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색 양말
정범종
-나오는 사람들
청소부: 중년 여자. 청소복은 청색 상하의. 두건을 쓰고 빗자루를 듬.
소리꾼: 중년 여자. 간편 한복 차림.
챙모자: 젊은 남자. 챙모자를 썼음.
핫팬츠: 젊은 여자. 핫팬츠를 입음.
붉은 안경: 젊은 남자. 불그스름한 안경 착용.
극작가
-때
1980년 5월에서 수십 년이 지난 때.
-장소
건물의 실내. 비품과 장식은 없음.
처음부터 열려 있는 공간에 챙모자, 핫팬츠, 붉은 안경이 등장한다. 그들은 관객석에서 놀다가 무대로 나설 수도 있다.
챙모자: 내가 왕이다.
핫팬츠: 또 네가 왕을 하겠다고?
붉은 안경: 이번에는 내가 왕 역할을 맡을 차례야.
챙모자: 내가 왕이라니까. (사이) 요즘 텔레비전에 선조가 나오더라고.
붉은 안경: 걔가 드라마에 또?
챙모자: 나는 선조다. (사이) 짐이 듣자니 조선 팔도에서 근왕병이 일어나 물 건너온 도적을 쳐서 충성의 뜨거운 징표를 보여주고 있다니 심히 기쁘도다.
핫팬츠: 됐고.
챙모자: 짐은 조선의 왕으로서.
핫팬츠: 아, 됐다니까. 벼슬을 얻기 위해 필요한 그놈의 충성.
챙모자: 네 가문이 의심스럽다. 쌍놈 집안 출신은 벼슬에 거부반응을 일으킬 테니까.
핫팬츠: 연극배우는 잡탕이다. 그 말 잊었어?
챙모자: 그럼 너는 잡탕답게 기생 역할이나 해라. 나는 말했다시피 왕을 할 테니까.
붉은 안경: 난 뭐 할까?
챙모자: 이여송 어때?
붉은 안경: 그럼 연극은 선조와 이여송이가 만나는 데서 시작해?
챙모자: 그렇지. 자, 인사 올려 봐.
붉은 안경: 맞절해야지.
챙모자: 야, 내가 왕이야.
붉은 안경: 이여송이하고 선조하고 맞절했어.
챙모자: 에이, 선조는 왕이야. 이여송이는 장군이고. 다시 말해 주지. 당시 조선에 왕은 하나. 장군은 여럿.
붉은 안경: 이여송이는 명나라 장군이야. 다시 말해 주지. 이여송이는 조선이 떠받든 명나라의 장군. 선조는 명나라가 내려다보는 조선의 왕.
챙모자: 그러면 너는 이여송이의 부장해라.
붉은 안경: 텔레비전에서 선조를 봤다며? 거기에 이여송이의 부장하고 선조하고 맞절하는 거 안 나와?
챙모자: 이여송이의 똘만이하고도 맞절을?
붉은 안경: 이여송이의 부장도 명나라 장군이야. 명나라 장군답게 당연히 선조하고 맞절한 거지. (사이) 맞절하기 싫으면 그만두자.
챙모자: 아냐, 아냐. 우리 맞절하자.
챙모자와 붉은 안경이 맞절을 하려고 마주선다. 핫팬츠는 그들 주위를 돈다. 챙모자는 무릎을 꿇어 큰절을 하는데 붉은 안경은 손을 모으고 허리만 굽힌다. 챙모자가 일어나 노려본다. 붉은 안경은 ‘명나라 방식’이라며 웃는다.
핫팬츠: 이제 뭐해? 기생인 나를 데리고 자는 건가? 난 한 명인데 남자는 둘이네. 누가 데리고 자?
챙모자와 붉은 안경: (한 목소리로) 당연히 내가. (이어서 각자가 자신이라고 마구 소리친다.)
핫팬츠: 이렇게 의견이 각각이면 언제 극작가를 부르냐?
붉은 안경: 극작가가 먼저 희곡을 쓰고 그걸 배우들이 무대에 옮겨야 하는데 우리 극단은 거꾸로 가고 있어. 먼저 배우들이 무대에서 새 캐릭터를 찾아내서 연기를 하면 나중에 극작가가 그걸 가지고 희곡으로 만들겠다니.
핫팬츠: 책상머리의 극작가 아닌 무대의 배우들에게서 비롯한 연극을 관객들이 원한다잖아?
붉은 안경: 원하면 다야? 상대가 원하기만 하면 너는 옷 벗냐?
핫팬츠: 그럼, 원하지도 않은데 옷 벗으리?
챙모자: 자, 그만하고 새 연극의 캐릭터에 집중하자고.
핫팬츠: 기생으로 돌아가자. 누가 데리고 잔 거냐고?
챙모자: (핫팬츠를 껴안고) 당연히 나지.
