顔回曰: 「回益矣.」 仲尼曰: 「何謂也?」 曰: 「回忘仁義矣.」
曰: 「可矣, 猶未也.」
他日, 復見, 曰: 「回益矣.」 曰: 「何謂也?」 曰: 「回坐忘矣.」
仲尼蹴然曰: 「何謂坐忘?」
顔回曰: 「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장자」 ‘대종사’ 편 마지막 장에 나오는 좌망 이야기는 장자 수양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안회는 공자와 수양의 깊은 단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공자는 사랑하는 제자의 깨달음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안회가 인의를 잊었다고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덕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안회는 예악을 잊었다고 하였다. 의례에 얽매이지 않는 단계를 넘어서 인의의 덕목에 자신을 귀속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자유롭게 덕을 수행할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공자는 그것으로는 자아를 회복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다. 공자의 가르침에 힘입어 안회는 더욱 정진하여 마침내 좌망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좌망이란 지체의 기호에 구속되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이 좇는 총명함을 구하지 않는 단계이다. 형체를 떠나고 지식을 버린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얽매이지 않음을 뜻한다. 이러한 수행의 경지를 대통에 일치한다고 표현하였다. 대통이란 바로 도(道)의 용(用)을 말한다. 도가 통하지 않는 곳은 없다. 사람의 수행이 도와 하나가 되면 지금까지의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살아가게 된다.
우주가 비워져 있어 도의 쓰임이 크게 통하게 됨과 같이 좌망은 자아의 완전한 비움으로 도와 일치를 이루게 한다. 일상에서 마음을 비우면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새로운 분별력이 생긴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그러니 다시 옛 습관에 따라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쓴다. 몸과 마음은 대상에 대하여 서로 다른 갈등을 일으키고 그것을 통해 나라고 하는 존재성을 확인하게 된다. 이때의 존재성은 대상을 통해서 나타난 주체로서, 대상에 비추어진 자아에 대한 존재성이다. 좌망은 대상을 나와 대립적인 관계에서 바라보지 않고 대상과 일체감 속에서 인식하는 관계다. 서양 신비주의 전통에 meditatio(명상)에서 contemplatio(관조)를 너머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ekstase(망아)에 이르는 관상수행 전통이 있다. 좌망은 바로 이 망아와 유사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자아를 완전히 버리고 비우게 되면 하느님이 우리의 영 안에 외아들을 낳으실 것이고 나의 영혼도 외아들을 다시 낳을 것이라고 하였다. 영성이 눈을 뜨게 되면 우리 안에는 어떠한 갈등도 일어나지 않고 어떠한 미련도 갖지 않게 된다. 우리의 눈은 진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의 빈자리에 하느님이 들어오셔서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이다.
자신을 잊음으로써 이루는 이 일치의 신비를 우리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볼 수 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하기에 앞서 천사로부터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라는 고지를 듣게 된다. 그리고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겸손하게 답하였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고백하며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 안에 머물러 살았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에 귀기울이고 두려움 없이 자신을 내어놓았다. 그 비천한 마음에 높은 분의 영이 가득 차 하느님의 거룩한 아들을 잉태하였다.
좌망을 정적인 비움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때의 ‘앉을 좌’는 몸의 자세라기보다는 마음과 영을 가라앉힘이다. 따라서 동적인 비움에 가깝다. 마리아의 겸손한 비움은 바로 동적인 비움의 전형이다. 생활 가운데 우리는 늘 동적인 비움을 이루어 낼 수 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할 때, 상대와 차이를 느끼지 않고 대등한 축복 가운데 있음을 확인할 때 우리는 비움을 경험하게 된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한테 베푸는 것은 내가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다. 마리아의 노래처럼 나 스스로가 진정 비천한 존재임을 깨달을 때 나는 대등한 관계에서 그와 진정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진정한 사랑은 나의 존재성을 인식하지 않는 가운데 나누어지는 사랑에서 나타난다.
좌망은 나를 잊음으로 주님이 나를 사랑 안에서 새롭게 하는 신비다. 비움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더 큰 나를 발견하게 한다. 사랑의 경계가 없어짐은 바로 이 비움의 영적 체험 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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