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묵상하라

예언자의 하느님

깜장보석 2007. 9. 30. 10:27

 

 

하느님의 사람
신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현상은 비단 유다 사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대 중동의 유목민들은 탈혼상태에서 앞날을 예견하는 무당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는 용한 여성 점쟁이 피티아가 있어 신탁을 했다.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예언자들이 하는 일은 국가와 인간과 관련해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었고, 그렇게 주어진 신의 음성에 청원자들은 절대 복종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주변 세계의 예언 현상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구약 예언자들은 장차 벌어질 일을 사실적으로 내다본 사람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데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곧 노스트라다무스와 같은 선견자(先見者)가 아니라 하느님의 대변자(代辯者)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메시지에 하느님의 강력한 경고가 들어 있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음으로 구약의 예언자는 예언자 개인보다는 그 이전부터 내려오는 위대한 전통을 배경으로 한다. 예언자의 효시로 간주되는 사무엘은 판관시대를 마무리짓는 인물로, 이스라엘 왕정 출현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 학자에 따라서는 모세를 예언자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 모세 역시 광야로 도망치는 등 실패를 맛본 후 무력감에 빠진 목자였다. 그러다가 떨기나무 속에 불타고 계셨던 하느님을 만났고 그분의 소명을 받아 노예의 땅 이집트로 향했으니, 최초의 예언자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예언자들은 각자 자신의 직업을 갖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하느님의 소명을 받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모스는 목자였고, 예레미야는 사제였다. 소명을 받을 때 예언자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기쁨에 차 감사도 하고, 기꺼이 직업을 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예언자 직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든 하느님의 소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특히 예레미야는 얼마나 그 일을 꺼려했는지 자나깨나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심지어 자기를 낳은 어머니까지 원망한다(예레 15,10-­11). 예언자들은 하느님이 나타나시면 두려움에 휩싸여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절대자 앞에 선 나약한 인간으로 당연한 반응이었다.

예언의 내용
하느님은 원래부터 이스라엘 편이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구해낸 이후 광야에서 그들과 40년을 같이했고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도 기운을 북돋워 주었다. 난공불락의 예리코성 주위를 일곱 번 돌고 나서 함성을 지르니 성이 힘없이 무너졌다는 만화 같은 이야기도 하느님의 철저한 도우심을 이상화시켜 표현한 것이다. 이후에 판관들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부족 동맹체 시절이나 기원전 1000년 이후 왕정이 베풀어졌을 동안도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같이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상황은 점점 바뀌어 갔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망나니짓에서 등을 돌리고 말았다.
사회 지배층의 권력욕은 기승을 부렸고 그에 따라 불평등은 심해져 갔다. 과부와 고아와 이방인의 인권은 어디에서도 보장받을 수 없었고, 종들은 헐벗고 나그네는 괄시받았으며 장사꾼들은 저울을 속이기 일쑤였고 고리대금업이 활개를 쳤다. 12부족 동맹체에서 중앙집권형의 왕정으로 바뀌어 비록 나라는 부강해졌지만 빈부의 격차는 눈에 띄게 벌어졌다. 그런 일이 발생하자 이제까지 왕조의 수호자 역할을 하셨던 하느님은 광야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리셨다(이사 10,1-­3).
근동의 신들과 구약성경의 하느님 표상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라도 눈을 돌리실 수 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을 독점할 수는 없다. 하느님은 눈에서 벗어나면 누구라도 가차없이 내리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신탁에 심판 예고가 유난히 눈에 띄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심판과 희망
구약성경의 스바니야서에 ‘야훼의 날’(주님의 날)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1,14-­2,3) 스바니야서에는 야훼가 부패한 유다에 대해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괴롭힌 주변 국가들에 대해 대대적인 징벌을 내리시리라는 내용이 들어 있고, 궁극적으로 야훼가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시리라는 희망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곧 스바니야서는 심판과 희망을 담은 예언서인 것이다.
‘야훼의 날’은 유다가 저지른 죄를 벌하기 위해 아주 가까이 와 있다. 그날이 되면 세력있는 자들은 모두 응징을 받을 것이며 응징에서 살아남은 자들, 곧 이전에 ‘하느님의 법대로 살다가 고생하던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은 심판 후에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2,3). ‘야훼의 날’이란 바로 야훼가 손을 뻗어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심판의 날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비록 표현은 다를지라도 ‘야훼의 날’과 같은 개념이 아모스 예언서와 이사야 예언서에도 등장한다. 그리고 이 개념은 스바니야를 잇는 예언자인 예례미야서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바니야서에 등장하는 ‘야훼의 날’이 이사야-스바니야-예레미야를 잇는 고리를 형성하는 개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스바니야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예언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훼가 누구신지’ 알리는 것이 그 일차적인 목적이다. 야훼는 의롭고 거룩하시며 유일한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야훼의 눈에서 벗어났다. 하느님의 분노가 지나칠 리 없었다. 그러나 심판만이 하느님의 궁극적인 의도는 아니다. 심판 중에도 그간에 올바르게 야훼를 섬기며 살았던 이들은 살아남을 것이고 그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을 비롯한 전 유다 땅에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게 될 것이다. 이런 희망이 예언서에는 담겨 있다.
예언자들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야훼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를 가르치려 노력하면서 한편으로는 야훼의 분노가 들이닥치리라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의 상황에서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희망, 곧 야훼의 궁극적인 돌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심판과 희망’, 예언서를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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