올라 오는데 아브라함의 종이 뛰어 나가 그를 반기며 항아리의 물을 좀 마시게 해 달라고 청했다. 리브가는 할아버지, 어서 물을 마시십시오하며 항아리를 내려 손에 받쳐 들고 마시게 해 주었다. 이렇게 물을 마시게 해 주고 나서 낙타들에게도 실컷 마시게 물을 길어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병에 남아 있는 물을 얼른 구유에 붓고는 물을 길으러 샘터로 달려 가서 낙타들도 모두 마시게 물을 길어다 주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자기가 띠고 온 사명을 야훼께서 뜻대로 이루어 주시려는지 알아 보려고 리브가를 지켜 보고 있었다.

이윽고 낙타들이 물을 다 마시고 나자, 그는 반 세겔 나가는 금코고리를 아가씨에게 걸어 주고 다시 십 세겔 나가는 금팔찌 두 개를 팔목에 끼워 주고는, 리브가에게 물었다. “아가씨는 뉘 댁 따님이시오? 아가씨의 아버지 집에는 하룻 밤 쉬어 갈 만한 방이 없겠소?” 리브가는, “저는 브두엘이라는 분의 딸입니다. 할아버지는 나홀이고 할머니는 밀가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의 집에는 겨와 여물도 넉넉하고 쉬어 가실 만한 방도 있습니다.” 그는 야훼께 엎드려 경배하고는 내 주인의 하느님 야훼, 찬양을 받으실 분이어라. 야훼께서는 내 주인을 버리지 않으시고, 참으로 신의를 지키셨구나. 야훼께서 이렇게 나를 주인의 친척 집에까지 인도해 주셨구나. 하며 찬양하였다(24,15-27).

 

종이 나중에 리브가를 이사악에게 데려오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더욱 간결하고 모호한 방식으로 그 절정에 다다른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동안의 경위를 낱낱이 이사악에게 보고하였다. 이사악은 리브가를 천막으로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다. 이사악은 아내를 사랑하며 어머니 잃은 슬픔을 달랬다(24,66-67).

