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바라기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

깜장보석 2012. 9. 25. 14:52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

 

 

D. 스탠리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목격한 사람들’(루가 1,2)이 누릴 특권으로, 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한 데서 나온 기쁜 소식으로 특징지어진다. 최초의 사도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투신으로 응답했던 이 체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히 새로운 지식, 즉 그분의 지상 생애의 의미와 특히 그분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 완전히 새롭게 알게 된 결과를 가져왔다. 새로이 발견된 믿음을 해석하고 분명히 하기 위해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여 모인 사도들의 집단은 이스라엘의 성스러운 문학인 성경에 의지하여 선택된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구원행위를 드러내고 있는 특정한 이미지와 테마들을 찾아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설교의 개요는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과거가 보여주는 온갖 사적인 모습들과 이스라엘이 경험하고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주요사건들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즉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교 복음사가들이 예수의 구속사업의 의미를 말하기 위해 이용한 것들이다. 그분은 옛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신적 약속에 대한 응답으로 묘사된다(사도 3,25-26). 그분이 하느님 오른편에 오르심은 일찍이 예언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내린 예언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그것은 그의 왕통에서 난 한 자손이 영원히 그 왕좌를 상속하리라고 한 그 예언의 성취로 분명하게 선언된다.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는 산헤드린 앞에서 행한 설교에서 구약성서의 역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 해석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의 예표에 도움이 되는 일련의 유명한 유다인들을 끌어들인다. 그들 중에는 아브라함 외에도 요셉과 모세, 특히 예언자들이 있다(사도 7,2-8.9-16.17-40.52).

사도시대 그리스도론의 가장 두드러진 주제들 중 하나는 제2 이사야가 통열(痛烈)하고도 신비스럽게 노래했던, 수난받고 영광스럽게 되는 하느님의 종에 관한 것이다. 예루살렘 공동체의 케리그마(kerygma)는 이 주제를 선조들의 하느님에 의해(사도 3,13) 자신의 부활과 승천으로(사도 3,26) 영광스럽게 된 종(이사 52,13)인 예수에게 가장 먼저 적용시켰다. 예수는 헤로데와 빌라도가 유다인과 로마인들의 협력을 얻어 사형시키고자 공모하고 획책했던 종으로 여겨졌다(사도 4,27-28). 영감에 따라 집필했던 초기의 복음사가들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예언을 이사야의 고난받는 종의 관점으로 표현했다(마르 8,31; 9,31; 10,33-34 참조).

 

 

. 바오로와 창조의 주제들

 

우리가 바오로의 문헌들을 접할 때면, 그는 예수의 공생활 동안 예수와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열두 사도들의 체험과는 분명히 달리,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체험했음을 알게 되는데,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비에 대한 바오로의 접근방식이 독특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일어난 그의 개종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드러내시며 높임을 받으신 주님과의 대면으로 이루어졌다(갈라 1,16). 그가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사도 9,5)라고 경악에 찬 질문을 했을 때 그에게 주어진 응답은 천상적이고 신적인 그분이 바로 그 변변치 않고 멸시받던 랍비인 나자렛 예수라는 사실을 확인받은 것이었다. 이 엄청난 사건에 대한 바오로의 회상에서 우리는 그것이 온전히 전례(前例)없는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어서 그가 하느님의 빛의 창조(창세 1,3)에 비견되는 사건으로 그것을 묘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어두움으로부터 빛을 비추라고 말씀하시는 그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신적 영광을 드러내는 지식을 전하도록 빛으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비추게 만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2고린 4,6).