붉은 안경: 너는 말이야 이여송이 부장하고 맞절한 놈이야. 나는 그 부장의 상관인 장군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너보다 더 높지. (챙모자를 밀어내고 핫팬츠를 껴안은 뒤) 왕은, 개뿔이나.
핫팬츠 키스할 듯이 입술을 내민다. 붉은 안경이 장단을 맞춰 키스 자세를 취한다. 챙모자가 달려들어 둘 사이를 갈라놓는다.
핫펜츠가 나가려고 발걸음을 옮긴다.
챙모자: 야, 어디 가?
핫팬츠: 화장 고치려고.
챙모자: 극작가가 곧 오긴 올 모양이군. 야, 그런다고 극작가가 너한테 넘어갈 줄 알아? 그가 데리고 노는 계집애들 여럿이야.
핫팬츠: 놀아본 놈이 잘 놀아. 그런 놈이 내 맘에 들어.
핫팬츠 나간다.
붉은 안경과 챙모자 앉는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다. 무료하다.
둘 다 휴대폰을 꺼내서 메시지를 확인한다. 둘의 휴대폰은 똑같이 생겼다.
이어서 유행가를 듣는다. 둘이 일어나 유행가에 맞춰 춤을 춘다. 둘의 춤은 똑같다.
춤을 마치고 둘 다 휴대폰을 호주머니에다 넣는다.
다시 둘이 앉는다. 또 멍하니 앞을 보고 있다. 무료하다.
붉은 안경: (일어나) 극작가가 새 연극의 캐릭터로 쓸 만한 그런 인물을 찾아보자.
챙모자: 난 왕이 좋은데. (일어난다.)
붉은 안경: 왕은 그만두고 최근 인물 중에서 찾아보자. 민중의 지도자, 뭐 이런 것.
챙모자: 민중? 어디선가 들어본 말 같다.
붉은 안경: 1980년대에는 많이 쓰였다더라고. 지금의 취업, 인터넷, 아파트 시세 이런 말만큼이나.
챙모자: 1980년대 시작할 때 광주에서 5‧18이 일어났지, 아마.
붉은 안경: 5‧18을 새 연극의 소재로 삼아 볼까? 무대에 올릴 만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지닌 캐릭터가 있을 거야. 5‧18에 관해 들은 게 있으면 말해 봐, 뭐든.
챙모자: 이거 군대서 들은 얘기야. 전방 GP에서 경계 설 때 광주에서 온 고참이 고향에서 벌어진 예전 일이라며 들려주었지. (사이)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신군부의 계엄군 총에 맞아 죽었어. 그 시체를 상무관에다 모아 두었거든.
붉은 안경: 귀신 나오는 거야? 그거 괜찮다. 내가 보니까 한국 영화에서 귀신이 자주 나와. 귀신이 돈 되는 걸 영화판 애들은 이미 알아차린 거지. 연극에서는 드물어. 이래서 연극판이 가난해. 그렇지만 섹시한 귀신을 무대에 올리면 돈이 될 수 있어.
챙모자: 상무관 시체들 사이에 웬 아가씨가 나타났어. 아가씨는 시체 사이를 천천히 돌아다녔지. 그리고는 양말을 꺼냈어. 그걸 시체 발에다 신겨줬어.
붉은 안경: 이게 뭐야? 시체의 발에 열광하는 여자의 페티시즘? (사이) 그거 좋네. 영화나 소설에서 남자의 페티시즘은 흔했어. 여자가 그런 건 드물어. 더구나 시체의 발만 보면 성욕이 확 일어나는 여자라니, 이건 구미가 확 당기는 캐릭터야. 스토리 된다. 나중에는 돈도 되고.
챙모자: 페티시즘은 아닌 듯해.
붉은 안경: 그럼 그게 뭐야?
챙모자: 졸다가 고참 얘길 듣는 둥 마는 둥 했거든. 왜 그랬다고 말해주었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에는 없어. 아무튼 그 당시 고참이 제 고향인 광주의 예전 이야기를 할 때의 분위기로 봐서는 페티시즘은 아니야.
붉은 안경: 아가씨 행동에 전후 설명 없이 연극으로 만들면 돼. 평론가들이 해석해 주겠지. 우린 그 때 덩달아 고개만 끄덕이면 되고.
핫팬츠가 들어온다.
핫팬츠: 에이 시팔.
붉은 안경: 여자 화장실에 몰카라도 있었어?
핫팬츠: 내가 변기에 앉아 있는데도 청소부 아주머니가 밖에서 청소한답시고 물을 뿌려대. 물줄기가 쏟아지는데 제대로 일을 볼 수 있어?
챙모자: 물줄기가 쏟아질 때 내 오줌 줄기는 잘만 쏟아지던데.
핫팬츠: 네 건 호스니까 같은 호스끼리 잘 어울리지만 난 아니잖아.
