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묵상하라

현실에 성실한 지혜

깜장보석 2007. 9. 30. 10:46

 

 

코헬렛은 삶이 품고 있는 허황된 매혹을 찾아 방황하다 결국 그 매혹이 비수처럼 숨기고 있던 혐오의 얼굴을 만나게 되는 우리 인생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를 매혹시켜 왔던, 그러나 그만큼의 혐오를 동시에 체험하게 했던 삶의 주변적 얼굴을 뚫고 이제 가장 본질적인 내면의 질서를 찾아내는 것, 이것이 코헬렛이 제시하는 신학적 결론이자 지혜이다. 삶을 대하는 가장 현명한 모습은 ‘완벽한 삶’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성실한 삶’에 있음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개관
코헬렛은 소위 ‘메길롯’이라고 불리는 ‘축제 두루마리(아가·룻기·애가·코헬렛·에스테르기)’의 하나로서, 주로 초막절 셋째 날에 읽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막절은 농경사회 안에서 모든 추수가 끝난 후에 오는 그 ‘종말론적 쉼’을 기념하는 축제였다. 코헬렛을 이 축제의 텍스트로 설정하였다는 것은, 인생이 광야의 방랑생활같이 힘겹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 모든 사건에는 종말론적 끝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명칭
히브리어 ‘코헬렛’은 동사 ‘카알’(부른다, 불러 모으다, 회합하다)에서 파생된 여성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 말은 ‘회중에게 말하거나 가르치는 사람’,혹은 ‘설교자’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책을 종전에는 ‘전도서’라고 불렀는데, ‘전도’ 혹은 ‘선교’와 관련된 행위나 언급이 등장하지 않기에 ‘전도서’보다는 ‘코헬렛’이라는 제목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저자와 제작 시기
코헬 1,1의 표제에 의하면, 이 책은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임금인 코헬렛의 말’이라고 되어 있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저자가 자신을 ‘솔로몬’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솔로몬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점, 1-­2장에서는 왕의 신분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3장부터는 왕과 무관한 내용이 등장한다는 점, 사용된 히브리어가 매우 후대의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점(형태론과 구문론에서 아람어적 표현을 발견하게 되고 때로는 헬레니즘적 영향도 발견됨) 등은 실제적 저자를 솔로몬으로 간주하기 어렵게 만든다. 아마도 저자는 ‘지혜의 대명사`=`솔로몬’이라는 통념을 그대로 적용하여 자신의 책을 솔로몬의 권위와 명성 아래 두고자, 소위 ‘가명성’이라는 기법을 적용시킨 듯하다. 책의 내용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는 몇 가지는, 저자가 직업적 현인으로서 백성에게 지혜를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 전해 내려오는 잠언들을 수집·정리·기록하고 때로는 새로운 잠언을 지어내기도 하였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쿰란(제4동굴)에서 기원전 2세기 중엽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코헬렛의 단편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이 책이 적어도 기원전 2세기 이전에 완성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페르시아 문화의 흔적이 거의 없어서 이 책이 헬레니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기원전 3세기 중반경에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문학적 특징
1) 1인칭 고백 산문체:대부분 1인칭 서술 관점(‘나 코헬렛은…’)으로 진행되고 있다.
2) 잠언 형식의 등장:잠언처럼 짧은 구절로 심도 높은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돈을 사랑하는 자는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큰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수확으로 만족하지 못하니 이 또한 허무이다.’(5,9) 등의 문장이 그러하다.
3) 수사 의문문:의문문은 주로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할 때 사용되지만, 수사 의문문은 답을 유도하기보다 청중을 자신의 논지에 끌어들여 동의와 제청을 유도시킬 때 사용된다. 자주 등장하는 ‘…`무슨 소용이 있으랴?’(5,10) ‘…있으랴?’(1,3; 2,25; 4,11) 등의 의문문은 헛된 삶의 실상을 부각시키고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구성
코헬렛에서는 일관적 구조를 찾아내기 어렵다. 주제에 따라 내용이 전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서언(1,2-­11)과 발문(12,9-­14)이 최종 편집자에 의해 첨부된 부분임에 동의하고 있다. 특별히 12,9-­14은 제자에 의해 지어진 ‘발문’(후기)인데, 편집자는 코헬렛이 지혜의 교사로서 많은 가르침을 남겼으며(9-­10절), 이 모든 말씀과 가르침은 사실 하느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임을 분명히 한다(11절). 그런데 12절부터는 다소 비평적 어조로 책을 쓰는 일과 공부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어서 12장 9-­11절과 12-­14절이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1,2의 내용이 12,8에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어서 편집자는 코헬렛의 어록을 모아 본문을 완성하고, 코헬렛을 3인칭으로 제시하면서 이 모음집에 ‘서언’과 ‘발문’(12,9­-11)을 첨가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코헬렛은 ‘충족되는 않는 인간의 욕구’가 전반부(1-­6장)에 전개되고, 이어 그런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는 ‘생활의 지혜’(7­-12장)가 소개된다. 전반부에서는 ‘허무로다’라는 표현이 후반부보다 두 배 이상 언급되고 있지만, 이와는 달리 7장 이하에서는 삶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가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간추린 내용
코헬렛은 1장에서 자신이 삶의 진리를 찾기 위해 전존재를 투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모든 것이 마치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헛된 일’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얻고 누리기 위해 힘써온 많은 노력은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 ‘헛되고 헛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2장). 3장은 모든 것의 적절한 때가 있음을, 그리고 그 때(시간)를 결정하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강조한다. 시간의 주인 역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4장에서는 세상의 폭력과 억압의 기원을 ‘질투’와 ‘경쟁심’에서 찾는다. 5장에서 강조되고 있는 주제는 ‘종교심’이며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다. 6장은 지금까지 피력한 내용을 다시금 수렴한다. 세상은 하느님의 뜻에 의해 결정되고 진행되는데, 유한한 인간이 하느님께 왜 이러느냐고 ‘따질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하느님을 거부하고 항의할 만한 능력을 ‘현실적으로’ 갖추지 못했으니 창조주의 뜻에 맞추어 살아갈 때 가장 안전하고 의미 있는 삶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7­-8장에서는 삶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과 지혜로운 삶을 ‘즐겁게 사는 것’(8,15)으로 제시한다. 코헬렛의 이러한 주장은 삶을 마구 즐기라는 의미처럼 들릴 수 있지만, 허망한 세상 먹고 마시는 일이 최고라는 부정적 염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매 순간을 즐겁게 살려는 태도는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사건을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길 때만 가능한 은총이며, 삶에 대한 적극적이고 신앙적인 결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9­-11장에서도 이와 같은 맥락을 유지하는 데 인간 스스로 조정할 수 없는 운명이라 해도, 그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인간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각자의 운명을 믿으며 최대한 즐겁게 자신의 삶을 수용하는 것이 곧 ‘행복’인 것이다. 편집자의 마지막 당부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라는 것’과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다(12,`13­14). 지혜문학의 대표적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께의 경외’를 다시 한번 강조함으로써 코헬렛 전체의 막을 내리고 있다.

