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서는 남녀간의 사랑과 결혼이라는 좀 특이한 주제를 도입하여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런데 바람기 많은 여자와 그녀를 기다리는 남편이라는, 좀 슬프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그런 사랑 이야기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살려내는 일이라고 하던데, 하느님은 다른 남자를 따라다니는 자신의 아내 이스라엘을 어떤 사랑으로 살려내시는지 그 이야기를 읽어보기로 하자.
1.개관
호세아서에서 가장 부각된 특징은 구약성경 최초로 ‘결혼’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묘사했다는 점이다. 이는 신들의 결혼과 다산을 경신례의 주된 요소로 삼고 있던 가나안 종교를 수용한 결과로 보여지는데, 곧 호세아서는 남신과 여신의 결혼이라는 신화적 표상을 야훼와 이스라엘의 계약이라는 주제로 신학화하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이러한 신학화는 신약에 들어와서 ‘그리스도-교회’의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2.인물
호세아서는 예언자의 이름과 아버지(가문)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브에리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는 그는 ‘이스라엘이 주님께 등을 돌리고 창녀 짓을 하기 때문에 너 역시 창녀와 결혼’하라는 기괴한 명령을 받으면서 예언직을 시작한다(1,2 참조).
호세아는 북왕국의 유일한 문서 예언자였다(아모스도 북왕국에서 활동하지만 그는 남왕국 출신이다). 호세아라는 이름은 여호수아, 예수아 등의 이름과 같이 ‘구하다, 곤경에 몰린 이를 구해주다, 꺼내주다’라는 의미의 히브리 동사 ‘야샤’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호세아란 ‘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지식층에 속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북이스라엘 사람답게 북쪽의 전통, 예를 들어 야곱 전통(12,34), 모세 전통(출애굽에 대하여 12,14; 시나이 계약에 대하여 8,1.12), 광야 전통(9,10; 13,5)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이스라엘의 현안들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3.구성
호세아서는 나름대로 정교한 구성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탄탄한 구성력이 이미 구두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후대 전승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는 정확히 구별할 수 없다.
제1부(자서전적 내용: 13장)
상징적 표현: 간음한 아내 고메르와 충실한 남편 호세아
(1) 1장은 제자가 쓴 전기 부분(3인칭)
(2) 3장은 자서전적 설화 부분(1인칭)
(3) 2장은 1장과 3장을 조화시키려는 신학적 해석
제2부(예언 신탁: 414장) 여러 신탁들
(1) 징벌에 대한 신탁(413장)
(2) 구원에 대한 약속(14장)
4.편집
호세아서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그의 제자들이 남왕국으로 가지고 와서 편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왕국적 관심사, 특히 신명기 역사적 관점이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1,7; 4,15; 5,5.14; 6,11; 12,1). 또한 유배의 경험을 반영하는 구절로써 다윗 왕조의 회복을 기다리는 희망의 메시지도 포함되어 있어(3,5; 14장) 유배 이후에 최종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5.신학 사상
① 하느님께 대한 앎
호세아서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야훼와 바알 중 누가 진정한 풍요의 신이냐라는 질문이다. 이스라엘이 처음 알게 된 야훼는 창조와 풍요의 신이라기보다는 구원과 역사의 신이었다. 그러나 농경사회에 정착하면서 남신과 여신의 교접을 통해 풍산을 기원하는 바알 종교 제의를 알게 되고, 이에 현혹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맞게 된다. 사실 사람이 아이를 낳고, 가축이 새끼를 낳으며, 곡식이 자라는 모든 과정을 남녀간의 원리로 이해하던 바알 신화의 위상은 대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최첨단 문화 안에서도 여전히 강세를 보이는 이슈는 성 관련 산업문화임을 인정한다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바알은 그의 생식력을 상징하기 위해 송아지로 형상화되곤 하였는데, 이스라엘 예배처소에서 송아지를 섬겼다는 것은 바알이 야훼 종교에까지 침투되어 혼합화된 현상을 드러낸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 안에서 호세아서는 더 이상 바알이 야훼 종교 안에 침투되는 것을 막고자 한다. 진정한 풍요의 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야훼가 곧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인간에게 수여하시는 풍요의 신임을 천명하고자 한 것이다. 특별히 6장 6절은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헤세드)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아트)다”라고 말함으로써 구원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앎이 곧 해방이요, 구원임을 강조한다.