화자는 마지막의 이 주요 일화를 더욱 아이러니컬한 국면으로 끝맺는다. 자기 아들의 아내감으로 리브가를 찾은 사람은 아브라함이었고, 야훼의 약속에 대한 설화 전체의 지향은 아브라함과 그 조상들의 대를 이을 남자 아이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행위가 시작되기도 전에 사랑의 불임을 언급함으로써 애당초 사라에게 중요한 역할이 부여된다.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지속적인 실제성을 지닌 인물은 사라뿐이다. 이제 이사악이 자기 아내에 대한 사랑 속에서 어머니의 사랑도 발견함으로써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사악은 아버지의 아들이기보다는 어머니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이 재혼하고, 마침내 이사악에게 자기의 모든 재산을 물려주며, 175세의 나이에 죽어 아내 사라 곁에 함께(25,10) 묻힘으로써 아브라함 이야기 전체가 끝을 맺는다. 화자는 아브라함의 나이를 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한 개인 삶의 굽이치는 흐름 속에서 히브리 민족이 하느님과 나누어온 대화의 오랜 세월을 되살리게 된다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올터가 지적했듯이, 선조 실화들 속에서, “민족의 원형(原型)들은 개인들 삶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형성되었다.” 아브라함의 삶은, 히브리 종교 문화가 가문의 대를 잇고자 하는 기복 문화에서, 하느님과 서로 주고받는 성숙한 믿음의 관계라는 문화로 변화했다는 역사를 담고 있다. 이러한 성숙한 믿음은 삶을 본래 이러한 관계와 연관시켜 파악하며, 하느님께서 이러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증거를 일상적인 사건들의 자연적인 과정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 이사악과 그 아들들: 몽타주와 은유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죽은 후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의 역사는 시작된다(25,19). 전에 사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사악의 아내 리브가도 처음부터 아기를 낳지 못했다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써 화자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나온 다산성과 불임이라는 주제의 변주를 다시 시도하는 듯하다. 하지만 화자는 곧 이사악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하는 이야기를 덧붙인다(25,21). 화자는 즉시 이야기의 초점을 이사악에서 그 둘째 아들 야곱에게로 옮겨서 이 연속되는 이야기의 인간적인 지향을 만들어 나간다. 이 지향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 도입된 형제간의 다툼이라는 주제의 변주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동생이 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이다. 인간 자손으로 인해 생겨나는 고생을 극화하면서 화자는 창세기 제1장에서 번성하여라!”(1,28)하신 하느님의 명을 다시 한번 아이러니컬한 빛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형제간의 긴장은, 이미 쌍둥이가 리브가의 태중에서 서로 싸우고,” 야곱이 먼저 태어난 에사오의 뒷꿈치를 붙들고 뱃속에서 나올 때에 이미 시작된다(25,22-36). 그리고 그 갈등은, 몇 해 후 에사오가 사냥에서 돌아와 배가 고픈 상태에서, 야곱이 자기가 만들고 있는 그 죽을 줄 테니 대신 장자권을 달라고 갑자기 요구하자 거기에 동의하는 사건으로 그 갈등이 이어진다(25,27-34). 화자는 이미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유형을 본딴 일화들로 이사악의 일생을 보여준 뒤 재빠르게, 이사악이 늙어 눈이 보이지 않는 때로 넘어 간다. 리브가는 야곱을 부추겨서, 에사오가 사냥을 나간 틈을 타서 그 형을 가장하여 눈먼 이사악에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가져다 주고 그를 속여 보통은 형에게 주도록 되어 있는 축복을 가로채라고 시킨다. 이 장면에 나오는 대화는 창세기 27장까지 나오는 대화 중에 가장 길고 사실적인 대화가 들어 있다(27,1-40). 우리는, 화자가 야곱과 그 어머니를 그리는 방식과 아브라함과 사라를 그리는 방법을 비교함으로써, 야곱과 그 어머니가 비열한 수단으로 속이는 이야기 안에서 인물 설정이 입체화되고 사실적인 감각이 상당히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속임으로써 이사악의 축복을 받기는 하지만, ()에 사무친 형의 미움도 함께 남는다. 에사오는 아버지가 야곱에게 복을 빌어 준 일로 야곱을 미워하였다(27,41).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 속의 한 사건이 다시 되풀이되는 일화 속에서 이사악은 자기가 사는 가나안 지방을 떠나 자기 어머니의 집으로 야곱을 보내어 아내를 얻어 오게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이 이사악의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으로 이사악의 아내감을 찾아내는 신심 깊은 일화 대신에 가족 간에 서로 속이는 복잡한 드라마가 펼쳐져 있다. 이 이야기의 두 번째 대목에서 야곱은 어머니의 고향인 동쪽으로 여행을 하면서 여러 사건들 속에 빠져드는데, 이 사건들은 순전히 인간적인 의도에서 생겨나 인간이 만드는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굴레 속에서 연이어 일어난다. 어머니의 고향 땅으로 돌아간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작은 딸 라헬이 아내감으로 마음에 들었다. 라반은 7년간 자기 가축을 돌보아 주면 그 대가로 라헬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라반은 야곱을 속이고, 첫날밤에 야곱이 덜 마음에 들어하는 첫째 딸 레아를 준다. 그리고 야곱이 다시 7년을 일해 주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라헬도 그에게 준다(29,1-30). 사라와 리브가처럼 라헬도 처음부터 아기를 낳지 못했다. 레아가 야곱에게 여섯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아 주고, 하녀들이 네 명의 아들을 더 낳아 준 뒤에야 라헬은 아들을 하나 낳는데 그가 요셉이다(30,22-24).