청소부가 들어온다.
청소부: 어이, 아가씨.
핫팬츠: 저요?
청소부: 그래, 너.
핫팬츠: 저 아세요?
청소부: 알다마다. 조금 전에 변기에 앉아 똥 싼 여자잖아. 너 말이야, 물 좀 내려라.
핫팬츠: 잠깐 깜박한 건데 여기까지 와서 그걸 따져야겠어요? 아주머니가 내리면 안 돼요?
청소부: 네 똥 덩어리는 네가 내려야지. 안 그래? (핫팬츠에게 다가가) 야, 빨리 가서 물 안 내릴래? (청소부가 빗자루를 치켜든다.)
핫팬츠: (버티고 있다가) 에이 시팔.
핫팬츠 나간다.
청소부: 너희는 뭐냐?
챙모자: 연극을 한 편 만들려고 이곳 사무실을 한 달 간 임대했어요. 앞으로 이곳 청소도 잘 해주세요.
청소부: 무슨 연극인데?
붉은 안경: 정해진 건 없어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연기해 보다가 느낌이 오는 게 있으면 그걸 새 연극의 캐릭터로 삼으려고요.
청소부: 나는 연극을 잘 몰라. 청소야 잘하지. 노래는 좀 하고.
붉은 안경: 노래해 봐요.
청소부: (진도아리랑의 한 대목을 노래한다.) 문전(門前) 세 재는 웬 고개인가. 구비야 구비 구비가 눈물이로구나.
청소부는 챙모자와 붉은 안경에게 후렴을 부르라고 고갯짓을 한다. 둘은 청소부를 보고만 서 있다.
청소부: 왜 가만있어? (노래조로) 에야 디야 에헤헤 헤야, (평소 말투로) 하고 후렴을 넣어야지. 다시 부를 테니까 잘 넣어봐.
청소부가 조금 전에 부른 진도아리랑을 부른다. 붉은 안경과 챙모자는 후렴을 넣지 않는다. 청소부가 둘을 번갈아서 노려본다.
붉은 안경: 문전 세 재가 뭐예요?
청소부: 문 앞에 있는 고갯마루가 셋이다, 그런 말이지.
붉은 안경: 그 고갯마루 셋이 뭐냐고요.
청소부: 생로병사가 생의 네 고갯마루 아니냐. 그런데 살아있다는 건 이미 태어났다는 뜻이니까 고갯마루 하나는 넘었어. 이제 나머지 셋이 뭐겠냐.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지.
챙모자: 아주머니는 세 고갯마루에서 하나는 넘었네요.
청소부: 50대인데 다 넘은 건 아니지. 고갯마루에 올라섰다고 할까. 20대인 너야 올라가는 중이지만.
챙모자: 그 고개 오르기 전에 연극으로 한번 떠야 하는데. 이렇게 공연할 만한 연극이 없으니.
붉은 안경: 조금 전에 말한, 5‧18 때 상무관을 찾았다는 그 아가씨를 주인공으로 하면 괜찮은 연극이 될 듯한데.
청소부: 상무관을 들먹이니까 하는 말인데 나도 5‧18 당시에 그곳을 찾았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얘기가 됐네.
챙모자: 친척 중에 누가 죽었어요?
청소부: 내가 광주 남동에서 살 때인데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서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갔지. 그 때가 5월 23일이야. 계엄군은 시내에서 쫓겨나간 뒤였어. 광주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서 집회를 열고 있더라고. 거기 있다가 광장 동북쪽에 있는 상무관으로 갔어. 시신이 그렇게 많은 줄이야.
붉은 안경: 열 구?
청소부: 아니.
챙모자: 스물?
청소부: 아아니.
붉은 안경: 알았어요. 내가 인심 한 번 팍 쓰죠. 스물다섯 구?
청소부: 아니다. 당시 광주에서 수백 명이 칼에 찔리고 총에 맞아 죽었다는데, 내가 갔을 때는 시신이 50구 정도 있었어.
챙모자: 시체의 산이네.
붉은 안경: 시체의 들판이지.
청소부: 태극기나 천으로 시신을 덮어 놓았는데 삐죽 나와 있는 발도 보이더라. 때에 절은 양말을 신은 발. 그 양말에는 언제 때가 올랐을까? 그 사람이 일할 때, 아니면 금남로나 전남도청 광장에서 시위할 때? 어디서 때가 올랐든, 그건 내 양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 (사이) 피 묻은 양말은 그렇지가 않았어. 그건 아주 낯설었어. 나는 그 때까지 피 묻은 양말은 본 적이 없었거든. 그걸 벗겼다.
챙모자: 신겨 준 게 아니고 벗겼다고요?
청소부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핫팬츠가 들어온다.
핫팬츠: 아주머니 이제 화장실로 가 봐요.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말고.
