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바라기

창조와 구속의 관계성

깜장보석 2012. 9. 10. 14:35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얼마동안 많은 학자들은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 개념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학적 이해라는 전제 아래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와 고대 근동 지역의 문헌들에 나타난 창조의 개념을 비교 연구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러면서도 창조와 구속의 관계성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활동하신 하느님의 구속사적 상황 안에서 해석되어져 왔다. 곧 구약에 있어서 창조란 이스라엘의 구속사적 입장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1936년 폰 라드의 창조와 구속에 관한 소논문이 발표된 이래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은 폰 라드의 견해를 수용하여 창조는 이스라엘의 구속사에 종속되어 있는 신학적 주제로 이해하였다. 곧 창조는 독립적인 신학적 주제가 아니고 구속사적인 상황에서 해석되어져야 하며 구속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폰 라드는 그의 논문 첫머리에서 구약의 야훼신앙은 선택사상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원칙적으로 구속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결론에 가서는 구약의 전체적인 상황에서 창조교리의 신학적 역할은 독립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구속교리와 관련되어 구속사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의 논지를 시작함에 있어서 이스라엘 신앙에 가장 위협적인 가나안의 자연 혹은 창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바알 종교와의 갈등 속에서도 바알 종교와 대항하고 있는 호세아나 혹은 신명기적 문헌들이 창조신학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어서 그는 창세기 1장뿐만 아니라 제2이사야와 시편에 나타난 창조 구절들을 예로 들고 있다. 폰 라드에 따르면 이사야 431절과 4424절의 경우 하느님의 창조와 이스라엘에 대한 구속사상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이 구절들에서 하느님의 창조는 지금 막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새 일(new thing)과 관련된다. 곧 하느님의 구속의 목적을 설명하기 위하여 창조 사상이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이사야 519절의 경우 예언자가 야훼 하느님에 의한 세계의 창조를 언급함으로 그의 선포를 시작하고 있으나 곧 이어서 창조의 행위를 홍해에서 일어난 구속의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창조 행위는 이스라엘의 창조와 관계되어 설명될 수 있는 것이지 우주의 창조나 우주의 기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이사 44,24; 54,5 등을 보라). 이와 비슷한 경우가 시편에도 나타난다. 폰 라드는 시편 899-11절의 경우에도 시인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에서 시작하여 89편의 주제인 다윗과의 계약사상으로 그 내용을 이어 전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주요 주제인 다윗 계약사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시인은 창조사상을 가지고 왔다는 것이다. 또한 시편 74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구속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하여 창조 모티브를 설명하고 있다. 위의 예들을 통하여 볼 때 창조는 독립적으로 그 신학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항상 구속의 교리와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구속론적으로 이해(soteriological understanding)하여야 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폰 라드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전제를 갖고 있다. 첫째는 구약은 기본적으로 역사 즉 구원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활동과 관련된 역사책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역사책이다; 그것은 세계의 창조에서부터 마지막 일이 일어날 때까지 즉 세계에 대한 지배가 인자에게 넘어올 때까지(7,13 이하)의 이스라엘, 나라들, 그리고 세계와 관련된 하느님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창조 그 자체는 하느님의 구원의 행위로서 이해되어지기 때문에 이 역사는 구원사로서 묘사될 수 있는 것이다.

 