야곱이 자기 장인을 속이고 그의 가장 좋은 양들을 얻어내어 자신을 속인 대가를 치르게 함으로써 이 가족극은 더욱 복잡해진다(30,31-43). 결국 야곱은 자기 아내, 자식, 가축을 데리고 가나안의 아버지 이사악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를 팔아 먹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돌려 주셔야 할 돈도 혼자 가로채신 거예요(31,15)라고 말하던 라헬과 레아는 자기 아버지에게 한()을 품고 있었기에 야곱과 함께 가는 것에 동의하고, 특히 라헬은 집안의 수호신들을 훔쳐서 가져간다. 라반은 그들을 뒤쫓아가지만 결국 모두와 화해하게 된다. 가족이 화해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 때문에 이야기의 이 대목은 다소 부자연스럽고 비현실적으로 끝을 맺는다.

이야기의 세 번째와 마지막 대목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야곱은 자기 형 에사오를 만나 잘 처리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고, 에사오에게 줄 선물을 딸려서 하인들을 먼저 보낸다. 야곱은 형 에사오가 자기에게 사무친 한()을 품고 있음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전에 품었던 분노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사그러든 에사오는 모든 면에서 동생을 따뜻하게 반긴다. 그러나 야곱은 여전히 에사오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 그는 형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에사오와 그 부하들로부터 계속 피하는 것이다(33,8-17).

설화는 전통적인 희극의 조화로운 해결법으로 결말을 맺는다. 그러나 야곱과 에사오의 화해는 다소 불확실하며, 극적 흥미의 관점에서 볼 때 다소 어정쩡한 결말을 형성하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야기 전체가 마치 TV 연속극과 같은 두 개의 중요한 신비한 일화에 가서야 비로소 그 깊은 의미를 얻는다. 첫 번째 일화는 설화의 1/3까지, 두 번째 일화는 2/3까지에 걸쳐서 나오는 것인데 이 둘은 모두 야곱이 본 환시이다.

첫 번째는 야곱이 신부감을 구하러 어머니의 고향으로 가는 길에서 보는 환시이다.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잠이 든다. 꿈 속에서 야훼께서 나타나,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내린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야곱에게로 넘겨 주신다. 야곱은 꿈에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가 있고 그 층계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있었는데, 야훼께서 그의 옆에 나타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야훼,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네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이다. 나는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28,13-15).

야곱은 그곳을 베델(하느님의 집)이라고 부르며, 자기가 베었던 돌베개를 세워 그 자리에 표시를 해 놓고 가던 길을 간다.

이 신비한 꿈에는 하느님 현존의 공개적이고 기적적인 현현이 아니라, 초월적인 만남의 개인적인 체험이 담겨 있다. 이 꿈 이야기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간의 갈등과 기만일화들과 짝을 이루어,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된 이중적인 전개 흐름, 곧 인간을 돌보시는 하느님의 손길과 죄를 향하는 인간의 반대 성향의 두 흐름을 다시 반복한다. 야훼께서는 환시 속에서 많은 자손에 대한 약속을 야곱에게 넘겨 주면서도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극적인 이야기나 그의 아버지 이사악의 간략하게 그려진 인생에서처럼, 야곱이 살아갈 길의 방향을 정해 주지 않으신다. 야훼께서는 형제간의 싸움과 가족 분열 이야기의 인간적인 지향이 상당히 진행된 뒤에야 비로소 움직여 그 약속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 환시에서는 앞선 창세기 이야기들과는 달리, 하느님께서 피조물과 상호 교류를 통해 어떻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지에 대한 뚜렷한 새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은 노아처럼 야곱이 뛰어나게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야곱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야곱은 그처럼 선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속이기 잘하는 꾀보이다. 또 아브라함처럼 자신이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기꺼이 바치려 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야곱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것도 아니다.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야훼께서는 아담, 하와, 카인에게 도전했던 그런 방식으로 야곱과 그 어머니의 기만에 대해 도전을 제시하지 않으신다. 실제로 야훼께서는 이전의 창세기 이야기들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죄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떨쳐 버리신 것 같다. 이 이야기에서 야훼께서는, 아브라함과 처음으로 맺으신 계약을 봉인하는 공적이고 극적인 활활 타는 불꽃의 상징보다 더 개인적이고, 신비하고 낮은 음조의 방식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에 대한 배려를 반복하신다. 그것은 그들의 도덕성이나 관대함은 전혀 개의치 않는 무조건적인 태도이다. 유일한 조건은 야곱이 제안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날 아침의 다음과 같은 야곱의 서약에 붙은 것이다. 만일 제가 이 길을 가는 동안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하여 주시고 저를 지켜 주셔서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고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만 하여 주신다면, 저는 야훼님을 제 하느님으로 모시겠습니다(28,20-21).

