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은주 수녀
(부산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름에 대한 학계의 의견들
1. ‘야훼’ 이름의 유래에 대한 종교 언어학적 연구
2. ‘야훼’ 이름의 어원론(탈출 3,14)에 대한 문법적 연구
Ⅲ. 이야기의 형식 안에서 보는 탈출기의 전체 구조
Ⅳ. 탈출기 3,14의 인접문맥을 통해서 보는 하느님 이름의 의미
1. 모세 소명담(3,1-4,23)의 구조와 특징
2. 어원론에 관한 고찰
Ⅴ. 홍해탈출까지 모세의 소명수행 안에 드러나는 야훼 하느님의 이름
Ⅵ. 탈출기 15장-신명기 34장에 나타나는 야훼 하느님의 특성
Ⅶ. 오경 밖의 구약성서에서 보는 야훼 하느님의 특성
Ⅷ. 신약성서적 조명
Ⅸ. 나가는말
Ⅰ. 들어가는 말
성서를 학문의 대상으로서 연구한다는 것이 참 힘들다. 우선 여러 다양한 방법론들이 어렵고, 이 방법론들을 본문에 어떻게 어느 정도로 사용해야 적합할 것인지 분별하기가 어렵고, 대다수가 알아들을 만큼 쉽고 합리적이면서도 신학적 메시지를 동반하는 방법론을 찾아낸다는 것은 더더구나 어렵다. 본문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가 분석하다보면 때로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통일성과 조화를 갖춘 본문의 이야기가 J1, J2, E, JE 혹은 D, Pg, Ps, R, RJE, RJEP등 복잡하고도 무참하게 찢기어 본문에 담긴 깊은 신학적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가 하면, 본문의 중복과 단절이 확실한데도 이를 속수무책 역사비평학자에게 맡긴 채 공시적(共時的) 주석만으로 혹은 선택적인 본문의 독서만으로 자족하면서 중요한 메시지를 놓치는 경우도 대하게 된다. 본문을 얼마만큼 끊어 읽고 또 붙여 읽어야 할까? 본문의 거시적 세계와 미시적 세계가 서로 만나 그 뜻을 비추어주고 의미의 세계를 한 소리로 조화롭게 내는, 성령의 감도를 느낄 수 있는 성서해석이란 과연 영원한 숙제와도 같다는 생각이다.
한편, 구약학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학문적 합의에 도달한 ‘구약성서신학’을 내지 못한 가장 근본적 이유를 김이곤은 방법론 사이의 긴장관계 혹은 역사비평가들의 해석학적 무정부 상태 같은 현상학적 요인들에서 찾기보다 구약신학의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침멀리의 『구약성서 신학개요』(1972)가 적어도 ‘출발점’에 있어서는 구약성서의 본질을 가장 바르게 파악하였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그(침멀리)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구약성서는 본질상 ‘야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 하느님의 ‘자기 일치성’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갖고 있는 책이며, 동시에 ‘이 야훼께서(!)’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돌보셨다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해온 책이므로, 바로 이곳에서만(!) 우리는 이스라엘 신앙의 ‘내적 통일성’(inner continuity)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신학의 출발점은 ‘나는 야훼이다’라고 하신 그분 ‘야훼’의 본질에 대한 파악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에 대한 해설은 전체 구약성서를 통틀어 탈출 3,14에 꼭 한 번 나온다. 그러므로 고금을 막론하고 이에 관한 무수한 논문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제껏 연구는 주로 ‘야훼’라는 신명(神名)의 종교학적․어원학적 유래, 탈출 3,13-15 혹은 조금 폭을 넓혀 3,1-4,17(23)의 맥락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외에 탈출기 혹은 성서의 다른 책들에서 병행이 될만한 구절을 비교하거나 어떤 특정 주제(예를 들어 계약, 야훼의 속성 등)와 이름을 연결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신앙을 교리에 대한 해설이나 논증 형식으로 전달하지 않고 주로 이야기 형식을 통해 표현하였듯, 탈출 3,14도 하느님과 모세 사이의 대화의 한 부분, 즉 고난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시고 모세를 불러 그 백성을 해방과 자유에로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역사를 서술하는 큰 이야기 흐름 속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3,14 혹은 3,13-15와 함께 읽어야 할 이야기의 범주인가? 학자들이 성서본문을 잘라서 읽거나 해설하는 가장 근본적 이유는 본문의 흐름에 충돌이나 단절 혹은 중복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즉 다른 전승에 속한 글들이 함께 섞여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을 각각 떼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탈출기에도 이런 것들이 발견된다. 너무 광범위한 연구를 피하기 위하여 만일 우리가 홍해탈출 이야기까지로 본문을 제한해서 관찰해 보면 실상 이야기의 흐름에 있어 충돌이나 단절 혹은 반복이 ‘확실한 곳’이 그리 많지 않은 데 놀라게 된다. 우선 6,2-7,6은 사제계(P) 학자들이 모세와 아론, 특히 아론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삽입한 중복자료임을 알 수 있다. 이 본문은 자체 내에서 폐쇄적 구조를 이루고 있고 앞선 모세의 소명담 이야기를 요약해서 되풀이할 뿐더러 6,1에서 7,7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다. 또한 12,1-28; 12,37-13,16에 나오는 법조문들도 이야기의 흐름을 차단한다. 10번째 재앙의 맥락 안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를 보다 원천적인 법으로 제시하려는 의도로 후대에 삽입한 것이 확실하다. 이 자료들을 제외하고 탈출 1-15장을 읽다 보면, 그리고 우리가 사료비평의 가설에 너무 얽매이지 않으면, 이야기가 제법 자연스럽게 흘러감을 어렵잖게 발견하게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이야기에서 10가지의 재앙이 나오고 파라오의 마음이 스스로 10번 굳어지고, 야훼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10번 굳히신다. 또한 재앙이 내림에 있어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구분되는 것이 5번이요, 구분되지 않는 것이 5번이다. 파라오의 변화와 이집트 마술사들과 신하들의 변화가 모두 ‘점진적으로’ 강도를 높여가며 이루어진다. 재앙 사이의 이음새도 제법 단단하다. 또한 핵심단어들(예를 들어, ‘섬기다’ 혹은 ‘일하다’를 뜻하는 ‘bd)이나 핵심구절들(예를 들어,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였다’ 등)이 한 줄로 꿰듯 이어지며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만한데, 특히 이들을 통해 이야기의 주요 주제, 즉 야훼와 파라오 중 누가 참된 신이며 이스라엘의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겨루는 권력다툼의 문제가 점차 심도 있게 드러나는 것은 더욱 장관이다. 과연 이러한 현상을 그냥 넘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3,14에 관해 이제껏 이루어진 연구와 방향을 조금 달리 하여 이 글에서는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이름이 갖는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글의 목적이 이러하니만큼 연구방법론도 자연히 설화분석방법론을 주된 도구로 삼아야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먼저 ‘야훼’ 이름에 대한 학계의 의견들을 살펴본 후, 홍해탈출 이야기(1,1-14,31)의 맥락 안에서, 모세의 소명담(3,1-4,23) 안에서 그리고 마침내 어원론이 있는 3,13-15까지 차츰 범주를 좁혀가며 그 이름의 의미를 이야기의 틀 안에서 관찰할 것이다. 그 후 이 주제가 신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러한 고찰은 기존의 연구결과들을 보완하여 성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 풍요롭게 하리라 믿는다.