고헬렛의 신학
1) 헛됨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1,2) 이 문장은 코헬렛의 주제를 잘 요약해 주고 있다. ‘헛되다’(히브리어 ‘헤벨’)라는 단어는 원래 ‘입김’ 또는 ‘숨’처럼 금방 없어지는 것, 찰나의 것, 오래 붙잡을 수 없는 것 등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그 어의(語義)가 확장되면서 실체를 가지지 않은 것, 환상적인 것, 허무한 것 등의 추상적 의미로까지 파급되는데, 코헬렛은 이 단어의 반복을 통해 인간이 인생에 대해 품게 되는 갖가지 집착들의 ‘무상함’을 표현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헤벨’이 ‘무상함’, ‘헛됨’ 등의 부정적 개념만을 내포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헤벨이 ‘숨’이라는 의미를 함의한다는 사실과 연결되는데, 숨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절대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곧 히브리어 ‘헤벨’은 생의 갖가지 요인들(부귀·명예·쾌락 등)이 ‘숨’처럼 인간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조건들일 수 있지만, 숨이 찰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듯 찰나적인 것들을 삶의 본질인 양 소유하려 하고 자기 것으로 고착시키려 할 때 그것만큼 무상하고 무의미한 노력도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2) 인간존재의 한계와 이에 대한 긍정
인간 ‘각자의 숙명은 피할 수 없다’. 각자의 운명과 계획은 인간보다 훨씬 더 강한 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3,14; 7,14; 9,1).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고, 이 세상의 모든 사물 역시 인간의 것이 아니다. 결국 궁극적 자유와 구원, 행복을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자신을 겸허하게 개방하는 것뿐이다. 이 진리를 무시하거나 방관하고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할 때 모든 노력은 ‘허무하고 헛된’ 것이 될 뿐이다.

3)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위의 관점은 내 인생의 주인 역시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명시해 준다. 하느님은 시간을 창조하셨고, 시간의 절대적 주인이시므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때(시간)’에 순명할 수밖에 없다. 나의 과거·현재·미래 전체가 스스로에 의해 조정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면, 그리고 모든 이의 공통적 운명인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음을 인식했다면 우리가 주력해야 할 노력은 자명해진다. ‘현실에의 충실’만이 해결인 셈이다. 결국 자신의 현재에 적응하고, 그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며(2,24; 3,13; 8,15; 9,9), 지금을 가장 좋은 때로 인식하고 살아갈 때 인간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모든 미래적 계획과 과거에 대한 추억은 모두 ‘헛된 일’일 뿐이다.

4) 하느님께 대한 경외
인간의 한계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경외라는 신학적 주제와 연결된다(3,14`; 7,18`; 8,12-­13; 12,13). 코헬렛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던 인물이었다. 완벽한 지식과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 힘썼고, 최고 권력의 자리까지 올랐던 사람이었다. 생의 궁극적 진리를 알아내려고 지혜를 짜보기도 했지만, 그가 다다른 곳은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다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고,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경외라는 신학적 주제를 완성시켰다. 결국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인식은 그분께서 나에게 선물하신 생을 감사히 받고 그분이 정하신 날까지 성실히, 즐겁게 살아가야 한다는 지혜를 산출시킨다. 코헬렛의 저자는 인간의 한계성이라는 부정적 요인을 통해 오히려 강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유도하였던 것이다.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지나간 어제는 오지 않는다.” “당신의 오늘을 특별한 내일로 만들라.” 이런 말들, 이젠 왠지 좀 식상한 듯하다. 너무 유명해진 말들이어서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나 삶의 지혜는 역시 이러한 문장들 안에 함축되어 있다. 코헬렛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좌절과 덧없음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기쁘게 사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한 쾌락주의와는 구별되는 자못 감동적인 현실주의로서 자아를 잃고 공중에 뜬 듯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내 주변과 현실에 산재하는 기쁨·행복·평화 등을 발견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오늘, 우리, 정말, 행복하기를!”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내일도 모레도 우리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라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작고 순수한 사랑을 지켜낼 것, 절망하지 말고 진심으로 살 것, 그리하여 새벽부터 밤까지 스스로에게 눈부신 사람이 되어볼 것, 생각만 해도 뭉클하고 가슴 뛰는 삶이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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