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 해야 합니다"(요한 9,3-4).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이 한 질문,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에 대한 대답이다. 언뜻 보면 이 말은 잔인하게까지 생각된다. 하느님께서 당신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 사람을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만든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평생 어둠 속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에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고 그 결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소경으로 태어났다니, 만일 그렇다면 하느님의 이러한 계획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한 인간을 철저히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해석이 맞는다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스런 사건이 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계획된 일이란 말인가? 비행기 사고로 몇백 명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요, 전쟁과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도 하느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계획된 것이 된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너무나 잔인하고 몰인정한 분이 아닌가. 그런데 이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치유 기적은 하나같이 예수님이 병자의 처지를 가엾이 여겨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가엾이 여겨 고쳐주셨고, 두 소경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가엾이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는 그리스어로 splagcnivzomai인데 이는 ‘애장·간장·내장’을 가리키는 명사 splavgcna에서 나온 말이다. 직역하면 ‘애간장이 끊어지다. 오장육부가 끊어지다’이다. 그것은 곧 고통을 당하는 병자를 보며 당신 존재 밑바닥에서부터 아파하고, 그 병자와 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직접적인 동기는 태생소경에 대한 연민에서였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 하느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병자들에게 고통을 허락했다면, 그래서 고통을 겪는 병자들을 보고 애처로워하시고 눈물까지 흘렸다면 그것은 악어의 눈물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치유 기적을 행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고통받는 병자들에 대한 깊은 연민 때문이었다.
둘째, 9장 1절을 유념해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태생소경을 만난 것이다. 일부러 처음부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 사람을 찾은 것이 아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은 우연히 만난 태생소경을 보고 자비심이 움직여 그에게 빛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비행위의 결과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난 것뿐이다. 그러니 태생소경을 하느님 영광의 도구로 취급하기보다는 하느님 자비의 살아 있는 예로 보아야 한다.
셋째, 절 표시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3절 후반부(“하느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기 위해서입니다”)는 본래 4절로 들어가야 하는데 실수로 3절에 포함된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성경은 장과 절로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러한 구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경의 절 구분은 에티엔 수사가 1551년에 완성한 것이다. 그는 1절, 2절, 3절 등을 표시하기 위해 새로운 절이 시작될 때마다 시작되는 단어 앞에 점을 찍었다. 그런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에티엔 수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마차 여행중에도 작업을 하였는데 간혹 말이 뛰면서 마차가 흔들릴 때 엉뚱한 곳에 점을 찍어 부적절한 절 구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구절이다.
원래는 3절의 전반부(“저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에서 3절이 끝나고, 3절 후반부터 4절이 시작되도록 점을 찍으려 했는데 그만 말이 뛰는 바람에 점을 조금 더 뒤에,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는 4절 앞에 찍었다는 것이다. 정리해 보면 에티엔 수사가 의도했던 절 구분은 다음과 같다. 3절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4절 “하지만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기 위하여,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서 맹인의 눈에 바르며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시오” 하셨다. 맹인은 곧 가서 씻고 보게 되어 돌아갔다(9,6-7).
예수님은 시각장애자의 눈에 진흙을 바른 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언덕을 타고 내려가는 비탈길에 자리잡고 있어 눈먼 사람이 혼자 가기에는 아주 어려운 길이다. 태생소경이 실로암까지 내려가면서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지 우리는 모른다. 나아가 두 눈에 진흙을 붙이고 실로암까지 비틀거리며 내려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저놈이 이제는 돌았나 보다. 저 꼴 좀 보아라”며 비웃었을지 모른다.
예수님은 왜 태생소경을 그 자리에서 고쳐주지 않고 힘든 걸음을 하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늘 그렇듯이 기적을 행하실 때 인간의 협조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병자를 대뜸 치유해 주시지 않고 무엇인가 믿음의 행위를 요구한 것은 치유 기적이 우리 신앙을 바탕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기적은 우리의 신앙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나자렛 체험을 떠올려 보라.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기적을 행하려 하셨지만 사람들의 불신앙 때문에 기적을 행하실 수 없자 당신도 놀라셨다(마르 6,5).
엘리사가 나병환자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으로 내려가서 몸을 씻으라고 했을 때 나아만이 불복종했던 것(2열왕 5,11)과 달리 태생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한다. 비탈길에서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실로암까지 간다. 태생소경은 예수님 말씀대로 실로암 물로 눈을 씻으면 뜨일 것임을 확신했다. 그의 확신은 다음 두 가지 근거로 이루어졌다.
첫째, 예수님이란 라삐에게 감동했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자는 볼 수는 없지만 대신 귀가 밝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왕래하는 라삐들과 그의 제자들이 성전 문앞에서 구걸하는 자기를 두고 인간의 죄와 하느님 징벌이란 주제로 토론을 벌이는 것을 자주 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이란 라삐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자기를 두고 토론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그러자 예수님은 그동안 태생소경이 들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그 누구의 죄도 그를 장님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대답한 것이다. 소경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크게 감동했다.
둘째, 태생소경은 예수님이 자기 눈을 뜨게 해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갠 다음 그것을 자기 눈에 발라주었을 때 예수님을 깊이 만났다. 눈을 뜨지 못하는 시각장애자의 감각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예민하고 뛰어나다.
예수님은 태생소경만이 아니라 다른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도 병자들의 몸에 손을 대셨다. 예수님은 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셨을까? 말씀으로도 병자들을 치유할 수 있는 권능을 갖고 계신 분이신데 왜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셨을까?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인가? 물론 아니다. 가엾이 여기시는 당신 마음을 병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병자들은 육신의 병보다는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분은 가족과 사회에서 버림받아 살아온 그들에게 진실된 애정을 느끼게 하려고 손을 대어 만져준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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