Ⅱ.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름에 대한 학계의 의견들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름을 흔히 ‘사성문자’(四聖文字, tetragrammaton)라 한다. 모음(母音)없이 네 개의 히브리어 자음הוהי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הוהי(yhwh)의 발음이 ‘야훼’였다고 추측한다. ‘야훼’ 이름의 뜻을 설명하는 어원론이 들어있는 문맥인 탈출 3,13-15는 사료, 양식, 전승 비판의 결과 다양한 전승의 합으로 간주되었고, 그 중에서도 어원론 자체인 ‘에흐예 아쉘 에흐예’(היהא רשא היהא, ’ehyeh ’ašer ’ehyeh, 3,14ㄱ)는 많은 경우 후대에 끼어든 첨가문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문맥보다는 이름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1. ‘야훼’ 이름의 유래에 대한 종교 언어학적 연구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름 ‘야훼’의 유래에 관한 연구는 고고학 특히 고대 근동 언어와의 비교를 통해 가장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야훼신앙의 유래를 ‘선조들의 하느님’ 혹은 모세의 장인이며 미디안의 사제였던 이드로가 섬기던 ‘켄족의 신’에게서 찾기도 하지만, 특히 아라비아어, 시리아어, 우가릿어, 아카드어, 아람어들로부터 hwy, ya(w)um, yahu, ym, yw, -ya 등 비슷한 자음 혹은 소리들을 찾아 야훼yhwh라는 이름의 원형으로 계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밖에도 ya-huwa나 ya-hu(야-! 그분이시다) 등 고대 제의(祭儀)에서 하느님을 부를 때 사용하던 탄성이 이름으로 발전하였다고 하는 주장들도 있다.
중요한 점은 야훼라는 이름이 매우 오래 전부터 쓰였다는 점에서만 학계의 의견이 거의 일치할 뿐 야훼 이름의 원형으로 다수가 긍정할만한 것이 아직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사성문자의 유래에 상관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이 이름의 뜻을 어떻게 알아들었냐는 문제일 것이다.
2. ‘야훼’ 이름의 어원론(탈출 3,14)에 대한 문법적 연구
탈출 3,14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 ‘에흐예’(’hyh)와 ‘야훼’(yhwh)는 각각 hāyah동사 1인칭 단수와 3인칭 단수 위에 세워진 같은 이름으로 간주된다. 어근hwh는 hyh의 고대형(古代型)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탈출 3,14에 쓰인 ‘에흐예 아쉘 에흐예’(’ehyeh 'ašer ’ehyeh)가 내포한 hāyah동사의 형태, 시제, 내용 및 문장의 형식에 대해 관찰하고 이들을 통해 이름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였다. 이제까지 쟁점이 된 것들을 간략히 종합해 보고자 한다.
1) hāyah(היה)동사의 형태: 사역형(hiphil)인가 단순형(qal)인가?
① hāyah 동사를 사역형(hiphil)으로 보는 경우
히브리 동사 hāyah의 단순형(qal)은 그 우선적 의미가 ‘있다, 생기다’(to be/exist, to become)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사역형이 되면 ‘있게 하다, 생기게 하다’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Haupt는 3,14ㄱ에 미미한 본문 파손이 있었으리라는 것 그리고 마소라 학자들도 이 글자들에 정확한 모음을 붙이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이유로 들어 hāyah동사를 사역형으로, 그리고 두 번째 ’ehyeh를 3인칭으로 읽을 것을 제안하였다. 즉 ’ehyeh ašer yihyeh로 본문을 고침으로써 “나는 생겨나는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한다”(I cause to be what comes into existence)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Albright는 근동언어에 관한 지식과 고고학적 자료들을 동원해 Haupt의 주장을 지지하고 강화하였으며, Freedman은 이들의 이론 위에서 자신의 학설을 전개시켜 나갔다. 또 한편 Cross는 우가릿의 ‘엘’신에 대한 제의적 칭호에 나타나는 ‘엘-야휘’(’el yahwi = El who creates)가 발전하여 ‘엘’이라는 신명(神名) 대신 야훼라는 이름으로 대치되었다고 주장하며 3,14ㄱ의 원래 형식이 yahweh ’ašer yihweh(he causes to be what comes into being)였으리라고 한다. 즉, 그는 본문 안에 있는 두 개의 1인칭을 모두 3인칭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위의 가설들은, hāyah 동사의 사역형이 성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과 본문비평상 합당한 근거 없이 성서본문을 수정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② hāyah동사를 단순형(qal)으로 보는 경우
대부분 학자들이 이 동사의 형태를 단순형(qal)으로 보며, 이 경우에는 동사의 시제와 성격에 관한 것이 주 관심사가 된다.
단순형 현재시제로 보는 경우: 이 경우 ’ehyeh ’ašer ’ehyeh는 흔히 “나는 곧 나다”(공동번역) 혹은 “나는 있는 나다”(구약성서 새번역)(영어로는 주로 I am who/that I am; I am who is)로 번역된다. 드 보(de Vaux)는 칠십인역(LXX)이 3,14ㄱ을 -εγώ είμι ό ὤν으로 번역한 데 기반을 두고 hāyah동사의 뜻을 ‘있다’(to be)로 간주하며 이 구절을 존재에 대한 단언이라고 한다. 만일 이 동사를 미래로 알아들을 경우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의 형식으로 명사든 형용사든 반드시 한정어를 가져야만 하는데 3,14는 그렇지 않으므로 ‘내가 있다’라고 현재형으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미래로 생각한다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에 그분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라는 반어법적 설명을 하기도 한다. Durham도 현재시제로 보지만 hāyah동사 안에 존재와 활동의 성격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하며 3,14ㄱ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I am being that I am being 혹은 I am the Is-ing one)로 번역하고 그 뜻을 “나는 항상 존재하는 자다”로 풀이한다. “활동하는 존재의 실재는 오직 현재형으로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 단순형(qal) 미래시제로 보는 경우: 3,14에 나오는 ’ehyeh를 특히 3,12; 4,12.15에 나오는 “내가…와 함께 있으리라”(’ehyeh ‘im)와 연결시켜 미래형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더욱 지배적이다. 즉, 3,14를 “나는 미래에 현존할 것이다. 그러한 내가 될 것이다”와 같은 약속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하느님의 존재하심이란 곧 활동적 차원을 전제한다고 보면서 hāyah동사가 지닌 활동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2) 어원론의 문장구조: 왜 이렇게 독특한가?
’ehyeh ’ašer ’ehyeh라는 문장은 성서에서 유일회적으로 볼 수 있는, 아주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관계대명사 ’ašer의 선행사가 (be-)동사(형 이름)인데다가 주절을 해설하는 종속절이 주절의 단어를 그대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런 문장구조 안에서 하느님 대답의 의도는 물론 그분의 속성을 알아내고자 하였다.