실로 바오로는 창세기의 첫 부분을 자신이 개인적으로 체험한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통찰로 구체화시킨 최초의 그리스도인 신학자로 보인다. 복음에서 보도되는 우리 주님 자신의 가르침은 이러한 상징과 주제의 사용에 대한 선례가 거의 되지 못하고 있다. 예수의 이혼에 대한 명료한 금지(마르 10,6-7; 마태 19,4-5)는 창세기의 도입부분을 인용한 유일한 예이다. 구약의 예언서는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구원의 희망을 진술함에 있어서 창조를 극히 예외적으로만 언급한다. 하느님 백성의 궁극적인 회심은 하느님의 창조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예레 31,22). 2 이사야는 바빌론 유배로부터의 귀향에 대한 희망을 새로운 창조로 묘사했다(이사 65,17; 66,22-23). 아담의 표상이 지혜문학의 몇몇 부분들에 의해 신학적 가르침들의 매개로 사용된 것은 후기 유다이즘에서뿐이다(집회 17,1; 49,16; 지혜 2,23-24; 9,2-3; 10,1).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이방인들에게 행한 바오로의 설교 내용들 안에서 이러한 창조의 테마들을 대단히 독창적으로 선호하고 있음을 부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힌트를 얻게 된다. 바오로가 유다인 청중들에게만 연설할 때는 이스라엘 역사를 개관하는 것으로 복음을 자기 식으로 소개하고자 했다(사도 13,16-25). 하지만 이방인들에게 연설할 때는, 그는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교리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오로는 리스트라(Lystra)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 그리고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드신 모든 창조의 유일한 근원이심을 주장한다. 그분 홀로 당신 자신의 계획에 부합시켜 인류역사를 지시하는 분으로서, 인류에 대한 사랑의 섭리로 사계절의 순환을 주제하신다(사도 14,15-17). 아테네에서 바오로는 야훼께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 “모든 이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바로 그분이며, “한 사람에게서 인류의 모든 민족을 만드신 분이라는 진리를 되풀이한다(사도 17,24-26). 여기서 마지막 인용문은 아마도 공통의 조상으로서 인류 종족들에게 근본적인 일치를 부여하는 아담에 대한 환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에 대한 바오로의 독창적인 표현으로 주목되는 것은 그가 집필활동 중반기에 쓴 고린토 전서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여러 가지 사목적 문제점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심할 나위없이 고린토 교회의 일부 구성원들이 모든 사람의 종말론적 부활이라는 결정적인 교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린토인들이 보인 이러한 의심은 참으로 모순되게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정통신앙과 부합된 것으로 보여졌다. 이에 바오로는 즉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을 부정함은 동등하게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한 중심사건들 중 하나를 부정하는 것임을 지적했다(1고린 15,3-4). 이렇게 주저하고 있는 고린토인 개종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우리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회적 특성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예수는 단절된 개인으로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분은 당신 죽음 안에 인류를 포함시켰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은 당신의 죽음 안에 우리가 연루될 가능성을 만들어내었다. 바오로가 후에 고린토 후서에서 썼듯이, “한 사람이 모든 이를 위해서 죽었고, 그래서 모든 이가 죽었던것이다(2고린 5,14).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들이 개인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고린토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의혹들을 반박하기 위해 바오로는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셨으니, 잠든 이들의 맏물이십니다”(1고린 15,20)라고 선언한다. 그가 보증서로 제시한 것은 모세법에 규정된 맏물의 고대 전례적 봉헌에 있다(레위 23,10-14). 이 행위는 땅과 그 소출에 대한 하느님의 배타적 소유권이 선포된 이래 이스라엘에게는 엄숙한 의무가 되었다. 동시에 이 맏물의 봉헌은 실제로 모든 수확을 야훼께 바침을 말한다. 바오로는 이 중대한 의식이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일으켜지신 바로 그날에 성전에서 수행되어졌음을 깨달았다. 부활하신 주님은 단지 그분이 의인의 보편적 부활을 개시하셨기 때문만이 아니라, 영광을 받으신 그분의 인성이 어느 날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희망의 목적을 또한 우리 안에서 효과적으로 실현하실 것이기 때문에 잠든 이들의 맏물이라고 마땅히 불리우는 것이다.

이 단계의 논쟁에서 바오로는 처음으로 그의 서한에서 아담을 소개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으니) 역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이가 죽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21-22).