② 불륜과 매춘
이와 관련하여 호세아는 하느님께 대한 무지와 망각을 ‘불륜’이라는 죄로 고발한다. 이스라엘은 당시의 부강함 속에서 마치 아내가 남편을 잊듯이 하느님을 잊었다는 것인데, 특별히 이러한 불륜행위는 앞에서 언급된 첫번째 신학적 주제 ‘하느님께 대한 앎’과 연결되어 있었다. 곧 자신들을 부양하고 풍요하게 하는 신을 바알로 착각하고 그를 따르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창녀의 매춘 행위로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서가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매춘의 실태는 우선 왕권 탈취를 위한 유혈극과 이국 문물의 범람이었다. 하느님을 잊고 살 때 도래하게 되는 자연스런 귀결은 그릇된 분별력이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외국의 도움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착각하는데, 이러한 잘못된 정치적 관행(8,9), 그 어리석음이 바로 매춘이라는 것이다(5,13; 7,8 이하; 10,4; 12,1 참조). 두번째 현상은 난무하는 ‘우상숭배’였다. 다른 힘을 믿고 그 힘에 의지함을 지적한 것으로서 바알과 야훼를 동일시하는 현상이라던가, 대놓고 바알을 섬기던 상황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들 안에서 이스라엘은 구원의 기회를 거절하고(2,4 이하; 4,16; 6,4; 7,14 이하) 야훼를 ‘잊어버렸으며’(2,15) ‘듣지 않는’(9,17; 11,5)다. 모두 배신의 태도들인 것이다.
③ 원점상황(Nullpunktsituation)
매춘에 대한 벌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박탈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내용은 “너희가 이집트로 다시 가리라”(8,13; 9,3; 11,5 참조)는 표현을 통해 제시되고 있는데, 현재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처음 출발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수여하신 하느님의 모든 혜택과 은총을 거두어가야 비로소 그것을 주셨던 분이 야훼 하느님이셨음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세아서의 제1신학 주제인 ‘하느님께 대한 앎’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공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많건 적건 우리의 삶을 영위케 하는 자산들)이 나 자신의 능력을 통해서, 혹은 하느님 아닌 다른 어떤 존재의 도움으로 획득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신 분은 바로 당신이심을 분명히 인식시키기 위해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거두어 ‘원점(본래의 無)’으로 돌아가게 하실 수 있다. 이는 하느님을 망각한 죄로 주어지는 벌이라기보다 하느님을 분명히 앎으로써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인 과정인 것이다.
호세아서는 출애굽 사건과 광야 여정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원체험’했던 그들의 조상들처럼 이제 그들을 ‘광야’로 데리고 가신다. 물이 없어 목말라 죽을 지경에 이를 정도로 결핍된 곳이었지만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그 어떤 시절보다 풍요로웠던 곳이 광야이기 때문이다(2,16-25).
④ 하느님의 사랑
당시 유다인들의 결혼풍습에 의하면 간음한 아내는 그 자리에서 처벌당했다(레위 20,10; 신명 22,22). 보통은 돌로 죽음을 당했고(신명 22,23 이하), 이혼당한 여자는 절대로 첫 남편에게 돌아올 수 없었다(신명 24,3 이하). 그러나 호세아서는 당시의 결혼관을 초극하는 놀라운 사랑을 보여준다. 간음한 아내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남편(하느님)의 절절한 사랑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11장).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그녀를 불륜의 죄로 고발한 남편의 심정은(2,4 이하) 아내에 대한 원한이나 복수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해서 돌아오게 하고 사랑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
⑤ 의무뿐인 전례
호세아서가 고발하고 있는 또 다른 주제는 마음 없이 의무적 행위로 전락한 전례이다. 호세아의 아내 고메르가 호세아에게 불충실하였듯이 이스라엘의 제사는 하느님과의 진정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배제된 채 그저 의무만을 이행하던 자리였다. 전례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화하는 살아 있는 예배의 장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의무감만을 충족시키는 예배는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거부감과 혐오감만을 불러일으키는 자리로 전락하였다(4,4-11. 12-19; 8-10장).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무리 화려한 예물을 드렸다 하더라도 마음과 진심이 없는 전례를 원하지 않으신다. 호세아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봉헌’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품안에 의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었다 해도 너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면 할말이 없는 법이라고 한다. 호세아 신탁의 주제가 바로 이런 사랑과 맞물려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겨 진정한 사랑을 만나지 못하던 이스라엘은 그분과의 관계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전례 때조차도 자신들의 마음을 드리지 못한다. 더 이상 할말이 없는 사랑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와 하느님 사이가 혹시 그런 사이가 아닐까, 원고를 쓰는 내내 많이 두렵고도 안타까웠다.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6,4) 그분의 분노 섞인 슬픔과 애절함이 아주 가까이에서 들리는 듯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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