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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어대가리

깜장보석 2006. 3. 15. 11:04

[제목] 북어 대가리
  [페이지] F01
  희곡 이강백
  연출 김광림

  [페이지] F02
  이강백  . 1947년생
          . 197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으로 연극계 데뷔
          .  <봄날>,  <칠산리>,  <동지섣달 꽃  본듯이>,  <통  뛰어넘기>  등  20여 편의  작품으로 공연하였음.
          . 동아 연극상, 대한민국 문학상, 서울 연극제 문학상,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등 수상
  차례
  제 1 장 ----------------------------------------------------- 9
  제 2 장 ---------------------------------------------------- 25
  제 3 장 ---------------------------------------------------- 33
  제 4 장 ---------------------------------------------------- 51
  제 5 장 ---------------------------------------------------- 69
  제 6 장 ---------------------------------------------------- 81
  이강백 작 . 김광림 연출의 <북어 대가리>에 대하여 / 이재명 -- 95
  [페이지] F04
  북어 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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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장인물
  자앙 ---- 창고지기
  기임 ---- 창고지기
  트럭 운전수 ---- 노름꾼
  미스 다링 ---- 트럭 운전수의 딸
  [페이지] F06
  무대 / 창고(倉庫)
  이 연극의  무대는 창고이다.  직사각형의 단순한  모습에 출입구가  하나 있을뿐 창문은  찾아볼 수
없다. 지붕 어딘가에 환기통이  있는지 하루 중에 극히 짧은 시간  동안 한 줄기의 햇빛이 비춰질 때가
있다.  그러나  창고  내부는 완전히  어둡다.  그  어둠을  밝히는  것은  창고의  천정 높이  매달린
백열전등들이다. 창고  안에는 두 명의 남자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창고지기이다. 둘 다 홀아비로서
사십대쯤 나이 들어 보인다. 그들은 창고 구석에 살림 도구들 - 석유 곤로, 냄비, 그릇, 식탁, 침대 등
- 을 갖춰놓고  있다. 그들에게는 창고 안에서 상자들을 보관하는  일과 먹고 자는 삶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즉,  직업과 생활이  같은 것이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살림 도구들은 비록  값싼 물건들이지만
말끔하게 손질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여있는  냄비들과 놋쇠 국자가 그렇다.
하지만 개인 도구들은  언뜻 보기에도 상당한 차이가 난다.  자앙의 침대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으나,
기임의 침대는  지저분하게 흐트러져 있다. 자앙의  침대 밑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을 정리해서 넣어둔
상자들이 있다. 그러나  기임의 침대 주변에는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들,  싸구려 도색 잡지, 그 밖의
소지품들이 널려있다.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공동 사용 도구들은 자앙이 항상 도맡아 정결하게 손질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새벽 여섯  시 반이  되면, 단  하루도 빠짐없이  화물 운반용  대형 트럭이
상자들을  싣고 온다.  그 트럭은  창고에 새로  보관할 상자들을  내려놓고, 보관했던  상자들 중에서
출고할 상자들을  실어간다. 창고지기들은  트럭 운전수가  상자들과 함께  가져온 서류를  받아서, 그
서류에 적힌 대로  작업을 한다. 옛날에는 창고지기들이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옛날엔 감자와 토마토  같은 농산물, 말린 생선과 미역 같은  수산물이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그러한
물건들은 거의  대부분이 부속품들이다.  그 부속품들이 하나로  모아져서 어떤  전체를 만들 것이라는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그 완성될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 더구나 그 부속품들은 상자
속에 단단히  포장되어 있으므로, 고의적으로  뜯어보기 전에는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도 없다. 물론
상자를 뜯어서 그 속에 든 것을 꺼내 본다고 해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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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지] 009
  [장]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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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무렵. 두  명의 창고지기,  자앙과 기임은  창고 문  밖에 놓여  있는 상자들을  창고 안으로
옮겨와서  쌓는 작업을  하고  있다. 트럭이  그  상자들을 문  밖에  내려놓고 떠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창고지기들의 작업은 계속중이다. 그들의 작업은 슈퍼마켓이나 창고에서 흔히 사용하는 화물
운반용 핸들  카에 몇  개씩의 상자들을 싣고  와서, 보관할  자리에 정확하게 쌓는  일이다. 상자들의
옆면에는  아라비아  숫자의  분류  표시가  쓰여있다.  어떤 상자들은  3-1014번에서  3-1082번까지의
일련번호가  쓰여있고  어떤  상자들은  4-9124번에서  4-9300번까지의  일련번호가 쓰여있으며,  어떤
상자들은  5-7708번부터 5-8010번까지의  일련번호가  쓰여있다.  또한 창고  안의  가득차  있는 다른
상자들도 각각  고유한 번호들이  표시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자앙은 트럭  운전수에게서 받은 서류와
상자들을 대조하면서, 각기 다른 일련번호의  상자들이 뒤섞이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는
창고 안에 상자들을  쌓는 위치가 맞는지 몇 번이나 신중하게  검토하고, 그 위치에 상자들을 정확하게
쌓았는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자앙의  그런 꼼꼼한 작업 태도는 기임에게는 짜증스럽게 느껴진다.
상자들을 옮겨와서 쌓는 작업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임의 짜증은 심해져서, 상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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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는 그의 태도는 점점 거칠어 보인다.)
  [자앙] 조심해! 아무렇게나 쌓지 말구!
  [기임] 알았어.
  [자앙] 그 자리가 맞아? 틀리면 안 돼.
  [기임] 알았다니깐!
  [자앙] 목소리가 왜 그래?
  [기임] 내 목소리가 어때서?
  [자앙] 잔뜩 짜증이 났군.
  [기임] (핸들  카의 상자들을 소리나게 내려놓는다.)  새벽 여섯 시 반에  트럭이 오잖아. 한참 곤히
자고 있을  때 말야. 상자들을  싣고 와서는 빵빵  경음기를 울려댄다구. 빌어먹을.  그런데 지금이 몇
시야? 새벽 선잠을 깨서부터 지금까지 우린 쉬지 않고 일만 했어!
  [자앙] (서류와 상자를 대조하며) 일할 때는 온 정신을 쏟아. 그럼 불평 따윈 생기지 않는다구.
  [기임] 난 너처럼 굼뜨게 일하는  건 싫어. 아무렇게나 운반해서 그냥 쌓아버리면 간단히 끝날 것을,
너는 상자 하나 옮겨 놓고 서류 한 번 보고, 상자 두 개 옮겨 놓고 서류 두 번 보고---. 난 질렸다구!
  [자앙] 이 서류  좀 봐. 3-1014번에서 3-1082번까지의  상자들은, 4-9124번부터 4-9300번 상자들과는
절대로  뒤섞이지 않도록  쌓아  두라는 거야.  더구나  오늘 작업은  복잡해.  5-7708번부터 5-8010번
상자들은,  이미 보관중인  2-5631번부터 2-6907번  상자들과,  6-2122번부터 7-8044번  상자들 사이에
쌓아두라고 했어.
  [기임] 정말 속 터져 죽을 일이군!
  [자앙] 이 서류를 보라니깐.
  [기임] 난 안 봐!
  (기임, 핸들 카를 끌고 창고 밖으로 상자들을 가지러 간다. 자앙은 그 동안 잘못 쌓은 상자들을 고쳐
쌓는다. 기임이 더욱 짜증난 모습으로 상자들을 싣고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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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앙] 침착해.  신경질 내지 말구.  서류와 상자들을  꼼꼼히 확인하면서 제  위치에 쌓아놓는 것이
시간 절약이야. 짜증난다구 아무렇게나 쌓아 놓았다간 다시 고쳐 쌓기에 시간이 몇 배나 더 걸리거든.
  [기임] (핸들  카에서 상자들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으며)  다시 고쳐  쌓을 필요는 없어!  창고 안에
두었다가 다시 창고 밖으로 가져갈 걸 아무려면 어때!
  [자앙] 그 말은 창고지기답지 않군.
  [기임] 내가 창고지기답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자앙] 생각해 봐. 너와 내가 이 창고에서 몇 년을 지냈지?
  [자앙] 그래, 그래!  네가 끔찍하다고 할 만큼 그렇게 우리는  오랫동안 창고지기를 해 왔다구. 그런
우리가 아무렇게나 상자들을 취급하면 안 되잖아.
  [기임] 제발,  고지식하게 굴지 마!  다른 창고에서는 어떻게  하는 줄 알어?  트럭이 와서 상자들을
내려놓자마자 게눈 감추듯이 순식간에 해치우는 거야. 그리고는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노는 거지.
  [자앙] 나도 알아. 그들은 함부로 일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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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임] 그런데도 아무 탈이 없잖아?
  [자앙] 그건 성실치 못한 짓이야.
  [기임] 우리도 그렇게 하자는 거야. 내 말은!
  [자앙] 난 못 해.
  [기임] 왜 못 해. 좋은 방법인데?
  [자앙] 그들의 방법은  옳지 않아. 창고 안에서 일생을  보내는 사람들이, 상자들을 함부로 다룬다는
건 자신에 대한 모독 행위라구.
  [기임] 인생 어쩌고 하면서 잘난 체하지만, 넌 사실은 바보 멍청이라구. 바로 옆 창고에 새로 들어온
햇병아리 있잖아.  그 녀석도 벌써  꾀를 부릴 줄 아는데  말야, 너는 그토록  오래됐으면서 뭣 때문에
고지식한지 모르겠어!
  [자앙] (기임이 쌓은 상자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한다.) 3-1025번 상자가 왜 여기에 있지?
  [기임] 응, 내가 갖다둔 거야.
  [자앙] 여기 두면 안 돼. 이 상자는 다른 것들과 섞어 두지 말랬어.
  [기임] 일부러 이렇게 한 거라니까. (상자를 옮기려는 자앙을 제지하며) 그냥 둬, 제발. 상자를 잘못
쌓아 두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두고 보자구.  미리 장담하지만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없다는 걸
알아야 넌 굼벵이마냥 굼뜬 짓을 그만둘 테구, 다른 창고지기들처럼 재빠르게 상자들을 해치우겠지.
  [자앙] 이건 꼭 악몽 같군! 난 어젯밤 무서운 꿈을 꿨는데 악마가 나타나더라구. 난 악마란 흉칙하게
생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냐. 아주 미끈한 미남으로, 너처럼 잘 생겼어.
  [기임] 나처럼?
  [자앙] 그렇다니까.  키가 좀  작기는 했지만  어쨌든 아주  잘 생긴  악마였지. 그  악마가 말이야,
꿈속에서, 3-1025번 상자를 꼭 이 자리에  갖다 놓더라구. 그리고는 나를 시험하는 거야. 아무 일도 안
생길 테니깐 염려할  것 없다면서 달콤한 말로 날 유혹하더라구.  그런데 내가 몸이 오싹해지면서 정말
무서웠던 게 뭔지 알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지금까지, 단 하나도 틀리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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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다면---. (301025번 상자를 옮겨 제자리에  쌓는다.) 그래서 난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지. 악마야, 시험하지 마라! 나를 시험하지 마!
  [기임] (의심스런 표정으로) 정말 그런 꿈을 꾼 거야?
  [자앙]  그래,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걸.  꿈 속인데도,  악마가 시험하던  상자를  제자리에 갖다
놓으니까가 마음이 안정되더군.
  [기임] 악마가 진짜 나처럼 잘생겼어? 머리에 뿔이 솟았거나 엉덩이에 꼬리가 달리지는 않았구?
  [자앙] 글쎄--- 꼬리까진 확인 안 했는데---.
  [기임] 사실은--- 어제 저녁에 만난 여자가 말이야. 나더러 악마라구 했거든.
  [자앙] 처음 만난 여자가 그랬어?
  [기임] 처음 만난 여잔 아냐. 너한테는 말은 안했지만--- 요즘 저녁마다 만나는 여자가 있어. 그런데
엊저녁엔 좀  특별했어. 내가 술을  샀거든. 맥주를 마셨는데, 그  여잔 술이 쌔더라구.  아무 말 없이
성난 표정으로 벌컥벌컥 마셔대더니, 갑자기 나더러 악마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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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라구 소리 소리 지르는 거야.  그러자 술집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데, 난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구.  아이구, 빌어먹지!  비싼  술 사먹이고  기분 나쁘게  그런  소리나 들어야
한다니---. 그런데 뭐야. 너마저도 꿈속에서 악마 같은 나를 봤다니 말야, 영 살맛이 안 나는군!
  [자앙] 그 여자 술 마시고 있을 때 너는 뭘 했어?
  [기임] 뭘 했다니---?
  [자앙] 옆에서 가만 있진 않았을 것 아냐?
  [기임] 글쎄--- 내가  뭘 했더라---. (자신의 두  손을 번갈아 바라보며) 아,  그래. 이 손은 술잔을
들고 있었고--- 또 이 손은 그 여자의 어깨 위에 올려 놓았어.
  [자앙] 그것뿐이야, 단순히?
  [기임] 생각이 안 나는데, 그것밖엔.
  [자앙] 잘 생각해봐. 뭔가 또 있을 걸?
  [기임] 난 왼손, 오른손, 둘뿐인 걸. 손이 하나 더 있는 것도 아니잖아---.
  [자앙] 너는  그 여자를 화나게  만든 뭔가를 했어. 어깨에  얹었던 손을 잘  생각해보라구. 그 손이
슬그머니 아래로 내려와 그 여자의 허벅지를 만졌다든가 그랬을 거야.
  [기임] 좋아, 그랬다구! 하지만 말이야, 함께 술을 마시면서 허벅지 좀 만졌다고 화낼 건 없잖아?
  [자앙] (잘못된 상자들을 찾아서 고쳐 쌓으며) 사람이란 진실이 통하지 않을 때 화가 나게 돼 있어.
  [기임] 진실이 뭔데?
  [자앙] 진실이 뭔지도 몰라?
  [기임] 모르니깐 묻지!
  [자앙] 진실이란 시험하지 않는 거야. 예를  들자면, 창고 속에서 상자 쌓기 같은 거라구. 우리가 이
상자들을 엉뚱하게 쌓아놓고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건 진실과 어긋난 거지. 너는 그저
장난으로 그 여자 허벅지를 만져서 사랑이 있는지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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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해보니깐, 그 여잔 화가 나 고함을 질러댄 거라구.