바오로가 여기서 인류의 죄스런 조상 아담과 우리의 범행들 때문에 넘겨지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하여 부활하신”(로마 4,25)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제시한 그 대조의 범위를 평가하기 위해, 우리는 죽음에 대한 성서적 개념의 포괄적 내지 전체적인 특징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처럼 바오로가 죄라는 맥락에서 죽음을 이야기할 때, 그 용어는 단지 물리적인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영적 죽음(중대한 죄)이나 종말론적 죽음(영벌)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내보려 했던 것을 포함한다. 구약성서 작가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온전한 실상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살아계신 하느님으로부터의 완전한 그리고 궁극적인 분리를 의미했다. 실로 그러한 것은, 바오로가 그 후에 쓴 편지에서 선언하게 되듯이(로마 5,12 이하), 모든 인류 가족에게 미치는 아담의 죄로 인한 파괴적인 결과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의 목적은 아담에 의해 인류에 미친 비참한 결과를 원상태로 돌리는 것이었다. 모든 이가 당신의 영광스러운 부활로 당신과 일치될 수 있도록 모든 이들에게 수여하고자 하신 생명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생명이다. 그것은 실로 영원한 생명이고, 그것의 통교는 그리스도인에게 그 육체적인 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때가 되었을 때, 예수의 구속적인 부활의 효력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확신을 주장하기 위해 바오로는 여전히 영혼의 불멸에 대한 그리스 철학적 논쟁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으로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바오로는 이 진리를 전개하기 위해 같은 장의 조금 뒤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다시 대조하여 제시한다. 따라서 성서는 또한 첫 사람 아담은 자연적 생명체가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1고린 15,45)라고 진술한다. 바오로는 땅에서 온 아담의 기원을 상기하고 고린토인들에게 아담의 기원이 그의 모든 자손들에게 흔적을 남겨놓았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두 번째 창조기사(창세 2,7)를 인용한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흙으로 빚어졌지만흙으로부터 난 그들은 흙으로 빚어진 사람과 같은 본성이다”(1고린 15,47-49 참조). 그리고 바오로는 이야기를 마지막 논점으로 이끌어간다. “형제 여러분, 나는 이것을 밝혀 둡니다. 곧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1고린 15,50). 우리 모두가 아담으로부터 받은 인간본성은 하느님과의 친교가 요구하는 신적 생명을 얻을 능력이 없다. 인간본성은 어떻게 해서든 그 죄성(sinfulness)에 못지 않은 지상적 한계를 초월할 수 있도록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분은 그분 자신의 부활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운명 지워진 결정적인 신분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분 안에서 당신 자신의 구속사업의 모든 결과가 항구히 실현되는 마지막 아담’ - 종말론적 인간이신 것이다. 바오로는 땅에서 창조될 때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는아담과 대조해서 영광을 받으신 주님을 생명을 주는 영이라고 명명한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하면서 바오로는 그분 인성의 이러한 변환이 그분의 인성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뜻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를 생명을 주는 영이라고 부름으로써 바오로는 부활하신 상태의 주님께서, 그분이 우리 안에서 행하신 일들이 이제부터 그분 자신과 동일시되게 하는 영적 근원이라고 주장한다(2고린 3,17-18). ‘주님이 영이시라는 데 대한 매우 실제적인 인식이 있다. 니케아 신경에서 교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주님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바오로다운 별칭을 성령께 적용할 때, 교회는 이 동일한 진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생명을 주는 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기능은 바오로에 의해 그가 창세기 창조의 첫 기사로부터 취한 또 다른 착안에 힘입어 우리가 숙고해 온 인용에서 규정된다. 즉 하느님의 모습과 모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형상이 그것이다. “우리가 흙으로 빚어진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장차는 천상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1고린 15,49). 하느님의 창조적인 영의 일을 하신다고 여겨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을 통해 인간의 영광이 가진 궁극적 상태가 인간의 육적인 면에까지 실현될 의인의 부활을 가져오심으로써,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그리스도인의 변모(transformation)를 일으키실 것이다.

