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묵상하라

문화적 조건화

깜장보석 2009. 9. 5. 12:37

 

말에 대해 좀더 이야기합시다. 앞서 나는 말이란 한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거기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아무것에도 들어맞지 않는 말들이 더러 있습니다. 예컨대, 나는 인도인이죠. 그런데 내가 파키스탄에서 전쟁포로가 되었다고 합시다. 사람들이 나에게 "자, 오늘은 우리가 당신을 국경으로 데리고 가겠소. 당신은 당신 나라를 보게 될 것이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국경으로 데리고 가고, 나는 저 건너편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오, 나의 조국, 나의 아름다운 조국! 마을들과 나무들과 언덕들이 보이는구나. 이것이 내 나라, 내 조국의 땅이로구나!" 잠시 후 한 안내인이 말합니다. "미안하오, 우리가 실수를 했소. 십 마일을 더 가야겠소." 내가 반응하고 있었던 게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죠. 인도라는 한 단어에 계속 집중했던 것입니다. 나무들이 인도는 아닙니다. 나무는 나무죠. 사실상 거기에 국경이나 경계선이란 없는 겁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의해 거기 놓여진 거죠. 일반적으로 어리석고 탐욕스런 정치가들에 의해서. 우리 나라는 옛날엔 한 나라였습니다. 지금은 넷입니다. 우리가 주의하지 않는다면 여섯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우리가 여섯 개의 깃발, 여섯 종류의 군대를 가지게 되겠죠. 깃발에 경례하는 나를 여러분이 결코 목격하지 못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모든 국기를 혐오합니다. 우상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경례하고 있습니까? 내가 경례하는 건 인간입니다. 주변에 군대를 거느린 깃발이 아닙니다. 깃발들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어휘 속에는 현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수천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들이 우리 안에서 감정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재하지 않는 사물들을 보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인도의 산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도 사실상 그것들을 '보고' 있고 역시 존재하지도 않는 인도 사람들을 사실상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미국적 조건화가 존재합니다. 나의 인도식 조건화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썩 행복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제삼 세계 나라들에서는 "문화 토착화"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합니다. 이 "문화"라는 게 뭡니까? 나는 그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행하도록 조건화되었으니 그걸 느끼고 싶다는 뜻인가요? 그건 기계적이 되는 게 아닙니까? 러시안인 부부에게 입양되어 러시아로 간 미국인 아이를 상상해 보십시오. 미국인으로 태어났다는 생각조차 없습니다. 러시아어를 말하면서 자라고, 모국 러시아를 위해 살고 죽습니다. 미국인을 증오하고. 그에게는 그 자신의 문화가 찍혀 있고 그 자신의 문학이 배어 있습니다. 그는 자기 문화의 눈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그런데, 자기 문화의 고유 의상을 입고 싶어한다면, 그야 좋은 일이죠. 인도 여인이라면 사리를 입겠고, 미국 여인이라면 다른 옷을, 일본 여인이라면 기모노를 입겠죠. 그러나 아무도 자기를 의상과 동일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정녕 자기 문화를 더 의도적으로 입고자 합니다. 자기네 문화를 자랑스러워하죠. 자랑스러워하도록 사람들이 가르치죠. 이 점을 나는 되도록 강조하고자 합니다. 예수회원인 내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언제고 난 걸인이나 가난한 사람을 보면 적선을 안할 수가 없다네. 어머니에게서 그걸 배웠지." 그의 모친은 지나가는 가난한 사람에게 끼니를 제공하곤 했더랍니다. 나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죠, 자네가 가진 건 덕이 아니네. 강박관념이지. 걸인 편에서 보면 '착한' 일이지만 아무튼 그건 강박관념이야." 우리 예수회 봄베이 관구 회원들간의 한 친교 모임에서 또 다른 예수회원이 했던 말이 기억나는군요. "나는 팔십세인데, 육십오 년간 예수회원이었소. 난 묵상 시간을 빠뜨린 적이 없소. 단 한 번도." 그런데, 그것은 매우 탄복할 일일 '수도' 있겠지만 혹은 강박관념일 수도 있겠죠. 만일 기계적이라면 큰 공덕은 아니죠. 한 행위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습관이 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민감성, 자각, 지각의 명료성, 반응의 정확성에서 나오는 겁니다. 나는 한 걸인에게는 응하고 다른 걸인에게는 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의 과거 체험이나 나의 문화에서 오는 조건화 또는 설계화에 의해 강박되지 않는 겁니다. 아무도 나에게 무얼 각인하지 않았고, 그랬다 하더라도 나는 이미 그것을 바탕 삼아 반응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미국인에 대한 나쁜 경험이 있거나 개에 물린 적이 있거나 어떤 음식에 대해 나쁜 경험을 했다면 여생 동안 그런 경험들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그게 안 좋습니다! 거기서 해방될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의 나쁜 경험을 지니고 다니지 마십시오. 정녕, 과거의 좋은 경험도 지니고 다니지 마십시오. 무엇을 충분히 경험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배우십시오. 그러고는 앞서의 것에서 영향을 받지 말고 그걸 떨쳐 버리고 다음 순간으로 옮겨가십시오. 바늘 귀라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홀가분하게 여행하게 될 것입니다. 영생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영생이란 '지금'이니까요. 시간이 없는 지금 안에 있으니까요. 이래야만 영생에 들어가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지니고 다닙니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일, 짐들을 버리려는 일, 우리 자신이 되는 일을 우리는 하려 들지 않는 겁니다. 말하자니 애석하게도 나는 다니는 곳곳에서마다 이 일에서 비켜가는 데에 회교도들이 그들의 종교, 그들의 에배, 그들의 코란을 이용하고 있는 걸 발견합니다. 힌두교도들과 그리스도교들도 마찬가집니다. 말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된 사람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에게도 얼마든지 무슨 말이나 해 줄 수 있고 그도 여전히 꽤 많은 말을 해 줄 것입니다. "나는 대교구장 아무개 추기경이오" 한다고 해서 그 때문에 그의 말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의 상대방을 보는 거죠. 딱지에 영향받지는 않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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