하느님의 새로운 태도는 화자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의 문제이다. 이것을 고대 역사 과정 속에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 태도의 변화라든가, 하느님을 실제적인 변화를 겪는 진화하는 존재로 보는 신학적 이해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신비평(New Critcism)은 한 문학작품을 구성해 전해주는 다양한 요소들을 분석함으로써 그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려 한다. 그러나 소위 독자반응비평(Reader’s Response Criticism)은 작품을 독자의 세계와 연관시켜 이해하려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자의 비평 방법에 따라서, 이 환시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세속적인 사건들의 복합물과 혼합된 몽타주가 어떻게 이 이야기의 의미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이 혼합체에서 하느님이 히브리 백성에게 주시는 계시를 보여 주려고 하는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환시를 각 독자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서, 자기 삶의 드라마에 담긴 복합체 안에서 자신이 언제 야곱의 이 환시와 유사한 초월적인 체험을 했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질문을 야곱이 두 번째로 본 중요한 환시에 대해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환시는 첫 번째 환시와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는 선에서, 전체 이야기의 3/2에 걸쳐서 일어난다. 하느님의 명에 따라서 야곱은 에사오에게 선물로 줄 많은 가축을 이끌고 집을 향해 떠났지만 하느님의 도움을 구한다. 그는 자기 형이 400명의 부하를 데리고 있는데 그들이 자기를 공격할까봐 무척 두려워하고 있다. 그날 밤 그는 신비한 체험 속에서 하느님과 만나는데, 이 만남은 전체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주된 절정을 이루며, 야곱과 그 가족 사이의 관계가 아닌 야곱과 하느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주된 의미 지향을 전면으로 내세운다.

 

야곱은 혼자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나타나 동이 트기까지 그와 씨름을 했다. 그분은 야곱을 이겨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 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를 다치게 되었다. 그분은 동이 밝아 오니 이제 그만 놓으라고 했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복을 빌어 주지 않으면 놓아드릴 수 없다고 떼를 썼다. 일이 이쯤 되자 그분이 야곱에게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 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 그러니 다시는 너를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여라(32,25-29)

 

이 환시 일화 그 자체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전래의 민담으로, 사람들이 왜 환도뼈 힘줄을 먹지 않는지, 또는 왜 히브리 백성이 그는 하느님과 씨름한다는 의미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에 대한 상상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처럼, 앞에 나오는 야곱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결합된 이 일화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일생 이야기와 독자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하느님과의 씨름이라는 은유와 관련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초대한다. 이 절정의 은유적인 환시는 현대에서라면 진부한 가족 연속극에 불과할 것을 오랜 세월에 걸쳐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지속적인 힘을 지닌 문학 작품으로 바꾸어 놓는다.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에 대한 은유인 이 환시는, 노아 이야기의 절정에 등장하는 무지개나, 아브라함 이야기의 절정에서 나오는 이사악의 희생보다 더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다. 그런 까닭에 이 환시는 우리의 상상 속에 사고의 자극제로 살아남는 더 큰 힘을 지닐 수도 있다.

꿈속의 그 인물이, 너는 하느님과 겨루어 냈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긴 사람이다(32,29) 하고 설명하지만 그 설명 자체가 매우 아리송하다. 야곱은 이미 어머니의 태중에서 형 에사오와 싸웠다. 그 후 그는 장인 라반과 싸웠다. 이제 그는 분명히 하느님과 씨름하며, 마음 속에서는 자기자신과 싸운 것이다. 그는 하느님이 명하신 대로 집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곳에서 에사오를 만날 때 닥칠 일을 무척 두려워한다. 첫 번째 싸움들에서는 야곱이 이겼다. 그리고 이번에도 이기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싸움들 안에서 그는 하느님과의 씨름에서 이기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그리고 하느님과의 씨름에서 이긴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그렇지 않을까? 독자는 각자 언제 자신이 하느님과 씨름했으며, 자신이 이겼든 졌든 어떤 구체적인 인간적 사건 안에서 그런 싸움이 일어났으며, 자신이 이겼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었는지를 자문한 것이다.