Freedmann은 3,14의 문장구조가 더 이상 잘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을 때 같은 말을 사용해서 설명하는 idem per idem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3,14는 탈출 34,6(“나는 야훼다, 야훼다”)처럼 원래 시문(詩文)이었는데 후대에 관계대명사 ’ašer을 집어넣어 산문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ehyeh의 hāyah동사를 사역형으로 간주하는 그는 따라서 3,14를 “나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창조한다”(I create what I create)로 번역한다. 즉 그분이 창조주 이심을 이런 식으로 강조하여 설명한다는 것이다. 김이곤은 idem per idem 형식을 받아들이며 ‘에흐예’를 사역형 미래시제로 해석하여 3,14ㄱ을 “나는 (구원이 필요한 자에게 구원을) 존재하도록 할 것이다.”로 번역하고 3,14와 병행 내지 보완될 만한 성서구절을 고난신학의 맥락 안에서 관찰하면서 ‘야훼’라는 신명을 고유명사적 이름으로서보다는 ‘창조자’(One who causes to be, creator: 긍휼을 베푸는 ‘라훔’의 신. 탈출 33,19 참조)와 ‘붙드는 분’(sustainer: 고난받는 자를 붙들어 세우는 ‘샤따이’의 신. 탈출 6,2-3 참조)의 이미지가 조화되고 종합된, 신의 본질과 기능을 밝히는 표현으로 이해한다. 동사형 선행사란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3,14의 원래 형식을 ‘ani-hu ašer ’ehyeh로 추정하는 Albrektson에게 반대하여 McCarthy는 3,14가 야훼yhwh라는 이름과 hyh와의 관계를 강조하려고 의도적으로 hāyah동사를 두 번씩 사용하였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성서저자는 문법적으로 정상적인 형태를 버리고 동사를 반복함으로써 그 비정상적인 형태와 반복이 주는 놀라움으로 본문의 요점을 선명하게 강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Childs도 3,14를 하느님의 이름을 hyh와 연결시켜 하는 말놀이(paronomasia)로 본다. 즉, 이름과 의미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고 보는 것이다. 3,14는 대답인 동시에 대답의 거절을 담은 ‘파라독스’다. 하느님께서는 한편으로 모세에게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며 다른 한편으로 그분의 계획에 따라 미래에 당신 자신을 점차 더 드러내시리라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Noth는 이런 종류의 반복법은 보다 더 자세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할 때 혹은 확실하게 파악된 무엇을 말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을 때 쓰는 용법으로서 ‘불확정성’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것은 순수 의미에서의 불확정성이 아니며, 3,14ㄱ은 “나는 무엇이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는 앞으로 더 밝혀지게 될 것이다” 또는 “내가 되고자 의도하는 그대로가 나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3,12; 4,12.15의 약속과 더불어 이 말은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행동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학자들이 현재시제 안에서 미래적 전망을 보고 있다. Abba 역시 hāyah동사가 지닌 역동성에 관심을 모으며 3,14의 반복적 구문이 약속을 강조해 확인하기 위하여 쓰였다고 본다. 3,14는 “내가 참으로 있겠노라”(I will indeed be present)는 뜻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특별한 개인적 관계,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계약관계를 표현하는 이름이다. 이 거룩한 계약의 이름 안에는 따라서 미완료형의 특성인 계속성이 내포되어 있고, 새로운 역사의 장(場)마다에서 야훼의 본질과 목적은 새롭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3,14가 이름이라기보다는 계시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동사형의 이름이 가능한 것일까? 학자들은 종종 호세 1,9에 대해 언급한다. 성서 안에서 탈출 3,14와 직접 연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구절이기 때문이다. 계약 양식과 이름이 합쳐진 구절인데, 그릇된 길을 간 이스라엘 백성을 빗대어 하느님께서는 호세아의 아들 이름을 ‘로-암미’(내 백성이 아님)라 짓게 하시고, 이어서 당신을 ‘로-에흐예’(라켐)’, 즉 ‘(너희를 위해) 있지 않는 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로-에흐예’를 ‘로-암미’와 병행하는 이름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출 3,14의 ‘에흐예’도 이름일 수 있고, 호세 1,9는 탈출 3,14의 내용을 부정하는 개념으로 쓰였다 할 수 있다.
정리: 탈출 3,14가 원래 시 형식이었다는 Freedman의 주장은 증명하기가 힘들다. 3,14의 구조는 idem per idem 형식을 이용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Childs나 McCathy가 말하는 대로, 히브리 어원론에서 자주 쓰는 말놀이 형식에 훨씬 더 가깝다. 이는 야곱(y’qb), 요셉(ysyp), 이스라엘(yśr’-el)이 각각 ‘qb, syp, śr’ 어근에 ‘요드’(y)를 앞에 붙여 만든 이름인 것처럼 hyh어근 앞에 ‘알레프’ 혹은 ‘요드’를 붙여 만든 이름(즉, ’+hyh=’hyh 혹은 y+hyh/hwh
=yhyh/yhwh)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미 호세 1,9와의 비교를 통해서도 가능성을 보았지만, 3,14ㄴ에서는 ’hyh를 확실히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유럽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에서도 관계대명사 앞에 가장 자연스럽게 오는 것은 명사나 대명사이므로 본문의 형식으로 볼 때 ’ehyeh ’ašer ’ehyeh의 첫 번째 ’ehyeh를 고유명사로 생각하는 것이 우선적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성문자에서 볼 수 있는 모음은 훨씬 후대에 마소라 학자들에 의해 붙여진 것이기에, yahweh나 ’ehyeh의 원래 발음이 어떠했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느님의 이름 ‘hyh의 원래 발음이 어떠했건 간에 그 이름의 ‘뜻’을 알아듣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는 선행사 ’ehyeh를 설명해 주는 종속절이고 이것이 바로 두 번째 ’ehyeh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문장구조의 독특성에 상관없이 두 번째 ’ehyeh의 뜻만 잘 해석하면 이름(첫 번째 ’ehyeh)에 관한 문제도 풀릴 수 있다고 본다. 두 번째 ’ehyeh, 곧 동사 ’ehyeh의 시제는 미완료(yiqtol)이고 이는 시간적으로 열린 동사이다. 따라서 존재냐 활동이냐 혹은 현재냐 미래냐를 섣불리 못박기보다는 hāyah동사의 성격과 시제에 대한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염두에 두면서 문맥 안에서 ’ehyeh의 의미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런 문장구조를 갖추게 된 이유도 문맥을 통해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Ⅲ. 이야기의 형식 안에서 보는 탈출기의 전체 구조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야기(story) 혹은 설화(narrative)가 지니고 있는 내적 질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20세기에 나타난 신비평주의(New Criticism)는 이러한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야기의 다양한 순간들’에 대한 고전적 모형을 따라 탈출기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겠다.