  [기임] 그렇게 모든 걸 잘 알면서 왜 너에겐 여자가 없어?
  [자앙] 대신 나한테는 네가 있잖아.
  [기임] 날 사랑한단 말야?
  [자앙] 그럼.
  [기임] 정말 끔찍하군! 네가 내 허벅지를 만지를 광경을 상상해봐!
  [자앙] 난 그런 상상은 안 해.
  [기임] 왜 안 해?
  [자앙] 난 진실로 자네를 사랑하거든. (기임이 쌓아놓은 상자들과 서류를 대조한다.) 이건 엉망이군!
이 상자들을 다시 고쳐 쌓아야겠는데!
  [기임] 고쳐 쌓고 싶거든 자네가 해!
  [자앙] 신경질 내지 마. 우리, 잠시 쉬었다가 저녁밥을 먹고서 다시 고쳐 쌓자구.
  [기임] 난 그럴 시간 없어!
  [자앙] 시간이 없기는--- 밥 먹고 나서 바로 잘 것도 아니잖아?
  [기임] 난  약속이 있어.  어제 나한테 화냈던  여자, 그 여자와  오늘 저녁  다시 만나기로 했다구.
미안하지만 저녁밥은 너 혼자 먹어. 그리고 상자들을 옮기고 싶거든 너 혼자서 실컷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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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임,  핸들  카를  밀쳐버린다.   그리고는  창고  구석에  있는  자신의  침대에가서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자앙, 작업을 중지하고 기임을 바라본다.)
  [자앙] 너를 위해서 충고하는데 말야, 그런 불성실한 태도는 여자들 화만 돋울 뿐이야.
  [기임] 김새는 소리 하지 마!
  [자앙] 넌 만나는 여자들마다 실패했잖아.
  [기임] (손에 잡히는 옷을 둘둘 말아 자앙에게 내던질 자세를 취하며) 입 닥치라구!
  [자앙] 이 상자들을 제자리에 정확하게 쌓고 가봐. 그럼 어떤 여자나 너를 좋아할 거야.
  [기임] (자앙을 겨냥하여 옷을 내던진다.) 입 닥쳐!
  [자앙]  (자신에게 던져진  옷을  집어들고 바라본다.)  이건  너의 하나뿐인  외출복  바지잖아? 다
구겨졌군!
  [기임] 이리 줘.
  [자앙] 구겨져서 입고 갈 수나 있겠어?
  [기임] 어서 내놔!
  [자앙] 내 바지 빌려줄까?
  [기임] 너의---? 너의 긴 바지를 질질 끌고 가라는 거야?
  [자앙] 잠깐 기다려. 그럼 내가 다리미로 다려줄께.
  (자앙, 자신의  침대로 가서 밑에 놓여있는  상자들을 꺼낸다. 옷들을  가지런히 정돈해 담은 상자도
있고,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을 담은  상자, 전기 다리미를  넣어둔 상자도 있다.  그는 전기 다리미를
꺼낸다. 그리고 식탁위에 담요를 반듯하게 펼쳐서 기임의 구겨진 바지를 다려준다.)
  [자앙] 네가 잘되기를 바래. 정말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난 너를 진실로 사랑하거든.
  [기임] 시끄러워! 그런 소릴 들으면 재수가 없어서 아무 일도 안 돼!
  [자앙] 사람이란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구. 네 바지는 너무 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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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아무렇게나 상자를  다루듯이, 옷을  함부로 입기  때문이지. 자주  세탁을 하구,  미리 깔끔하게
손질해 두면 좀 좋아. 그런데 오늘 저녁 또다시 만나기로 한 여자, 어떻게 생겼어?
  [기임] 그런 건 네가 알 것 없어.
  [자앙] 나이는 몇 살인데?
  [기임] 알 것 없다니까.
  [자앙] 이름은? 설마 이름이야 가르쳐주겠지?
  [기임] 다링이야.
  [자앙] 다링---?
  [기임] 응. 모두들 그 여자를 보면 마이 다링이라고 불러.
  [자앙] 그건 본명이 아리나 별명 같은데?
  [기임] 그러니깐 알 것 없다구 했잖아!
  [자앙] 걱정이 되어서 그런 거야.  혹시 어떻게 생겼는지 잘 보지도 않고, 그저 여자니깐 쫓아다니는
건 아닌지 말야.
  [기임] 너는 요즘 잔소리가 부쩍 심해졌어!
  [자앙] 나도 그걸 느껴. 아마 나이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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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임] 나이 탓이라구? 천만에! 난 너와 나이가 같은데 잔소리가 없잖아.
  [자앙] 어쨌든 늙으면 잔소리가 많아져.
  [기임] 우리가 늙었다는 거야?
  [자앙]  젊었다곤 할  수  없지. 인정할  건  인정하자구. 너와  나는  이젠 젊진  않아.  여자 뒤를
쫓아다니는 건 젊은 애들이나 하는 짓이야. 이젠 조용히 자기 자신을 생각해야지.
  [기임] 나도 생각이 있어.  난 아무 까닭 없이 여자를 쫓아다니는  게 아냐. 빌어먹을. 이 창고 속을
보라구! 상자들을  운반하고 보관하는 일이 지겨워  죽겠는데, 먹고 자는 생활도  이 창고 속에서 하고
있잖아! 난 나 자신이 늙기 전에, 여자하구 결혼해서 이 창고 속을 빠져나가고 싶은 거야!
  [자앙] 일하는 것과 사는 것은 같은 거야. 그게 서로 다르면, 사람은 불행해져.
  [기임] 정말 고리타분한 소릴 하고 있군!
  [자앙] 그리고  말야. 이  창고를 빠져나가면  또 뭐가 있을  것 같아?  저 하늘의  해와 달, 별들이
빛나는 우주는 거대한  창고이고, 우리의 이 창고는  그 조그만 창고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창고 중에
하나의 아주 작은  창고거든. 결국은 창고를 빠져나가도 또다시  창고에 지나지 않으니깐, 그 누구든지
완전하게 창고 밖으로 빠져나간다는 건 불가능해. 만약 우리가 이 창고 속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다른
창고에 들어가본들 행복할  수는 없어. 그래서 바로 이 창고,  이 창고 속에서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한 거라구. (다림질을 마치고 바지를 기임에게 준다.) 바지를 입어. 오늘 입고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벗어 놔. 내가 깨끗하게 빨아줄께.
  (기임,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바지를 받아 입는다. 자앙은 침대  밑 상자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다림질로 곱게 다려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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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앙] 깨끗한 손수건 없지? 이걸 가져가.
  [기임]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자앙] 돈은 있어?
  [기임] 걱정 마. 있으니깐.
  [자앙] (자신의  상자에서 돈을 꺼내  기임에게 준다.)  잘 해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술집에 가지
말고, 오늘은 어디 조용한 음식점엘 가라구.  그리고는 절대로 여자 허벅지를 만지면 안 돼. 점잖게 두
손은 식탁 위에  올려놓고, 다만 눈으로 그 여자의 눈을  바라보는 거야. 말할 때는 한마디, 한마디씩,
마치 상자를 정확하게 쌓듯이, 정승들여 자신의  진실을 말해. 아참, 한 가지 더 주의할 게 있어. 너는
식사할 때 음식  묻은 입을 손으로 쓱쓱  문질러 닦는데 말야. 꼭 손수건을  꺼내 닦으라구. 그런 모습
하나 하나가 여자한테는 매우 중요하게 보이는 법이야.
  [기임] 난 네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어.
  [자앙] 뭘---?
  [기임] 내가 여자를 만나러 가는 걸  싫어하면서도 말야. 갈 때는 꼭꼭 챙겨 주잖아? 지금도 그렇지.
의붓어미처럼 귀따갑게 잔소릴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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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고는, 바지도 다려주고 돈도 주면서 잘 해보라나---. 도대체 뭐가 진짜 네 마음이냐구?
  [자앙] (기임이 아무렇게나 쌓아둔 상자들 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서류와 대조하면서 일련번호대로
상자들을 고쳐 쌓는다.) 실망하지 말고 돌아와, 오늘은.
  [기임] 그게 대답이야?
  [자앙] 그래, 네가 낙심한 꼴을 보면 내 마음이 아퍼.
  (기임, 또 잔소리를 들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창고 문 쪽으로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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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그러더니 잠시 멈춰서서 자앙을 뒤돌아본다.)
  [기임] 오늘밤 혼자서 그걸 다 옮겨 쌓을 거야?
  [자앙] 어서 가. 늦지 말구.
  [기임] 수고해. 그럼, 난 갔다 올 테니깐.
  (기임, 창고 밖으로 나간다. 자앙을 상자 옮겨쌓기를 계속한다.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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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제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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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밤.  천정의 전등들은  소등되어  창고  내부는 어둡다.  오직  자앙의  침대맡에  켜둔 전기
스탠드만이  불빛을  밝히고  있다. 자앙은  돌아오지  않는  기임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침대 밑에서  꺼낸 책을  읽는다. 하지만  독서에 몰두하지  못하고, 가끔씩  시선을 돌려
창고문 쪽을 바라본다. 자앙, 마침내 책읽기를 중단하고 신발을 벗고 침대 위에 올라간다. 그러나 잠들
수 없다는 듯이  상반신을 침대맡에 기댄 채 기임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창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앙은 반갑게 문을 향해 외친다.)
  [자앙] 들어와! 문은 안 잠갔어!
  (문 두드리는 소리, 계속된다.)
  [자앙] 문 안 잠겼으니 그냥 들어오라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에서 미스 다링이 잔뜩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기임을 힘겹게
부축하고 비틀거리며 들어온다.)
  [다링] 좀 도와주세요! 무서워 죽겠어요!
  (자앙, 놀란 모습으로 다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는다. 창고 안에 들어온 기임은 주저앉아
버린다. 미스  다링은 그를  붙들어 세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자앙이 기임을 침대에  데려가 눕힌다.
웃옷을 벗기고 신발을 벗긴 다음 담요로 기임을 덮어준다.)
  [다링] 무슨 남자가 그래요?
  [자앙] 네---?
  [다링] (침대의 기임을  가리키며) 이 사람 말이에요, 술 몇  병 마시고는 정신 나갔어요! (자앙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나, 미스 다링이에요. 미, 스, 다, 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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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앙] (엉거주춤 손을 잡고 악수하며) 아, 그러세요--- 말씀은 들었죠.
  [다링] 미스  다링이 무슨 뜻인지  아세요? 사랑스런 여자다,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찬  물 한 잔
주시겠어요?
  [자앙] (살림 도구 있는 곳에서 유리컵에 물을 따라 가져온다.) 여기 있습니다.
  [다링] (물을 마시며) 물인지 술인지 모르겠네--- 나도 잔뜩 취했거든요.
  [자앙] 오늘은 술집 대신 음식점으로 가라고 했는데요?
  [다링] 그게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나요.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고---. (침대에 누워있는 기임을
가리키며)  저 남자는요,  창고  속에서 사는  건 싫증이  났대요.  하루 종일  상자  따위나 들여오고
내보내자니 지겨워  죽겠다면서, 어찌나  술을 먹고  떠들어대는지 내  귀가 아플  지경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면서요? 언제나  성실하고 정확해서, 단  하나의 상자도  틀리지 않는다죠? 그래서
호기심이 들더라구요. (다시 자앙에게 손을 내밀며) 나, 미스 다링이에요. 미, 스, 다, 링!
  [자앙] 우린 아까 인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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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링] 아참, 그랬었죠! 내 정신이 오락가락하네요!
  [자앙] 이 늦은 밤에--- 데려다 드릴까요?
  [다링] 우리 집에 어딘지 아세요?
  [자앙] 아뇨. 하지만 가르쳐주시면---.
  [다링] 걱정 마세요. 조금 있으면 술이 깰 거예요.
  [자앙] (식탁의자를 끌어다가 다링에게 권하며) 그럼 잠깐 앉으시죠.
  [다링] 고마워요.  (의자에 앉아서 창고 안을  둘러본다.) 캄캄해요. 이  세상의 모든 창고는 이렇게
어둡다구요.
  [자앙] 전등을 켤까요? 전등을 켜면 환해집니다.
  [다링] (고개를 흔든다.) 난 알아요. 낮에도 창고 속은 캄캄한 걸요. (빈 유리컵을 자앙에게 내밀며)
물 한 잔 더 주시겠어요?
  (자앙,  다링에게 가까이  다라온다. 그러나  다링의 풀어헤쳐진  옷  때문에 시선을  정면으로 주지
못하고 유리컵을  받으려 한다.  다링은 그것이  재미있다는 듯이  일부러 치마를 무릎  높이 치켜들고
유리컵을 흔들면서 유혹적인 태도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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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링] 날 똑바로 봐야죠. 그래서 잔을 집을 수 있잖아요?
  [자앙] (다링을 쳐다보며 빈 유리컵을 잡는다.)
  [다링] 술은 없어요?
  [자앙] 없습니다.
  [다링] 다른 창고에는 있던데요?
  [자앙] (엄격한 표정으로) 이 창고에는 없어요.
  [다링] 당신은 굉장히 친절하고, 자상하고, 엄격하면서, 또 잔소리가 많다면서요?
  [자앙] 내 친구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다링] 당신이  의붓어미래요. 여자와  만날 때는  단정한 태도를  취하라, 절대로  여자의 허벅지를
만지면 안  된다, 그건 진실과는  어긋난 짓이다, 진실도  없이 사랑이 있는가를  시험하지 말라, 그럼
여자는 성을 내며 고함을 지르게  된다----. 자, 시험해 보세요, 사랑이 느껴지는지, 내 다리를 만져서
시험해 보라구요!
  [자앙] 저어--- 물을 더 갖다 드리죠. (살림 도구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아니면 차를 끓여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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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링] 이 근처 창고지기들은 모두 시험해 봤어요! 당신 혼자만 안 해본 거예요!
  [자앙] 난 그런 건 못 합니다.
  [다링] 왜 못 하죠?
  [자앙] 장난으론 못 해요.