성서를 문학적으로 읽는 독자는 신학적으로 읽는 독자와는 다르다. 신학적인 독자는 이야기에서 개념적 이해를 밝혀냄으로써 명확성을 찾는다. 하지만 문학적인 독자는 오히려 여기서처럼 작품 안에 존재하는 모호성과, 다중적인 의미의 차원들과,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긴장에 관심을 가진다. 그는 모호함, 다중적인 의미, 그리고 긴장이, 우리들 자신, 우리의 삶, 그리고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에 대해 끈질긴 질문들을 제기 할 수 있는 지속적인 힘을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에 대해 끈질긴 질문들을 제기 할 수 있는 지속적인 힘을 그 작품에 부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서양 문학비평이 강조하는 것은, 한 문학작품이 의미와 감동을 발생시키는 힘은 대부분 우리로 하여금 모호한 긴장과 갈등을 유발시키는 생각이나 감정과 직면하게 함으로써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호함과 긴장은 한 작품에 무한히 열려있는 개방적인 차원을 부여하며, 이러한 차원 때문에 여러 시대의 독자들은 끝없이 다시 그 작품으로 돌아오게 되며, 그 의미의 가능성들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창세기 이야기의 전개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유다인들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마음에 오랜 세월동안 살아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와 같이 장면을 제시하는 모호한 방식 때문이다.

이사악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 전체의 마지막 부분에서 라헬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베냐민을 낳다가 죽는데, 베냐민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유일하게 라헴의 첫째 아들 요셉의 친형제이다(35,17-18). 그 뒤에 야곱의 아버지 이사악은 죽고 화자는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37,2)로 넘어 간다.

 

. 요셉과 그 형제들: 민담과 사실주의

 

이사악 이야기가 이사악보다는 주로 그의 아들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이듯이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도 야곱의 아들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처럼, 편애와 형제간의 질투에 뿌리를 둔 소박한 심리적 사실주의 드라마로 시작된다. 전지한 화자는 간결하게 설명한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라고 해서 어느 아들보다도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입히곤 하였다. 이렇게 아버지가 유별나게 그만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형들은 미워서 정다운 말 한마디 건넬 생각이 없었다”(37,3-4).

요셉의 꿈들은 형제들의 질투와 한()에 불을 붙인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형제들의 행동이 보여 주는 잔인한 심리적 사실주의이다. 요셉은 도다인으로 찾아가 거기에서 형들을 만나게 되었다. 형들은 멀리서 알아보고 그가 다다르기 전에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 ‘, 꿈장이가 오는구나. 저 녀석을 죽여 아무 구덩이에나 처넣고는 들짐승이 잡아 먹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꿈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보자(37,17-19).

하지만 잘 알려져 있듯, 이들은 요셉을 죽이지 않고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 넘긴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은 몇 년 후 전혀 다른 양식으로 이어진다. 버림을 받은 요셉은 이제 깨끗하고 잘생긴 사나이(39,6)가 되었으며, 사실적인 설화보다 순수한 민담으로 보이는 행운의 반전을 계속 거치는 것이다. 요셉은 하느님의 축복으로 주인 보디발의 총애를 얻어 그의 집안 전체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는다. 하지만 보디발의 음탕한 아내를 유혹하려 했다고 고발을 당하여 갑자기 행운은 불행으로 바뀌고 감옥에 갇힌다. 감옥에 있는 동안 요셉은 꿈을 해몽하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 다시 한번 행운을 맞이한다. 파라오는 자신이 꾼 꿈을 요셉이 에집트에 닥쳐올 7년간의 풍년과 7년간의 기근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해몽한 공으로 그를 에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운다고 말한다(41,41).