청소부: 5‧18 얘기하고 있는데.
핫팬츠: 듣기 싫어요.
청소부: 하던 얘기는 마무리해야지.
핫팬츠: 정말 왜 이러실까?
청소부: 잠깐만 더 얘기하면 안 될까?
핫팬츠: (손사래를 친다.)
청소부: 들어볼 만한 이야기야.
핫팬츠: 아, 듣기 싫다니까요. 듣기 싫다는데 왜 자꾸 이래요? 빨리 나가요. (청소부를 밀어낸다.)
청소부 버티지만 결국 핫팬츠에게 밀려나고 만다.
붉은 안경: 저 청소부 아주머니를 우리 극작가한테 소개시켜 봐?
챙모자: 우리 극작가가 식상하다고 그럴 건데. 광주 이야기라고 해봐야 나오는 건 민주주의, 인권, 통일 뭐 이런 것들이라고 하면서.
붉은 안경: 우리 극작가는 광주 얘기를 써본 적도 없으면서 식상하다는 말이 입에 올랐어.
챙모자: 나도 광주 얘기는 식상하다고 여겨.
붉은 안경: 양말 사건은 식상하지 않아. 여자가 나오잖아. 그리고 시체가 나오고. 달밤의 처녀 귀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 땅의 여러 전설, 바로 그 민족 서사의 원형에 근접해 있다니까.
챙모자: 원형에 근접한 이야기라서 기본 관객이 있다, 이거지?
붉은 안경: 바로 그거야. 우리 극작가도 기본 관객이 있다고 하면 외면하지 않겠지.
챙모자: 그 청소부 아주머니는 처녀였을 때 양말을 신긴 게 아니라 벗겼다고 했어. 내가 군대서 고참한테 듣기로는 아가씨가 양말을 신겼거든.
붉은 안경: 양말을 신겼느냐 벗겼느냐가 중요한 게 아냐. 시체들 가운데 있는 여자, 이게 핵심이니까.
핫팬츠: 여자 캐릭터라면 내가 연기할게. 어떤 연기든, 무대에서 벗는 연기라고 해도 나 자신 있어.
붉은 안경: 넌 벗는 연기가 별로일 텐데. 연기는 환상이거든. 없는 걸 있는 것처럼. 너처럼 이놈 저놈 앞에서 벗어 댄 여자는 그 환상을 만들 수 없어.
챙모자가 밖으로 걸어간다.
붉은 안경: 어디 가?
챙모자: 담배 피우러.
붉은 안경: 함께 피우자.
챙모자와 붉은 안경이 나간다.
핫팬츠는 연기 연습을 한다. 관객 앞으로 다가가서 바로 앞에 거울이 있다고 가정하고 표정 연기를 한다.
여자 관객의 몸짓을 그대로 흉내 내기도 한다. 남자 관객에게는 섹시한 표정을 짓는다.
밖에서 소리꾼의 목소리가 나자 핫팬츠 밖을 쳐다본다. 잠시 시간이 흐른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핫팬츠 이번에는 막춤을 춘다. 선정적이고 격렬하다.
소리꾼이 들어온다. 간편 한복을 입고 있다.
소리꾼: 웬 지랄이냐?
핫팬츠: 동료 배우들이 잠시 자리를 비워서.
소리꾼: 그래서 요분질 연습하냐?
핫팬츠: 심심파적으로 춤춘 거예요. 연기 연습하는 중에.
소리꾼: 요분질 연습한 게 아니고?
핫팬츠: 귓구멍이 막혔나. (목소리를 높여) 연기 연습했다고요.
소리꾼: 이게 소리는 왜 지르고 지랄이야, 지랄이.
핫팬츠: 당신은 누구예요?
소리꾼: 광대다.
핫팬츠: 그럼 우린 동료네.
소리꾼: (소리로) 이년 저년 바람나니 정녕코 봄이로구나. 봄은 다시 왔건마는 이 내 몸은 쓸쓸하구나. 나도 한때는 청춘일러니. (갑자기 소리를 끊는다.)
핫팬츠: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하고 또랑광대 흉내를 내다 말고) 사철가가 약간 바뀌었네.
소리꾼: 사철가야 사철 바뀌지. 임을 위한 행진은 사철 이어지고.
핫팬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소리해 보세요.
소리꾼: (소리) 갈까부다. 갈까부다. 임과 함께 갈까부다. 천리라도 함께 가고 만리라도 갈까부다.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 보라매 다 쉬여 넘는 동설령 고개라도 님과 함께 갈까부다.
소리꾼은 어깨춤을 춘다. 느린 춤사위다. 그것은 핫팬츠가 추었던 춤과는 대조적이다.
춤이 끝날 무렵 붉은 안경과 챙모자가 들어온다.
붉은 안경: 얼굴 착해. 피부도 착해. 춤사위에 진정이 깔려 있어. 당신은 내 이상형 누님이에요.