바오로는 인간의 죄의 기원문제를 다루고 있는 로마서의 찬양부분(로마 5,12)에서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세부적인 묘사들을 계속 보충해 나간다. 그는 아담을 장차 오셔야 할 분의 예형”(로마 5,14)이라고 부름으로써, 인류의 첫 조상과 부활하신 주님 사이의 대조를 제시한다. 아담의 불복종의 개인적 행위는 바오로 자신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신비한 방식으로 아담의 자손들에게서 발견되는 죄스러움에까지 이르렀다(로마 5,12-15). 아담의 범죄로 인간성에 상처를 입힌 이 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적인 복종으로 치유되어야만 했다(로마 5,19). 이 생명을 주는 복종은 바오로의 관점에서 (그가 여기서 명백하게 일컫지는 않더라도) 예수께서 마지막 아담으로 선정된 자신의 지상업적 안에서 일어난 위대한 두 사건, 즉 자신의 죽음과 부활의 모든 구체적 상황들을 수락하심으로써 실현된 것이다.

 

 

. 구속에 대한 바오로의 관점

 

우리는 이 점에서 인간의 구속에 대한 바오로의 개인적인 생각의 주요 특징들을 종합해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형성하는 두 국면의 사건에만 거의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그는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에서 의도했던 것처럼 강생을 구속적 사건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심은 무죄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었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그분의 구속사업에 필요한 전제조건이었다. 만일 그분이 반역하는 인간이 성부께 드릴 수 없었던 것 - 효성스럽고 순종하는 사랑 - 을 성부께 드리고자 했다면, 그분은 스스로 죄스런 인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하느님의 아들은 죄의 육신을 갖춘 모습으로”(로마 8,3) 오셨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그분이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갈라 4,4)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자신의 죽음을 그 구체적인 전체 삶 안에서 받아들임으로써 인류에게 첫 아담에 속박된 죄의 연대를 영원히 파괴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이 자유로이 모든 종족의 효과적이고도 구원적인 대속물로서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기”(필립 2,8)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부활로, 사람에게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과의 일치를 통해 이루는 하느님께 대한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관계, 즉 아버지로서의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가능성을 만들면서, 은총의 어떤 새로운 초자연적 연대를 창조하셨다. “또 그분이 모든 이를 위해서 죽은 것은, 살아있는 이들이 더는 자기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일으켜지신 그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2고린 5,15)이다.

그러나 사람이 개인적으로 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 자신의 죽음 안에서 하나의 실재로 드러나는 새로운 창조인 그리스도인의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구속적 경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바오로가 가르치는 결정적으로 필연적인 이 체험에 이르는 가능성은 예수의 대속적인 죽음 안에서 성사적 참여인 세례를 통해 최초로 개인에게 열려진다(로마 6,3-4). 그러나 예수의 부활에의 참여라는 다른 하나의 체험 - 세례로써 가능해지는 - 이 또한 인간구원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재림 때 이루어질 것이다(1고린 15,23 이하).

따라서 바오로의 사상에서 드러나는 강조점은 예수의 구속사업의 대속적인 성격에 있지 않고, 비록 그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오히려 완전히 새로운 인간적 체험에 인간을 관련시키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효력에 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은 그리스도교의 성사들, 특히 세례와 성체 성사로 준비되어진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대속된 인간본성의 결정적인 형태를 자신 안에 나타내 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죽음과 그리스도께로의 부활을 통해 그분과 완전히 합체(合體)됨으로써 구원된다.

 

 

. 바오로의 구원론에서 본 모상이란 주제

 

마지막 아담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중심사상이 바오로의 구원론 사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역시 창세기의 창조기사, 즉 인간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지배권을 가지도록예정됨으로써 하느님의 모상(image)으로 창조된 존재라고 표현한 것에서 유래한다(창세 1,26-28). 창조의 절대주이신 하느님께서는 자비롭게도 당신 창조물들에 대한 당신의 우주적 주권의 한 몫을 사람에게 주셨기에 인간은 신적 모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바오로가 모상의 신학적 주제에 대하여 창세기의 도움을 받고 있음도 문맥상 하느님의 인간 창조에 대한 몇 가지 언급들이 드러나는 그의 서간(1고린 11,7-8)에서 처음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바오로의 이후 서간들 안에서 그 잠재력이 계속해서 개발될 하느님의 모상이자 영광의 개념으로 일컬어진다.