한편, 기근이 찾아오자 야곱은 막내이며 요셉의 친형제인 베냐민만 남기고 모든 형제들을 에집트로 보내어 곡식을 사오게 한다. 에집트에서 요셉이 형제들과 만난다는 이야기의 생명력은 부분적으로는 민담 모티브와 이 모티브가 펼쳐 가는 심리적 사실주의의 긴장에서 생겨난다. 여러 해 동안 헤어져 있던 형제들의 만남은 심리적 사실주의보다는 아동 민담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을 알아본 요셉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 형제들을 놀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민담과 같은 만남에 깔려 있는 사실적인 그리움과 불신감은 어른에게도 호소력을 가지게 한다. 분단된 북한의 많은 이산가족들은 표현되지 않는 복잡한 그 감정의 사실성을 잘 알 수 있다(42,7-9).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놀리면 놀릴수록, 우리는 곤경에 빠진 그들을 동정하게 된다. 요셉은 그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곡식을 준다. 하지만 그는 둘째인 시메온을 인질로 잡아 두고서, 막내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한다. 자기들이 오래 전에 요셉에게 저질렀던 죄 때문에 그동안 억눌러온 죄책감이 갑자기 형제들 마음 속에서 머리를 든다. 그들은, 악한 행동은 세월이 흐르면서 결국은 벌은 받게 된다는 상투적인 권선징악적 역사관과 연관시켜 자기들이 처한 곤경을 해석한다. 사실이지, 우리가 동생에게 그 짓을 하고 어떻게 벌을 면하겠니?”(42,21).

이제 떠오르는 복잡한 감정 속에서 민담풍의 상황은 갑자기 참기 어려울 만큼 사실적인 상황으로 변한다. 화자는 르우벤의 입을 빌어 형제들이 느끼는 감정의 일단을 엿보게 해 준다. 요셉의 감정에 대해서는 단지 요셉은 듣다말고 물러가서 울었다고만 말한다. 화자는 우리로 하여금 요셉과 같은 깊은 감정으로 이 장면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요셉은 정확하게 무엇을 느끼는가?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가족과의 이 재회 순간에, 그러나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제들과 만나는 이 순간에 그의 감정은 분명히 정과 한이 뒤섞인, 형용할 수 없는 장조와 단조의 느낌들이 뒤엉킨 그런 감정일 것이다. 한국의 가족처럼 전쟁 중에 헤어져 수십년이 흐른 뒤에 다시 만난 사람들은 요셉의 느낌이 어떠한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터이지만 그런 감정을 누구라서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는 성서 화자의 판단은 건전하다.

민담풍의 분위기가 다시 계속되어 요셉은 빠르게 움직이는 일련의 극적 반전 속에서 계속 형제들을 놀린다. 그리고 사건이 절정에 이르자 요셉은 관리인을 시켜서, 베냐민의 자루에 자기의 은잔을 몰래 넣게 하고는 형제들을 쫓아가서 은잔을 훔쳤다고 고발하고 그 은잔을 찾아내게 한다. 관리인이 맏아들에서 시작하여 막내 아들에 이르기까지 뒤지자,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나왔다.”(44,12)

요셉의 집으로 되돌아온 형제들은 요셉 앞에 꿇어 엎드린다.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어찌 입을 놀릴수 있겠습니까? 변명할 여지도 없습니다.” 하면서 유다가 아뢰었다. “하느님께서 소인들의 죄를 들추어 내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잔이 나온 이 애나 우리나 할 것 없이 모두 어른의 종이 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44,16) 요셉은 잔인하게, 그러나 여전히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렇게 할 수 없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잔이 나온 사람만 내 종이 되고 너희 나머지는 아버지에게 평안히들 올라 가거라.”(44,17). 이 장면은 유다가 요셉에게 나아가 이렇게 말하는 대목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저희는 늙은 아버지가 있고 그가 늘그막에 얻은 아이가 있다고 아뢰었습니다. 그 애와 한 배에서 난 형은 죽고 그 애만 남았는데, 아버지는 그 애를 애지중지한다고 아뢰었습니다. 그 애 대신 소인을 남겨 두시어 어른의 종으로 삼으십시오.

