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묵상하라

인과 사랑

깜장보석 2007. 9. 30. 10:21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인(仁)에 뜻을 두면
악한 일이 없게 된다. - 논어 이인편


어떤 사람이 인애(仁愛)의 덕을 닦기로 마음먹었다면 결코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不可)과 할 수 없다(不能)는 것은 다르다. 인덕(仁德)을 닦기로 뜻을 세운 사람이라도 여전히 죄를 짓거나 범죄할 수 있다. 다만 양심상 조금이라도 더 경계하고 더 단속하여 스스로 삼가면서 다시 죄에 떨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원래 향기와 고약한 냄새는 같은 그릇에 담을 수 없고, 얼음과 숯불과 같이 성질이 다른 것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법이다(薰不同器, 氷炭不相容). 일단 덕을 닦아 선(善)을 지향하기로 뜻을 세웠다면 못된 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덕을 닦아 선을 지향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과 영적 생명을 발전시키는 것으로 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느님께 향하는 것이며, 반면에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적인 측면과 영혼이 없는 금수에 가까운 행위로 인간을 타락하게 하여 영원한 죽음에 다다르게 한다.
선을 지향하는 것은 인간이 성령의 움직임을 따르는 것이고, 악을 행하는 것은 사사로운 욕심을 따르는 것이다. “육은 영을 거슬러 욕정을 일으키고 영은 육을 거슬러 일어납니다. 둘은 상극이라 여러분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게 합니다..”(갈라 5,17)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준 가르침이다.
덕을 닦아 선을 지향하기로 마음먹으면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일반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만일 신앙인에 대해서 말한다면 더욱더 강화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인이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특히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는 절반만 드리고 나머지 반은 자기가 지니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려면 바로 그리스도와 같이 살고 같이 죽으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그리스도와 같이 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좋아하는 것이면 좋아하고, 그리스도께서 미워하면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갈라 2,19)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신비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의 실제 생활이기도 하다. 다만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 같이 살고 같이 죽으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그리스도와 같이 하는 신앙인들, 과연 그들이 못된 짓을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못할 것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나는 인(仁)을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고, 또한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공자의 이 말은 반어법이다. 그 뜻은 인을 좋아하는 사람과 불인을 미워하는 사람을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가를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인을 중시(重視)할 줄 알고 또 인이 다른 덕행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숭고한 경지의 수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율법과 계명은 인간 심중(心中)의 인덕(仁德) 혹은 사랑과 관련되어 있다.(마태 22,37-­39 참조) 그래서 인덕을 좋아한다는 것은 온 마음과 온 힘 그리고 온전한 뜻으로 인애(仁愛)의 덕을 힘써 닦는 것이요, 황급한 일을 당했을 때에도 이같이 하며, 넘어지는 순간에도 이같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인을 미워한다는 것은 그가 인(仁)하지 못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불인한 일을 결코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결코 인덕에 반(反)하는 일을 하지 않고 또한 인을 해치는 행위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불인을 미워하는 것은 거의 힘써 인덕을 실행하는 것과 같다.
공자는 사람들이 인덕을 좋아하여 힘써 닦아 나가는 한편으로 인덕을 위반하는 일을 하지 않고, 인을 해치는 행위를 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격려하면서 말하기를 “하루라도 인에 힘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 나는 힘이 부족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아마 있기는 하겠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구나.” 사람이 능히 하루라도 온 마음과 힘 그리고 온전한 뜻으로 인애의 덕을 닦는다면 결코 힘이 마음을 따르지 못하여 중도에 그만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 힘이 부족하여 하루 종일 노력했어도 인덕을 이루지 못했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공자는 말하기를 “나는 이런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구나.”
공자의 이러한 가르침은 신앙인들에게도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사랑의 계명을 받았고 또한 요한과 바오로 두 사도들의 해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마땅히 온 마음과 온 힘으로 그리고 온전한 뜻으로 인애의 덕행을 닦아야 하고, 하루뿐만 아니라 일생 동안 힘껏 닦아나가야 가능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노력한다면 애덕을 이루지 못할 리 없다.
인간 편에서 오롯한 마음과 뜻을 다하여 노력한다면 언제나 성취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노력하는 그만큼 수확하는 것인데, 하물며 매일매일 힘쓰면서, 더구나 평생 동안 노력한다면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이다. 하느님 편에서 보면 우리가 만일 매일 끊임없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힘쓴다면 하느님께서 분명히 우리를 강복해 주시고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시어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도리이다.
마태오복음을 보면(13장 참조)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설명하면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그리고 자신이 하늘나라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강생하여 인성을 취하신 예수, 하늘나라 사랑의 씨앗을 인간들에게 뿌리시어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으니 인간은 단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만 하면 모든 계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역대 선지자들과 성현들 또한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니, 공자도 그 중의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공자가 말한 것은 모두 인간을 선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선의 근원이시니 모든 선에 관한 가르침은 하느님께 나온 것이며, 모든 선행은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과 교회의 성인(聖人)들은 사람들을 위하여 ‘사랑의 씨앗’을 뿌렸고, 공맹(孔孟)과 성현들은 ‘인의(仁義)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사람들이 능히 이 ‘사랑의 씨앗’과 ‘인의의 씨앗’을 자신의 마음속에 받아들여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또한 얼마나 하느님 뜻에 맞는 기쁜 일이 되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밭[心田]은 가시와 엉겅퀴로 가득 차 있고 잡초가 무성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이 머무를 공간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님 사랑의 씨앗과 공맹의 인의의 씨앗이 모두 그들의 마음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마침내는 사회와 교회가 혼란스럽게 되고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사건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

'이것을 묵상하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전백승의 여호수아기  (0) 2007.09.30
누가 목마르거든  (0) 2007.09.30
하느님, 우리의 신분증  (0) 2007.09.30
바리사이의 시선  (0) 2007.09.30
베짜타 못가의 병자  (0) 2007.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