소리꾼: 너, 이런 말 처음 만난 할머니한테도 하지?
붉은 안경: 할머니한테는 이상형 엄마 같다고 하지요. 그건 그렇고 누님, 우리 연극 한 편 같이 만들어요.
소리꾼: 우린 창극이야.
붉은 안경: 크로스 오버, 퓨전, 몰라요?
소리꾼: (두리번거린다.)
챙모자: 우리하고 함께 연극 만들어 볼 거예요, 말 거예요?
소리꾼: 난 지금 언니를 찾아야 하는데.
핫팬츠: 그런데 여긴 왜 왔어요?
소리꾼: 언니 찾으러 왔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
붉은 안경: (나가는 소리꾼을 잡고) 누님, 잠시 기다리세요. 곧 극작가가 와요. 연극을 만들 건데 누님에게도 역할을 줄지 몰라요.
소리꾼: 소리꾼은 극작가를 기다리지 않아. 어디에든 서서 무슨 사설이든 소리로 풀어내지. (소리) 이놈 저놈 지랄하니 분명코 난장판이로구나. 난장판 됐으니 이 내 마음 쓸쓸하구나.
소리꾼 나간다.
챙모자: 야, 다들 앉아 봐.
챙모자가 앉고 붉은 안경과 핫팬츠가 그 옆으로 가서 앉는다. 챙모자가 바닥을 노려보고 있다. 다들 말이 없다.
챙모자: 새 연극의 캐릭터 찾기, 안 할 거야?
붉은 안경: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캐릭터는 정해져 있고 그 캐릭터의 스토리가 나왔어야 하는데…….
핫팬츠: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더니 캐릭터고 스토리고 생각나는 게 없다. (사이) 그따위 청소부 아주머니가 어딨어. 에이 염병할.
붉은 안경: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핫팬츠: 차분하면 캐릭터가 생기냐?
붉은 안경: 그렇다고 그냥 아무 캐릭터나 정해서 막 떠들어?
챙모자: 막 떠드는 것도 한 방법이야.
핫팬츠: 이제껏 떠들지 않았나?
붉은 안경: 캐릭터를 찾을래, 말래?
핫팬츠: 찾자.
청소부가 등장한다.
청소부: 야, 이제 나가라. 청소 좀 하자.
챙모자: 아주머니가 아까 했던 얘기, 그거 거짓말이죠? 당시 소문으로는 어떤 아가씨가 시체의 발에다 양말을 신겨주었다는 거였어요. 양말을 벗긴 게 아니라고요.
청소부: 상무관에서 시신들의 피 묻은 양말 다섯 켤레를 벗겼어. 피를 씻어내서 신겨주고 싶었거든. 그걸 집으로 가져갔지. 흰 양말 두 켤레, 검은 양말 두 켤레 그리고 회색 양말 한 켤레. 그걸 빨았다.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더라. 다시 비누를 칠해서 문질러 댔지. 그래도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아. 우리 엄마가 그러시더라고. 핏자국이 있는 빨래는 찬물에서 오래 담가두어야 한다. 그게 다 풀어질 때까지.
붉은 안경: 미국 애들은 콜라 부어. 조폭끼리 싸워서 길에 핏자국이 너절하다. 콜라를 그 위에다 쏟아 부어. 콜라는 피보다 독해.
청소부: 핏자국은 빠졌는데 흰 양말 한 켤레에서 황톳물이 빠지지 않더라고. 황토밭에서 살아온 농사꾼의 것인 듯했어. 그래서 그건 황색 양말로 여겼지. 양말 다섯 켤레를 빨랫줄에다 걸어 놓고 쳐다보니까 거기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내려. 양말이 우는 거, 처음 봤다.
핫팬츠: 스타킹은 가끔 울더라고요. 팬티는 가끔 웃지만.
챙모자: 팬티가 어떻게 웃어?
핫팬츠: 네가 여자 팬티를 알아? 여자 거기는 알아도 팬티는 모르겠지. 그러니까 너는 섹스는 했어도 정사는 못 했어.
청소부: 이튿날 새벽에 일어났어. 늦봄이지만 그래도 새벽에는 서늘한 기운이 있고 그러지. 상무관에 있는 시신들의 벗은 발이 떠오르더라고. 그 발이 쌀랑한 밤공기를 밤새 맞았겠구나. 발이 차가워졌겠구나. 양말을 신겨주면 발이 따뜻해질 거야. 발이 따뜻해지면 그 시신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핫팬츠: 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시체가 어떻게 일어나요?
청소부: 나는 부랴부랴 양말을 걷었어. 양말은 거의 다 말랐더라고. 그런데 검은 양말 하나와 회색 양말 한 켤레에 구멍이 나 있었어.
붉은 안경: 도대체 누가 구멍 난 양말을 다 신어요?