폰 라드의 두 번째 전제는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하느님의 행위에 관한 전승들은 역사적 신앙고백(The old historical credo)안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역사적 신앙고백서들 안에 창조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하여 폰 라드는 구속사의 한 부분으로서의 창조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비교적 늦게 나타나는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즉 이스라엘은 창조가 구속사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신학적인 역할만을 감당한다고 여겼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창조가 구속사를 이해하기 위하여 후대에 발달한 신학적 사상이라는 것을 내포한다. 이 점에서 구약의 다른 모든 부분에 나타난 창조뿐만 아니라 창세기 1,1-2,4a에 나타난 창조조차도 구속사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날(םוי)로 표현된 시간의 한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곧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는 창조 자체에 대한 중요성으로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부름에서 시작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의 역사까지를 설명하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구속사의 신학의 상황 속에서 폰 라드의 창조신앙에 대한 구속사적 이해는 대단한 영향을 주었으며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은 이 견해를 따르게 되었다. 특별히 쾰러는 창조와 역사에 관한 논쟁에서 구약에서의 창조는 비교적 늦게 나타난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에서의 창조는 그 자체로서 중요성을 가진 우주의 기원에 대하여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백성들의 의미의 위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는 세계 역사의 시작으로서 역사의 의미에 의존하고 있으며 인물들과 날들(figures and dates)에 의해 특정지워지는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의 의미에 국한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쾰러에 있어서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신앙은 일곱째 날이 창조의 마지막이요 목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종말론과도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가 일곱째 날에 완성되었던 것과 같이 이 세계의 정상적인 여섯 기간(six nomal period)를 가진 후에 세계에 안식의 기간이 온다는 것이다. 네피어(B.D.Napier)도 폰 라드의 입장에 서있다. 네피어는 폰 라드의 1936년도 논문을 요약하면서 창세기 1장은 역사적인 인간존재에 대하여 말하는 이스라엘의 창조신앙에 대한 고전적인 진술이라고 말한다. 창조란 기원에 대한 질문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어떤 의미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야훼의 구원의 행위를 지지하기 위하여 창조를 사용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뮐렌버그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는 역사에 대한 서론일 뿐만 아니라 선택과 역사적 삶의 즉 출애굽을 그 중심으로 이해하는 구속사의 한 발전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들의 전승사에 대한 연구에서 폰 라드와 그의 견해에 따르는 학자들은 역사의 시작으로서의 창조는 구원의 역사에 속해 있다고 보았으며 창세기에 나타난 다른 구절들과의 관계에서 창조의 위치를 연구해 왔다. 그들의 연구에 의하면 구약에 나타난 창조신앙은 단순히 구원신앙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소개된 것들이 주로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중심으로 구속론적 창조이해를 하였다면 어떤 학자들은 이사야 40-55장에 나타난 창조와 구속의 관계에 관심을 두었다. 예를 들면, 렌드톨프(Rolf Rendtorff)2이사야에 나타난 창조신앙의 신학적 위치라는 소논문에서 제2이사야의 경우 창조는 단순히 과거의 한 사건으로서만 아니라 구원에 대한 현재적 행위와 관련된다고 주장하였다. 곧 창조주 하느님은 가끔 일어나는 사건을 중재하는 신이 아니라 계속하여 활동하시는 하느님이며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존재와 구원에 대하여 계속하여 감사하는 백성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창조주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존재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이며 그들을 계속하여 새롭게 하는 하느님인 것이다. 또한 스튤뮬러(Carroll Stuhlmueller)는 제2이사야의 창조 신앙에 그 초점을 맞추어 폰 라드의 구속론적 창조 이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에 따르면, 2이사야에 나타난 창조는 하느님의 역사적 행위로서의 새창조를 의미하며 바라(ארב)라는 단어에도 창조가 계속되는 역사적 사건임을 내포하고 있다. “창조사상은 항상 예언자(2이사야)가 경이로운 구속에 대하여 선언한 사건을 요약하는 구절의 서론이나 결론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발견하고 창조를 독립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구속을 설명하는 언어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근거로 그는 창조와 구속의 관계를 창조적 구속(creative redemption)”이라는 말로 집약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2이사야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것에서부터 우주론적인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물질적 우주의 창조가 구원의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나며 역사적 사건의 창조가 자연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튤뮬러에게 있어서 제2이사야에 나타난 창조는 계속되는 구속적인 능력이며 이는 새 출애굽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하나의 주제인 것이다.