마지막 아담인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바오로의 서간에서 하느님의 모상으로 선포되는데(2고린 4,4), 그것은 바오로가 이 세상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한 측면을 향해 끊임없이 변형되는 과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듯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가운데 (그분과) 같은 모상으로 모습이 바뀔 것이니, 영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에서 영광으로 모습이 (바뀔 것입니다)”(2고린 3,18). 그 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같은 주제로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설명한다. “그분께서는 미리 알아 (택하신) 이들을 당신 아드님 모습과 한 모양이 되도록 예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드님이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로 있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 8,29). 바오로에게 있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은 하느님 자녀들의 영광과 자유”(로마 8,21)라는 기쁨인데, 그것은 우리 몸의 속량”(로마 8,23)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아들의 모상 안에서구원되는데, 그분은 부활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골로 1,15)이시다.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된 목적, 즉 아버지와 맺는 참된 부자(父子)관계에 이른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전인격이 죽음으로부터 영광에로 부활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 모상이라는 주제를 통해 비인간적인 혹은 마법에 의한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아버지께 대한 아들의 관계라는 매우 실제적이고 상호인격적인 관계를 향한 진보적인 성장으로서의 속량을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오로의 서간에서 그리스도는 새로운 사람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마지막 아담이라는 표현과 동의어이다. 그리고 여기서 모상이라는 중심 사상이 이 개념과 관련해서 다시 떠오른다. 세례체험과 이 성사의 은총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은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버렸고 새 사람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에,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을 따라 새로워져 (그분의 뜻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골로 3,9-10 참조) 된다. 우리가 위에서 이미 본 것처럼 충만한 지식에 도달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그의 아버지로 앎으로서만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에페소서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 열심히 애쓰도록 권고한다. 그 지식으로 인해 그는 완전한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의 충만함의 완숙한 경지에 이르게”(에페 4,13)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아버지께 대한 자녀로서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이 증대되는 의식을 단순히 전개해 놓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여기에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표가 당연히 뒤따르기 마련인데, 바오로는 같은 편지에서 아래와 같이 덧붙이고 있다. “지난날의 생활방식에 얽매여 속이는 욕정 때문에 썩어 없어질 묵은 인간을 여러분은 버리고 여러분의 정신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며,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하느님을 따라 창조된 새로운 인간을 입으시오”(에페 4,22-24)

 

 

. 맺음말

 

거룩한 역사의 성서적 관점에 대해 종말은 창조에 부합할 것이다라는 격언이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이 많은 신약성서 작가들에 의해서 이스라엘 역사의 기원으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들 속에 작용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그들은 아브라함이나 모세 이전으로까지는 올라가지 않는다. 바오로의 신앙적, 천부적 재질은 창세기 앞부분의 창조사화에서 영감을 찾기 위해 우주의 바로 그 시작에로 되돌아감으로써 일찍이 없었던 사상의 기원을 제시한다. 다름 아니라 그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리스도교 종말론에 대한 시각을 요약하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인간본성은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최종적 완성에 도달하고,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성될 우리 자신의 속량은 하느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심으로써 역사 안에서 분출되는 권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 과정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단히 개별적인 참여를 필요로하는 것으로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을 의미한다. 바오로의 영성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죽음은 우리들 지상적 존재에게는 극히 중대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아멘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최종적인 접근이 공개된다. 이 일치는 자녀다운 순종과 우리 육신의 부활이라는 한 걸음 더 나아간 행동만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최후에 완성될 것이며 마지막 아담이시요 우리 형제이신 그리스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분과 영원히 합체될 것이다. 바오로는 그분에 대하여 확신에 차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여러분 가운데서 우리는 선포했고, 여러분은 아니오사이에서 주저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모든 약속들에 있어서 그분께서는 그것들이 확실하게 되도록 라고 대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때 그분을 통해서 아멘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2고린 1,19-20 참조). * (신학전망. 1997.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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