  [다링] 나도  장난으로 해보자는 건  아니예요. (흐트러진  옷을 바르게 고쳐  입으며) 우리, 장난이
아닌 진실로써  해봐요. 다른 창고지기들은  모두 시험해 봤지만요, 그들은  나한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요. 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그들 좀 보세요. 굉장한  걸 느꼈다는 듯이 야단법석이죠. 모두
다  거짓이에요. 누구  하나 나를  진실로 대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모두들 창고  속에서 아무렇게나
상자를  들여오고 내보내듯이,  나를 아무렇게나  함부로 다룰  뿐이라구요.  (살림 도구가  있는 곳에
멈춰선 자앙에게) 이리 가까이 오세요!  제발 도망가지 말고 가까이 와서 나를 시험해보세요! (멈춘 채
오지 않는  자앙을 향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어째서, 당신은, 나를,  시험해보지도, 않는
거에요!
  (자앙, 침묵한다. 무대의 조명이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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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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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녘. 상자들을  실은 대형 트럭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창고 문 앞에  도착한다. 이어서 트럭의
경음기가 요란하게  울린다. 창고 안의 자앙은  그 소리를 신호처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침대에서
일어나 전등을 켠다. 그리고 기임의 침대에 가서 잠들어 있는 그를 흔들어 깨운다.)
  [자앙] 일어나! 일어나! 트럭이 왔어!
  [기임] (귀찮다는 듯 돌아눕는다.)
  [자앙] 트럭이 왔다니까!
  [기임] (몸을 웅크리며) 날 좀 가만둬!
  [자앙] 상자들을 옮겨야지. 어서 그만 일어나!
  [기임] (담요를 끌어올려 얼굴을 덮는다.) 날 그냥 두라구!
  [자앙] 어디 몸이 아픈 거야?
  [기임] 어젯밤 마신 술이 안 깨서 그래!
  [자앙] 그래, 그래---- 아프지 않다니깐 다행이군.
  (트럭의 경음기 소리가 재촉하듯이 반복해서  들린다. 자앙은 창고의 문을 열기 위해 급히 뛰어간다.
잠시 후 트럭 운전수와 자앙이 창고 안으로 들어온다.)
  [운전수] 임자 별명이 굼벵이라면서?
  [자앙] 누가 그래요?
  [운전수] 이 근처  창고지기들이 다들 그러던데. 임자가  어찌나 꾸물거리는지 굼벵이래. (들고 있는
서류를 자앙에게 준다.) 오늘은 보관시킬 상자가 일흔다섯 개. 가져갈 상자가 서른두 개야.
  [자앙] 오늘은 들어오는 상자는 많은데 나가는 상자는 적군요.
  [운전수]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지! (침대에 누워있는 기임을 가리키며) 저 친구는 왜 안 일어났어
  [자앙] 곧 일어나겠죠.
  [운전수] 장인어른이 오셨는데 누워있다니, 버릇이 없군!
  [자앙] 장인어른이라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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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전수]  내가  저 친구의  장인이  될  거래. 기막히지?  나도  몰랐는데,  술집  사람들이 나한테
귀뜀해주더군. 어쩌면  저 친구와 내  딸이 결혼할 것  같다구. 물론 아직은  믿을 게 못  돼. 내 딸은
세상이 다 알아주는 바람둥이야. 이놈 저놈 사귀는 놈이 워낙 많거든.
  [기임] (덮어쓴 담요를 젖히고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며) 나 말고 또 어떤 놈이 있어요?
  [운전수] 어, 어--- 일어났어?
  [기임] 도대체 그놈들이 누굽니까!
  [운전수] 이 근처  창고지기들이지. 누구긴 누구야. (자앙에게) 그런데 저  친구 몇 살이야? 내 눈엔
마흔 살도 더 넘어 보이는데?
  [기임] 서른아홉입니다. 나는!
  [운전수] 늙기는 늙었군. 하지만 요즘 젊은  것들보다 늙은 게 낫지. 젊은 것들은 내 딸하고 함께 잘
궁리만 하지 결혼 같은 건 생각지도 않거든.
  [자앙] (창고 밖으로 나가며) 우선 트럭의 상자부터 내려놓죠!
  [운전수] (자앙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 여봐, 조심해서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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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임] 걱정 마세요. 저 친구는 실수하지 않아요.
  [운전수] 하긴 그렇군. 저 굼벵이가 실수할 리 없지. (호주머니에서 화투를 꺼내 식탁 위에 놓는다.)
어때? 이따가 오후에  일 끝내고 올테니깐 한판 하자구! 장인과  사위끼리 말야. 돈내기 화투를 쳐봐야
사람 됨됨이를 알지! (기임의  침대에 다가와서 어깨를 툭 치며) 여봐,  늙은 사위, 난 이 침대에서 쉴
테니깐 자넨 트럭에 가서 상자 내리는 거나 거들지 그래?
  [기임] (운전수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내려온다.) 네, 그럼 편히 쉬시죠.
  [운전수] (침대에  올라가 눕는다.  한 손으로 코를  쥐고 다른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아이구, 술
냄새! 어젯밤 얼마나 퍼마신 거야?
  [기임] 따님은 술이 더 쎄던데요?
  [운전수] 그년이 에밀 닮아서 그런 거야. 에미가 술고래였거든!
  [기임] 지금도 잘 마십니까?
  [운전수] 죽었는데 어떻게 마셔.
  [기임] 아--- 그래요?
  [운전수] 에미 죽었단 말도 안 해, 내 딸이?
  [기임] 안 하던데요.
  [운전수]  어렸을 때  죽어서 잊어먹은  모양이군. 자넨  어서 트럭의  상자들이나 잘  내려놔! 장모
죽었다 슬퍼하지 말구!
  [기임] (식탁에 가서 화투를 집어  바지 호주머니 속에 넣는다.) 화투는 감춰두죠. 오후에 한판 하러
꼭 오세요.
  (기임, 숙취가 깨지 않은 탓인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나간다. 트럭 운전수는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켜기도 하고  좌우로 돌아눕기도 한다.  마침내 가장 편한  자세를 찾은 듯이  반듯하게 눕더니 만족한
표정이다.)
  [운전수] 사위  덕분에 편해서 좋군! (침대에  누운 채 허공에 손을  뻗쳐서 무엇인가 붙잡는 시늉을
한다. 그럴 때마다 마술처럼 허공에서  화투장을 잡아낸다.) 요즘 젊은 것들은 노름할 줄도 몰라. 돈을
잃으면 체념할 줄 알아야 하는데 말야, 딴 돈 다시 내놓아라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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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쓰고 덤비거든.  노름은 역시  늙은 놈하고  해야 돼.  늙은  놈은 속이기도  쉽고, 뻔히  속은 줄
알면서도  항의조차 안  하지.  그나저나  우리 늙은  사위,  그 동안  창고지기  하면서  돈은 얼마나
모았을까---? (허공에서  잡아 모은 화투장들을 배  위에 올려놓고 한  장씩 뒤집으며 운수점을 친다.)
가만 있자---  오늘, 재수점이나  쳐보자구. 뭐,  그저 그렇군.  신통한 날이 아냐---  (갑자기 트럭의
경음기 소리가  들린다.) 저런, 저런, 누가  장난하는 거야?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다. 화투장을 긁어
모아 소매 속으로 감추면서 창고 밖을 향하여 외친다.) 누구야? 함부로 운전대에 손대면 안 돼!
  (자앙, 창고 안으로 들어온다.)
  [자앙] 트럭의 상자들은 다 내려 놨습니다.
  [운전수] (침대에서 내려온다.) 내 트럭의 경음기를 누가 저렇게 울려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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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임, 창고 안으로 들어온다.)
  [기임] 빌어먹을! 저 상자들을 옮겨 쌓으려면 죽을 지경이 되겠어!
  [운전수] (기임에게) 네가 마구 울려댔지?
  [기임] 그거 재미있던데요!
  [운전수] 뭐, 재미있다구? 젊은 애도 아니면서 장난을 했단 말야?
  [기임] 야단칠 것 없잖습니까? 장인어른 트럭이 내 트럭인데---.
  [운전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정말 내 사위가 되기 전엔  절대로 트럭엔 손대지 마! (창고 밖으로
나가며) 꾸물대지 말고 실어갈 상자들을 내놔! 시간 없어!
  [기임] 저 영감쟁이, 성미가 고약하군.
  [자앙]  (서류를  들고 창고  안을  다니면서  내보낼 상자들을  확인한다.)  여기야,  여기! 트럭에
실어보낼 상자들이 여기 있어.
  [기임]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자앙이 오라는 곳에 간다.) 아무 거나 실어 보내!
  [자앙] 6-6347번부터 6-6279번까지, 서른두 개의 상자야.
  [기임] (상자들을 발로 차며) 정말 기분 나쁜데! 경음기 좀 울렸다고 야단칠 건 없잖아!
  [자앙] 안 돼, 상자를 발로 차면!
  [기임]  아까 너도  봤잖아.  난  내 침대를  저  영감한테 양보했었다구!  내  침대는  자기 것마냥
여기면서, 나더러는 자기 트럭에 손도 대지 말라니, 그게 무슨 고약한 심보야!
  [자앙] (핸들  카를 끌고 와서  상자들을 싣는다.)  급하다고 한꺼번에 많이  싣지는 말어. 안전하게
여러 차례 나눠 싣자구.
  [기임] 될 수 있으면 많이 실어내. 여러 번씩 저 영감쟁이를 볼 필요는 없잖아.
  (창고 밖의 트럭에서 재촉하듯이 경음기 소리가 울린다.)
  [기임] 아이구, 지랄하네! 자기 트럭이라고 맘대로 울려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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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전수] (창고 안을 향하여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뭣들 해, 어서 나와!
  (자앙, 핸들  카에 상자들을 싣고  나간다. 뒤따라 가던  기임은 멈춰 선다.  기임, 잠시 망설이더니
자신의 핸들  카에서 상자 하나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다른 상자를  들어 올려 싣고  나간다. 잠시 후
창고 문 앞에서 트럭이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기임, 빈 핸들  카를 끌고 창고 안으로 들어온다. 창고
문 앞에서 자앙이 큰 소리로 외친다.)
  [자앙] 여봐, 시작한 김에 상자를 창고 안으로 옮겨놓자구!
  [기임] 들어와! 들어와서 커피나 한 잔 마시고 옮겨!
  (기임, 석유 곤로에 불을 붙이고 냄비를 올려놓는다. 자앙이 창고 안으로 들어온다.)
  [자앙] 커피 끓인다면서 냄비를 올려놨군?
  [기임] 응, 얼큰하게 해장국을 끓이려구. 어제  마신 술 때문에 골치도 아프고 속도 쓰려. 혹시 북어
한 마리 없어?
  [자앙] 요즘 그 말이 입에 붙었어. (기임의 목소리를 흉내낸다.) 북어 한 마리 없어?
  [기임] 아마, 내가 다 먹었을 거야. 그렇지?
  [자앙] 고춧가루만  남았지, 이제는.  (살림 도구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서  고춧가루가 담긴 큼직한
유리병을 가져온다.) 식탁에 가서 앉아 있어. 내가 해장국을 끓여줄께.
  [기임] 고춧가루만 끓인 건 먹고 싶지 않아.
  [자앙] (자신의 침대 밑에서 상자를 꺼내 온다.) 이게 뭔지 알아?
  [기임] 뭐야---?
  [자앙] (상자를 기임에게 준다.) 열어봐.
  [기임] (상자를 열고 환성을 지른다.) 이거, 북어 대가리잖아!
  [자앙] 그래, 네가 몸뚱이는 다 먹고 대가리만 남았어. 하지만 요긴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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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쓰려고 내가 대가리들은 잘 보관해뒀지.
  [기임] 역시 넌 빈틈이 없어!
  [자앙] (냄비 뚜껑을 열고 물이 끓는 것을 확인한다.) 물이 펄펄 끓어.
  [기임] 알았어! 알았다구! 이 북어 대가리 좀 봐. 뭔가 심각하게 생각을 하는 표정인데! 몸뚱이를 다
잃은 놈이, 머릿속엔  생각이 잔뜩 남아있는 모양이야! (냄비  속에 북어 대가리를 넣는다.) 아쉽지만,
이젠 내 뱃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라구!
  [자앙] (유리병의 고춧가루를 냄비 속에 뿌려 넣는다.) 이 정도면 얼큰할 거야.
  [기임] 고마워. 정말이야.
  [자앙] 고맙기는---.  (식탁에 가서  앉는다.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 앉아.  북어 대가리가
삶아지는 동안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기임] (경계하는 태도가 되면서 의자에 주춤거리며 앉는다.) 괜히 겁나는데---. 왜 그래?
  [자앙] 어젯밤 굉장히 취했더군. 도대체 몇 시에 돌아왔는지 생각나?
  [기임] 몰라.
  [자앙] 그 여자가 너를 부축해서 데려왔지.
  [기임] 그게 사실이야?
  [자앙] 그럼, 사실이지. 그런데 트럭 운전수는 그 여자가 자기 딸이라고 했어. 너는 그것도 몰랐어?
  [기임] 음, 몰랐어--- 어제는 내가  물어봤거든. 아버지가 뭐 하시는 사람이냐구---. 뭔가 대답을 안
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트럭 운전수라니 정말 나도 놀랐어!
  [자앙]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 전혀 말도 안 해?
  [기임] 그렇다니깐. 자기 어머니가 죽었다는 말도 안 하던 걸.
  [자앙] 그럼 만나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기임] 그냥  횡설수설하는 거지. 아직 젊고,  여자라서 그런지 쓸데없는  소리만 골라 지껄여. 나도
그렇고. 난 나이도 많은데--- 술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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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술을 마시지 않고 이야기하면 서로 쓸모있는 말만 할 텐데--- 그게 안 돼.
  [자앙] 왜 그게 안 되지?
  [기임] 우린  잔뜩 취한 다음부터야  말문이 열리거든.  나를 그렇게 꾸짖는  시선으로 바라보지 마.
어젠 자네가  시키는 대로 하려고 했어.  술집 대신에, 어디 조용한  음식점에 가서 식사나 하자고---.
그런데 빌어먹지! 그 말이 영 입에서 뱅뱅 돌 뿐 나오질 않는 거야. 그래서 술집부터 갔지. 둘 다 성난
표정으로, 우린  술부터 마셔댔지.  거기까지--- 거기까진  생각나. 그리고  또 있어. 네가  나한테 몇
번이나 주의줬던 것 있잖아, 여자 허벅지를  만지면 안 된다는 것 말야. 그건 지켰어. 오른손은 술잔을
들고 있으니깐 그런  짓을 안 하는데, 꼭 왼손이 만지거든.  그래서 술 마시기 전에 왼손을 손수건으로
꼭꼭 묶어 놨지.