창조에 대한 이러한 구원론적인 이해는 하느님에 의한 구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경험은 하나의 근본적인 주제이며 창조 전승은 아마도 후에 선택되어 이스라엘의 구원사에 첨가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예기하게 만든다: 구약에 나타난 창조전승이 후대에 이스라엘의 구원역사에 첨가되었다는 주장이 단순히 창조신앙이 구속신앙보다 그 중요성이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서는 구속신앙에 대한 종속적인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스라엘에 있어서 창조신앙이 구속신앙의 신학적인 상황 안에서만 오로지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타당한가? 이스라엘의 구속의 경험만이 구약에 있어서 오로지 하나뿐인 주제인가? 구약에 있어서 구속신앙이 구약에 나타난 모든 신학의 근본적인 기초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창조의 구속론적 이해를 하는 구약학계에 도전을 주기 시작했고 따라서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창조가 구속과는 독립된 주제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어왔다. 1950년 초반 린데스코그(Gösta Lindeskog)는 비평적이고 독립적인 견해를 발전시켰다. 린데스코그는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에서 선택사상을 해석하기 위한 기초들을 발견하였다. 그에 따르면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는 하느님은 한 분뿐이며 인류도 하나이고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졌음을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창조는 유일신론, 보편주의,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상들은 구약성서를 이해하기 위한 근본적인 사상들이 된다는 말이다. 곧 선택사상에서 출발한 출애굽 전승은 가나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창조전승과 함께 동등하게 중요한 사상인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는 폰 라드의 견해를 반대하는 또 다른 시도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로센(Carl Losen)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창세기 1장의 우주론은 더 이상 이스라엘의 선택신앙에서부터 발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통한 세계 창조로부터 발달한 것이며창세기 1장의 창조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신학적 사상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더욱이 로센에 있어서 창세기의 창조는 이스라엘의 선택신앙을 위한 기초이다. 7일 구조, 말씀에 의한 창조, 그리고 하느님의 형상과 같은 창조 모티브들은 구속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창세기에 있어서 창조신앙이 이차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우며 오히려 창조신앙의 기초 위에 창세기의 저자는 그의 신학을 세웠으며 구속신앙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하르너(ph.B.Harner)2이사야에 나타난 창조신앙이라는 소논문에서 폰 라드에 반대되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하르너에 따르면 2이사야는 단순히 역사 가운데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창조신앙과 관련된 단어를 빌려 쓴 것이며 이러한 창조 단어의 사용이 창조신앙이 구속신앙에 종속된 의미로 쓰여졌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어서 이사야 4511-13절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미래에 있을 구원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언자가 창조에 대한 언어를 상징적으로 사용하였음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포로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여 줄 능력을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훼는 온 땅을 창조하신 하느님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창조신앙이 단순히 구속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관계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르너에 따르면, 창조신앙이 단순히 구속신앙의 구조 속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신앙은 임박한 회복에 대한 기대와 출애굽 전승을 균형있게 하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곧 창조신앙은 제2 이사야에서는 독립적인 기능을 담당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은 사실상 큰 영향을 주지 못하였고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 생태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면서부터 구약학자들을 중심으로 창조신학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갖게 되었다. 이러한 기조 위에서 많은 구약학자들은 구약에 있어서 창조를 구속신앙과의 종속된 관계성 속에서가 아니라 창조 그 자체로서 중요성을 가질 수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신학적인 흐름에 큰 공헌을 한 학자는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이다. 기본적으로 전승사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쓴 탁월한 그의 창세기 1-11 주석 서론에서 베스터만은 출생에 의한 창조, 행위에 의한 창조, 말씀에 의한 창조와 창조주의 안식등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나타나는 창조 전승들이 고대근동의 창조이야기들 안에 있음을 찾아내고 이러한 창조의 모티브들은 고대근동의 창조 이야기에 그 배경을 둔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러한 창세기 1장의 창조신앙 전승의 배경에 대한 그의 연구를 통하여 베스터만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전승은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 왔으며 그 전승들은 새롭게 선택되어지고 다시금 조명되어졌다고 결론을 내렸다. 베스터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창조주와 창조에 대한 이해를 위한 한 중요한 방향을 가지게 된다. 창조의 행위는 독특하고 독립적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모든 다른 사건과 다르게 분리하여 독립적으로서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적 행위로서의 세계와 인간의 창조는 단순히 어떤 사건의 연속성으로서의 시작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연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a)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는 원역사의 한 사건이며 어떤 한 역사의 시작이 아닌 것이다.