제기(提起, exposition): 1,1-2,25. 이야기의 주요 행위가 시작되기 전에 그 행위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배경적 정보를 제공하는 부분이다. 창세기와의 연결을 이루는 전이부(transition. 1,1-7)에 이어,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인들의 상황(1,8-22), 모세의 출생과 그가 처한 상황(2,1-22) 그리고 이러한 처지에서 하느님의 상황(2,23-25)이 묘사되어 있다.
발단(發端, inciting moment): 3,1-4,23. 이야기의 주요 행위가 처음으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해 처음으로 적극적 개입을 하시는 순간이라고 하겠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어 이제부터 실행하실 당신의 계획을 설명하시는데, 그 첫 담화인 3,7-10은 하느님의 기본 동기와 계획이 드러난다는 면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가. 3,7.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나. 3,8. 나 이제 내려가서(A)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B)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겠다.(C)
가1.3,9.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나1.3,10.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A1), 내 백성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라.(B1)
〈표 1〉
하느님의 계획(나나1)은 명확한 동기(가가1)가 그 출발점이 된다. 이 동기는 이미 2,23-25에서 미리 제시된 것이다. 하느님의 기본계획(master-plan)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그분께서는 이제껏 두었던 거리를 거두어 내려오시어(A),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인들에게서 해방시키시고(B), 그런 다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실 것이다(C). 그런데 이 계획은 즉시 변형된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A)가 “너를 보낼 터이니”(A1)로,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B)가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라”(B1)로 바뀐 것이다. AA1가 계획을 실현할 주인공들에 대한 것이라면 이집트에서의 해방(BB1)과 가나안 입주(C)는 그들이 실현해야할 두 개의 큰 목표이다. 전체 소명담 안에는 바로 이 계획에 준하여 출애굽 후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드릴 예배(3,12, D),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일으키실 온갖 이적들(3,19-20, E) 그리고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털게 될 것(3,21,F)등 다른 여러 계획들이 선포되고 있다.
전개(展開, complication)와 해결(解決, resolution): 4,24 이하. 전개부는 목표를 달성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다양한 시도들로 이루어진 과정을 담고 있으며, 해결부는 목표가 달성되거나 문제가 해결되는 부분을 말한다. 그런데 탈출기는 단번에 도달하는 온전한 해결부를 갖지 못한다. 발달부에서 제시된 하느님의 다양한 계획들이 여러 단계에 걸쳐 하나씩 실현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큰 이야기의 흐름 안에서 여러 번의 작은 해결부를 갖게 되는 것이다. 탈출 14장의 홍해탈출 부분은 첫 번째 큰 과제인 BB1가 해결되는 곳이고, 이에 준한 계획으로서 이적을 행하고(E) 이집트를 터는 일(F)은 그 전에 이미 이루어졌다. 그러나 광야생활의 시작과 함께 C의 약속실현을 향한 여정은 여전히 계속되어야 할 것이니, 탈출기의 이야기는 열린 상태로 끝나게 된다.
Ⅳ. 탈출기 3,14의 인접문맥을 통해서 보는 하느님 이름의 의미
1. 모세 소명담(3,1-4,23)의 구조와 특징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3,14는 출애굽 이야기의 발단부, 곧 모세의 소명담 안에 들어 있다. 이미 여러 학자들이 지적한 대로 모세의 소명담은《사명부여-이의제기-(말씀 혹은 징표로 주어지는)보증-사명수락》이라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소명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틀을 지니고 있다. 본문의 내용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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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부여 |
이의 제기 |
보증(말씀 혹은 징표) |
3,10 -12 |
10 가라.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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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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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되리라.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면, 너희는 이 산 위에서 하느님에게 예배를 드리리라.” |
3,13 -22 |
16 가서 이스라엘의 원로들을 모아놓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너희를 찾아와 너희가 에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 보았다. …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함께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말하여라… |
13 “제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 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 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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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나는 있는 나다” … “너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여라.” 15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불릴 나의 칭호(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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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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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야훼께서 당신에게 나타나셨을 리가 없소’하면 어찌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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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① 지팡이 → 뱀 → 지팡이 5 “이는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너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그들이 믿게 하려는 것이다.” 6-7 ② 건강한 손 → 나병 → 건강한 손 8 “그들이 너를 믿지 않고 첫 번째 징표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두 번째 징표가 말하는 것은 믿을 것이다. 9 그들이 이 두 징표도 믿지 않고 너의 말을 듣지 않거든, 나일강에서 물을 퍼다가 마른 땅에 부어라 그러면 ③ 물 → 마른 땅에서 피. |
4,10 -12 |
12 “그러니 이제 가거라. |
10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입도 무디고 혀도 무딥니다.” |
11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나 야훼가 아니냐?” 네가 말할 때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주리라.” |
4,13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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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주님, 죄송합니다.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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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화를 내며 말씀하셨다. “레위인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는냐?… 15 너는 그에게 일러주어, 그가 해야 할 말을 그 입에 담아주어라. 네가 말할 때나 그가 말할 때, 내가 너의 입과 그리고 그의 입과 함께 있으리라. 너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가르쳐주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17 그리고 이 지팡이를 손에 잡아라. 너는 그것으로 징표들을 일으키리라.” |
4,18 |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 작별을 고하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수락) | ||
4,19 -20 |
19 “이집트로 돌아가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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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 -23 |
21 “네가 이집트로 돌아가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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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세의 소명담은 겉으로는 유연성을 지니면서도 그 안을 잘 들여다 보면 도식적인 것이 발견된다.
모세의 5번에 걸친 이의 제기는 점진적으로 강렬해지는 하느님의 5번에 걸친 응답으로 기각되고 만다. 첫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대답은〈세 개의 ’ehyeh ’i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미래에 당신 친히 활동하실 것을 보장해 주신다. 그분은 모세와 ‘함께 계실’ 것이고(3,12) 그의 입과 ‘함께 계시어’ 할 말을 가르쳐주실 것이고(4,12) 아론의 입과도 ‘함께 계실’ 것이기에(4,15) 모세의 의구심이나 불안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세 번째 대답(4,2-9)은 무엇보다도 잇단 〈세 개의 징표〉로 주어진다. 이 징표들은 하느님께서 모세와 ‘함께 계심’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5번 응답 중 ‘4번’이 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실 것이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는 모세의 파견이 모세의 개인적 능력이나 자질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다가올 상황 안에서 함께 계시면서 당신 능력으로 일을 이루어 가질 당신에게서 비롯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세 개의 ’ehyeh〉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두 번째 대답(3,14-15)도 과연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2. 어원론에 관한 고찰
3,13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에 관한 모세의 질문은 윗 단락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3,11에서 모세는 무엇보다 먼저 ‘보냄을 받는 자신의 자격에 대해’ 하느님께 질문하였고, 이제 ‘그를 보내시는 하느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모세는 백성이 하느님의 이름을 물으리라고 생각했을까? 백성은 조상들의 하느님을 몰랐나? 잊어버렸나? 히브리인들에게 이름은 단순히 개체를 구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성격, 모양, 특징 등 한 개인의 특성을 일괄하는 것이다. 즉, 백성은 모세를 파견하시는 그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묻고 있다. 어떠한 뜻을 지니신 분인지, 과연 그들을 구해줄 만한 능력을 지닌 하느님이신지, 그분의 본질과 능력에 대해 묻는다고 볼 수 있다. 이 질문은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할 때 더욱 이해할 만하다. 이집트는 비할 데 없는 강대국으로서 온 세상 위에 군림하고 그들의 신전은 수많은 신들로 가득 찼으며 파라오는 육화한 태양신으로 숭배되었다.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그들 억압자와 감히 상대될 수 없는 한웅큼 노예의 무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백성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에 따라 모세의 파견을 인정하거나 불신할 것이다(4,1 참조). 14절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이다. 13-15절의 짧은 단락 안에 파견에 대한 구절이 3번이나 병행을 이루며 나타나는 것은(’ehyeh처럼 ‘보내다’라는 šālah 동사도 3번 반복된다) 하느님의 이름과 모세가 파견을 인정받는 것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ehyeh 혹은 ’ehyeh ’ašer ’ehyeh야말로 이 파견을 뒷받침해줄 것이다. 그렇다면 백성은 이 하느님 이름의 의미를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왜 백성이 잘 아는 듯한 이름인 ‘조상들의 하느님 야훼’로, 즉 15절로 단번에 대답해주지 않으시며, 또한 왜 굳이 특이한 형식의 문구를 통해 당신의 이름을 밝혀주시는가?