청소부: 양말은 말이야, 몸무게 전체를 받아야 하지. 짓눌리고 또 짓눌려. 그래도 올이 풀어지지 않고 버티지만 가끔 구멍이 나기도 해. 구멍은 헝겊을 덧대서 막아야지. 그런데 밤늦게까지 일하고 새벽에 나가야 하는 노동자들은 그 구멍에다 헝겊을 덧댈 시간도 없었어. 그대로 신고 다녔지.
챙모자: 정말 당시에는 구멍 난 양말은 신었나 보네.
청소부: 나는 구멍 난 검은 양말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어. 구멍에다 덧댈 헝겊이 없었어. 오래도록 입었던 겨울 내의에서 조각을 잘라냈지. 겨울 내의가 당시에는 빨간색이었어. 빨간 조각을 검은 양말 구멍에다 대고 바늘로 감침질을 했어. 까만 양말 뒤꿈치에 빨간 동그라미가 박히게 됐어.
핫팬츠: 그걸 들고 집을 나섰군요.
청소부: 마음은 상무관으로 달려가는데 몸은 구멍 난 회색 양말 한 켤레를 들고 서 있었어. 이 양말의 구멍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어. 뒤꿈치가 아예 빠져나간 구멍이어서 내 바느질로는 헝겊을 덧댈 수 없었거든. 옆집으로 가서 양말 한 켤레를 달라고 했지. 군대에서 석 달 전에 제대한 옆집 총각이 군대 양말을 기꺼이 내주더군.
핫팬츠: 그 총각이 지금의 아저씨?
청소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상무관으로 달려갔지. 무등산에서 아침 해가 뜨고 있더라고. 상무관에 가서 양말을 꺼냈다. 피를 씻어낸 흰 양말과 검은 양말, 옆집 총각이 준 시퍼런 군대 양말, 뒤꿈치에 빨간 내의 조각을 단 양말, 농사꾼이 신었을 황색 양말. 오방색 양말이지. 나는 그 오방색 양말을 시신의 발에다 신겨 나갔어. (사이) 그들의 발이 따뜻하게 됐어. 시신들이 일어날 정도로 따뜻하게.
핫팬츠, 챙모자, 붉은 안경 뭔가를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 다닌다. 그러다가 나란히 선다. 각자의 사이는 두 팔을 벌려도 닿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있다.
청소부: 이제 청소해야겠다. 너희, 나가라.
핫팬츠: 우린 아직도 새 연극의 캐릭터를 찾는 중이예요.
청소부: 그게 도대체 언제 찾아지는데?
챙모자: 아주머니, 곧 찾아요. 다른 데 먼저 청소하고 이리 오세요.
청소부: 또 오마.
청소부 나간다.
핫팬츠: 내 춤 스타일을 바꿔볼까.
붉은 안경: 네게는 막춤이 어울려. 막 사는 여자한테는 막춤 말고는 없어.
핫팬츠: (잠시 막춤을 추고 나서 어깨춤으로 바꾼다.) 어깨춤도 어울리잖아.
챙모자: 막춤이든 어깨춤이든 다 좋으니까 새 연극의 캐릭터에 집중하자.
핫팬츠: 야, 너희 누워봐. 내가 시체 발에다 양말 신겨주는 아가씨를 연기해 볼 테니까 누워보라고.
챙모자: 시체 역할은 싫어.
붉은 안경: 너 배우 아니냐?
챙모자: 잡탕이라고 다 받아 들이냐? 난 싫은 건 싫어.
핫팬츠: 문전의 세 고갯길, 그 마지막은 죽음의 문이야. 거기로 언젠가는 가게 돼 있어. 그러니까 그렇게 싫어할 것 없어. 자, 너희가 시체 해. 내가 시체의 발에다 양말 신겨주는 아가씨 할게.
붉은 안경이 눕는다. 챙모자가 멈칫거리고 있다가 눕는다.
핫팬츠가 챙모자의 양말을 벗기려고 한다. 그러다가 뒤로 서너 발 물러난다.
핫팬츠: 양말에서 냄새난다.
챙모자: 그럼 그만둬.
핫팬츠: 네가 벗어라.
챙모자: 양말 벗기 싫어.
핫팬츠: (붉은 안경에게) 네가 벗을래?
붉은 안경이 양말을 벗어준다. 핫팬츠 고개를 돌리고 그걸 받아든다. 잠깐 서 있다가 양말을 들고 붉은 안경에게 간다. 양말을 신기려 드는데 좀체 신겨지지 않는다. 핫팬츠 양말을 붉은 안경에게 내던진다.
핫팬츠: 야, 양말은 네가 신어라.
붉은 안경: 이왕 나선 김에 신겨 보지 그래.
핫팬츠: 그 아가씨가 시체 발에다 양말 신겨 줄 때 정말 힘들었겠어. 땀이 쏟아졌겠지.