  [자앙] (미소를 짓고) 잘 했어. 정말 잘 한 거야.
  [기임] 오랜만에 칭찬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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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앙] 네가 너  자신의 손을 묶어놨다는 건 좀 심했지만  어쨌든 점잖은 태도가 그 여자한테는 좋게
보였을 거라구. 가만 있어. 내가 해장국을 차려줄께.
  (자앙, 놋쇠 국자를 들고 가서 곤로 위에 끓고 있는 냄비의 뚜껑을 열어 본다.)
  [자앙] (국자로 국문을 떠 냄새를  맡으며) 흠, 흠, 근사한데! (냄비를 식탁으로 가져와서 기임 앞에
놓는다.) 조금 식거든 먹어. 뜨거운 국물에 입안을 데지 말구.
  [기임] 이 냄비 속의 북어 대가리를 봐!
  [자앙] (냄비 속을 들여다본다.)
  [기임] 정말  대단한 놈이잖아? (자앙의 손에서  국자를 빼앗아 들고 냄비  속의 북어 대가리를 건져
올린다.) 펄펄 끓는 고춧가루 국물 속에서도 태연하게 눈을 뜬 채 웃고 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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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앙] 그건 왜 꺼내 들고 그래?
  [기임]  (북어 대가리를  자신의  얼굴 앞에  가까이 당겨  바라본다.)  이 놈이  웃네!  정말 웃어!
대가리만 덜렁 남은 놈이 입을 쩍 벌리고 으하하하, 으하하하, 소리를 내어 웃잖아! (자앙의 웃지 않는
표정을 살피며) 그런데 너는 왜 웃지 않지?
  [자앙] (기임의 맞은편 식탁의자에 가서 앉는다.) 왜--- 안 웃느냐구?
  [기임] 그래, 오히려 심각한 표정인데?
  [자앙] 모르겠어, 나도--- 하지만 그런 끔찍한 농담은 싫어. 어서 그 대가릴 냄비 속에 집어넣어---.
  [기임] (북어 대가리를 냄비 속에 넣는다.) 난 네가 좋아할 줄 알았지.
  [자앙] 난 싫어. 그런 농담 하는 버릇은 고쳐.
  [기임] 너는 또  나를 어린애처럼 야단치는군. 그래, 언제나 그렇다구.  난 너의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가도 금방 야단 맞고는 풀이 죽지. 너는 내 의붓어머니야. 이건 해라, 저건 하지 마라,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며 나의 모든 것을 간섭한다구. (손수건을 꺼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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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닦는 시늉을  하며) 이 손수건을 봐. 손으로  입을 쓱 문질러 닦지 말라고  네가 준 거야. 그런데
이렇게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면 꼭 어린애가 된 기분이라니까.
  [자앙] 뭔가 오해하고 있군. 난 너를 어린애로 생각한 적이 없어.
  [기임] 아냐, 너는 나를 어린애처럼 꽉  붙잡아 두려고 해. (손수건을 내 던진다.) 이 빌어먹을 창고
속에서,  평생  동안 함께  살  욕심으로  날 어린애  취급한다구.  (자신의  침대로  가서 걸터앉더니
호주머니에서 화투를 꺼내 놓는다.) 난 결코 너의 어린애가 아냐! 오늘은 절대로 날 간섭하지 말라구!
  [자앙] 그게 뭐지?
  [기임] 보면 몰라?
  [자앙] 너와 화투 칠 사람이 누군데?
  [기임] 또 잔소리를 늘어놓을 모양이군!
  [자앙] 누구야, 말해봐!
  [기임] (화투장을 섞으면서) 트럭 운전수, 내 장인될 사람이지. 오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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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끝내고 한판 하러 오겠대.
  [자앙] 그가 노름꾼이라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기임] 나하고 사귀는 여자는, 자기 아버지가 노름꾼이란 말은 안 하던걸.
  [자앙] 운전수들, 특히 트럭 운전수들은  화투치기엔 도사들이야. 그런 사람들과 노름하면 돈을 잃을
건 뻔해.
  [기임] 재수없는 소리! 잃을지 딸지는 해봐야 알지.
  [자앙] (기임의 침대로  가서 곁에 앉으며 달래듯이 말한다.)  미안해. 아까 북어 대가리한테 농담할
때 웃지  않았던 건 내 실수였어.  그것 때문에 네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하지. 자,  냄비 속에서 다시
꺼내. 내가 큰 소리로 실컷 웃을께.
  [기임] 그건 이미 지난 얘기지.
  [자앙] 정말 노름을 하고 싶거든 나랑  둘이서 하자구. 그럼 내가 돈을 잃어도 네가 따는 거고, 네가
돈을 잃어도  내가 따는  거니까 실제로는  손해날 것  없잖아? 어때,  생각해봐. 트럭  운전수와 하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겠지?
  [기임]  쳇, 그게  무슨 노름이야?  결국 너는  의붓어미  노릇을 하고,  난 의붓자식  노릇 하면서,
어머니와 아들끼리 사이좋게 놀아보자 그건데 말야, 난 그 따위 유치한 수법엔 안 넘어가!
  [자앙] 오늘 아침은 이상한데---. 왜 자꾸만 심술을 부리는 거야?
  [기임] (벌떡 일어서며) 그것 보라니까!  심술부린다, 그건 어린애한테나 쓰는 말이지 어른에게 하는
말은 아니잖아!
  [자앙] 그래, 그래, 심통이 되게  났군. (침대에서 일어나며) 해장국 다 먹었거든 일어나. 창고 앞의
상자들을 안으로 옮겨 놓자구.
  [기임]  그것 역시  너의  수법이지! 상자,  상자,  상자들!  내가 심술부린다고  생각하면  너는 그
빌어먹을 상자로써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려고 해.  제자리에 옮겨놓아라,  정확하게 쌓아라, 절대로
틀려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나를 호되게  야단치지!  (다시  침대에 걸터  앉아  화투장을 섞으며)
그렇지만 오늘은 글렀어. 오늘은, 상자 하나가 잘못됐거든!
  [페이지] 048
  [자앙] 상자가 잘못됐다니---?
  [기임] 음, 음, 그렇게 됐어. 오늘 내보낸 상자 중에서 하나가 틀렸지.
  [자앙] 하지만 뭐야, 트럭에 실어 놓고 확인했는 걸! 모두 서른두 개였잖아!
  [기임] 숫자는 맞았지. 내가 아무 상자나 슬쩍 채워 넣었거든.
  [자앙] 어--- 어떤 상자인데?
  [기임] 어떤 상자인지는 나도 몰라.
  [자앙] 상자의 번호도 안 봤다는 거야?
  [기임] 볼 틈도 없었지. 얼른 손에 잡히는 대로 채워 넣은 거니까.
  [자앙] 도대체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어!
  [기임] 글쎄--- 나도 순간적으로 한 짓이야.
  [자앙] 왜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이건 보통  일이 아냐. 상자 하나만  잘못된 게 아니라구! 하나가
잘못되면 전체가 틀려져! 모든 것이 잘못되고 마는 거야!
  [기임] 어쨌든 나한테는  잘된 일이라구. 미운 짓을  했으니까 너도 이제 나를  이 창고 속에 붙잡아
두지는 않을 테고, 나도 나갈 때 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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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해서 좋겠지. 여봐, 의붓엄마, 얼굴이  왜 그렇게 창백해? 자식 나가는 게 걱정이야? 아니면, 잘못된
상자가 더 걱정이야?
  [자앙]  그러니까 다른  엉뚱한 상자가  실려  나갔다면--- 어떻게  하지? 그래---  우선  그 상자의
번호부터 알아내야겠어. 서류들을  전부 뒤적이면서, 창고 속의  모든 상자들을 대조해보면, 그 상자의
번호는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기임] 오늘은 그  일 때문에 바쁘겠군. 어때,  우리 둘이서 화투 칠까?  하지만 너는 시간이 없어서
못할 거야, 그렇지?
  (무대 조명, 암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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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제4장
  [페이지] 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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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무렵. 기임과 트럭 운전수가 식탁에 앉아서 화투 노름을 하고 있다. 각각 두 장의 화투를 나눠
갖고서 그 합친 숫자로 우열을 가리는 간단하면서도 빠르게 진행되는 노름이다. 상대방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패를 잡게 되면 돈을 더  많이 올려 걸 수 있다. 상대방이 포기 않고 같은 돈을 걸면서 응수할
경우엔 서로  패를 공개하는 데  합의할 때까지 돈  액수를 계속 높여나간다.  기임의 표정은 초조하고
심각하다. 그는 트럭 운전수에게 돈을 계속해서  잃을 뿐 단 한 번도 따지 못했다. 기임과는 정 반대로
트럭  운전수는 여유  있는  표정이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기임을  다루고 있다.  자앙은  창고 안의
상자들이 쌓인 곳에  있다. 그는 서류와 상자들을 대조하면서 잘못  실려 나간 상자의 번호를 확인하는
중이다. 가끔씩 그의 모습은 쌓여있는 상자들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는다.)
  [기임] (쥐고 있던 패를 내려놓으며) 난 죽었어요.
  [운전수] 여봐, 늙은 사위. 노름을 해보니까 자네의 인간적인 결점을 알겠는데.
  [기임] 내 인간적인 결점이 뭔데요?
  [페이지] 054
  [운전수] 자네  결점은 다른 게  아냐. 행운이 있을 땐  배짱이 약해지고, 행운이  없을 때는 배짱이
쎄진다는 거야. (자신이 갖고 있는 화투장을 펴 보인다.) 이걸 보라구. 난 겨우 다섯 끝이야.
  [기임] (애석한 감정을 터뜨리며) 겨우 다섯 끝이었어요?
  [운전수] 그렇다니깐, 자넨 뭐였지?
  [기임] (바닥에 내려놓은 패를 펴 보인다.) 갑옵니다. 갑오!
  [운전수] (판돈을 쓸어 가며) 쯧쯧, 갑오 들고 다섯 끝한테 죽다니, 참 안됐군.
  [기임] 그 쪽에서 워낙 쎄게, 자꾸만  판돈을 높여 걸었잖아요. 그래서 나보다 더 좋은 패를 잡은 줄
알았죠.
  [운전수] 이번엔 잘 해봐. 미리 겁먹지 말구. 자네 배짱대로 하는 거야.
  (트럭 운전수, 화투를 다시 쳐서  내민다. 기임은 신중하게 반으로 떼어낸다. 운전수는 각각 한 장씩
두 번 화투를 나눠 갖는다.)
  [운전수]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런, 이런---!
  [기임] 왜요?
  [운전수] 아냐, 아무것도. 그래 자넨 어떻게 하겠어?
  [기임]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기 앞에  놓인 양철상자 속에서 돈을 꺼내 식탁 가운데에 놓으며) 큰
거 다섯 장에 작은 것 일곱 장!
  [운전수] 굉장히 많은 돈인데?
  [기임] 자신 없거든 죽으세요.
  [운전수] 글쎄---.
  [기임] 아, 나중에 후회 말고 죽어요.
  [운전수] 살기도 뭐하고, 죽기도 뭐해서 그래---. (한참 망설이더니 기임이건 만큼의 돈을 내놓으며)
우리 이만 펴 볼까?
  [기임] 아뇨. (양철상자 속에서  더 많은 돈을 꺼내 놓는다.) 난 더  걸겠어요. 큰 거 넉 장에, 작은
것 석 장---.
  [운전수] 젠장, 난 어정쩡해서 말야---. (주저하면서 판돈을 더 건다.) 이 정도만 하자구,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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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임] (의기양양하게 더욱 많은 판돈을 걸면서) 난 행운을 잡은 걸요.
  [운전수] 좋아. 더 걸지. (할 수  없다는 듯이 소극적으로 판돈을 더 내놓는다.) 어때, 이젠 서로 펴
보는 것이?
  [기임] (들고 있는 패를 보여주며) 난 삼땡입니다.
  [운전수]  (자신의 패를  느긋하게 보여준다.)  난  공산명월 한  장에 기러기  한  장, 팔땡이라구.
아이구, 늙은 사위, 일찍 죽지 그랬어?
  [기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내가 삼땡을 들고 죽어요?
  [운전수] 하지만 생각해봐. 내가 더 좋은 패를 들었다는 걸 감 잡을 수 있었잖아.
  [기임]  그런  소리 마세요!  의뭉스럽게  엄살을  떨어놓곤 나더러  감을  잡으라니---.  이번 판은
무효예요!
  [운전수] 노름엔 무효가 없어. (쌓여있는  돈을 자기 앞으로 긁어 간다.) 자네한테 충고하지만, 자넨
나의 장점을 알아둬야 했어. 내 장점이 뭐냐,  난 행운을 못 잡았을 땐 배짱 쎄게 나오고, 정작 행운을
잡았을  땐 금방  죽을 듯이  엄살을 떠는  거라구. 늙은  사위, 진정하고  앉아. 노름에  졌다고 발칵
성질내면서 일어서는 건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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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적으로  좋지 않아.  앉아서  차분하게 생각해.  응? 오직  노름에서  돈 잃는  것만  생각하면 화가
나겠지만, 자넨 나한테서 따가는 것도 있잖아?
  [기임] (의자에 앉는다.) 난 오직 잃기만 했어요.
  [운전수] 아냐. 따간  것도 있어. 노름에서 자넨  돈을 잃을수록 그만큼 내  딸을 따가고 있는 거야.
(화투를 다시 쳐서 내밀며) 이젠 장인의 기분을 알았으면 얼굴을 펴.
  (기임, 노름을  계속할 의사로서 화투장을  뗀다. 트럭  운전수는 다시 패를  나눈다. 그들이 각자의
패를 들고  겨루는 동안 미스  다링이 창고 안으로  들어온다. 그녀는 노름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태도이다.)
  [다링] 내가 이럴 줄 알았죠!
  [운전수] 음, 너 왔냐---?
  [다링] (식탁에 가까이 다가와서 기임에게 묻는다.) 얼마나 잃었어요?
  [운전수] (기임이 대답하기 전에 먼저 가로채서 말한다.) 이제 막 시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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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야. (기임의 동의를 구하며) 그렇지? 방금 시작한 거지?
  [기임] 아--- 네---.
  [다링] (기임의 돈 담은 양철상자를 들고서 그 안을 바라보며) 돈이 조금밖엔 없잖아요?