연이은 15절로 말미암아 다음과 같은 등식이 성립된다. 하느님=에흐예=조상들의 하느님=야훼. 이미 언급한대로 이름이 하느님의 특성을 내포하는 것이라면 ’ehyeh에는 일단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다 연결되어 있다. 그분은 과거에 조상들의 하느님이셨으며, 현재 모세를 보내어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시는 분이고, 앞으로 모세와 함께 계셔 그 계획을 실현해 나가시고 야훼라는 이름으로 그 백성에게 영원히 기억되실 분이시기 때문이다(15ㄴ). 이름이 지닌 미완료 동사형(yiqtol)의 성격 그대로 그분은 시간적으로 연결되며 개방된 상태에 계신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 ’ehyeh의 과거적 차원: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과거에 그분은 조상들의 삶에 개입해 어려울 때마다 그들을 돕고 인도하고 축복하셨으며 그들과 계약을 맺었던 분이시다. 곧, 그분은 ‘역동적인 방식으로 그들 삶에 함께 하셨고’, 그러한 내용을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ehyeh ‘im(즉 ‘내가 함께 하리라’)이라는 표현이었다(창세 26,3; 26,38; 28,15; 31,3) 그런데 그분은 지금 모세에게 같은 약속을 하고 계신다(3,12).
- ’ehyeh의 현재적 차원: 그러면 현재 하느님께서 그들의 후손에게 하고 계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분은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사정을 ‘보시고’ 그들의 고난을 ‘알고 계신다’(2,23-25; 3,7.9.16.17 참조). ‘알다’(yāda‘)란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현장에 함께 계시며 마치 하나가 되듯 그들의 사정을 체감하고 계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리고서 과거 그들 조상들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신다‘(zākar. 2,24). 주목할만한 점은 3,16-17의 설명이다. 확실히 2,23-25와 3,7-10과 관계되는 말씀인데 특수한 단어가 첨가되어 있다. ‘찾아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pāqad(3,16; 4,31)는 하느님께서 구원 혹은 심판을 위해 어떤 특정한 때에 강력히 그 활동을 드러내시는 것을 의미한다. 룻기 1장 6절에서처럼 이곳에서도 이 단어는 구원하기 위한 방문에 속하는데, 실상 ‘기억하다’가 이미 이 방문을 내다보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다’라는 뜻은 잊었던 것을 불현듯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시리라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찾아오다’(pāqad)는 ‘기억하다’(zākar)가 본격적으로 행동화되는 단계라 할 수 있겠고 그렇다면 현재 모세의 파견과 함께 ‘하느님의 찾아오심’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제 모세가 소명을 수행함과 동시에 이 방문은 구체화될 것이다. 쉽게 말하여, 하느님의 ‘기억하심’과 ‘보고 듣고 아심’이 과거와 현재를 잇고 미래를 향해 하느님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3,7-10에 나타나는 동기와 계획의 이중병행절(표1참조)은 바로 이를 드러내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 ’ehyeh의 미래적 차원: 이름을 알려주신 후 계속되는 담화인 3,16-22는 ’ehyeh가 지닌 미래적 차원을 잘 나타내 준다. 이 단락은 하느님께서 원래 청사진(3,7-10)을 확장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제사에 대한 허락문제(3,18)에 이어 에흐예/야훼 하느님께서는 처음으로 당신의 앎(全知)과 능력(全能)에 대한 암시를 주신다. 이스라엘의 청은 파라오에게 거절당할 것이고 그 때문에 야훼께서는 그들을 강한 손으로 치시리라는 것이다. 온갖 ‘이적들’(miple’otay)은 야훼의 강한 활동과 현존을 드러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마침내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적극적으로 내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고(‘보내다’라는 동사가 강조형[piel]으로 쓰였다. 12,23 참조), 이스라엘인들을 이집트인들을 턺으로써 전쟁의 승리자가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있을 모든 재앙들과 출애굽 사건을 사전 요약한 것(proleptic summary)으로서 하느님께서 ‘어떤 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실지’ 예시하는 말씀이다.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ehyeh/yhwh라는 이름이 나타내는 하느님이란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걸쳐 변함없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며) 자신의 현존을 활동으로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에게 hāyah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하는 순수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었고 또한 동사의 미완료형(yiqtol)은 지속적인 상태나 계속적인 반복을 표시하는 열린 시제였으니, 우리는 여기서 ’ehyeh가 문법적으로 보여주는 상태가 하느님의 이름인 ‘에흐예’(혹은 ‘야훼’)가 문맥을 통해 보여주는 뜻과 온전히 일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ehyeh라는 이름은 현재 마소라본에 씌어진 그대로 이해될 수 있으며 ’ehyeh ’ašer ’ehyeh는 하느님 이름의 뜻을 확인하는 설명, 즉 말 그대로 어원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나는 (모든 시공 안에 참으로 살아 활동하며) 있는 현존자다” 혹은 ’ašer을 ki와 같은 의미로 볼 때 “나는 (모든 시공 안에 역동적으로) 현존하기에, 현존자다”라는 뜻을 지닌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계속하여 역동적인 모습으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가리키기에는 아마도 이런 동사형 이름이 가장 적합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본다면 3,14의 대답은 거절도, 회피도, 단순한 강조도, 불확정성을 나타내는 무엇도 혹은 영원한 신비도 아니다. 그분은 모세의 질문에 아주 정확하게 답변하고 계신다.