요셉은 시종들 앞에서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할 길 없어 모두들 물러나거라.” 하고 외쳤다. 이렇게 요셉은 모든 사람을 물리고 나서 형제들에게 털어 놓았다. “내가 바로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다고요?” 형제들은 그의 앞에서 너무나 어리둥절하여 입이 얼어 붙고 말았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자, 그제야 가까이 옆으로 갔다. 요셉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나를 에집트로 팔아 넘겼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나를 이 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마음으로 괴로와할 것도 얼굴을 붉힐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이 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나서 요셉은 친동생 베냐민의 목을 부둥켜 안고 울었다. 베냐민도 그의 목에 매달려 울었다. 다시 요셉은 형들과 일일이 입을 맞추어 인사하고는 붙잡고 울었다. 그제야 형들은 그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44,20-45,15).

 

앞에서 본 이사악과 에사오의 다소 설득력이 없는 화해 장면과(33,1-17) 비교해 보면 지금 이 이야기의 흥미진진한 절정 부분을 풀어나가는 화자의 능숙한 기법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화자는 우리로 하여금 요셉의 형제들이 느끼는 공포를 통해서 그 장면을 체험하게 한다. 전에 자기들이 죽이려고 한 동생을 갑자기 대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분명히 요셉이 자기들에게 어떻게 복수할까 걱정하며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화자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요셉의 생각과 마음으로 그 장면을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억눌러온 한과 싸워왔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벌어진 모든 역사적 사건 안에서 움직이는 하느님께 신뢰를 드리는 놀라운 표현으로 변화한다. 요셉은 나를 이 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하고 말할 때, 그는 한 차원에서는 이야기 속의 등장 인물인 형제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화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를 끌어들이려고 하는 하느님 말씀과의 대화라는 담론에서 보면, 요셉은 그 말씀을 대신하여 독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 유다 독자들에 대해서는 선조들의 권위에 의존해서, 그리고 모든 독자들에게는 극적 서술력에 기대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의 재능은 우리로 하여금 이야기 속에서 형제들을 대하는 요셉의 무서운 위력을 깊이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요셉의 믿음을, 하느님 말씀이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으로도 느끼게 해 준다.