  [기임] 그래--- 벌써 난 많이 잃었어.
  [다링] 우리 아버진 이런 사람이에요. 딸이 사귀는 남자들을 가만두지 않죠. 장인과 사위끼리 어쩌구
하면서 노름판을 벌여서는 꼭 먹이로 삼거든요. 그래서 이 근처 창고지기들은 모두 다 우리 아버지한테
당했어요.
  [운전수] 얘 좀 보게! 날 아주 못되게 험담하고 있네!
  [다링] 험담이  아니잖아요, 아버지.  (양철상자를 기임의  앞에 내려놓는다.) 내  실수였어요. 우리
아버지를 조심하라는 말을 미리 했어야 하는 건데---.
  [운전수] 넌  이 사람한테 중요한  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더라. 너의  어머니가 일찍 죽었다는
말도 안 했구, 내가 온갖 고생 해가며 너를 키웠다는 말도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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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링] 왜 그런 말을 해요?
  [운전수] 그건 중요한 거야. (기임에게) 자네 생각도 그렇지?
  [기임] 그럼요. 어쨌든--- 중요한 거죠.
  [운전수] 네가  통 말  안 해준  것 같아서,  내가 대신  다 말해줬다. 그러려면  다정하게 인간적인
화투라도 치면서 해야지, 멀뚱멀뚱 얼굴 쳐다보며 입만 놀릴 순 없지.
  [다링] 돈을 많이 잃을수록 나를 따갈 거라는 말씀도 하셨겠군요?
  [운전수] 물론 했다!
  [다링] 그리고, 내가 여러 남자들과 사귄다는 말씀도 하셨겠죠?
  [운전수] 그거야 제일 먼저 했지! 하지만 난 젊은 사위보다 늙은 사위가 더 좋다고 했다!
  [다링]  듣고 보니까  아버지는  온갖 말씀을  다  하셨군요. (식탁에  걸터앉아서  기임의 화투장을
넘겨보며) 죽어요. 그런 패를 들고 무슨 배짱으로 돈을 걸려고 했어요?
  [기임] 죽다니--- 이건 굉장히 좋은 거야!
  [다링] 국화 두 장, 구땡이죠. 하지만 이런 경우 아버지는 단풍 두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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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땡이에요.
  [운전수] 너--- 너--- 남의 패를 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해?
  [다링] 난 아버지의 수법을 다 알거든요.
  [운전수] 여봐, 늙은 사위, 구땡을 들고서 죽는다는 건 말도 안 돼!
  [기임] 하지만 장땡을 들고 계신다면서요?
  [운전수] 그거야 뭘 들었는지 알려줄 순 없지!
  [기임] (갈피를 못 잡겠다는 듯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정말 미치겠군!
  [다링] 이럴  땐 젊은  남자들은 어떻게  하는 줄  아세요? 벌떡  일어나서는 서슴없이  판을 뒤엎어
버리죠. 그런데 당신은 딱도 하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처한 표정만 짓고 있군요.
  [운전수] 그래서 난 젊은 놈들이 싫다는 거야! 그놈들은 노름할 줄도 몰라!
  [다링] 아뇨,  내가 보기에는요,  정말 노름할  줄 모르는  건 아버지예요. 아버지는  교묘하게 패를
바꾸죠. 이기고 지는  걸 우연한 운수에 맡기는 게 아니라,  그냥 모두 아버지가 이기도록 만든다구요.
그러니깐 무슨 재미가 있고 무슨 흥미가  있겠어요. 아버지는 돈만 딸 뿐 노름의 진짜 맛은 못 느끼죠.
(기임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가엾어라. 그런데 당신은 부들부들 떨고만 있군요.
  [기임] 난 이 좋은 걸 들고 어떻게 해야지? 죽어야 하는 거야? 아니면 살아야 하는 거야?
  [다링] 당신은 죽어요.
  [운전수] 옆에서 자꾸만 죽으라고 하지 말아라. 그럴수록 사람 배짱만 약해져.
  [다링] 그럼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기임] 아냐, 난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 정말 저쪽이 장땡을 든 게 확실해?
  [다링] 몇 번이나  그렇다구 말했잖아요! (걸터앉은 식탁에서 내려오며)  당신 친구는 어디 있죠? 안
보이는데요?
  [기임] 음, 음, 창고 안 어디에서--- 상자를 찾고 있을 거야.
  [운전수] 여봐, 늙은 사위, 죽든지 살든지 어서 정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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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링] (창고 구석의 살림 도구가 있는 곳을 둘러본다.) 어머, 온갖 살림이 다 있네! 어젯밤 왔을 땐
못 봤는데,  곤로도 있고, 냄비도  있고, 그릇이랑  국자---- (국자를 집어들고  바라본다.) 이런 놋쇠
국자는 옛날에 만든 것이죠? (기임에게) 내 말 안 들려요?
  [기임] (화투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대답한다.) 응--- 뭐라구?
  [다링] 이런 놋쇠 국자는 요즈음엔 없다구요!
  [운전수] (기임에게) 다른 덴 신경쓰지 마. 어서 정하기나 해!
  [다링] (국자를 제자리에 놓고  침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이 침대  둥 중에 어느 것이 당신 거예요?
이쪽? 아니면 저쪽?
  [기임] (건성으로 대답한다.) 이쪽 것이 내 침대야.
  [다링] 똑바로 보고 말씀하세요. 분명히 이쪽 것이 당신 침대예요?
  [기임] (침대를 힐끗 바라보며) 아냐, 그게 아니고 저쪽이 내 침대야.
  [다링] (기임의 침대에 가서 앉는다.) 참 지저분하게 생겼네.
  [운전수] 얼마나 더 망설일 거야?
  [기임] (더욱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며) 글쎄요---.
  [다링] 그런데 당신 친구 침대는 왜 저렇게 깨끗하죠?
  [기임] 글쎄, 난 몰라---.
  [다링] 함께 오래 살았으면서 그걸 몰라요?
  [기임] 난 모른다니깐!
  [다링] (침대에 놓인  도색 잡지를 치켜들며) 그리고 당신  친구는요, 저렇게 고상한 책들만 읽는데,
당신은 이런 유치한 것만 읽어요?
  [운전수] 얘,  너 입  좀 닥쳐라!  늙은 사위가  지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너까지 끼어들어
정신을 혼란시킬 건 없다.
  [다링] 그럼 뭐죠, 아버진 장땡을 잡으셨으니까 혼을 빼도 좋다는 건가요?
  [운전수]  안 되겠다.  너,  저기 창고  구석에 가서  상자찾기나  할래? 오늘  아침에  상자 하나가
엉뚱하게 내 트럭에 실려 나갔다는데, 그게 어떤 것인지 찾고 있단다.
  [다링] 그건 내가 시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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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전수] 네가 시킨 거라니?
  [다링] 아버지의 늙은 사위한테 물어보세요.
  [운전수] (기임에게) 쟤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기임] 글쎄, 그게--- 내 친구가  너무 고지식하기 때문에 나까지 힘들어 죽겠다고 했더니만--- 상자
하나를 슬쩍 잘못되게 해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난--- 시킨 대로 시험해본 거죠.
  [운전수] 시험할 게 따로 있지, 상자 가지구 시험을 해?
  [다링] 상자가 잘못되면 아버지도 책임이 있을 걸요?
  [운전수] 그게 왜 내 책임이냐? 난  그저 상자를 가져오고, 가져갈 뿐이다. (기임에게) 이젠 더 시간
끌어봐야 소용없어. 죽든지, 살든지, 눈 딱 감고 정해버려!
  [기임]  지금  그럴 작정입니다.  (양철상자  통째로  식탁 가운데에  내민다.)  자,  남은  돈을 다
걸겠어요!
  [운전수] 좋아.  단번에 끝내자구! (손에  들고 있던 화투장을  식탁 위에 나란히  펼쳐 놓는다.) 난
시월 단풍 두 개, 장땡이야. 자네는?
  [기임] (힘없이 화투장을 펴 놓으며) 졌어요, 내가---.
  [운전수] 자넨 구월 국화 두 장이로군.
  [기임] 정말 억울해요---.
  [운전수] (기임의  양철상자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 쏟는다.)  억울할 건 없다구.  자넨 들었던 패도
좋았고, 운도  좋았어. 다만 내가  몇 번이나 가르쳐줬지만  말야, 자넨 인간적으로  고쳐야 할 결점이
있어. 패가 좋고 운이 좋을 땐 슬며시 죽어야 하는데, 자넨 오히려 기를 쓰며 살려고 하거든.
  [기임] 제발 그런 말씀 말아요! 언제 죽고, 언제 살아야 할지를 난 몰라요!
  [운전수] 그러니깐  배짱이 필요한 거지. 우리  나가서 한잔 하지. 내가  살께. (다링에게) 얘, 너도
갈래?
  [다링] 난 가고 싶지 않아요.
  [운전수] 왜? 너도 함께 가면 좋을 텐데?
  [다링] 우리 셋이 술집에 나타나면 웃음거리가 될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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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전수] 누가 우리를 보고 웃어? 아무도 그럴 사람 없다!
  [다링] 사람들은  다 알죠. 아버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술  마실 돈은 누구한테서  딴 건지 알고는
웃어댈 거라구요.
  [운전수] 가기  싫거든 넌  빠져라. 우리끼리  갈 테니까.  (식탁의 의자에서 일어나며)  여봐, 늙은
사위, 너무 상심하지 말고 그만 일어나. 술 마시러 안 갈 거야?
  [기임] 갈 겁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다링에게 묻는다.) 그런데 정말 안 따라가고 여기 있을
거야?
  [다링] 글쎄요---. (창고 안을 둘러보며) 여기가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기임] 여긴 아무것도 재미없어!
  [운전수] (기임을 창고 밖으로 이끌고 가며) 우리끼리만 가자구! 난 저 애랑 함께 가는 게 싫어!
  (운전수와 기임, 창고 밖으로 퇴장한다. 다링은 계속해서 커다랗게 외친다.)
  [다링] 나는 아버지가 싫어요!
  (창고의 상자들이 가득 쌓인 곳에서 자앙이 서류 뭉치를 들고 나온다. 다링은 외치기를 멈춘다.)
  [다링] 미안해요, 큰 소리를 질러서---.
  [자앙] 괜찮습니다.
  [다링] 어젠  잔뜩 술 취하구,  오늘은 큰 소리를  지르구---. 만날 때마다  그래서 괴상한 여자로만
보이겠군요.
  [자앙]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요, 내 친구를 데려다 주어서.
  [다링] 뭘요, 오늘은 우리 아버지가 다시 술집으로 데려갔는 걸요. 그런데 상자를 찾고 있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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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앙] 네. (살림 도구가 있는 곳에 가서 물을 마시며) 목이 타는군요.
  [다링] (자앙의 물 마시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키득키득 웃는다.)
  [자앙] 왜--- 웃죠?
  [다링] 어젯밤 생각이 나서요. 어젠 내가 목이 타서 물을 마셨잖아요.
  [자앙] 오늘도 물 한 잔 드릴까요?
  [다링] 아뇨. 오늘은 필요 없어요.  (자앙에게 다가가며) 상자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생각해 보시죠.  실려 나간  상자와 남겨진 상자가  똑같은 거라면  아무 잘못된 것이  없잖아요? 예를
들자면, 그  두 상자 속에  똑같은 물건이 들어있다고 그래  봐요. 상자는 서로  바뀌었어요 속 내용은
전혀 달라진 게 없거든요!
  [자앙] (물컵을 내려놓고 상자가 쌓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나도 그 생각은 해봤어요. 하지만---.
  [다링] (자앙을 중간에서 가로 막는다.) 하지만 뭐죠?
  [자앙] 상자 번호가  달라요. 서류와 상자들을 하나씩 대조해  봤죠. 8-3986번 상자가 엉뚱하게 실려
나가고, 대신  6-6274번 상자가 남아있는  거예요. 각각  번호가 다른데 똑같은  물건이 들어있을 리는
없습니다.
  [다링]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자구요. 두 상자 속에 각각 다른 것들, 이를테면, 한 상자 속엔 계란이
들어있구요, 다른 한 상자  속에는 감자가 있는 거예요. 하지만 둘  다 식료품이죠. 둘 다 먹는 것이란
점에는 똑같은 거라구요. 어때요? 내가 걱정을 멋지게 해결해 드렸죠!
  [자앙] 나도 그 생각은 했었어요. 하지만 그건---.
  [다링] 아, 또 하지만예요?
  [자앙]  예전에,  내가 창고지기를  시작하던  때에는  대부분 이런  상자들  뿐이었죠.  (식탁 위에
놓여있는 양철상자를  들어 보이며)  보세요, 이 옛날  상자엔 하얀  연기의 예쁜 무늬와  담배 피우는
사람을 그려놓았죠. 이건  누가 봐도 담배 상자예요.  옛 시절엔 이렇게, 상자만  봐도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았거든요. 하지만
  [페이지] 064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 상자들은  거의 다 숫자들,  그냥 번호만  적혀있죠. (서류 뭉치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 읽는다.)  상자 번호 8-3986번, 내용물 35-402, 사이즈  18, 수량 50. 이건 엉뚱하게 실려
나간 상자입니다.  그리고 잘못  남아있는 상자는  이렇죠. (다른  한장의 서류를 읽는다.)  상자 번호
6-6274번, 내용물 98-024, 사이즈  33, 수량 45---. 이걸 보고선 상자  속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어요.
  [다링] 혹시 우리 아버지는 알고 있지 않을까요?
  [자앙] 아까  노름하러 왔을 때  물어봤죠. 그러나  모른다고 하더군요. 과거에는  트럭이 직접 물건
만드는 곳에서 실어왔지만, 지금은 화물 기차가 대량으로 정거장에 운반해 놓은 것을 나눠 싣고 창고로
왔다가는, 다시 창고에서 나눠 싣고 정거장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기는커녕,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상자인지도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다링] (웃으며) 그것 참 재미있네요!
  [자앙] 뭐가--- 그리 재미있죠?
  [다링] 이 창고 속에 가득 쌓여있는 상자들을 보세요, 모두 알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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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뿐이라니 무슨 신기한 수수께끼 같잖아요! 우리 상자를 뜯어봐요! 엉뚱하게 잘못 남은 상자,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뜯어보자구요! 당신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자앙] 궁금하다구 상자를 뜯어볼 순 없어요.
