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이 하느님 밖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악이 하느님 밖에서 유래했다는 말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이지요.
뭔가 모순되는 듯 느끼시는 것은 창세기 이야기에서 과학적인 정확성(모순 없는 표현의 정확성)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뱀에 관한 문제, 원죄에 관한 문제로 국한시켜 볼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설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의 문제로 넓게 보시면 좋겠습니다. 마거릿 누팅 랄프의 『구약성서 기원 발견하기』(바오로딸)를 참고하여 써드리니 좀 긴 내용이지만 공부 삼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창조가 시작될 때 살던 사람이 아닙니다. 이건 이미 구약입문 2과를 공부하셨으니까 다 아시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교재를 통해 배우신 것처럼 창세기의 창조설화는 진리를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진리’와 과학적 또는 역사적 사실을 동등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역시 2과를 통해서 배우셨을 테니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이 진리들은 우리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함하며, 그것들은 우리의 존재 이유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살아 있는가?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느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행위는 무엇인가? 등등,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대단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쉽게 파악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질문을 할 때 우리는 신비의 영역에 들어갑니다.
성경이 쓰여지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런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 그들의 고유한 체험을 들여다보았겠지요.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체험,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이런 체험과 사건에서 하느님이 어떻게 당신을 계시하시는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자신의 영적 통찰을 이야기 형식으로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이 특별한 종류의 이야기를 ‘신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신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저자가 이해를 넘어서는 실재를 말하기 위해 이미지와 상징을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그 진리가 이해를 넘어서기 때문에 저자는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서 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저자가 이미지와 상징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그 이야기가 ‘진리가 아니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자는 그가 사용하는 뚜렷한 상징을 통해 이야기를 역사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신호를 우리에게 보냅니다.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생명의 나무, 그리고 말하는 뱀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이야기가 상징을 빌려 전개되고 있지만 그것은 현실을 다룹니다.
저자는 자신의 체험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관찰은 저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합니다. “왜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가? 고통이라는 현실이 사랑이고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양립할 수 있는가?”
아담과 하와 이야기에는 이런 의문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저자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뿌리는 죄라는 믿음을 가르칩니다. 고통은 하느님이 선고한 벌이 아니라 죄의 결과입니다. 배고픔, 나약함, 심지어 죽음도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결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신화’(혹은 설화)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제 뱀의 이미지 또한 상징임을 이해하셨을 테니까 질문하신 내용으로 초점을 모아보겠습니다.
여기서 뱀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짐승들(2,19) 중의 하나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생각하는 뱀은 ‘악마적’ 세력의 상징은 아니며, 뭇 짐승과 구별되는 점이라면 단지 뱀이 좀 더 영리하다는 점입니다. 뱀이 ‘간교하다’고 하였는데 ‘간교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룸’은 ‘지혜롭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낱말입니다. 따라서 ‘간교한 뱀’은 나름대로 치밀한 지식 체계를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충동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도 타당한 해석입니다.
육체적, 감각적 충동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분명히 인간의 내부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은 인간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내부에 있는 존재입니다. 저자는 인간과 인간의 죄책만을 문제삼을 뿐이지 악을 어떤 방식으로든 객관화시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저자가 유혹의 동인을 인간 밖에 설정해 놓은 것은 가시적인 표현을 하기 위한 필요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뱀의 정체가 아니라 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럼 왜 하필 뱀으로 표현했을까요? 뱀은 고대 근동에서, 예컨대 가나안에서는 번식력의 상징으로, 이집트에서는 정치력의 상징으로 큰 구실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주변의 나라에서 신으로 떠받드는 뱀이 단지 하나의 피조물일 뿐임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림으로써 뱀을 숭배하고자 하는 유혹(우상숭배의 유혹)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고 싶은 또 하나의 의도가 이 설화의 저자에겐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간교함이라는 악과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가 결국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 그리고 그 간교함이라는 것은 뱀이 지닌 속성이라기보다는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죄의 경향임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이 선하시다는 점과 위배되는 이야기가 아님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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