핫팬츠도 눕는다.
셋이 누워 있다.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챙모자: 요즘 세상에서는 재벌 총수야. 권력은 총구가 아니라 총수에게서 나온다, 이렇게 됐거든. 총수한테서 정치 자금 못 받으면 정치가들이 살아남질 못해요. 그러니까 총수가 새 연극의 캐릭터로 좋아. 쉬고 나서 내 맘에 드는 재벌부터 찾아볼래.
붉은 안경: 나는 장군을 할까? 이 나라에서는 여전히 장군이 힘을 쓰니까.
핫팬츠: 야, 떠들지 마. 누운 김에 진지하게 새 연극을 생각하게.
다들 입을 다물고 있다가 눈을 감는다. 셋은 잠이 든다.
잠시 후에 청소부가 들어온다.
청소부: 이것들이 다 잠을 자네. (빗자루로 쓸까 말까 망설이며 돌아다닌다.)
극작가: (목소리만) 아주머니, 배우들이 뭐 해요?
청소부: 잠자.
극작가: (목소리만) 배우들이 새 캐릭터를 찾아내야 그를 등장시켜 희곡을 쓸 텐데…….
청소부: 깨워.
극작가: (목소리만) 그냥 돌아가렵니다.
청소부: 내가 깨워줄까?
극작가: (목소리만) 두세요. 배우들은 곧 깨어날 거예요. 그때쯤 다시 와야죠.
청소부가 밖으로 나가려다가 돌아선다. 잠든 셋에게 다가가 빗자루를 치켜든다. 잠시 후 빗자루를 거둬들인다.
청소부가 밖으로 향한다. 나가기 직전에 멈춘다. 빗자루를 치켜들고 셋에게로 달려간다. 빗자루를 내리치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들 주위를 돈다.
청소부가 또다시 밖으로 향한다. 경계에 서서 망설인다. 빗자루를 치켜들었다가 내려놓았다가를 반복한다.
어느 순간 청소부가 천천히 셋에게로 간다. 다가가서 그들의 발을 쓸어내려는 듯이 비질을 해 댄다. 서두르지 않고 비질을 이어간다.
셋이 깨어나 일어난다. 청소부가 그들의 발을 쓸어내려는 듯한 비질을 계속해 댄다.
붉은 안경: (바지에 빗자루가 닿자 다리를 신경질적으로 떨고 나서) 아주머니, 바지에 더러운 것 묻잖아요. 이거 내가 미국 갔을 때 뉴욕에서 산 거라고요. (청소부가 계속 비질을 하자) 오우, 노!
청소부: 네 눈에는 여기 쓰레기가 안 보여? 하긴 붉은 안경을 썼으니 잘 안 보일 수도 있겠다. 그거 벗고 한번 봐.
청소부는 비질을 하고 붉은 안경은 그걸 보고 있다가 안경을 벗는다.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다. 한참을 보고 있다가 안경을 든 채 밖으로 나간다.
청소부가 핫팬츠에게 다가가서 비질을 한다.
핫팬츠: 어휴 짜증나. 그렇지 않아도 요즘 화장발이 받지 않아서 고민인데 이렇게 스트레스까지 받네. (피해 다니다 멈추어서) 아주머니, 도대체 왜 이래요? (다시 피해 다니다 멈추어서) 말을 해 봐요. 정말 컨셉 안 잡히는 아주머니네.
청소부: 화장에서는 클렌징이 중요하고 실내에서는 청소가 중요해. 바닥이 깨끗해야 네가 춤을 추든 노래를 하든 할 거 아냐?
청소부의 비질이 이어지자 핫팬츠가 그걸 보고 있다. 비질을 흉내 내는 춤을 춘다. 청소부는 비질을 하고 핫팬츠는 비질을 흉내 내는 춤을 추며 밖으로 나간다.
청소부가 챙모자에게 다가간다.
챙모자: 아주머니, 쉬고 있는데 왜 이래요? 나는 조금 후에 총수가 돼야 한다니까요.
청소부가 챙모자에게 가서 그의 발에다 비질을 한다.
챙모자: 내가 총수라니까.
청소부: 총수 아니라 총수 할아버지가 사는 데도 누군가 청소는 해야 해. 청소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냐?
청소부가 비질을 한다. 챙모자가 청소부를 보고 있다가 모자를 벗어 먼지를 턴다. 모자를 쓰고 나서 밖으로 나간다.
청소부는 계속 비질을 한다. 밖으로 쓸어내 버리지 않고 빙빙 원을 그리며 쓰레기를 한가운데로 모은다. 엄숙한 비질이 이어진다. 어찌 보면 꼭 종교 의식을 행하는 듯하다.
청소부는 빙빙 원을 그리며 비질을 하다가 한가운데에 이른다. 비로소 허리를 편다.