  [다링] 왜요? 왜 뜯어볼 수 없다는 거예요?
  [자앙] 허락을 받기 전엔 보면 안 돼요.
  [다링] (자앙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며) 누구 허락을요?
  [자앙] 상자 주인의 허락이죠.
  [다링] 상자 주인이 어디 있는데요?
  [자앙] 어디 있는지는---.
  [다링] (얼굴이 맞닿을 만큼 바짝 다가오며) 그럼 누군지는 알아요?
  [자앙] (말문이 막힌 채 뒤로 물러선다.)
  [다링] (자앙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으며)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모르잖아요!
  [자앙] 우리가 모른다고 상자 주인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링] 물론  주인이야 있겠죠.  그러나 겁낼  것 없어요.  (자앙의 어깨를  잡았던 손으로  그 목을
안으며) 내  생각엔 당신은  뜯어볼 권리가  있다구요. 상자를  지키는 사람이,  그 상자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더구나  잘못된  상자는 당연히  뜯어봐야죠! 그  상자 어디
있어요? 나한테 가르쳐줘요!
  [자앙] 잠깐만, 잠깐만--- 이 목의 손 좀 풀어요.
  [다링] (더욱 손에 힘을 주어 안으며) 당신은 가르쳐주기만 해요. 뜯는 건 내가 할께요.
  [자앙] 제발, 이 손을---.
  [다링] 이  손을 놓아주면  도망가려구요? 당신은  어젯밤 나를  시험해보지 않았어요.  저 구석으로
도망쳐서 꼼짝도 안했다구요. 어서 말해요. 그 상자는 어디 있어요?
  [자앙] (상자가 놓여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기에--- 저기 있어요.
  (다링, 상자들이 쌓여있는 곳에 가서 6-6174번 상자를 들고 되돌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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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링] 꽤  무거운데요! (상자를 내려놓고  살펴본다.) 단단히  못을 밖았네! 망치나  톱 같은, 무슨
연장 없어요?
  [자앙] 상자를 뜯으면 안 되는데---. 만약 뜯었다가 잘못되면---.
  [다링] 아무 걱정 할 것  없어요, 당신은. 나에게 맡겨두고 보기만 하세요. (주위를 둘러보더니 살림
도구 있는 곳에서  놋쇠로 만든 국자를 들고 온다.) 이  튼튼한 놋쇠 국자가 좋겠어요. (국자 손잡이를
상자의 본체와  뚜껑 사이에 비집어 넣는다.  그리고 지렛대처럼 힘을  주며 들어올리자 못이 빠지면서
뚜껑이 열린다.) 자, 됐어요! 이리 가까이 와서 상자 속에 든 것을 보세요!
  [자앙] (주춤주춤 상자에  다가온다.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더니  점점 당혹한 표정이 된다.) 뭘까요,
이것들이---?
  [다링] (상자 속에  든 금속 물체를 꺼낸다.) 참 이상하게  생겼네! 쇠로 만든 것이 가운데는 구멍이
뚫리구---.
  [자앙] 글쎄요--- 뭔가 부속품 같은데---.
  [다링] (자앙에게 금속 물체를 내민다.) 무슨 부속품이죠?
  [자앙] (금속 물체를 받아 살펴보며) 어떤 기계의--- 하지만 어떤 기계인지는---.
  [다링] 맞아요.  기계의 부속품이에요! 부속품 한  개가 이 정도  크기라면, 수많은 부속품들이 모여
만든 그  기계는 아주  굉장히 크겠군요! (점점  자신의 생각을  부풀리며 흥분한다.) 물론  그 기계는
특수하겠죠.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있고, 바다  밑을 다닐 수도 있을  테죠. 언젠가 영화를 봤는데요,
실제로 그런  기계가 있더라구요. 신나게, 과거에도  가고 미래에도 가요.  어쨌든 사람들은 그 신나는
기계  때문에 행복해요!  (침묵하고 있는  자앙에게) 그런데  당신은  왜 아무  말도 않죠?  내 생각이
틀려요? (사이) 좋아요, 그럼 다른 생각을 해볼까요? 그러니깐 이건요--- 굉장한 폭탄의 부속품이에요.
그 폭탄은 사람들을  죽이죠. 한두 명씩 죽이는  게 아니라 수천, 수만  명을 한꺼번에 죽여요! 실제로
그런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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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 폭탄이  있다구 잡지에서 읽었거든요.  순식간에, 어찌나 재빠르게  죽여버리는지, 사람들은 죽는
고통을 느낄 수도 없대요! 그래도 당신은 아무 말 안 하시네---. 또 내 생각이 틀린 모양이죠?
  [자앙] (꺼냈던 것들을 다시 상자 속에 넣으며) 상자를 괜히 뜯어봤어요.
  [다링] 후회하는 거예요?
  [자앙] 그래요--- 차라리 그냥 둘 것을---.
  [다링] 후회할  것 없어요.  다시 뚜껑을  닫으면 되잖아요.  (상자의 본체에 뚜껑을  덮고 국자로써
솟아나온 못을 때려  박는다.) 기계의 부속품인지, 폭탄의 부속품인지  알게 뭐예요! 어차피 우린 이게
뭔지 모르잖아요! 상자를 뜯어봤던 게  겁나거든 나랑 함께 도망가요! 이 창고를 빠져나가 우리 둘이서
함께 살자구요!
  (다링, 국자로써 상자 뚜껑의 못을 때려 박으며 재미있다는 듯 소리내어 웃는다. 무대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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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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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후,  늦은 밤.  어둠 속에서  자앙과 기임은  침대에 누워있다.  그 들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간혹 침대가  삐거덕거리는 소리  등이 들린다.  자앙과 기임, 그들은  서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마침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어둠 속에서 기임의 목소리가
들린다.)
  [기임] 여봐, 왜 잠을 못 자는 거야?
  [자앙] 너는---?
  [기임] 내가 먼저 물었잖아.
  [자앙] (침묵)
  [기임] 그 빌어먹을 상자 때문에 그래?
  [자앙] (침묵)
  [기임] 그렇다면 그렇다고 솔직이 말해. 혼자서 끙끙 앓지만 말구.
  [자앙] 잠깐 불을 켜도 돼?
  [기임] 좋을 대로 해.
  (자앙, 식탁 위  천정에 달린 전등을 켠다. 불빛에 눈이  시린 기임은 뒤돌아 눕는다. 자앙은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는다.)
  [자앙] 참 이상하지---.
  [기임]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자앙] 상자말야---. 상자가 잘못 바뀌어졌는데도 주인한테서 아무 연락이 없거든.
  [기임] 별 걱정을 다 하는군.
  [자앙] 자꾸만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워---.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전혀 연락이  없어. 상자 속엔
부속품이  가득  들어 있거든.  어딘가에서  그것들을  모아 굉장한  걸  만들  텐데---.  잘못 만들면
안되잖아---.
  [기임] (자앙을 향해 돌아누우며) 글쎄, 잘 만들었으니깐 아무 연락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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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앙] 건성으로 듣지  말고 진지하게 내 걱정을 들어줘. 난  그 부속품이 잘못 바꿔졌다는 걸 알아.
더구나 나는 상자까지 뜯어봤어. 그런데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는 몰라---. 잘못됐다는 연락도
없구---. 그래서 난  잠을 못 자고 생각해봤지.  여러 가지를.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생각해 본 거야.
첫째는 부속품이  잘못된 것을 모르고서  그냥 만든다---.  둘째는 부속품이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냥
만든다--.  셋째는  부속품이 잘못된  것은  알지만  그 상자가  우리  창고에서  바꿔졌다는  건 알지
못한다---.  넷째는, 부속품이  잘못된  것도 알고  우리 창고에  서  바꿔진 것도  알지만  모르는 체
덮어두기로 한다---.
  [기임] 그만해!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자앙] 여러 가지 중에 어느 것이 맞겠어?
  [기임] (침대에서  일어나 걸터앉으며)  그럴 때는  네 배짱대로  정하는 거야. 요즈음  우리 장인될
사람이 뭘  가르쳐주는지 알아?  배짱이라구, 배짱!  자신의 손에  어떤 패가 들어왔느냐는  중요한 게
아냐. 삼팔 따라지를 들고서도 배짱만 좋으면 얼마든지 광땡처럼 먹을 수 있어!
  [자앙] 내가 한 말은 노름이 아니잖아?
  [기임] 이거나 저거나 마찬가지라구!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배짱이란
뭐냐, 그 중 하나를  자기 좋을 대로 택하는 거야. 그리고  이건 우리 장인어른 말씀인데, 세상은 모두
잘못됐다는 거야.  어느 것  하나 옳게  된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틀리지  않은 게  없다는 거지.
그러니깐 믿을 게 뭐 있겠어? 자기 배짱뿐이지!
  [자앙] (기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기임]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자앙]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냐,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
  [기임] (담요로 얼굴을 문질러 닦으며) 뭔가 묻은 모양인데---.
  [자앙] 그냥 너의 얼굴 그대로야. 예나 지금이나 다른 게 없는 네가 엉뚱한 말을 하고 있으니깐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바라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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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임] 무슨 소리야, 그게?
  [자앙] 배짱이란 너한테는 맞지 않아. 그리고 나한테도 맞지 않구. 우리는 둘 다 이 세상이 잘못되면
불안해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야. 분명하고, 정확하게 모든 것이 틀림없어야만 우리는 안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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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수 있다구.  내 마음이  이렇게 복잡하고  불안하듯이  너 역시  마찬가지야. 너는  나에게 숨기려
하지만, 난  알아. 요즈음 너는  너무 많이 잃었다구.  모아놓은 돈도 잃었고,  마음의 안정도 잃었어.
오늘 밤도 네가 잠 못 자는 이유는 그 때문이지.
  [기임] (자앙의  말을 어느 정도는  수긍한다는 듯이) 그래, 그래---.  하지 만 얻은  것도 있어. 그
여자는 내꺼야. 확실히, 내 것이 됐다구.
  [자앙] (말없이 기임의 얼굴을 바라본다.)
  [기임] (담요로 얼굴을 가린다.) 제발, 그렇게 보지 마!
  [자앙] 그 여자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기임] 우린 같이 살기로 했어! 그 여자가 약속했고, 그 여자 아버지가 보증했다구! (담요를 내리며)
너는 내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싫어?
  [자앙] 왜 싫겠어.
  [기임] 아냐. 너는 의붓어미라서 내가 행복해지는 게 싫은 거야.
  [자앙] 네가  속상할지 몰라 말 안  했는데--- 그 여잔 행실이  좋지 못해. 며칠  전 술에 취한 너를
데려왔던 날,  그 여자는  나에게 옷을 풀어  헤치고 자기를 만져보랬어.  그뿐 아냐.  내 목을 껴안고
놓아주지 않은 적도 있었구, 함께 살자고 유혹한 적도 있어.
  [기임] 알아!  너한테 꼬리쳤다는  거, 나도  다 알아!  그 여자는  이 근처  창고지기들 아무한테나
시험하려고 그래. 하지만  시험은 끝났어! 최후로 너와 나 둘만  남았지. 처음엔 성실하고 정확한 네가
더 그 여자 관심을 끈 모양이야. 그러나 말야, 상자가 틀린 다음부터 네가 안절부절 못하니까, 그 여자
생각이 달라졌어. 너 같은 불안한 인간하곤 못 살겠다 그거지. 오히려 틀려도 끄떡없는 나하고 사는 게
안심이다, 그렇게 판단한 거라구!
  [자앙] 그게--- 정말이야?
  [기임] 암, 정말이지! 그 여잔  이제는 너한테 관심조차 없어! 알았거든 전등불이나 꺼! 눈이 부셔서
잠을 못 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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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앙은 침대  밑에서 석유등과  종이, 연필을 꺼내더니  식탁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불빛이 약한
석유등을  켠 다음  식탁의자에  앉아 편지를  쓴다.  기임은 침대에  누운  채 그  광경을  얼마 동안
지켜본다.)
  [기임] 뭘 하는 거야, 석유등을 켜놓고?
  [자앙] 편지를 써.
  [기임]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키며) 무슨 편지---?
  [자앙] 내일 새벽에 트럭이 오면 운전수를 통해서 편지를 보내려구.
  [기임] 누구한테 보내는 건데?
  [자앙] 상자 주인.
  [기임]  (침대에서 내려와  자앙의 맞은편  의자에  앉는다.) 상자  주인이 너의  편지를  받아볼 수
있을까---?
  [자앙] 받아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지.
  [기임] 기도---?
  [자앙]  내 잘못을  용서해달라구---.  들어봐---. (편지  내용을 읽는다.)  주인님  전상서. 상자가
바뀌어진 줄도 모르고 트럭에 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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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  저의  태만과,  그것으로 생길  모든  결과에  대하여,  창고지기인  저에게  그  책임이 있음을
고백하오니---.
  [기임] 편지는 쉽게 쓰는 거야.
  [자앙] (편지를 쓰며) 저의 잘못을 침묵 속에 덮어두지 마시옵고, 차라리 드러내어 심히 꾸짖으소서.
그것만이 이 깊은 불안에서 저를 벗어나게 할 것이옵니다.
  [기임] (침대에서  내려와 자앙에게 다가온다.)  나도 상자 주인한테 편지를  보내야겠다. 부를 테니
받아 써줄래?
  [자앙] 그래, 불러봐.
  [기임] 사실은 상자를 바꾼 건 제  친구가 아니라 저올시다. 제 친구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벌을
주시려거든 저에게 주십시오.  야, 잠깐. 벌이란 말은  빼라. 난 벌받는 건  싫으니까. 제 친구는 아주
성실한 사람입니다.  창고 안으로 상자를 들여올  때는 단 하나도 틀리지  않았고, 창고 밖으로 내보낼
때는 정확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했었죠.  그런데 말씀입니다. 요즘  제 친구는 밤에  잠을 못 잡니다.
낮에 일할 땐  힘이 없구요. 뭔가 잘못을 했으면 야단치실  것이지, 가만 있으니깐 지금까지 잘한 일도
의심스러운 모양입니다.  잠깐, 너 야단치란 그것도  빼.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제 친구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큰 상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제  친구가 다시 신이  나서 행복하게
일하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부르기를 마치고 가만히  앉아 있는  자앙을 바라보며) 어어,
받아쓰질 않았잖아?