그런데 3,1-4,23의 이야기 흐름으로 볼 때 3,14는 ’ehyeh의 ‘미래적 차원’을 보다 강조하고 있는 듯 하다. ’ehyeh이신 그분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러하시지만 특별히 당신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활동 안에서 그분의 특성을 드러내실 것이다. 이것이 모세를 통해 백성에게 전달하는 내용의 초점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ehyeh는 다른 4개의 약속 혹은 보증(3,12; 4,2-9.12.15)과 같은 맥락 안에 놓이게 된다. 즉,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5번 이의에 대해 다 같은 식(‘함께 계셔 활동해주실 하느님’)으로 대답하시며 미래에 대한 영원한 보증을 해주신 셈이 되는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보내신 분이 이런 분임을 믿고 받아들이면 그들은 모세의 파견 또한 인정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에흐예/야훼’라는 이름은 모세 소명담의 중추가 되며, 앞으로 벌어질 역사(歷史) 안에서 하느님의 숨은 신비를 열어보일 열쇠가 될 것이다. 또 만일 그렇게 될 경우에는 우리가 위에서 도출해낸 야훼 이름의 의미가 그 정당성을 얻게 되기도 할 것이다.
Ⅴ. 홍해탈출까지 모세의 소명수행 안에 드러나는 야훼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선포하시는 출애굽에 대한 계획들(A, B, E, F...)은 모두 그대로 이루어진다. 일어나는 사실들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확인하는 것들 외에도 성서저자는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였다”(7,13.22; 8,11.15; 9,12.35)라는 표현을 통해 그 점을 확실하게 짚어준다. 야훼께서는 재앙이 일어날 시간을 알려주시기도 하고(9,5.18), 재앙을 거두어주기를 청하는 파라오에게 원하는 시간을 물어보아 그 시간에 재앙이 물러가게도 하신다(8,5). 이는 재앙의 오고감이 우연이 아니라 확실히 야훼 하느님의 활동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과 이집트 백성 사이에 구분을 두고 재앙을 내리는 것(9,26)도 마찬가지다. 이리하여 야훼께서는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이 ‘야훼께서 그 땅에 계심을 알게 하려고(8,18)’ 하신다. 이는 결국 도무지 당신의 영역이 아닌 듯한 그 이집트 땅에서조차도 야훼께서는 당신의 활동으로써 현존을 드러내실 수 있는 하느님이심을 확인시킨다는 뜻이다. ‘알게 하려고’는 중요한 핵심단어로서 재앙사화 전체를 꿰뚫고 있다. 모세를 만나 야훼의 첫 전갈을 받는 파라오가 “그 야훼가 누구이길래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라는 거냐? 나는 그 야훼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이스라엘을 내보내지도 않겠다”(5,2)라고 한데 대한 답이 바로 재앙을 통해 주어진다.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이 ‘야훼가 누구인지 알게 하려고’(7,17; 8,6; 14,4), ‘온 세상에 야훼와 같은 신이 없음을 알게 하려고(9,14)’, ‘이 세상이 야훼께 속함을 알게 하려고’(9,29) 그리고 ‘야훼께서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을 구분하셨음을 알게 하려고’(11,7) 재앙이 주어지는 것이다. 재앙은 땅과 인간과 그리고 자연, 즉 온 우주적 차원에서 일어나며 마침내 갈대바다에서는 물과 물을 가름으로써 창조 때의 일이 재현된다.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을 이 지점에서 드디어 야훼께서 ‘내려오시어’(3,8 참조) 이스라엘을 ‘실제로’ 돕고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4,25). 곧, 재앙사화와 갈대바다 사건을 통틀어 이집트인들이 알아야만 했던 것은 야훼라는 신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신, 그러나 전지전능하며, 시간과 공간을 맘껏 주무르시고, 우주의 전권을 쥐고 계시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당신 백성을 빼내시는 신, 따라서 세상의 참신은 태양신의 현현으로 인정받는 파라오가 아니라 야훼 바로 그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지를 가능케한 것은 야훼, 즉 이름의 뜻 그대로, 참으로 세상 가운데 ‘현존하며 활동하시는’ 그분의 속성 때문이었다.
한편 야훼께서 이집트에 재앙을 내리신 데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대대로 ‘야훼께서 누구신지 알게 하려는’(10,2) 의도도 있었다. 마치 하느님이 아니 계신 듯한 그들의 가장 처참한 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백성 못지않게 야훼가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다. 이집트에 내린 재앙들은 물론 그들을 인도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움직임을 통해 드러나는 그분 현존의 증거였고, 그분 보호의 힘이었고, 갈대바다의 갈라짐과 이집트인들의 떼죽음은 야훼께서 어떤 하느님이신지 확실히 알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것은 그들을 야훼께 대한 신앙과 경배로 그리고 모세에 대한 신뢰로 이끌었다(14,31). 야훼라는 신은 모세와 ‘함께 계시며’(3,12) 모세의 말 그대로 ‘그들을 위하여 싸워주시고 그들을 위하여 구원을 행하시는 분’(14,13-14)이셨던 것이다.
종합하여, ’ehyeh는 지금 현재 마소라 성서본이 보여주는 모양 그대로, 동사형 이름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느님은 고정된 어떤 존재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현존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위의 관찰에 따르면, 탈출 3,14의 어원론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전하는 출애굽의 이야기 전체에서 그 뜻 그대로 드러나고 있고, 또 한편 이야기의 큰 맥락은 이 어원론을 통하여 훨씬 밝게 조명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어원론은 성서의 다른 부분들조차 조명할 수 있는 것일까?
Ⅵ. 탈출기 15장-신명기 34장에 나타나는 야훼 하느님의 특성
‘설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탈출 1-14장에 나타난 주제(motif)들은 홍해탈출 이후 약속의 땅 입구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혹은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새로운 주제들을 유출해 내기도 한다.
야훼께서는 이집트에서 우레와 우박, 번갯불과 바람(탈출 9,23-24; 10,13) 등으로 드러내시던 당신의 우주적 권능을 시나이산과 광야에서도 계속 드러내신다(탈출 19,16; 20,18; 민수 11,31). 광야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로 백성에게 당신의 현존을 알리시고, 특히 성막을 통해 당신께서 ‘함께 계심’을 더욱 선명히 드러내신다. 한편 이집트인들이 겪던 재앙에서 면제되는 것으로 그 땅에서 자신들에 대한 하느님의 호의를 체험하던 이스라엘인들은, 광야에서는 물과 만나와 고기 등을 공급받으며 그분의 보다 적극적인 돌보심을 체험하게 된다.
