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묵상하라

큰물고기와 큰새

깜장보석 2007. 9. 30. 10:32


北冥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가 한 마리 있는데 이름이 곤이다.
곤은 하도 커서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이름이 붕이다.
붕의 등허리는 하도 커서 몇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솟구쳐서 날면 그 날개가 하늘을 드리운 구름 같은데
이 새가 그렇다.
바다가 출렁이면 장차 남쪽 큰 바다로 날아갈 것인데
남쪽 깊은 바다는 하늘의 못이다.


모든 설화의 첫 이야기가 그렇듯이 이 이야기도 「장자」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함축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북쪽 깊은 바다에서 하늘로 솟구쳐 남쪽 하늘 바다로 날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이 세 공간 여정이 보여주는 것은 세 가지 삶의 차원이며,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변화다. 새로운 차원에서 살기 위해서는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첫 단계에서 물고기인 곤(鯤)은 피라미와 같은 작은 물고기가 아니다. 그는 이미 더 이상 물속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 성숙한 곤이다. 그의 간절한 염원은 자신을 붕(鵬)으로 변신케 하였다. 그는 무거운 몸을 상승시키기 위해 바람을 타고 힘차게 날갯짓을 해야 한다. 그를 날아오르게 하고 쉴새없이 큰 날갯짓을 하게 하는 것은 남쪽에 있는 하늘의 못 때문이다. 하늘의 못에 이르러 그는 다시 한번 솟구치는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상승과 변화의 과정을 주도하는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나이며, 우리 인간이다. 이 짧은 글은 우리의 영적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은 생명과 지혜의 상징이다. 물의 부드러움과 자애로움 속에서 우리는 지혜를 키운다. 곤의 크기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엄청난 영적 잠재력을 암시하고 있다. 북쪽 바다는 무지와 암흑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키워지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때를 기다린다. 더 이상 물에 머물지 않을 정도로 커지고 지혜로워졌을 때가 변화의 시점이다. 사람은 스스로 변화를 감내하고 새 세상으로 나온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영웅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은 홀로 호흡하고 서게 된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영적으로 성숙한 존재가 사는 이상세계를 암시한다. 우리한테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날개가 있다. 날갯짓은 영적인 자질을 의미한다. 날아오르는 자에겐 자유와 희망이 있다. 힘찬 날갯짓은 또 한 차례 새로운 변화를 예고한다. 하늘의 못에 기어코 들어가서 그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구약성경 요나서에서 장자의 이야기와 상통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큰 물고기 이야기인 점이 비슷하다. 요나서를 요약해 보자. 요나는 하느님한테서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요나 1,2)는 소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을 피해 배를 타고 달아나다가 희생제물이 되어 큰 물고기에 먹혀버린다. 그때서야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으로 기도하니 하느님께서 물고기로 하여금 그를 뱉어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요나를 다시 부르시자 그는 말씀을 따라 니네베 사람들에게 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했고, 그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자 하느님께서 재앙을 거두셨다. 하지만 요나는 결국 이렇게 될 일을 공연히 자기만 수고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은 요나의 마음을 돌리려고 아주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가 말라 죽게 하셨다. 그러자 요나는 잠시 시원했는데 이제는 더워서 죽겠다고 짜증을 낸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아주까리를 그토록 아까워하는 요나의 마음을 통해 당신이 니네베의 어린이들과 가축까지도 사랑하는 까닭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는 큰 사람으로 이 세상에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인이 된 것, 사랑의 대상을 발견한 것이 바로 큰 사람의 표징이다. 큰 사람은 그에 걸맞은 날갯짓을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작은 사람이라며 부름을 회피한다. 요나처럼 자신을 이롭게 하는 사소한 것들의 상실은 아까워하면서도 자신의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것은 아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을 새롭게 발견하고 이루도록 파견되었다. 하느님은 요나를 큰 물고기 속에서 성숙하게 하셨다. 그가 니네베에 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긴 했지만 의무감에서였지 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의 불의를 고발하고 회개하라고 외칠 수는 있었지만 세상과 함께할 수는 없었다. 요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정감이 넘친다. 아주까리 그늘의 소중함을 통해 요나의 마음 쓰임새를 밝혀내신다. 아주까리를 통해서 요나의 짜증을 사랑으로 변화시키신다. 이 사랑으로 요나는 니네베를 바라만 보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보금자리로 여기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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