  [자앙]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난 정말 감동했어.
  [기임] 뭘 그까짓 걸 가지고 감동해? 편지는 알아듣기 쉽게 써야 하는 거야.
  [자앙] 응, 네 말이 맞다.
  [기임] 한 마디도 받아쓰지 않고 뭘 맞다고 그래?
  [자앙] 네 편지는 모두 내 마음 속에 적었지!
  [기임] 미리 경고해 두는데, 나한테 다정하게 굴지 말어. 난 분명히, 네 곁을 떠날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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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앙] 가면 안 돼.  나와 함께 여기 있자구. 창고 밖으로 나가면,  또 창고가 있고, 그 창고 밖으로
나가면, 또 창고가 있을 뿐---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어.
  [기임] 또 의붓어미 버릇이 나오는군! 언제나 너는 나한테 잔소리를 퍼부었어. 이 창고 속에 있어라,
이 창고 속에서  제발 성실히 일하렴. 그게 행복하게 사는  거란다---. 하지만 이젠 지겨워! 너도 나와
함께 바깥 세상에  한번 나가봐. 창고 밖의  세상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아까운 인생을 이 창고 속에서 썩히냐?
  [자앙] 우린 인생을 썩히는 게 아냐! 내 편지에 답장이 오면 네 생각도 달라질 거야.
  [기임] 뭐, 내 생각이 달라져?
  [자앙] 그래!  상자 주인의 답장을 받으면,  넌 이 창고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될 테고, 우린 다시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겠지!
  [기임] 야, 이젠 알겠어! 네가 왜 편지를 쓰는지 알겠다구! 그러니깐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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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상자 때문에만 불안한 게 아냐! 사실은 내가 떠날 것 같기 때문에 더 불안한 거지?

  [자앙] 어쨌든  넌 가면 안 돼.  노름으로 잃은 돈이 얼마야?  네가 잃은 모든  걸 내가 대신 채워줄
테니까 넌 제발 여기에 있어!
  [기임]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그만하자, 그만해! 너처럼 꽉 막힌 놈하고 말해봤자
잠도 못 자고 날만 새겠다. (침대로 돌아가서 눕는다.) 난 잠이나 잘 테니깐 넌 네 맘대로 해!
  (기임, 얼굴 위까지  담요를 덮는다. 자앙은 홀로 식탁에 남아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석유등을
바라본다. 사이, 연필에 힘을 주어 한 자씩 또박또박 쓰면서 낮은 목소리로 읽는다.)
  [자앙] 저희들은  이 작은 창고에서,  계란과 감자를 보관하던 시절부터  창고지기였나이다. 그 오랜
나날 저희들의  성실함을 단  한 마디  칭찬하여 주시지  않았어도 기쁘고 즐거웠으나,  이제 저희들의
잘못함을 꾸짖지 않으시면 그 괴로움은 감당하기 어렵나이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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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옵기는  저희들의  잘못을  분명  알고   계신다는  답장을  주옵소서.  오직  그  답장만이  저희
창고지기들의 소원이옵니다.
  (자앙, 편지를 쓰고 나서 석유등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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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제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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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녘. 창고 문 앞에 트럭이 와서 요란하게 경음기를 울려댄다. 그러나 여느 날과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경음기  소리만 아니라 창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리는 점이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자앙이 전등을 켠다. 기임은  곤하게 잠들어 있다. 창고 밖에서는 트럭 운전수가 문을 두드리면서
어서 열라고 외쳐댄다.)
  [자앙] 나가요! 나갑니다!
  [기임]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깨고) 오늘은 왜 저 야단이야?
  [자앙] 글쎄, 빨리 나가야겠어!
  (자앙, 창고  문 쪽으로 뛰어간다.  기임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한다.  느릿느릿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는다. 트럭 운전수가 성급한 걸음으로 들어온다.)
  [운전수] 잘 잤나, 늙은 사위!
  [기임] 무슨 불이라도 났습니까, 새벽부터 시끄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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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전수] 어서, 자네 짐을 꾸려!
  [기임] 짐이라뇨---?
  [운전수] 당장  짐을 꾸려서  우리 집으로  옮겨. 오늘부턴  자넨 우리  집에 들어와 사는  거야. 저
트럭에서 빵빵거리는 소리 들리지? 내 딸이 자넬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는 소리야.
  [기임] 갑자기 그러니깐 정신을 못 차리겠네---. 상자들은 싣고 왔어요?
  [운전수] 그럼, 싣고 왔지.
  [기임] (창고 밖으로 걸어가려 하며) 상자부터 내려놓고 짐을 싸야죠.
  [운전수] (기임을 붙잡는다.) 굼벵이 혼자서 하게 내버려 둬. 그리고 자넨 나하고 할 말이 있어.
  [기임] 뭔데요?
  [운전수] 창고지기 노릇은 싫다고 했지?
  [기임] 죽는 것 다음으로 싫죠! 왜요? 무슨 좋은 일이 있어요?
  [운전수] 트럭  운전을 해볼  테야? 우선  자네를 내  조수로 쓸  테니까 운전을 배워.  그리고 내가
나중에 그만두면, 자네가 완전히 트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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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으라구. 어때, 기막히게 좋지?
  [기임] (좋아서  펄쩍펄쩍 뛰다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가만 있어봐요---.  이렇게 좋은  건 분명히
속임수가 있더라구요---.
  [운전수] 여봐, 이번엔 안 속여!
  [기임] 아뇨, 안 속인다면서 늘 속였잖아요.  내 손엔 구땡을 쥐어주고, 한 수 높은 장땡으로 먹는가
하면요, 슬쩍 패를 바꿔놓기도 했어요.
  (미스 다링, 창고 안으로 들어온다.)
  [다링] 뭘 꾸물거려요?
  [운전수] 그래, 네가 말해라. 이 늙은 사위가 내 말이라면 믿질 않는구나!
  [다링] 난 아이를 가졌어요. 하지만 솔직히, 누구 아이인지는 몰라요.
  [운전수] 얘야, 너무 솔직할 것 없다.
  [다링] 지우려고  했지만 너무  늦었어요.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았죠.  그리고 나한테 말하기를요,
누구 애인지 모르지만 애비는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당신이에요. 짐을 꾸려서 우리집으로 옮기게
하구, 그리고는 트럭  운전하는 법도 가르쳐 주겠대요.  창고지기보다는 트럭 운전수가 좋은 거라면서,
당신을 꼬여내는 거죠.
  [기임] 그래서--- 새벽부터--- 야단법석이군---.
  [다링] 함께 살기 싫으면 그만둬요.
  [운전수]  쓸데없는  소리! 이제  너희  둘이서  정식으로 결혼식도  올리고  부부로서  평생을 함께
살아야지! 네 죽은  에미한테 내가 제일 후회되는  게 뭔지 알아? 구청에다 덜렁  종이 한 장으로 결혼
신고만 했을 뿐, 정작 결혼식은 안 하고 살았던 거라구.
  [다링] 죽은 어머니가 아버지 후회하는 걸 어떻게 알아요?
  [운전수] 여봐, 늙은  사위, 이건 정말 좋은  기회야. 자네 일생에서 이런  행운을 놓치면 언제 다시
오겠어?
  [기임] 잠깐만요---. 이건 생각해볼 문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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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임, 침대에 가서 심각한 표정으로 앉는다. 자앙, 창고 안으로 들어온다.)
  [자앙] 트럭의 상자들은 다 내려놨어요. 실어 보낼 상자들은 어떤 건지, 서류를 주시죠.
  [운전수] 내가 깜박했군. 서류는 운전대 옆에 있어.
  [다링] (가슴 속에서 서류들을 꺼내 자앙에게 준다.) 내가 가져왔어요.
  [자앙] (서류들을 받아 훑어보며) 오늘은 내보낼 상자들이 꽤 많군요.
  [운전수] 음, 많아!
  [자앙] (침대에 앉아 있는 기임을 발견한다.) 왜 자넨 구석에 앉아있나?
  [기임] 노름중이야.
  [자앙] 노름?
  [기임] 분명히 좋은 패를 잡았는데 말야--- 어떻게 해야 할지---.
  [자앙] 어서 일어나! 트럭에 상자들을 실어 보내자구!
  [기임] (일어나지 않는다.) 이걸 죽어야 하나--- 살아야 하나---.
  [운전수] 저 사람 대신 내가 도와주지. (자앙에게) 우리 둘이서 싣자구.
  [자앙]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운전수] 무슨 부탁인데?
  [자앙] 상자를 옮기면서 말씀드리죠.
  (자앙과 운전수,  상자들이 쌓여있는  곳으로 간다.  자앙은 서류와  상자 들을  대조하며 확인한다.
자앙과 운전수는 확인된  상자들을 핸들 카에 싣고 창고 밖으로  나간다. 그들이 작업하는 동안 기임은
팔짱을 낀 채  심각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있다.  미스 다링은 살림 도구가  있는 곳에 가서 이것저것
뒤져본다.)
  [다링] 뭐, 이런 잡동사니뿐일까---. 자세히 보니깐 값나갈 건 없군요.
  [기임] 그래도 아직은 쓸 만한 것들이야.
  [다링] 이게 모두 당신 것은 아니잖아요?
  [기임] 반절은 내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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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링] (놋쇠로 만든 국자를 집어들며) 이 국자는 누구 것이죠?
  [기임] 글쎄--- 왜, 그 국자가 마음에 들어?
  [다링] (두드리는 동작을 하며) 망치처럼 못 박는데 쓰려구요.
  [기임] 음식하는 덴 쓰지 않구?
  [다링] 이 옛날 놋쇠 국자는 아주 튼튼해서 갖고 싶어요.
  [기임] 이리 와 봐. 가까이.
  [다링] 싫어요.
  [기임] 가까이 오라니깐. 할 말이 있어.
  [다링] 여기에서도 말은 들려요.
  [기임] 당신이 가진 아이, 내 자식일 가능성은 없는 거야?
  [다링] 글쎄요---.
  [기임] 전혀 없어?
  [다링]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죠.
  [기임] 그럼 반절 정도는 가능성이 있다고 봐도 돼?
  [다링] 왜 그런 건 물어요?
  [기임]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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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링] 으음--- 어느 정도일까---.
  [기임] 삼분지 일? 아니면 사분지 일?
  [다링] 나도 몰라요. 당신 배짱대로 정하세요.
  (창고  밖으로 상자들을  옮기고 있던  자앙과 트럭  운전수 사이에  언쟁이 벌어진다.  자앙은 트럭
운전수에게 편지를 전달해주도록 간청하고 운전수는 목청을 높여가며 거절의 이유를 설명한다.)
  [운전수] 그건 미친 짓이야! 일부러 잘못했다고 편지를 보낼 필요는 없어!
  [자앙] (편지를 운전수에게 내밀며) 제발 보내야 해요!
  [운전수] 여봐,  내가 상자를 운반하고 다니니깐  주인과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건 큰
착각이야. 난 말이야,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싣고 왔다가 그냥 실어 가는 거라구. 실제로 내가 아는
건, 정거장에서 여러  트럭들이 상자를 나눠 받을 때  만나는 분배반장 딸리코하고, 창고에 보관했다가
다시 나눠 싣고 정거장에 가서  만나는 접수반장 외눈깔, 그 둘뿐이라구. 딸이코와 외눈깔은 내가 붙인
별명인데, 물론 진짜 이름이야 있겠지.  하지만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노름꾼이라 하듯이 나도
그들을 별명으로만 불러. 어쨌든 딸기코가  상자를 분배하는 곳은 정거장의 왼쪽이고, 외눈깔이 상자를
접수하는 곳은 정거장의 오른쪽이야. 그래서  그들은 같은 정거장에서 둘 다 상자를 취급하면서도 서로
얼굴 한 번 볼 수조차 없어.
  [자앙] 별명이든 이름이든  상관없어요. (편지를 억지로 운전수 손에  쥐어 준다.) 상자를 싣고 가는
곳에 내 편지를 갖다 주면서,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라고 하면 되거든요.
  [운전수] 내가 자네 편지를 외눈깔에게  주면, 외눈깔은 그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고, 그 다음 사람은
또 다음 사람에게--- 계속해서 운반되는 상자들을 따라가 맨 나중엔 주인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거지?
  [자앙] 네, 바로 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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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전수] 그게  또 큰 착각이라구.  부속품이 든  상자들은 말야. 중간중간에서  여러 갈래로 수없이
나눠지거든.
  [자앙] 부속품 상자들은 결국 한 군데로 모아지는 것이 아닙니까?
  [운전수] 물론,  모아지는 곳도 있겠지. 상자들이  한 군데에서 나와  여러 군데로 흩어지느냐, 여러
군데에서 나와 한 군데로 모아지느냐---. 그건 그럴 수도 있구,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어쨌든 중간에
있는 우리가 어떻다고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
  [자앙] 그래도 상자 주인에게는 반드시  알려줘야죠. 엉뚱하게 바뀌어진 상자 하나 때문에 뭔가 잘못
만들어지면 안 되잖아요.
  [운전수] 잘못 만들어진다니---. 그게 뭔데?
  [다링] (멀리서  듣고 있다가  큰 소리로 외친다.)  어떤 굉장한  기계래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즐겁고 기쁘게 해주는 신기한 기계죠!
  [운전수] (다링에게 외친다.) 무슨 기계라구?
  [다링] (큰 소리로) 기계가 아니라 폭탄이래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여요!
  [운전수]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자앙에게) 어쨌든 상자 속의 부속품으로 뭘 만드는지 알
수는 없어.  만약 폭탄을  만든다면 오히려  상자가 바꿔진  것이 사람들의  목숨을 살릴  테니깐 잘된
일이잖아? (자앙의 편지를 허공에 들고 두  조각으로 찢으며) 여봐, 자넨 너무 배짱이 약해. 이 조그만
창고 속에서 모든 걸 성실하게 잘  했다는 것이, 창고 밖에서는 매우 큰 잘못이 된다고 생각해봐. 그럼
상자  하나쯤  틀렸다고  안절부절하진 않을  거야.  (두  조각으로  찢은  편지를  자앙의  바지 양쪽
호주머니에 쑤셔넣는다.)  무슨 일이 생겨도  창고 밖으로 알릴  필요는 없어. 그게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모를 바에야 그냥 덮어두라구. 창고 속의 자네한테는, 그게 배짱 편한 거야.