이집트에 내린 재앙의 가장 직접적 원인을 성서는 파라오가 힘없는 이들에게 가한 억압과 야훼 하느님을 계속 거부한데서 찾으며 그 깊은 뿌리가 파라오의 ‘완고한 마음’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길로 들어서면서부터 그들은 새로운 시련을 만나게 되고 이때마다 끝없이 불평하며 야훼 하느님께 불신을 드러내거나 의구심을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때로 그 불평을 해결해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분노하시어 전염병으로, 지진으로, 불로, 뱀으로, 또 때로는 무언지 모를 재앙으로 죄인들을 벌하신다. 그들이 이런 재앙을 입게 되는 원인은 무엇인가? 성서는 다시금 ‘완고한 마음’(혹은 ‘뻣뻣한 목덜미’)을 그 이유로 내세운다. 일축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런 사건들을 통해 그들이 완고한 마음을 깨고 당신을 알아 믿음과 순종으로 향할 수 있도록 그들을 교육시키고 정화시키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야훼께 신뢰하고 순종할 때에 그분께서는, 마치 파라오와 그 군대를 쳐부수던 것처럼, 손수 당신 백성의 원수들을 쳐부수어 승리를 주시고(탈출 17,8-16), 불순종할 때는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아” 패하게 버려두심으로써 마침내 당신이 누구신지 알게 하신다(민수 14,39-45).
그러므로 이집트에서의 탈출 후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모두 야훼가 누구신지를 증명해주는 것들이다. 야훼는 언제나 변함없이, 이름의 뜻 그대로, (그들을 위해, 그들 가운데) ‘역동적으로 현존하는 분’이시다. 인간은 육안을 통해서보다는 ‘사건을 체험함으로써’ 그분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채 그분의 능력을 의심하거나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라며 그분의 존재에 의혹을 품는 것(탈출 17,7) 그리고 금송아지를 통해 그분의 무한성을 인간의 한계 안에 집어넣으려 한 것(탈출 32) 등은 그런 야훼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하느님께 대한 반역이 되었다. 이는 곧 “그 야훼가 누구냐?”(탈출 5,2)고 하던 파라오의 질문과 그 내막에 있어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야에서도 시나이산에서도 야훼의 본질은 변함없이 드러나고, 인간이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야훼를 참 하느님으로 알고 섬겨야만 한다는 주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출애굽 이후 새로운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계약이다. 탈출 3,12에서 백성들이 시나이산에서 드릴 예배가 미리 암시되고 있긴 하지만, 또 ‘너희 하느님’, ‘히브리인의 하느님’, ‘나의 백성’이란 명칭들이 미리 나오기도 했지만, 시나이산에서의 계약이야말로 그 모든 것들을 ‘실제화’시킨 사건이 되었다. 야훼께서는 이제부터 그들 조상들과 맺은 계약 때문에만 그들을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맺은 계약 때문에 그들과 그 후손을 돌보시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계약으로 말미암아 ‘야훼’라는 이름은 그 안에 이스라엘 백성과의 ‘특별한 관계’까지 내포하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이 되시고, 그들은 야훼의 ‘소중한 보물’, ‘선택된 백성’, 세상을 대상으로 ‘사제의 직분을 갖는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탈출 19,5-6). 새롭게 맺어진 이 관계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이라는 집단체험을 거침으로써 야훼 하느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집단적 비전을 갖게 된 결과이며(탈출 19,4), 이에 따라 야훼신앙은 이제부터 ‘선조들의 하느님’이라는 차원을 넘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는 민족(국가)종교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백성은 계약의 조건인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그 계약을 유효하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내 계명을 어겼고 계약은 파기될 수밖에 없었다(탈출 32). 모세의 필사적인 중재로 말미암아 재계약이 가능해졌을 때, 야훼께서는 다시금 이 백성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신다. 그분이 죄지은 이들에게 분노하시어 벌을 주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동정과 자비, 너그러움과 자애와 진실을 지니신 분으로서 내리시는 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탈출 33,19; 34,6-7). 이러한 자기계시가 ‘계약’, 특별히 깨어진 계약이 복구되는 때 나타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일찍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후손들을 보고 듣고 그들의 고통을 체감하시어 움직이실 수밖에 없었던(탈출 3,7-10), 그리고 그들에게 ‘너’와 ‘나’로 이야기하시고자 했던(탈출 3,14) 분의 ‘성품’이 여기서 훨씬 더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해 전지와 전능을 지니고 현존하며 활동하시는 것’이 야훼의 본질이라면 ‘선과 용서와 자비’는 그분의 본성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이들은 하느님 존재(hyh)의 양 측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출애굽과 시나이 계약 이후 ‘야훼/에흐예’라는 이름은 ‘활동과 관계의 차원을 지닌 현존’의 개념을 보다 강력히 시사하게 되었다.
Ⅶ. 오경 밖의 구약성서에서 보는 야훼 하느님의 특성
가나안 땅 입주 때 그리고 입주 후 판관들의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 특히 판관들을 부르시며 주는 약속(’ehyeh ‘im, 판관 6,12.13.16)이나 성전(聖戰)의 맥락에서 볼 때 탈출기에 계시된 ‘야훼’의 속성은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이것은 왕정 수립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엘리야 예언자가 갈멜산에서 바알신의 사제들과 대결하는 장면은 모세와 파라오가 대결하던 장면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이제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제가 한 모든 일이 당신의 말씀을 좇아 한 것임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 응답해 주십시오. 야훼여, 저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백성으로 하여금 야훼께서 하느님이심을 깨닫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신 분이 당신이심을 알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야훼의 불길이 내려 와 제물과 함께 나무와 돌과 흙을 모두 태웠고 도랑에 괴어 있던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말려버렸다. 백성이 이 광경을 보고 땅에 엎드려서 부르짖었다. ‘야훼께서 하느님이십니다. 야훼께서 하느님이십니다.’”(1열왕 18,36-37) 반면에, 호세아서는 계약의 하느님 야훼를 강하게 부각시킨다. 계약에 불충실한 백성을 두고 야훼께서는 더 이상 ‘그들을 위해’ 현존치 않겠다고 하시며(1,9. 탈출 3,14 참조) 그들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파기할 것을 선언하시고 벌을 내리리라 위협하신다. 하지만 그분의 신실성과 사랑은 회개하는 이스라엘을 기다리며 용서를 준비하고 계신다(14,2-9). 사실 해방과 용서, 끝없는 보호와 인도를 통해 이루어진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역사 자체’가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 야훼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2,10; 13,4.9 참조).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이러한 야훼 하느님을 즐겨 대립명제를 통해 설명한다. 야훼는 듣고 보고 아시고, 그 이름을 부르면 “나 여기 있다”고 대답하시는 하느님인 반면, 다른 신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하는 허무한 우상이라는 것이다(이사 44,9-20; 52,6; 시편 115,4-7; 135,15-18). 야훼는 역사 안에서 활동하심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었지만 아무 신도 그런 일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에제키엘과 예레미아 예언서는 그의 백성을 심판 혹은 구원하기 위해 계속 방문하시는 야훼를, 이사야서는 온 세상을 대상으로 드러내시는 야훼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묘사한다.
