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묵상하라

예악의 근원은 사랑

깜장보석 2007. 9. 30. 10:29

 

 

子曰:仁而不仁, 如禮何? 仁而不仁, 如樂何?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서 어질지 않으면 예가 있은들 무엇하며
사람으로서 어질지 않으면 음악이 있은들 무엇하랴.
- 논어 「팔일편」

‘예(禮)’는 인간의 행위규범으로, 인간의 생활이 규정과 법도에 맞도록 이끌고 나아가 하늘이 준 천부적인 선성(善性)을 발휘하고 인간 본성의 존엄과 하느님의 모상성을 드러내어 영혼이 없는 일반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악(樂)’은 인간의 영성을 도야(陶冶)하고 인간의 정신을 승화시키며 또한 인간의 포악한 기운을 소멸시켜 온화하고 돈후(敦厚)할 뿐 아니라 부드럽고 자상스러우며 이치에 밝고 깊은 정을 지니게 한다.
주공(周公)이 예악을 만들 때 그 뜻이 이러했고, 공자가 예악의 가르침을 편 목적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인류가 (나 같은 노인도 이러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용서하시기를!) 만일 서로 화합하고 공존하는 세계를 만들어 다시는 서로 잔악하게 죽이지 않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중국 유가의 예악(禮樂)에 관한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곧 이러한 유가의 예악문화를 실현시키지 않고서는 하나의 화합된 사회, 진정으로 편안하고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알아들을 귀가 있은 자는 알아들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예악의 가르침에서 인류 사회의 화합은 이렇듯 중요하다. 그렇다면 예악의 근원은 무엇일까? 다시 말하면 어떤 능력에 힘입어 사람이 천부적인 선을 발휘하고 하느님의 모상성을 드러내게 하는 것일까? 또한 인간의 기질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정신적인 측면을 승화시키는 것일까?
예악의 근원은 사랑이다. 예악이 그것에 힘입어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능력도 또한 사랑이다. 인간의 심중에 진실된 사랑이 없다면 예와 악은 단지 외적인 형식일 뿐이며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바로 사도 바오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내가 사람의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나는 소리 나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고린 13,1)
인간의 진실된 내면에서 표출되는 예와 악이라야 비로소 인간의 생활을 법도에 맞게 이끌수 있으며 인간의 성정(性情)을 온화하고 돈후하게 만들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예와 악은 한갓 텅 빈 형식일 뿐이어서 실질적인 효용이 없게 된다. 마치 노인들이 훈화하면서 빈말처럼 하는 많은 구호(口號)나 벽에 붙은 숱한 표어들처럼….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이 만일 인덕(仁德)이 없다면, 사랑이 없다면 예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악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
인(仁)은 높은 경지의 덕행이며 모든 덕의 핵심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렇게 높은 경지의 덕을 터득할 수 있는 것일까? 무엇으로 시작해야 이 모든 덕의 핵심이 되는 인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분명히 제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논의했을 것이며, 이 소식은 공자의 귀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혹은 어떤 제자들이 인의 경지가 너무 높아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직접 공자에게 가르침을 청했는지도 모른다. 공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인이 정말 그렇게 높은 경지라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이더냐? 그러나 사실은 바로 너희 곁에 있는 것이어서 내가 인을 하고자 한다면 인은 바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스스로 겸손할 때 바로 인덕을 닦는 것이요, 남의 잘못을 참아주고 남을 용서해 주는 것 또한 인덕을 수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겸손하고 참아주며 용서하는 것들은 모두 내 눈앞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또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다만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겸손할 수 있고, 어디서나 참아낼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고원(高遠)한 경지란 말인가? 만일 사람들이 인을 터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증자는 이러한 이치를 깊이 깨닫고 있었다. 공자가 그에게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어져 있다”라고 했을 때, 그는 공자의 일관된 도를 인으로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충서(忠恕)’로 해석했던 것이다.
증자는 실천가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인덕을 닦는 것이 ‘충서’ 두 글자로 시작해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충(忠)은 온 힘을 다해 남을 위하는 것이고, 서(恕)는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推己及人) 것이다. 온 힘을 다해 남을 위하는 것이나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 모두 사랑의 행위이다. 둘 다 모두 인덕을 닦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공자도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한 사람이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면 남도 이루게 하는 것이다(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논어 「옹야편」).” 곧 공자도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면 남도 이루게 하는’ 충서의 도가 바로 인덕이며 인덕을 닦는 데 필요한 방법임을 밝힌 것이다. 더 나아가 공자는 그것을 먼 곳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주변에서 찾을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성 바오로 사도도 사람들에게 애덕(愛德)의 수련을 강조하면서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랑은 너그럽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고 허세를 부리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 것을 찾지 않습니다. 사랑은 분통을 터뜨리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딥니다”(1고린 13,4­7). 이 모든 것이 애덕을 닦아나가는 모습인 것이다.
우리가 사도 바오로가 제시한 다양한 사랑의 방법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적어도 다음 두 가지 관점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① 인(仁)도 사랑도 모두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인덕과 애덕을 수련하고 행할 수 있는 것이다. ② 그렇다면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제시하는 인애(仁愛)의 덕을 닦기 위한 다양한 방법 가운데 과연 몇 가지나 힘써 행하고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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