  [자앙] (손에 들고있는 서류를 가리키며) 그렇다면 이런 서류들은 뭡니까? 누군가 이 서류들을 보면,
상자가 잘못된 것을 알 수 있을텐데요?
  [운전수] 서류가 완전하다고 믿는 건 바보들뿐이지! 좋은 예가 있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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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옛날에 죽었는데  사망 신고를  안 했거든.  구청에서  호적을 떼어보면  지금도 서류상으로는
버젓하게 살아있는 것으로 나온다구. 자, 굼벵이 양반, 꾸물대지 말고 어서 상자들이나 옮겨!
  (자앙과 트럭 운전수, 핸들 카에 실은  상자들을 창고 밖으로 운반해 간다. 침대에 앉아 있던 기임은
일어나서 자신의 담요를 둘둘 말아  걷는다. 그리고 침대맡의 낡은 트렁크를 꺼내 물건을 주워 담는다.
미스 다링, 기임의 곁으로 다가온다.)
  [다링] 마침내 결정한 거예요?
  [기임] 그래, 함께 가서 살기로 했어.
  [다링] (살림 도구들이 있는 곳에서  접시, 그릇, 찻잔들을 가져와 낡은 트렁크에 담으며) 무조건 다
가져가요.
  [기임] (다링이 담은 것들을 다시 꺼내 놓으며) 아냐, 반절만 내 것인 걸!
  [다링] 둘이서 함께 쓰던 물건은 어쩌려구요? 반절로 나눌 수도 없잖아요.
  (자앙과 운전수, 핸들 카에 상자를 싣고 창고 안으로 들어온다.)
  [운전수] 우린 트럭에 상자들을 다 옮겼어. 그런데 너희는 짐도 안 싸고 뭘했지?
  [자앙] 짐이라니---?
  [기임] 으음, 그렇게 됐어. 오늘 나는 이 창고 속을 떠난다구!
  [자앙] 정말 가는 거야? 이렇게 갑자기---?
  [기임] 미안해!  그런데 막상  떠나려니까 조금은  서운하군. (창고  안을 둘러보며)  너하고 여기서
얼마나 살았더라--- 몇 십 년은 훨씬 더 될 거야. 아마---.
  [자앙] 그래--- 우린 철부지 시절부터 이 창고지기였어.
  [기임] 언제너 너는 나를 고맙게도 보살펴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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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앙] 날 의붓어미라고 미워했으면서 뭘---.
  [기임] 진짜로 미워한 건 아니잖아?
  [자앙] 나도 알아. (기임을 껴안는다.) 제발 가지 말아! 이 창고도, 나도, 전혀 달리진 게 없잖아?
  [기임] 그건 안 돼. 이 창고는 더 이상 내가 살 곳이 아냐.
  [운전수] 남자들끼리 헤어지면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창고 밖으로 나가며) 시간 없어! 나 먼저
트럭에 가서 있을 테니까 너희는 어서 짐 싸들고 나와!
  [다링] (놋쇠 국자로 소리나게 두드리며) 그만하고, 서로 자기 물건들이나 골라봐요.
  [기임] (자앙의 포옹을 풀며) 난 내 물건을 잘 모르겠어. 굼벵아, 네가 골라줘.
  [자앙] 아냐, 쓸만한 게 있거든 모두 네가 가져.
  [기임] 너는 이 창고 속에서 혼자 살 텐데---.
  [자앙] 내  걱정은 말고  어서 먼저  골라봐. 그리고 내가  너한테 줄  게 있어.  (침대 밑의 상자들
중에서 화려한 색깔의 스웨터를 찾아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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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너의 생일날 주려고 두었던 건데, 헤어지는 날 선물이 됐군.
  [기임] (자앙에게 스웨터를 받아 몸에 대본다.) 근사한데!
  [다링] (자앙의 침대 밑을 바라보며) 좋은 건 이 속에 다 있잖아요! 이걸 가져가도 돼요?
  [기임] 안 돼, 그건 손대지 마.
  [자앙] 가져가요.
  [다링] (자앙의 침대 밑에서 상자 하나를 꺼낸다.) 이건 뭐죠?
  [자앙] 북어 대가리죠. 그건 가져가세요. 꼭 필요할 겁니다.
  [다링] 북어 대가리---?
  [기임] 이게  왜 필요한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상자를  열어서 북어 대가리를  하나 꺼내
자앙에게 준다.) 난 너한테 이것밖에 줄 게 없군. 내 생각이 날 거야. 항상 곁에 두고 보라구.
  [자앙] (북어 대가리를 받으며) 그래, 언제나 내 곁에 두고 볼께.
  (창고 밖에서 트럭의 재촉하는 경음기가 울린다. 미스 다링은 서둘러서 물건들을 담요에 담는다.)
  [다링] 아버지가 재촉해요. (상자와 담요를 들며) 어서 들고 나가요.
  [기임] (트렁크를 들고, 자앙에게) 그럼 잘 있어.
  [자앙] (마지못해 대답한다.) 잘 가--- 가서 행복해.
  (기임과 미스  다링, 창고  밖으로 나간다. 자앙은  북어 대가리를  식탁 위에 놓고,  떠나는 기임을
바라본다. 창고 문 앞에서 자앙과 기임의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기임] (소리) 이 창고 앞의 상자들은 어쩔 거야? 내가 좀 창고 안에 옮겨주고 갈까?
  [자앙] 괜찮아!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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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고  밖으로 떠나는  것이 즐겁다는  듯이 기임의  환호성이 들린다.  트럭 운전수와  다링의 웃음
소리도 들린다.  잠시 후, 트럭이 경음기를  울리며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창고는 조용해진다. 자앙,
식탁의자에 힘없이  주저앉는다. 늙고  허약해진 모습이다.  그는 식탁  위에 놓여있는  북어 대가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자앙]  그래,  나도  너처럼  머리만  남았군.  그저  쓸쓸하고--- 허무한  생각으로---  가득찬---
머리만---  덜렁---  남은 거야.  (두  손으로  북어 대가리를  집어서  얼굴  가까이  마주 바라보며)
말해보렴.  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그토록 오랜  나날---  나는 이  어둡고  조그만 창고
속에서---  행복했었다. 상자들을  옮겨오고---  내보내며--- 내가  맡고  있는 일을  잘  하고 있다는
뿌듯함--- 그게  내 삶을 지탱해  왔었는데---. 하지만 네  생각을 말해봐. 만약에---  정말 그럴 리가
없겠지만--- 이  창고 속에서의 성실함이--- 무슨  소용 있는 거지? (사이)  북어 대가리야, 왜 대답이
없니? 멀뚱멀뚱 바라
  [페이지] 094
만  볼 뿐  왜  대답이  없어? (북어  대가리를  식탁  위에 내려놓는다.)  네가  말하지  않으니까 난
두려웁고--- 불안해---. (사이)  아냐, 내 물음은 틀린 거야. 덜렁  남은 머리 속의 생각만으로 세상을
잘못됐다구 판단해선  안 돼. (핸들  카에 실린  상자들을 서류와 대조하며  제자리에 쌓기 시작한다.)
제자리에 상자들을  옮겨놓아라! 나는 의붓어미다!  정확하게 쌓아라! 틀리면 야단칠  테다! 단 하나의
착오도 없게, 절대로 틀려서는 안 된다!
  (자앙, 정성을 다해 상자들을 쌓는다. 무대 조명, 서서히 자앙에게 압축되면서 암전한다.)
  - 막 -
 

 

 

 

 


  이강백 작 . 김광림 연출의 <북어 대가리>에 대하여
  이재명 (연극 평론가)
  이강백 작, 김광림  연출의 <북어 대가리>(1993.2.11~3.28 성좌  소극장) 공연은 역량 있는 극작가와 연출가,  연기자를  비롯한 각  분야의  연극  창조가들의 열의와  재주가  잘  결집되어  조화를 이룬 창작극이었다. 극발연(극발전 연구회)은  실력 있는 연극인들을 한  자리에 모아 그들의 기량을 짜임새있게 꾸며냄으로써, 우리 연극계의 바램인 연극의 직업화 가능성을 충분히 제시해 주었다.
  같은 환경  속에서 대조적인  인생관을 지닌 두  인물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추적한   <북어  대가리>는   카타르시스와  함께   연극의  중요  기능인   발견(혹은  인식, An-agnorisis)의  문제를 진지하게  모색한  문제작이었다. 이  작품은 먼저  극장  입구부터 쌓아놓은 상자들과 무대  가득히 객석까지 압도하는  상자더미를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상품 유통의 현장이자 닫힌 사회를  반영하는 창고라는 환경을  통해 현대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또한 그와 같은 환경 속에서  경직된 머리만  있고 실천(혹은  실현)의 도구인  손과 발,  몸뚱이가 없는  (마치 '북어대가리'와  같은)  인물  자앙의  삶과,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율적인  판단  없이 무조건적으로 숨막히는 현실을 탈출하는 인물 기임의 삶이 각각 개연성을 확보하고서 전개되었다.
  작품 <북어 대가리>는 창고지기 자앙과  기임이 인간다운 삶을 말살당한채 상품(혹은 자본)의 논리에 끌려다니는 삶을  사는 현대인의  전형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두  인물은 그들이 보관하고 유통시키는 상품이 현대 산업 사회의 산물이었으나 역으로 현대인을 억압하는 요소임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짜여진  계획에 따라 상품을 보관하고 유통시키는 반복적인 행위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인물들의 형상을 무대화시킴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이와 같이 폐쇄된 환경 속에서  인간성을 상실하고 왜소해진 인간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이 작품이 부조리 연극의  하나라는 인상을 주기도  했다. 이 작품에는  인간의 근원적 존재에  대한 물음을 묻는 베케트 식의  경향과 사회  구조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핀터 식의  경향이 어느 정도  혼재되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작품  <북어 대가리>는 이와 같이  긍정적인 측면이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물 상호간의 관계와  인물의 형상화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문제점을  간단히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이 작품이 결국 자앙과 기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었다면, 두 인물 사이의 갈등, 대립 양상이  좀더 진지하고  다양한 톤으로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희곡에서는 둘  사이의  관계가 보다  치밀하게 계산된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  공연에서는 갈등, 대립 장면이  점층적으로 쌓여가는 과정이 약화되었다.  즉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결과적으로 떠남과  머뭄이라는 결말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못하였다. 이는 연기자들이 유형화된 연기를 펼칠 데서 기인한다고 생각되었다.
  인물의 형상화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창고지기 자앙과 기임은 서로 대조적이면서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에서  자앙은 환경과 역할에  만족하고서 기존의 보수적 논리에 충실한 인물,  현실에 안주하는  인물, 더  나아가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로서  형상화되었다. (그러므로 보수적  세계관의  화신인  자앙에게  굼벵이라는  별명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자앙은 의붓어미라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기임을  보살펴줄 수 있었고,  창고를 벗어나려는  기임을 만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믿었던 기임이  떠나 버리자, 이 세상  모든 것은 옳고  바르다는 기존의 믿음과 그것에 대한 회의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아마도 자신
이 여태껏 살아온 삶의 방식을 지키려는  확신이 보다 강한 듯 보였으나, 번민하는 모습 자체가 오히려 극적이지 못했다. 또한 자앙의 번민 장면이 꼭 필요햇더라면, 언어적 독백보다는 더 연극적인 방법으로 처리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자앙을 곧바로  일상적인 삶  속으로 몰입하게 함으로써  끝까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원칙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데 자앙에게서는 현실적인 원칙주의자의 모습과 함께 어떤 종교적 근본주의자의 고뇌가 우화적으로 그려진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기도 했다.
  자앙과 대조적인 입장의  기임은 현실에 늘 만족하지 못한  채 적당주의와 요려이주의로 일관된 삶을 살다가,  결국  불안정한  미래에 몸을  내던지는  행동주의자로  그려져  있었다.  그는 세상은  모두 잘못됐고, 어느  것 하나  옳게 된  것이 없다는  인식을 얻고  나서, 창고를  벗어날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창고 안의 세계와  창고 밖의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이 무조건적으로 현실을 벗어나려는 무모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머뭄과 떠남이라는 상반된 결말에서 그에게는 떠남의 계기 마련이  부족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그의   행동  전반에서  자앙의  것에  비해  사실성이  충분히 확보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차분한 성격의  자앙과 대조시키기  위해 기임에게는 좀더 외향적인 연기를 요구할  수도 있었겠으나, 과장된 연기와  발성은 디테일적인 측면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기임에게  현실 탈출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자앙에게  현실을 회의하게  만든 부수적인  인물 트럭 운전수와 미스 다링도 상당히 전형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져 있다. 트럭 운전수에게는 직업을 그 자신의 이름으로 부여함으로써 인물의  직능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이 구사하는 방언과 능숙한 화투 솜씨를 통해 여러 곳을 굴러  다니면서 약육강식의 세상 이치를 몸으로 터득한 인물임을 효과적으로 잘 보여주었다. 그는  네 인물  가운데에서 가장  선명하게 개성이  살아 있음으로써 인물  사이의 매개적 기능을 충실히  다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창고지기의  애인이었던 미스 다링은  쾌락에 더 비중을 두게 함으로써 인물의 성격과 구도가 선명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밖에  장면과 장면을 연결시켜  주는 음악의  분위기가 창고라는 호나경과  어울리지 않게 무거운 느낌을  준다든가,  트럭은 객석  뒤쪽에서  도착한  것으로 그려지는데  경적  소리는  무대 앞쪽에서 울린다든가 하는  등의 문제가  드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700개의  상자를 꼼꼼하게  배치하고 창고의 서까래가지 만들어 놓은 무대 미술사의  노력은 크게 돋보이기도 했다. 이 작품은 인물들의 말과 행동, 사고뿐만 아니라 그 외의 세부적인  사항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산되어야만 극적 행위들이 사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북어 대가리>는  과도한 상업성과  말초신경적 자극성, 그  밖에 과도한  이념성에 짓눌렸던 기존의 창작극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이 작품은 받아먹기는 쉽지만 소화해내기는 결코 쉽지 않은, 결국 우리  체질에 잘 맞지 않는 번역극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우리 연극계에 훌륭한 대안 제시가 되리라 믿는다.
  * 이 글은 젊은 연극 평론가들로  구성된 <공연과 이론을 위한 모임>에서 이재명 본인의 발제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함께 토론된 사항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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