결국 마카베오서에 이르기까지 전체 구약성서가 증언하는 하느님은 탈출기를 통해 드러난 바로 그 야훼이시다. 탈출기(혹은 전체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당신 백성의 현실을 듣고 보고 아심, 계약을 기억하심 → (심판 혹은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심(yārad)/찾아오심(pāqad)’ → 이적들을 행하고 해방시키심/용서하심 또는 벌하심(=야훼가 누구신지를 알려줌) → ‘특별한 관계’의 정립(계약과 계명[法]*) → 믿음/찬미(=야훼의 이름을 ‘기억함’ 혹은 야훼께 부르짖음) → 듣고 보고 아시며 그들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해 새로이 찾아오심 → …》(*는 늘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곧 구원역사의 순환과정이고 이 온 과정을 감싸고 있는 것이 바로 야훼라는 이름이라 하겠다. ‘쉼없이 역동적으로 현존하시며 자비와 정의로 충만하신’ 그 속성(이름)이 이 순환과정에 끝없는 활력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 안에서 야훼는 더욱더 참 하느님으로 알려지고 이스라엘과 온 세상은 구원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이 과정은 신약시대까지도 지속되는 것일까?
Ⅷ. 신약성서적 조명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처음으로 공적으로 알리시는 때(탈출기의 발단부!)에 당신 이름의 뜻을, 즉 당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하신 것은 실로 의의가 크다. 사실 구약성서에 증언된 하느님 상은 바로 여기서 시작하여 출애굽의 구원체험을 통해 결정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들에게 ‘야훼, 현존하시는 하느님’이란 출애굽 사건 그리고 광야시절 이동성막의 개념에서 드러나는 그대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참여해 그들과 함께 계시며(임마누엘), 그들의 구원을 위해 역사(役事)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로몬이 성전을 건립한 이후 하느님의 이러한 역동성이 사람들의 개념에서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하였고 유배시절을 거치며 유다인들은 ‘성전’(聖殿)과 ‘법’(法)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종교는 예식중심, 법률중심으로 변화되어 갔다. 예를 들어, 야훼 하느님의 해방역사를 근간으로 인간은 물론 자연까지도 해방시키려던 안식일(과 희년)에 관한 초창기의 법정신은 제2성전 시대에 이르자 인간을 옭아매는 멍에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감히 자신들의 하느님 이름을 부르지조차 못해 야훼(הוהי) 그 사성문자를 ‘아도나이’(주님)로 바꾸어 발음하였다. 야훼 하느님은 예식 가운데서 드높임을 받으시는 분이 되었고 백성의 삶에서는 멀리 계신 듯 하였다.
이때 나자렛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함께 하며 활동하시는 하느님’ 즉 하느님의 현존(’ehyeh [‘im])을 새롭게 알리고 선포하였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며, 아니, 사실 그 나라는 이미 사람들 가운데 와 있고 하느님의 손가락이 그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고. 그런데 이러한 선포내용은 특별히 예수 그분의 존재와 활동을 통해 표현되었다. 천사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고 ‘예수’(=구원자)였다. 그분은 사람들의 사정을 ‘듣고’, 정황을 ‘눈여겨보시고’ 그들의 고통을 ‘알아주셨다’(yāda‘). 요한 복음 사가는 이를 하느님의 ‘내려오심’(3,31; 6,38; 탈출 3,8 참조) 또는 ‘육화’(1,14)로 표현하는 반면, 공관복음은 하느님의 ‘찾아오심’(루가 7,16; 탈출 3,16; 4,31 참조)이라고 한다. 이 예수는 당신 양들(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까지 싸워주시는 분으로서(요한 10,11) 치유와 구마 등의 이적 혹은 징표를 통해, 그리고 용서의 선포를 통해 고통받는 자들을 ‘해방’시키셨다. 나아가 그분은 당신의 피로 새 계약을 맺으시고 ‘새 계명’을 선포하셨으니 이로써, 그를 믿는 이들은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과 인간은 다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일치될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나다”(έγώ είμι, 히브리어로는 ’ehyeh)라고 하실 때 사람들은 그분이 지닌 우주적 권능을 보는가 하면(마르 6,50-51), 올리브 동산에서는 모두 다 뒤로 넘어졌다(요한 18,6). 그분이 지닌 신적 권위 때문이었다. 그분은 이 땅 가운데서 ‘하느님의 역동적 현존’을 온전히 드러내셨고, 세상 끝날까지 그렇게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셨다(마태 28,20).
그 약속의 성취는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졌다. 성령께서 ‘내려오심’(yārad. 탈출 3,8 참조)으로 하느님은 다시 한번 더욱 깊은 ‘방문’(pāqad. 탈출 3,16; 4,31 참조)을 하셨다. 하느님은 이제 인간 안에 내재하시는, 가장 완벽한 ‘함께 계심’(임마누엘)을 이루신 것이다. 그 성령은 인간의 가장 깊은 속사정을 알아주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며, 그들을 가르치실 것이고, 사람들은 그분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친밀히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립 4,13)라고 말한다. 과연 하느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 이들은 많은 이적을 베풀어 이 세상에 하느님의 역동적인 현존을 증거하게 되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우리는 아래와 같이 구약성서의 구원사에 나타났던 주요 주제들과 그 흐름을 신약성서에서 거듭 만나게 된다.《듣고․보고․아시고, 계약을 기억하시는 하느님 → 내려오심/찾아오심 → 이적을 행하고 용서를 선포하며 가르치심(=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줌)→특별한 관계의 정립(새 계약과 새 계명)→믿음/찬미(=그분을 기억함,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함) → 기도를 들으시고 새로이 찾아오시는 하느님…》이라는 같은 순환고리가 다시금 그대로 발견되는 것이다.
결국 구약에서 ‘야훼’라는 이름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자기계시는 신약시대에 이르러 그 깊이를 더했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강생 그리고 성령의 강림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특성이 ‘현존․활동․관계’로서 표현되던 참 하느님 ‘에흐예/야훼’를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완전한 형태로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Ⅸ. 나가는 말
이제까지의 고찰로써 우리는 탈출 3,14의 ’ehyeh ’ašer ’ehyeh가 보여주는 문장 구조의 특이성은 ‘야훼’라는 이름이 지닌 독특하고 깊은 뜻에서 비롯하며, 이 어원론은 본문에 삽입되었다기보다 오히려 모세의 소명담의 조직적 짜임새 안에서 핵심적 구절이 되어 탈출기 전체를 조명하는 역할을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흐름을 통해서 보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이름은 과연 어떤 의미를 전해주는가? 비록 짧았지만 탈출기 3,14에 대한 미시적, 거시적 차원의 독해는 하느님의 구원사란 결국 ‘야훼라는 이름이 지닌 역동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구원사’임을 드러내 보였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신앙의 ‘내적 통일성’을 그분 ‘야훼의 본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침멀리의 주장은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이름의 역동성은 늘 새로운 상황 안에 새로운 형태로 임재하시는 하느님을 의미하므로, 하느님의 이름을 안다함은 몇몇 학자들이 이야기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거나 그분의 힘을 일부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계속적으로 그분을 깨달아가는 것, 계속해 새로운 역사 안으로, 야훼 그 동사형 이름의 신비 안으로 점점 깊이 여행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여행은 구약에서 신약, 어제에서 오늘 그리고 열려진 미래 안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이야기 안에 담겨있는 계시를 이야기의 역동성 안에서 이해하면, 그 결과 계시가 지닌 역동성까지도 함께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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