인간사 속에 뒤엉킨 악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요셉의 믿음은 그의 형제들이 전에 표현했던 진부한 도덕적인 관점보다 더 명민한 역사 이해를 반영한다. 이는 인간사 안에서 인간과 상호 작용하는 하느님에 대한 더욱 순화된 믿음을 향해 나아가는 전체 창세기의 선조 이야기들이 지닌 지향의 절정이다. 이제 우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아브라함 이야기에 극화된 것과 같은 극적 기적에 의존하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야곱의 초기 일화에 나오는 환시로 힘을 얻은 믿음을 통과하여, 기적이나 환시가 나타나지 않을 때에도, 그리고 인간의 마음 속의 악 때문에 사건들이 일어날 때에도, 그 속에 하느님이 활동하고 계심을 보는 그러한 믿음에 도달했다. 요셉도, 또 화자도 요셉이 어떻게 이러한 명민한 깨달음에 도달하는지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 화자는 요셉의 억눌렸던 한()이 어떻게 해서 갑자기 용서로 바뀌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성적인 죄에 주목하는 그리스도교의 성향을 가지고 창세기 이야기를 말하는 그리스도교 저술가는, 아마도 창세기 화자들이 눈감아 준 많은 성적 범죄들에 초점을 두었을 것이다. 카인의 범죄 이야기가 그렇듯이, 창세기 화자들은 오히려 형제들간의 다툼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의 일치에 해악을 기치는 형제들간의 분열과 한은,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큰 죄악으로 한탄하는 악이다. 아마 히브리 백성 역시 이런 것들을 가장 위협적인 죄악으로 느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한국인이 가정 불화에 휩싸일 때 무당굿이 해 주려고 하는 바로 그런 일을, 히브리 백성과, 또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인 모든 사람을 위해 해 주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형제들에 대한 요셉의 용서로써 자기 백성의 독특한 죄악을 몰아내는 셈이다. 다른 시간, 다른 장소의 독자에게는 요셉의 입을 통해 극화된 이 하느님의 말씀은 불신과, 형제간의 분열과 한에 사로잡힌 모든 개인이나 집단을 초대하여 그 해방의 가능성을 보게 한다. 하지만 이렇게 사로잡힌 사람은 누구나, 요셉처럼 그렇게 용서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형제간의 분열과 한에 사로잡힌 사람이 요셉과 같이 용서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을 어렵게 느낀다면, 그 불화 안에서 하느님이 활동하고 계심을 발견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이는 마치, 요셉이 한국에 대해서, 북한과 남한의 형제들이 이토록 오래 갈라져 있는 것은 장차 확실하게 복을 주기 위해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오히려 이것을 비극적인 운명으로 보는 것이 훨씬 쉽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적인 운명이나 팔자라는 개념은 고통과 악을 통해서 축복으로 나아가는 하느님의 돌보심이라는 히브리의 개념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야기의 결말부분에서 야곱(이스라엘)은 에집트에 정착한다. 그는 죽으면서 자기가 죽으면 시신을 가나안으로 가져다가 선조들과 아내 곁에 묻어 달라고 명하는데, 아들들은 그대로 충실하게 이행한다(42,29-50,13). 이렇게 함으로써 이야기는 완벽한 해결에 다다르려고 한다. 형제들은 화해하고, 아버지는 평화롭게 임종하는 것이다. 하지만 형제들의 화해는 겉보기처럼 그렇게 완벽한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 형제간의 불신과 한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겠지만, 그런 불신을 하루 아침에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쩌면 요셉은 우리가 미워 우리에게서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할지도 모르겠다.” 하면서 요셉 앞에 나가 빌었다. “아버지께서는 세상 떠나시기 전에 당신의 말씀을 요셉에게 전하시라면서 이렇게 분부하셨습니다. ‘형들이 악의로 한 일이건 어떻게 마음을 잘못 먹고 한 일이건 못할 짓 한 것을 용서해 주어라. 네 아비를 돌보시던 하느님의 종들이 비록 악의에 찬 일을 했지만 용서해 주어라.’”(50,15-17)

 

그리고 나서 화자는, 요셉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형제들에게 자기들의 고통스러운 가족 역사에 대한 신학적 깨달음을 술회하게 하면서 이야기를 맺는다.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것들을 돌봐 드리리다.”(50,20-21)

그러나 마지막에 가면, 요셉의 형제들 편에서 그 화해가 얼마나 확실한 것이었는지 분명치 않다. 나중에 요셉이 죽게 되었을 때, 요셉은 그들에게 서약을 시켰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너희를 찾아 오시어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에게 주시마고 맹세하신 땅으로 올라가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요셉이 죽은 뒤에 그들이 그 서약을 지켰는지 지키지 않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들은 그를 썩지 않게 만들어 관에 넣어 에집트에 모셨다.”(50,24-26). 창세기는 이렇게 결말이 개방된 모호한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이제까지 우리는, 문학 독자가 선조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배경, 등장 인물들의 성격, 사건들, 감정적인 분위기나 어조, 전체적인 모습, 지향 등과 같은 것에 주목할 때 어떤 의미의 가능성이 생겨나는지를 살펴보았다. 문학을 배우는 학도들은 이런 종류의 텍스트 분석 단계에서 멈춰버리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언어 철학자 리쾨르(Paul Ricoeur)가 모든 텍스트를 읽는 독서법에 대해서 강조한 바 있듯이, 독자는 텍스트에서 발견한 의미를 자기 자신의 체험과 연관시킬 때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성서를 읽는 경우에 이런 사실이 특히 중요하다. 하나의 성서 이야기가 담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독자들이 그 이야기 안에서 만나는 인물들과 동화하고, 그들의 말씀과 조우하는 그 인물들의 드라마를 자신들의 삶 속에서 재현할 때 그 온전한 의미 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