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바라기

예수시대 정치 경제

깜장보석 2012. 9. 25. 14:53

성서와 주변 이야기122쪽 중간에 "황제의.... 데나리온 은화에는 티베리우스의 흉상...이란 표현이 있는데 성서에는 티베리우스가 아니라 카이사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상 다른 인물이라고 알고 있는데...

 

책을 통해서 공부하셨겠지만 로마 제국의 역사를 구분하여 특별한 황제에 관하여 제시하였으니 다시 정리해보시기 바랍니다. 연대수는 학자와 저술서 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도시국가로서 초기 로마 왕국: 왕정과 공화정이 실시되었고 그 후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삼두정치가 등장하였으나 카이사르가 독재권을 장악하면서 무너집니다. 옥타비아누스가 지중해 연안을 온전히 장악하여 '로마의 평화'(Pax Romana)시대를 열었던 시기입니다(기원전 31).

-로마제국: 옥타비아누스가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고, 원로원은 기원전 27년 그에게 '존엄한 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선사했고, 이 때부터 사실상 제정이 실시됩니다.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시대: 14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고 티베리우스 황제가 즉위하면서 68년까지 율리우우디우스 왕조가 시작됩니다. 이 기간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과 죽음이 있었고,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하게됩니다. 클라우디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네로 시대에 로마교회는 상당히 발전하였으나 황제숭배를 거부하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게 됩니다. 네로는 64년 로마의 대화제를 그리스도인들의 짓이라 하여 대박해를 감행합니다.

-플라비우스 황제시대: 네로가 죽은 후 1년 동안 세명의 황제가 즉위했다 사라집니다.

-오현제시대: 다섯 황제가 원로원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안정을 다지고 대외 정복사업도 전개됩니다. 이 시대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도 반복됩니다. 1세기 말부터 교회는 카타콤바(초대 그리스도 교인들의 지하묘지)에 숨어들기 시작합니다.

-군인황제 시대: 군사력을 배경으로 권력 투쟁하던 시대입니다.

-콘스탄티노 황제시대: 콘스탄티노는 323년 칙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기에 이릅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계속 성장합니다.

-로마제국의 몰락 시대: 콘스탄티누스 이후 테오도시우스가 황제로 즉위하여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합니다. 결국 로마제국은 동서 로마제국으로 갈라져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하여 476, 동로마제국은 터키인의 침략으로 1453년에 멸망합니다.

 

* 카이사르 다음 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카이사르(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시저, 음역으로 가리사리아)는 모든 왕의 이름 뒤에 붙어 황제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이사리아는 특별한 인물을 지칭하기보다는 황제라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한 이 화페에 새겨진 티베리우스 황제(기원후 14-37)는 보수적인 통화정책을 썼으며 세 가지 형태의 데나리온만 주조하도록 했는데 그 중 두 가지가 아직까지 몇 개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든 데나리온이 그렇듯이 세 번째 형태의 데나이온은 은화인데 한 면에는 신적인 신분의 상징하는 월계관을 쓴 황제의 흉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새겨진 문구에는 "황제 티베리우스, 신적인 아우구스투스 존엄한 아들"(Tiberius Caesar Divi Angusti Filius Augustus)이라고 되어 있고, 그 이면에는 칭호가 계속됩니다. "최고의 사제"(=Pontifex Maximus) 그리고 신들의 보좌에 앉은 황태후 리비아가 있고 오른 편에는 올림피아의 긴 홀이 있고 왼편에는 올리브 나무 가지가 있어서 그녀를 천상적인 평화의 화신으로 나타냅니다. 이렇듯 화페에는 권력의 상징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시대의 정치, 경제, 종교를 공부할 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어떤 것입니까?

먼저 성서 전반의 관점에서 정치, 경제, 종교의 중요한 것을 염두에 두면서 예수시대의 것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야 폭넓은 안목에서 성서를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을 뿌리를 두고있는 신약-예수시대의 정치, 경제, 종교 상황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구약 예언의 성취자, 계시의 완성자, 구원역사의 중심인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치