소리꾼이 등장한다.
청소부: 아니. 너는?
소리꾼: 그래 나야. 공장 다닐 때 언니가 귀여워해 준 그 동생.
청소부: 어떻게 왔어?
소리꾼: 언니가 여기서 청소 일을 한다는 말 듣고 왔지. 이 건물까지 와서는 언니를 못 만나 여기저기 헤맸어.
청소부: 헤맸구나.
소리꾼: 청소는 마쳤어?
청소부: 한다고 했다마는 그게 끝이 있는 일이냐?
소리꾼: 아까는 여기에 배우들이 있었는데?
청소부: 밖으로 나갔어.
소리꾼: 연기할 캐릭터를 찾았나 보다.
청소부: 못 찾았다면 이제 곧 찾겠지.
소리꾼: 어떻게 알아?
청소부: 내가 알려줬거든. 시신에다 오방색 양말을 신겨주는 아가씨.
소리꾼: 재미있기 어렵겠는데.
청소부: 너도 공연에서 재미부터 따지냐?
소리꾼: 창극에서도 그것부터 따져. 그런 말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게 입에 올라서.
청소부: 그나저나 참 오랜 만이다.
소리꾼: (소리로)
언니 찾지 않았냐고 나무라는가.
바빴다고 아주 바빴다고 내 말하려네.
무엇이 바빴냐고 묻지 말소.
오락가락 바빴다네. 이리저리 바빴다네.
언니야, 내 언니야, 그래도 또 나무라는가.
그리도 소원했냐고 날 나무라는가.
나도 내 정신이 아니었다네.
미친 세월에 함께 미쳤다네.
오늘은 내 언니를 찾아와
앞길로 쳐다보고 뒷길도 돌아보네.
길 가고 또 간 뒤에 뒤돌아보면
산마루 몇 보이고
골짜기며 가시덤불은 보이지 않으니
우리 사이도 그와 같아서
뚜렷했던 일 서넛만 남아 있네.
세월 더 지나 그것마저 잊힐 때
언니 무덤가에는 봄풀이 무성하리니
알기나 할까. 그 누가 있어 알기나 할까.
죽은 자의 발에서 양말 벗겨내
피 씻어내고 밤새 말려서
아침에 다시 신겨 준 일 알기나 할까.
맨발 따뜻하게 만들어서 시신 일으켜 세우겠다고
오방색 양말을 신겨준 그 마음으로
평생 살아갔는지 알기나 할까.
언니야, 내 언니야, 울지는 말소.
언니 닮은 사람이 또 있으리니
피땀에 젖은 남의 양말 빨아 주고 신겨 주는
그 누군가는 반드시 있으리니
어허, 한 명이라도 반드시 있으리니.
청소부와 소리꾼 마주보고 서 있다.
청소부: 너도 세상의 때가 많이 묻었구나, 소리 끝에다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을 덧다는 걸 보니.
소리꾼: 쓴소리 하면 사람들이 날 부르지 않아. 그래서 어느 틈에 나도 그런 말을 덧달게 돼 버렸어. 언니는 눈치 안 보고 쓴소리 하고 살지? 전혀 안 변했을 거야.
청소부: 객지에서 오래 살다 보니 나도 약간은 변했다.
소리꾼: 그래도 언니네 김치 맛은 예전 광주에서와 똑같지? 김치를 들먹이니 입맛이 확 나네. 우리 오늘 모처럼 묵은지에다 쌀밥 먹어 보세.
청소부: 우리 집으로 가자.
청소부와 소리꾼이 발걸음을 옮긴다. 이들은 챙모자의 목소리가 들릴 때 발걸음을 멈춘다.
챙모자: (목소리만) 노동자를 해볼까? 구멍 난 양말을 신을 수는 없으니 구멍 난 모자를 써야지.
핫팬츠: (목소리만) 모자에 웬 구멍? 넌 구멍을 너무 좋아해.
챙모자: (목소리) 모자에 난 구멍으로는 빛이 들어와.
붉은 안경: (목소리만) 네가 노동자면 나는 군인이 어떨까 싶어.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으려면 늙은 군인이 좋겠지.
챙모자: (목소리만) 늙은 군인이 뭘 할 수 있지?
붉은 안경: (목소리만) 양심선언.
핫팬츠: (목소리만) 너희가 그런 걸 원한다면 나도 바꿔야지. (사이) 인디밴드의 가수를 할래. 랩으로 세상을 한번 출렁이게 해야지. (랩으로) 야, 애들아, 이리 와. 와, 와, 와! 밝은 거리에서 신나게 놀아보자. 오, 예!
챙모자와 붉은 안경과 핫팬츠가 깔깔거린다. 청소부와 소리꾼이 그걸 듣고 있다가 밖으로 나간다.
불은 꺼지지 않는다.