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묵상하라

바리사이의 시선

깜장보석 2007. 9. 30. 10:14

 

예수께서 38년이나 중풍에 걸렸던 사람을 온전히 치유시켰다는 사실이 보도된 즉시 “그날은 안식일이었다”(5,9)라는 문장이 나온다. 좀 불길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그래서 유다인들은…”이라는 말이 불길한 징조가 사실임을 드러낸다.
38년간이나 마음대로 거동하지 못하다가 성한 몸이 되었다면 그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뻐하고 축하해 줄 것이다. 이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사람보다 율법을 더 중시하는 바리사이들은 중풍병자가 나은 것보다는 안식일에 침상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중풍병자에게 “오늘은 안식일이니 당신은 침상을 들고 다녀서는 안 되오”라고 한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지 못한다. 마치 거지 라자로가 부잣집 앞에 늘 앉아 있어도 부자의 눈에는 띄지 않았듯이 연민의 마음이 없으면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보다는 율법에 더 신경을 쓰던 바리사이들 눈에는 38년이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안식일법을 어기고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 사람만이 보일 뿐이다.
도대체 안식일법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야단을 떠는 것일까?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법은 절대로 어기면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법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안식일법을 어기지 않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식일법을 어기지 않도록 39가지 규정과 세부 규정을 정하였다. 세부 규정에는 이런 것이 있었다.
‘안식일에 침을 뱉어서는 안 된다. 땅에 떨어진 침이 흙 부스러기를 동그랗게 만들 경우 안식일에 일한 것이 되어 안식일법을 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틀니를 끼어서는 안 된다. 틀니가 빠지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떨어진 틀니를 집어 끼게 되니 안식일법을 어기게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정원을 거닐어서는 안 된다. 정원을 거닐다가 벌레 먹은 이파리를 보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이파리를 따게 되고, 그로써 안식일에 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에 여자들은 거울을 보면 안 된다. 거울을 보다가 얼굴에 무엇인가 묻어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털어버리게 되어 안식일에 일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듯이 바리사이들이 정한 금기 규정은 인간이 ‘자기도 모르게’ 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사전에 막겠다는 의도이며 안식일 계명을 철저하게 준수하겠다는 율법주의적 태도이다. 지나친 세부 규정으로 인해서 안식일은 더이상 하느님 찬미와 은혜의 날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무엇을 하지 말라’는 악몽의 날이 되어버린다.
율법주의적 태도란 신앙생활의 모든 것을 율법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 여부로 따지는 태도를 가리킨다. 율법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고 보는 태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훌륭한 신자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엉터리 신자로 보는 태도이다.
율법주의적 삶을 사는 이들은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죄에 신경을 쓴다. 바리사이처럼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노심초사하는 사람은 죄 속에 살아가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오직 죄를 피하는 일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들이 수많은 세칙을 만드는 데 정신이 팔렸던 것은 그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리사이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연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특히 사목자들과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더욱 그러하다. 예수님과 하느님처럼 사랑으로 불타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바리사이적 신앙의 허위성
“당신들은 그분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고 그분 모습을 본 적도 없습니다. 또 그분이 보내신 이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 말씀이 당신들 안에 머물게 하지도 않습니다. 당신들은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서를 연구하고 있지만 바로 그 성서가 나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데도 생명을 얻으러 내게 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5,37-­40)

바리사이적 신앙은 머리로는 진리를 알고 있지만 마음의 움직임은 전혀 없는 신앙을 가리킨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이 탄생한 장소를 알아보기 위해서 헤로데 대왕을 방문했을 당시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바리사이들은 그들의 해박한 성서 지식을 통하여 유다인의 왕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냈다. 하지만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베들레헴까지 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진리 하나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만족했다. 그들이 발견한 그 한 가지 진리가 그들에게 준 이득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교만이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껍질뿐인 삶이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적 신앙의 종교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바리사이들은 성서(구약성서)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성서에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 구절 하나하나를 공부했고 외우고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지만 놀랍게도 그 말씀대로 살지는 않는다.
바리사이들, 특히 율법학자들만큼 성서를 열심히 공부한 이들이 있을까? 이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황청 성서대학원 졸업생이거나 하버드 신학대학원 성서 전공 졸업생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바리사이와율법학자들은 성서학 세계에서 자신들의 해박한 지식과 이론을 펼치기 위해 긴 세월 학문적 훈련을 받은 이들이다. 하지만 성서 말씀은 그들 안에 없다. 긴 세월 성서를 공부했으면서도 말씀을 내면화시키지 못한 것은 연구를 위한 연구로 끝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서를 창(窓)에 비유하고, 성서를 통해서 보게 되는 영원한 생명을 푸른 바다로 비유한다면 이들 바리사이들은 창을 통해서 푸른 바다는 보지 않고 창만을 연구하는 이들이다. 창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고, 치수는 얼마이고, 투명도는 얼마이며, 어느 부분이 매끄럽지 못하고 하는 식으로 창 연구만 하는 이들이다.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성서 말씀을 공부하면서도 분석비판 차원에만 머물기 때문에 말씀을 공부하고 나서도 그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의 눈으로 성서를 읽기보다는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분석하고 비판할 때 우리의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간다. 창조주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대한 경외심과 기쁨을 잃어버린다. 진화론을 주장한 찰스 다윈은 이런 고백을 했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여러 종류의 시들이 내게 큰 기쁨을 주었다. 초·중학교 시절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강렬한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지난날 음악은 내게 커다란 기쁨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단 한 줄의 시도 읽을 수 없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어 보려 했으나 어찌나 따분한지 속이 다 울렁거릴 정도였다. 미술과 음악에 대한 취미도 잃고 말았다. 멋진 경치는 아직 어느 정도 볼 만하지만 예전처럼 강렬한 감동을 주지는 못한다. 내 정신은 거대한 정보의 집합체에서 일반 법칙을 만들어 내는 기계가 되어버린 것 같다. 삶에서 감동을 잃어버리니 더이상 행복을 느낄 수가 없다.”
오늘날 교회는 교육과 훈련을 강조한다. 레지오 간부 교육, 구역장 교육, 주일학교 교사 교육, 봉사자 교육, 봉사자 훈련, 전도 훈련, 묵상 훈련 등. 물론 성장하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교육과 훈련은 무엇보다 필요하다. 하지만 하느님 체험이 없는 교육과 훈련은 자칫 잘못될 수 있다. 가슴 없이 머리만 있는 사람만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슴 없이 머리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쉽게 교만해질 수 있다. 무슨무슨 영적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또 신앙생활에 말과 이론만을 앞세우고, 남에게 지식의 잣대를 자주 들이대어 판단하고, 내 견해와 다른 것은 다 잘못된 것이라 단죄할 수 있다. 결국은 다른 신자들에게 상처를 주고 공동체에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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