하느님께서 백성들을 이끌어가시는 인도자이며, 인간인 왕은 그분의 대리하여 백성들에게 봉사하는 자라는 사상이 이스라엘 정치사에서 주류를 이룹니다. 여기에서 "목자"라는 개념이 드러납니다. 이를테면 이스라엘에서 왕으로 축성될 때에 왕은 백성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이끌어갈 과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왕의 역할을 탁월하게 한 인물을 다윗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의 귀감, 백성들에게 관후하고 선량한 군주의 표본이 됩니다. 그는 적을 무찌르고 영토를 확보하여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지킨 위대한 통치자입니다. 그는 지파들을 차별하지 않는 보편적인 정치를 펼 뿐만 아니라,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에 옮기면서 예루살렘을 정치와 종교의 수도로 삼아 신정정치(神政政治)펼친 탁월한 왕이 됩니다. 열왕기 후서는 이스라엘 남북 왕조의 역대왕들을 열거하면서 다윗을 기준으로 왕의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 못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성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그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며 백성들을 착취할 때에 멸망의 길로 치닫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부패된 왕들의 역사를 통하여 이상적으로 통치할 왕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왕으로 오시어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을 완전히 성취하십니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을 사랑하시고 그분 뜻에 철저하게 귀의하신 왕, 봉사를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온 왕으로서의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발을 씻기는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요한 13,1-20). 바울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찬가(필립 2,6-11)에서 봉사하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특권을 누리며 이 지상에서 영예롭게 실 수 있었지만, 종이 되셨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죽음을 택하는 최대의 봉사를 하십니다. 그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고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이 선사됩니다. 봉사하러 온 예수의 선택은 빵을 기적을 행한 후 사람들이 왕으로 모시려 할 때에 조용히 사라지는 모습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경제

경제적인 정의의 개념은 출애굽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은혜로 다함께 출애굽을 한 같은 형제이기 때문에 왕도 백성들의 경제권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같은 정신이 나봇포도원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납니다(1열와 21,1-26). 하느님이 주신 풍요는 축적하라고 준 것이 아니라 나누어 쓰라고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안식년과 희년의 정신은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일체 농사를 짓지 않았고 땅을 쉬게 했습니다. 저절로 맺는 열매는 가난한 자를 살리고, 가축과 들짐승의 몫이 되었습니다. 50년 마다 맞게되는 희년에는 이전에 사고팔던 모든 땅을 원상복귀하여 첫주인에게 돌려주었고, 부리던 종들도 자유인의 처지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레위기는 이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힙니다. “나 야훼가 너희를 에집트 땅에서 구해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셨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억압과 착취가 없는 평등사회를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에 안식년과 희년의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시려 가난을 택하십니다. 또한 나눔의 삶을 완전히 실현하십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 하느님의 본성까지 나누시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되게 합니다. 그분은 나눔을 몸소 사시면서 자신을 위해 재산을 모으면서 이웃을 몰라보는 인간의 탐욕을 꾸짖으셨고, 지상의 부가 결코 진정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음을 설파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본받으면서 실천하면서 살려고 노력했던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은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끄는 생활이 됩니다(사도 2,43-47; 4,32-37 참조).

 

 

종교

구약으로부터 추구한 이스라엘의 종교는 유일하신 하느님입니다. 다신론이 창궐했던 주변 세계에서 유일신 하느님을 따르는 종교를 보존 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일하신 그 하느님은 가까히 계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계약을 맺는 신이었고,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와 함께 걸어가시는 하느님, 역사를 엮어가는 하느님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탈출, 시나이산 계약, 사막의 여정, 약속의 땅 정복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의 구원체험을 통하여 실제로 이러한 하느님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출애굽을 통하여 대단한 하느님의 체험을 합니다. 출애굽을 한 후 하느님께서 사막을 여행하는 동안 줄곧 낮에는 구름기둥을 통하여 밤에는 불기둥을 통하여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텐트를 치며 함께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나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차후 이 사막의 시절을 하느님과의 약혼시절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 체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조상들의 하느님이고 약속에 성실하시고 전능, 자비, 살아계신 하느님, 자기네들을 위하여 싸워주는 분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나이산 계약을 통하여 자신들은 모든 민족들을 대신하여 하느님을 흠숭하고 찬미하며 예배를 드리는 사제적 백성으로 뽑힌 신원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여 가나안 주민들이 섬기는 신이며 농사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바알신 유혹을 줄곧 받게됩니다. 비를 내리고 풍년을 들게 하는 신은 바알이 아니고, 야훼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예언자들은 줄곧 외치게 됩니다. 지존하신 야훼께서는 역사의 주요, 자연의 주이시다는 것을 엘리야 예언자는 갈멜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겨루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15에서는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은 입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이런 것을 만들고 의지하는 자들도 모두 그와 같으리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신명기에서는 그 누가 그도록 가까운 신을 모실 수 있겠느냐하고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신약에서 하느님은 예수의 육화를 통하여 우리 역사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하느님은 저 먼곳에 있는 분이 아니라, 나와 함께 역사를 엮어가시는 분입니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어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갈라 4,4-5)라고 바울로 사도는 설파합니다. 우리 가운데 오시어 우리와 함께 역사를 엮어가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운명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하는 충만한 삶으로 엮어가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사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사시고 걸어가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을 위한 길, 진리, 생명이 되어주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모든 인간이 맞아들여야 할 죽음의 이후의 삶까지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엠마우스 제자들과 함께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며 우리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찾아주는 하느님이십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마태 14,27)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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