 

다른 한편 베스터만은 하나의 원역사의 사건으로서 창조는 우리가 믿거나 말거나 하는 선택되어질 수 있는 객체가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고대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볼 때 창조의 주제는 구속신앙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 즉 이 세계와 인간이 창조되어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근동의 사람들에게는 단순하게 받아들여진 전제 조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베스터만에 따르면, “역사적 신앙고백에 창조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 단순히 구약에 있어서의 창조가 비교적 늦게 나타난 사상이라고 하는 것의 증거라고 할 수 없고 오히려 구약에 있어서의 창조는 하나의 분리된 요소로서의 원역사의 한 사건인 것이며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구원의 행위로서의 구원의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이요 전승인 것이다. 즉 창세기 1장의 창조는 원래적으로 오경에 나타난 다른 전승들과 떨어진 독립된 것이며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의 야훼에 대한 신앙고백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그보다도 이전의 사건으로 전승되어진사건인 것이다. 따라서 야훼 공동체 속에서 전해져 내려온 창조 전승은 구원자로서의 야훼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의 결과인 이스라엘 자신들만의 구원전승에 접목되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베스터만은 창조를 포함하여 원역사의 사건들은 문학적인 면에 있어서 구원이라는 오경의 중심사상에 대하여 서론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창조 행위가 구원의 역사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과 끝이 있는 우주의 한 역사를 의미하는 보다 더 넓은 의미로 확대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창조와 구속은 확실히 관계되어져 있으나 이 두 사건은 본래적으로 서로 독특한 것이다. 창조가 단순하게 구속신앙에 종속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는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과의 이스라엘의 만남 속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창조 신학이 실제적으로 창조와 구원이 같은 사건이라고 하는 구속론적인 입장에 의하여서 이해되어지고 채색되어질 때창조의 본래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세계의 창조는 전체를 위한 한번의(Once and for all)” 사건이요 계속적인 창조(creatio continus)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구약의 창조신앙이 구원역사에 종속되었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또 다른 견해는 크니림(Rolf Knierim)의 것이다. 크니림에 따르면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의 한 연속성으로서 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를 통하여 현재에도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역사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주적 공간, 순환적인 시간(cyclic time), 그리고 인간의 존재 등과 같은 우주적인 질서(Cosmic Order) 그 자체는 창조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the ongoing presence of creation)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적 시간의 시작은 인간 역사의 시작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순환적인 시간(cyclic time)은 역사적인 시간으로부터 독립되어지는 것이다. 크니림에 있어서 또 다른 창조의 계속적인 존재는 인간 존재이다. 창세기 1장에 있어서 인간의 삶은 역사의 영역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창조신학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역사 속에서 창조의 계속적인 현존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크니림은 우주적 공간과 순환적인 시간이 창조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라고 하는 한에 있어서 창조 그 자체는 인간의 역사와 공존하되 독립적인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폰 라드와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구약에 나타난 창조가 구약의 구속신앙과는 관계가 있다 할지라도 단순히 구속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베스터만이나 크니림의 견해는 기본적으로 원역사로서의 창조의 시간과 구속사로서의 역사의 시간에 그 개념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여 창조를 역사의 한 시작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곧 창조를 단순히 역사의 개념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만약에 이러한 견해가 옳다면 창조가 반드시 구속론적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이미 폰 라드 자신도 지혜사상이 구속보다는 창조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인정하듯이 구약의 지혜사상에서 우리는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최소한 아는 한 구약에서의 초기 지혜 전승은 구원, 역사 혹은 구원사라는 모티브와 깊은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고대 근동지역에 있어서의 가장 초기의 지혜전승은 개인의 보다 나은 삶과 사회의 복지를 위한 개인들의 행동에 대한 규범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러한 지혜는 실제적인 삶의 경험에서 기초하여 가족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대한 교훈에서 출발하여 성공적인 삶이나 직업을 위한 도덕적, 문화적인 훈련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지혜는 삶에 대한 일반적인 관찰들과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으로서 고대 근동지역에 보편적으로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지혜란 역사의 한 시점에서 발생하여 알려진 역사적 사건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지혜는 각기 다른 문화적 영향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지혜는 각기 다른 문화적 영향 아래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특별히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지혜는 단순히 삶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야훼에 대한 그들의 신앙의 구조 속에서 보편적 지혜를 신학화하였다. 이에 대하여 크렌쇼우(Grenshaw)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지헤란 다음 세 가지 수준에 있어서 사물, 사람, 그리고 창조주와의 관계성의 입장에서 자기 이해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한다 : (1) 인간의 생존과 복지를 위하여 사물을 지배하고자 하는 시도와 인간과 우주와 관련을 맺고 있는 자연 현상에 대한 탐구인 자연 지혜; (2) 질서 있는 사회와 국가에서의 인간관계에 그 초점을 두고 있는 법정 지혜(실제적 지혜); (3) 삶의 목적이 부정되어질 때에라도 신정론적인(theodicy)의 영역에서 궁극적 의미로서의 하느님을 확인하는 신학적 지혜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있어서의 지혜와 질서로서의 창조와의 관계성에 관하여는 지혜문학을 다루는 거의 모든 학자들에 의하여 논의되어져왔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학자들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동의되어지고 나아가서는 인용되어지는 것은 짐멀리(W. Zimmerli)의 주장이다:

 

우리가 만약에 지혜의 신학적인 태도를 특징짓기를 원하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지혜는 명확하게 창조신학의 구조 속에서 생각한다.지혜의 신학은 창조신학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라고 사용한 잠언에서나 엘로힘이라고 불렀던 전도서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족장들의 하느님’, 혹은 야훼 Zebaoth’,라는 이름들이 나타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창조주혹은 만드신 자등으로 불리워진다는 사실에서 확인되어진다.”

 

그는 지혜의 현상을 창세기 1,28에 나오는 하느님의 인간에게 대한 축복과 지배에의 명령으로서 해석했다: “하느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즉 지혜란 세상을 지배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성취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지혜의 가르침의 법칙들을 따름으로 창조의 축복을 얻게 되고 그 법칙들을 무시함으로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정직한 자는 그 의로 인하여 구원을 얻으려니와 사특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잠언 11,6). 이 점에 있어서 지혜는 창조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피흐트너(Johannes Fichtner)는 하느님의 주권과 질서, 우주적 질서와 사회적 질서(cosmic and social orders)의 영역에 있어서 창조와 지혜의 기초가 되는 권선징악(retribution)과의 관계를 증명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크렌쇼우는 짐멀리와 피흐트너가 말한 바와 같이 본질적으로 창조와 지혜의 관계성을 인정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혜문학에 있어서의 창조신학의 중심적인 역할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크렌쇼우는 창조의 본질인 질서가 구속신앙에 종속된 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중심적인 사상임을 주장한 쉬미트(H.H. Schmid)의 입장에 동의하면서 우주론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인 영역에서의 혼돈의 위협과 지혜문학에 있어서 창조신학의 기능을 논의하고 있다. 하느님의 정의의 문제와 창조의 문제는 혼돈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인간의 영역에 있어서 결코 다른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문제로서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점에 기초하여 크렌쇼우는 창조된 세계에는 악의 세력조차도 피조물로서 항상 존재해 있음을 말하면서(잠언 16,4) 이러한 혼돈의 위협이 있는 삶의 현장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정의를 지키기 위하여 창조가 존재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짧게 말해서, 창조신학은 하느님의 정의의 방어로서 그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한 방어는 삶의 모든 차원에 존재하고 있는 혼돈의 위협 때문에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지혜와 창조와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는 우리로 하여금 창조신앙이 이스라엘의 구원사와 관련을 맺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이해되어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지혜사상 자체가 역사라든가 혹은 구원론적 개념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지혜사상이 근본적으로 창조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질서로서의 창조신앙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사적 행위에 종속되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창조가 구원과 처음부터 관련되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은 법전과 창조와의 관계성에서 또한 찾아볼 수 있다. 쉬미트(H.H. Schmid)는 그의 창조신학에 대한 논문에서 고대 근동에서 우주적,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질서는 창조의 개념에서 출발함을 전제하면서 법적인 질서는 창조질서에 속해있다고 주장하였다. 곧 구약성서에 있어서 특히 신명기 법전과 원역사 등에서 나타나는 원인과 결과등과 같은 인과응보의 사상 등은 구속의 개념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의 질서의 개념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세계의 질서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유지하신다는 신앙 즉 창조의 교리는 성서신학에서 주변적인 주제가 아니라 명백하게 근본적인 주제이다.

혼돈과 질서의 개념으로서의 창조에 대한 이해는 제사법전에서도 적용된다. 구약의 제의적 문헌에 있어서 하느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특별히 거룩한 장소와 거룩한 시간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이다. 크로스(F.M. Cross)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가운데의 하느님의 현존은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clean and unclean), 순수한 것과 불결한 것(purity and impurity), 거룩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holy and unholy)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사제도에 있어서 깨끗하지 못한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안에 거하시게 하기 위하여서는 무엇이든지 정결케 되어지거나 아니면 그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

그러한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의 범주는 타부(taboo)의 개념에 의하여 이해되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창세기 1장의 창조에 행위에서 발견되어지는 분리(separation)에 의하여 특징 지워진다. 다시 말해서 제의적 질서는 정과 부정(clean and unclean)”, “순결과 불결(purity and impurity)”거룩과 부정(holy and unholy)” 사이의 분리와 철저한 경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주적인 창조의 질서는 제의적인 체계 안으로 확대되어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즉 제의적인 질서는 분리에 의한 창조적인 질서 안에 그 근거를 두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제의적인 질서는 불결이라든가 죄 등에 의하여 혼돈의 상태로 위협되어지고 제의적인 질서의 분리가 붕괴되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의적인 질서는 크게는 공간적인 분리와 시간적인 분리로 나뉘어진다. 이스라엘의 제의적 사회도 명확한 경계선으로 구분되어진 질서의 사회였다. 진의 중앙에는 하느님이 계시는 성막이 있었고 사람들이 거주하는 진과 비거주지역이 광야가 있었다. 이 제의적 사회에서는 거룩과 비거룩한 지역의 경계선은 분명했다. 성막과 진은 불결한 것과 오염된 것으로부터 분명히 보호되어져서 이스라엘이 멸망하지 않도록 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에 이 경계선이 깨어지면 그 제의 사회의 질서는 파괴되고 혼돈과 무질서가 일어나는 것이다(레위기 14, 16). 분리에 기초한 제의적인 질서는 부정과 불결에 의하여 야기된 혼돈으로부터 그 사회를 지켜나가고 회복시켜 나갈 때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현존과 함께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혼돈으로부터의 제의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질서를 지켜나간다는 것은 공간적인 분리에 의하여 질서를 창조한 창조의 패턴에 그 기초를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적인 분리의 경우도 이와 같다. 이스라엘의 제의적인 체계에서 시간은 보통의 시간과 거룩한 시간으로 구분되어지고 일할 수 있는 날과 쉬는 날로 구분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에 어느 누구든지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하게 되면 안식일의 거룩성을 오염시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안식일을 통하여 거룩한 시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출애 31,12-17).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하는 안식일(출애 24,15-18a)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구원을 경험하고 거룩한 시간을 지키지 못하면 하느님이 떠나시고 나아가서는 개인과 사회가 파멸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른 보통의 날로부터 거룩한 날을 구분함으로 유지되어지는 제의적인 질서는 명백히 시간적인 분리를 통하여 질서를 창조하신 첫 창조에 그 기초를 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제사는 장소와 시간 등의 분리를 통한 거룩의 회복과 유지가 그 목적이며 그러한 분리의 개념은 혼돈에서의 분리를 통한 질서의 창조에서 그 기본적 개념을 찾기 때문에 제사신학의 근간은 구속신학이라기보다는 창조신학이라는 점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지혜와 제사신학의 경우에 창조신앙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구속에 대한 종속관계로 이해되어지지 않는다. 비록 이스라엘의 창조전승이 후에 구속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구속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서 종속적 개념으로 나타났다 하더라도 적어도 구약의 또 다른 전승에서는 창조가 독립적인 기능을 갖고 있었으며 그 자체로서도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구속사의 시작으로서의 창조를 제시하는 창조의 구원론적인 이해는 구약에 나타난 창조와 구속의 관계성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창조가 단순히 구원 역사의 신학적 영역 안에서만 이해되어 질 때 그러한 이해는 본래적으로 구원역사와는 독립적이며 구원역사의 관점에 의하여 지배되어지지 않는 창조의 모티브들(Motifs)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가 단순히 구속사의 거울을 통해서만 이해되어질 때 창조의 의미는 제한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연과 생태계의 문제가 인간 구원의 문제와 연결되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자연이 희생될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하기도 하고 창조와 자연의 문제가 자체적으로 그 중요성을 상실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폰 라드가 주장한 창조에 대한 구속론적인 이해의 영향 아래서 구약에 나타난 창조기사의 우주론적인 연구가 그 자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 무시되어져 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근 30여년 동안에 있어왔던 창조신학에 대한 연구는 창조신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곧 구약에 있어서 창조가 역사 혹은 구속사와 직접 관련되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구속의 사건에서도 단순히 종속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건의 근본적인 기초가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논단11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